감상(응원)을 보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

나 자신도 자기가 한 작품을 보고 감상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마음속 깊이 응원하는 만든이들한테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자기가 지닌 여러 사정 때문에 마음을 전하고 싶어도 망설이는 이들의 마음도 잘 안다.

정신적으로, 그 밖에 여러가지 ‘자기를 드러내기 어려운’ 사정으로 누군가한테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지 못할 때는 많다. 괜히 나서는 것같단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자기를 유지하는 데 벅차서 ‘정말로 그러기 어려울’ 때도 있다.

애초에 상상이란 것 자체가 그런, ‘사정이 있는’ 이들이 즐길 때가 많단 생각을 한다. 따라서 이렇게 ‘응원은 하고 싶지만 자기는 드러내기 어려운’ 이들이 많으리란 생각도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조용히 응원하는 팬’이란 말이 있지만, 만든이 입장에선 그걸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옛날부터 그런 이들을 위해 웹박수라는 문명이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트위터가 주로 쓰이게 되면서 그것도 쓰기 어려워졌단 생각을 한다(‘질문하기’같은 서비스는 있지만 ‘글을 써야 한다(자기를 드러내야 한다)’란 점이 있으므로).

따라서 트위터같은 데서 쉽게 쓸 수 있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한테 응원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웹박수같은 서비스가 있으면 의외로 꽤 수요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당장 RT도 좋아요도 눈에 띌까봐 못하는 내가 잘쓸 거 같다…

새삼스러운 이야기.

옛날에, 초등학생 시절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 그 뒤로 진짜 자기자신은, 다른 누군가한테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닐까.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건 아닐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많이 무서웠다. 그 때 겪은 일이 부당하단 걸 깨닫고 나서도 그랬다.

위와 같은 일, 따라서 남을 그다지 믿지 못했던 일. 여기에 동생놈과 얽힌 여러 사정. 이런 까닭도 겹쳐서 뭔가 하려고 할 때 누군가한테 자기가 알려지는 것도, 자기가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단 게 알려지는 것도 아직 무섭다. 솔직히 엄청 무서운 거 투성이다…

지금까지 안 했던,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절대 못 할, 그리고 누가 생각해도 희한한 걸 저지르려는 것. 해보려 마음먹는다는 것. 앞서 말했듯 자기가 겪은 일이 부당하단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때 기억이 있어서인지 ‘앞으로 나서는’ 게,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게 겁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보통 때도 남 앞에 나서는 걸 겁내는 성격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 ‘자기를 드러내는 게, 자기한테 솔직해지는 게 무섭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싶은 ‘희한한’ 걸 위해 눈에 띄는 게 겁난다.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비슷한 얘기는 전부터 몇 번 했으므로 뜬금없다 여길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되돌아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지내왔구나…란 걸 확인하려고.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긴 하다.

아무튼 대악당이 된다는 것.

가끔 바쁘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들은 동생 생각 안 해도 되니까 편하겠다’라는 생각을. 딱히 부럽거나 지금 환경이 싫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하긴 했지만, 딱히 내가 동생 때문에 하고싶은 걸 포기하며 살고 있다, 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거꾸로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고싶은 것만 하기 위해서 움직이다가 짐작치도 못한 일 때문에 동생놈한테 피해를 입혔다 느낀 적도 있다.

몇 년 전, 강박증이 무척 심했을 때(이것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다가 갑자기 생긴 일이지만) 일 때문에 동생놈이 복지관에 못가게 된 건 특히 그렇게 느낀 일이었다. 그 때만큼 내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대악당이라 생각할 때가 없었다. 대악당이 나쁘단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스스로 판단해서 대악당으로 살자 정했고, 그러한 까닭으로 가족, 부모님 및 동생놈한테 알게 모르게 여러가지 걱정을 끼쳐드렸다(동생놈한텐 걱정이라기보다 ‘알게 모르게’란 게 더 크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가 오래 살아남고 싶다는 엄청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런 식으로 말했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엄청 만족한다. 남한테 걱정 안 끼치는 것보다 내가 살아남는 게 몇 배나 더 중요한 건 당연하니까. 그렇게 지내오면서 깨달은 것도 여러가지 있다. 대악당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아주 대악당 체질이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여기에 관해 말하려면 아마 몇날 며칠을 생각하고 써도 모자라겠지만…만약 이런 생각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가 어딘가에 있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좀 더 쓰고싶단 생각을 한다. 누군가 읽고 싶은,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잡지나 매체에 글을 싣는 것도 누군가 바라는 이가 있다면…

자기에 관한 글이나 뭐 그런 걸 쓸 땐 한없이 진지해지는 편이라서, 이런 글만 죽 쓰다 보면 주위에선 엄청 바람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란 쓸데없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뭐라도 해서 그런 느낌을 깨부수고 싶어진다. ‘えっちなゲーム作り’나 뭐 그런 거.

서울 전철역 의인화 누가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글

내가 서울을 잘 모르는 관계로 직접 하긴 어렵지만, 누가 서울에 있는 역을(대개 지하철이겠지만) 모두 의인화하면 재밌지 않을까. 각 호선 및 환승역, 지리나 근처 명소같은 것까지 생각하면 꽤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은데…난 지식이 없으므로…


라는 생각을 한 고로, 트위터에 이런 걸 줄줄 써봤다. 별 상관은 없지만, 이걸 바탕으로 게임을 만들면 꽤 재밌는 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릴 적, 혼자 상상하며 놀 때 숫자를 의인화하곤 했다. 그 때 숫자뿐만이 아니라 지하철역도 의인화하며 논 기억이 있는데, 아마 숫자와 전철역은 비슷한 데가 꽤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의인화가 왜 재미있느냐라 물으면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나는 ‘너무 안 튀는 공통점을 지닌 많은 캐릭터들’을 떠올릴 때 의인화된 작품을 찾을 때가 많다. 누구나 ‘이건 이걸 소재로 했다’는 걸 깨닫지 못해도 되지만, 적어도 그걸 떠올린 나는 기억해두고 싶을 때, 의인화된 작품은 좋은 지침이 됐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상상을 떠올릴 땐 그 작품에서 각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주로 생각하곤 하는데, 상상을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알겠지만 캐릭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루는 게 무척 어려워진다. 흔히 말하는 ‘캐릭터가 남아도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역할 없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캐릭터는 상상의 맛을 떨어뜨리곤 한다. 그걸 알면서도, 때로는 많은 캐릭터들을 그냥 떠올리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서 갑자기 서울역을 떠올린 덴 여러 까닭이 있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여기 적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를 바탕으로 상상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오래 전부터 죽 생각해온 거긴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별볼일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파고들어가면 ‘상상’으로 쓸 수 있는 요소가 무척 많다. 문화, 민속, 현실, 자잘한 도구, 모든 것들이 ‘지금껏 볼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와닿는 상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서울을 고른 건 딱히 깊은 까닭이 있는 건 아니고, ‘공통점’이 생긴다는 점과(서울이라는 큰 도시), 전철역이 무척 많기 때문에 재밌지 않을까란 생각에서였다. 물론 주위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다른 곳으로 폭을 넓히는 것도 재밌으리라 생각하지만…


길게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결론은 ‘아무튼 보고 싶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난 지식이 없기 때문에…대충 보니 서울 안에 있는 전철역은 대략 50개쯤 되는 거 같으므로, 캐릭터 수도 문제없을 거 같다. 따라서 누가 좀 해주지 않을까…지식이 바닥을 기는 나라도 좋다면 옆에서 최선을 다할 수도 있다…


4월 28일 추가.

여기에서 ‘그럼 ‘시청’이나 ‘어디어디 대학 앞’같은 역은 어떻게 하느냐’란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나도 조금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작중 캐릭터들이 의인화를 ‘컨셉’으로 여기는 건 어떨까란 거였다.

즉, 만약 시청을 의인화한 캐릭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캐릭터의 진짜 이름은 ‘시청’이 아니지만, 그러한 컨셉으로 ‘놀고’ 있기에 자기를 시청이라 자칭한다, 대략 이러한 것이다. 이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전해질까 모르겠는데…각 캐릭터들이 실제 있는 역에서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정말로 그 역이 의인화된 건 아닌, 하지만 캐릭터들이 ‘컨셉놀이’를 하고 있기에 그렇다 자기를 지칭하는, 대략 그런 걸 하고 싶었다.

자기가 적어놓곤 희한한 말이지만, 이걸로 알아주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자기만의 캐릭터 구성’을 만들 수 있게 된 시대.

옛날엔 캐릭터 종합선물세트라고 해야 할까, 인기가 나올 거 같은 캐릭터를 여러 명 세트로 묶어서 게임으로 만들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과연 이게 먹힐 것인가’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만큼 폭넓은 캐릭터들을 백명 단위로 한꺼번에 내놓을 때가 많다 느낀다.

자기가 스스로 마음에 드는 캐릭터만을 골라 ‘자기만의 아끼는 캐릭터 모음’을 만들 수 있는 시대. 주어진 여러 캐릭터 중 마음에 드는 캐릭터만을 살 수도 있고, 주어진 캐릭터를 모두 손에 넣을 수도, 혹은 어쩐지 관심이 가는 캐릭터를 골라볼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구성이 아니라 ‘자기만의 구성’을 만들고 그걸 맛본다는 것. 거꾸로 말하자면 이건 유저의 자유도가 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교류형 게임은 지금까지 ‘모든 캐릭터를 공략해야만 하는’ 식으로 발전해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마음에 드는 캐릭터만’ 아낄 수도 있는 시대다.

이렇게 바뀌어온 데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즐길 수 있는 게 넘쳐나는데 시간은 정해져 있다는 게 가장 크다 생각한다. 다들 짬짬이 상상을 즐기는 데 익숙해져 어느 하나에 오래 신경쓰기 어려워진 것도 있다. 짧은 시간에 폭넓은 캐릭터를 즐기는 것. 물론 마음내키면 깊게 즐길 수 있는 것.

만든이가 ‘미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걸 보는 이, 즐기는 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스스로 찾아 아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유저가 고른 캐릭터가 앞에 나설 일이 많다는 점에서, 이런 흐름은 캐릭터물을 생각할 때도 이것저것 와닿는 게 많다.

자기에 관한 이야기. 희한한 걸 하고자하는 까닭.

희한한 걸 하고 싶다.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조금 말해볼까 한다.

희한한 걸 하고 싶다.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라는 말을 몇번이고 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조금 말해볼까 한다.

바깥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지내는 건, ‘자기가 그렇다고 느끼고 마는’ 건, 마치 모든 것이 사회생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도, ‘알게 된 누군가’와 따로 만나 얘기를 할 때도,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져서 힘들 때가 많았다.

마치 겉으로만 보통인 척, 특이하지 않은 척 꾸미고 사는 듯한 느낌.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할 때도(도서관에서 반년쯤 일한 적이 있음), 우연히 알게 되어 같이 점심을 먹곤 하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자기를 숨기고 있단 게, ‘사회생활’처럼 지내고 있단 게 힘들었다.

물론 근로장학생까지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쉽게 말해서, 당시 나는 자기를 편하게 밖에 드러낸 적이, ‘남한테 칭찬은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재밌는 걸 하고 싶다’고 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겉으로만 보통 사람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길을 조금 벗어나기로 했다. 사실 집안사정도 있고 옛날 일도 있고, 애초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른 이들과 무척 겹치기 어렵단 까닭도 있지만…

전에 말한 대로 하고싶은 건 ‘좋아하는 것에 관해 다른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라기보다 ‘뭔가 재밌는 것, 바보같은 것, 웃음거리가 돼도 상관없는 것’을 누군가와 꾸미고 싶은 것이므로 하나도 안 겹친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건 맞다. 이건 둘째치고…

이번엔 아까와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전부터 몇 번 말해온 대로 난 장애를 지닌 동생이 있다(발달장애…아무튼 자폐 1급). 이건 동생놈 자체와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런 환경이란 걸 인식한 뒤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의 눈길을 의식하게 됐다(말하고 다닌 것도 아니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당사자가 아니면 이게 얼른 안 와닿을지도 모르지만 대략 이런 거였다. 다른 이들 눈에 ‘바람직하게’ 살아야 한다. 이상하게 살면 안 된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느낌. 자기가 이런 환경에 있단 걸 밝히면 안 될 만큼.

자기한테 이런 동생이 있다는 건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는 것.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 그런 생각을 무의식 속에서 하고 있었다.

이걸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이가 어떻게 여기는지는 알 길도 없으므로 둘째치기로 하자면, 아무튼 그런 생각 속에 자기도 모르게 억눌렀던 게 이것저것 있었단 걸 느낄 때가 있다.

따라서, 재밌는 것, 희한한 것, 바보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것. 아무튼 자기한테 있어 그런 걸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그러한 것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른 이한테도 알기 쉬운 걸 대자면 ‘えっちなゲーム’ 같은 거. 물론 하고 싶으면 다른 것도 뭐든지 해보고 싶지만..

바깥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지내는 건, ‘자기가 그렇다고 느끼고 마는’ 건, 마치 모든 것이 사회생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도, ‘알게 된 누군가’와 따로 만나 얘기를 할 때도,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져서 힘들 때가 많았다.

마치 겉으로만 보통인 척, 특이하지 않은 척 꾸미고 사는 듯한 느낌.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할 때도(도서관에서 반년쯤 일한 적이 있음), 우연히 알게 되어 같이 점심을 먹곤 하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자기를 숨기고 있단 게, ‘사회생활’처럼 지내고 있단 게 힘들었다.

물론 근로장학생까지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쉽게 말해서, 당시 나는 자기를 편하게 밖에 드러낸 적이, ‘남한테 칭찬은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재밌는 걸 하고 싶다’고 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겉으로만 보통 사람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길을 조금 벗어나기로 했다. 사실 집안사정도 있고 옛날 일도 있고, 애초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른 이들과 무척 겹치기 어렵단 까닭도 있지만…

전에 말한 대로 하고싶은 건 ‘좋아하는 것에 관해 다른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라기보다 ‘뭔가 재밌는 것, 바보같은 것, 웃음거리가 돼도 상관없는 것’을 누군가와 꾸미고 싶은 것이므로 하나도 안 겹친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건 맞다. 이건 둘째치고…

KR 책꽂이 10년 잔혹사 (바보편)

전에도 말했던 것같긴 하지만, KR코믹스를 사모은 지 벌써 10년 남짓. 08년부터 느릿느릿 사모으던 게 100권 가깝게 늘었다(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100작품). 이런 식으로 오래 사모았으면 여러가지 깨닫는 것도 늘어나는 고로, 웃지못할 일도 몇몇 있었던 지난 10년을 돌아보려 한다.

일단 가볍게 그 10년분 책꽂이 사진부터 올려봤다.


10년 동안 KR코믹스를 모아오면서 한 가장 큰 실수가 햇살이 비치는 데 책을 뒀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앞에. 나처럼 바보 멍텅구리가 아니더라도 햇살 때문에 옆표지가 바래 고민인 분들은 여럿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데 정답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앞서 말한 대로 나도 이런 실수를 한 탓에, 거의 5년 동안(08~13년쯤?) 모아온 책들 중 대부분 옆표지 색이 날아가고 말았다. 정말 심각한 건 새하얗게 바뀌기까지 함. 볼 때마다 책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처음 사모을 땐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옆표지 문제가 걱정될 때 가장 확실한 건, 햇살을 절대 받을 수 없게 하는 것, 즉 창을 등지게 해서 책을 보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화를 꽂는 책꽂이가 창을 등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하면 직사광선을 받을 일은 결코 없다. 방에 창이 두 개 있는 게 아니라면.

물론 두 개 있을 때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가장 큰 창문을 등지게 해서 보관한 뒤, 다른 창문은 커튼이나 담요로 가리는 것이다. 예전에 살던 집 창문은 커튼을 달 수 없었기에(옛날식 집이라서) 엄마한테 부탁해 담요로 어떻게든 가린 적이 있다.

이사오기 전엔 이런 방법을 써서 적어도 햇살 걱정은 전혀 안 했지만, 지금 사는 여기로 이사오면서 방이 좁은 탓에 결국 책꽂이가 창을 등지게 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냐면, 커튼이나 블라인드(후자가 가장 안전하단 생각을 한다)를 쳐서 가리면 된다.

블라인드는 치는 데 돈이 들지만, 열고닫아야 할 때 커튼보다 더 편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해도 햇살이 들어올 땐 들어오지만, 책꽂이를 창문 옆(맞은편이 아니라) 비스듬이 두면 그나마 그런 걱정을 그다지 안 하고 지낼 수 있었다. 적어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

사실 이 논리대로 하자면 책장에 커튼을 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만, 다른 책이면 모를까 KR코믹스는 옆표지를 보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잘 쓰이기 때문에…물론 상자에 담는 것도 이런 까닭으로 쓰기 꺼려졌다.


그리고 이것도 그냥 넘어가기 쉬운데, 책 옆표지는 직사광선은 물론 형광등 빛으로도 바랜다. 나도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책꽂이를 등지게 한 뒤 산 모 책이 1년쯤 지난 뒤 옆표지가 바랜 걸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땐 많이 절망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방 불빛을 LED등으로 바꾸는 것이다. 난 이사를 오면서 LED등으로 바꾸게 됐는데(새로 지은 집이라서 그렇게 되어있었다), 이 LED등은 형광등처럼 변색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자세한 것까진 모르지만, 이사온 뒤 책바램이 눈에 띄게 줄었단 건 느낀다.

아무튼 이렇게 아픈 실수를 저지른 바 있기에, 어떻게든 하려고 혼자 고민 및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나서야 그럭저럭 안정감있는 상황이 됐다.

지금처럼 전자책이 있는 시대에 실제 종이책을 산다는 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만큼 정이 있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소중한 책이 변색되지 않을까 자꾸 걱정하는 것보단, 이런 방법을 써서 마음편히 지내는 게 더 좋단 건 두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별 건 아니지만, 이러한 글이라도 소중한 책(만화가 아니더라도)을 보관하는 이한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옆표지가 바랜 뒤엔 이미 늦었다…나만 해도 이미 바랜 책 중 심한 건 다시 살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이미 절판된 책이 많음).

전에도 비슷한 걸 말했지만, 이 KR 전용 책꽂이 하나만을 위해(창가에 등지도록 둬야 하므로) 인터넷에서 책꽂이를 산 뒤 혼자 조립한 건 아직까지 꽤 소중한 기억이다. 거의 2년 넘게 무사한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저걸 다 모으는 데도 시간과 돈이 꽤 들었지만, 특히 엔화환율이 엄청 높던 13~14년즈음엔 정말 고생했다. 안 그래도 값이 나가는 KR 한 권이 13000원쯤으로 훌쩍 뛰었으니까. 세금 빼고 대략 810엔쯤 하는 책이 환율 때문에 13000원이 되는 지옥…

거의 모든 책을 새걸로 샀기에 특히 더더욱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돈은 전혀 안 아깝지만. KR을 사는 돈은 나를 위한 투자다(진지하게).

물론 지금은 그렇게 비싸진 않으므로(대략 9000원쯤), 이제부터 KR코믹스 원서를 사려는 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그 때 환율을 되돌아보면 지난 일인데도 눈앞이 새까매질 때가 있다.


이왕하는 거 떠오른 걸 더 말하자면,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KR코믹스는 초판이라고 한들 시간이 지나면 띠지가 안 붙으므로 띠지가 둘러진 책을 가지고 싶을 땐 서두르는 게 좋다. 느릿느릿 사면 초판인데도 띠지가 없을 때가 있다…

자기가 가깝게 지내지 않은 것은 낯설게 느껴진다, 는 것.

전에 ‘장애를 지니지 않은’ 아이들도 휠체어를 자유롭게 만질 수 있게 한(물론 탈 수도 있는) 도서관 이야기를 보고 처음엔 ‘그럴 수도 있구나’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더 낫겠다’란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데 친근감을 가지는 이는 드물 테니까.

휠체어같은 건 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만지면 안 되는 것. 하면 안 되는 짓. 이런 식으로 정해두면 그러한 물건은 언제까지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이 된다. 만약 누구나 휠체어를 마음대로 타는 식으로 ‘친근해지면’ 그걸 탄 이 역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이 뭔가 장애를 지닌 건 아니지만, 관계자인 건 틀림없기 때문에 가끔 ‘나같은 사람이 지닌 사정은 다른 이들한테 낯선 거겠구나…’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함.

‘캐릭터성을 바라지 않는 곳’에서 캐릭터를 깊게 다룬다는 것.

19금 게임이든 소셜게임이든, ‘캐릭터성을 바라지 않던 곳에서 캐릭터를 깊게 다뤘다’는 점은 똑같단 걸 느낀다.

이 둘은 얼핏 보기에 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이 두 가지 매체에는 ‘(19금[성인]/카드일 뿐이었던) 요소에 캐릭터성을 깊게 더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비슷한 걸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흐름이 또렷해진 뒤 두 매체의 매력 및 힘이 크게 늘었다는 것 역시 같은 점이다.

이걸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의 이들이 캐릭터성을 바라지 않는 곳’에서 캐릭터를 깊게 다룬다는 건 사람한테 깊이 와닿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데스크탑 액세서리나 뭐 그런 거. 내가 모르는 분야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아, 네칸만화도 그랬다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대부분의 이들이 캐릭터성을 바라지 않는 곳’에서 캐릭터를 깊게 다루는 것이 앞으로 상상을 이끄는 길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새삼스레 했다.

이렇게 캐릭터를 깊이 다루는 기법 다음엔 무엇이 이뤄질까, 라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교류형 게임(여기서는 19금 게임)에서는 캐릭터를 깊게 다룬 뒤 ‘루트(즉, 각 캐릭터들이 지닌 사정, 그리고 플레이어와 캐릭터가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다 또렷이 한 것/좀 더 쉽게 말하자면, ‘공통루트’ 및 ‘캐릭터 개별루트’라는 개념이 새겨낼 때쯤)’라는 개념이 생겨났는데, 과연 소셜게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물론 무조건 이렇게 이뤄지리란 보장은 전혀 없지만.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캐릭터를 깊게 다루는’ 시점이 되면 각 작품이 호화로워지기에 개발비가 많이 드는 것도 똑같은 점이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목소리가 들어가고, 동영상이 들어가고, 음악에 힘을 쏟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할까. 이 역시 돌고도는 역사 중 하나인 거 같다.


참고 링크.
https://ji-sedai.jp/book/publication/chain.html (샘플 PDF를 60P쯤 읽을 수 있으며, 이 트윗은 이걸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걸 정리함)

https://ja.wikipedia.org/wiki/%E5%90%8C%E7%B4%9A%E7%94%9F_(%E3%82%B2%E3%83%BC%E3%83%A0)

다른 이들한테 맞춤화한 작품을 하기 위해.

【ゲームの企画書】リアルを舞台に数千人規模でゲーム…そんなのは約30年前に存在した! 「蓬萊学園」狂気の1年を今こそ語りあおう【新城カズマ×齊藤陽介×中津宗一郎 】


링크와 큰 상관은 없지만 메모.

어떤 상상(작품)을 맞춤화시킬 때,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서 일일이 손으로 대응하는 방법과 ‘그 작품이 폭넓은 배경을 지닌 이들한테 볼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 다 비슷해 보이지만, 후자는 ‘짐작’이란 차이가 있다.

전에 RPG같은 필드계 게임에서 집안에 있는 모든 아이템에 반응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거나(흔히 말하는 엄청난 자유), 유저가 1대 1로 대할 수 있는 가공 캐릭터한테 온갖 반응 및 환경에 대응해줬으면 하는 것(‘이런 환경에 있구나. 힘들겠다’처럼)이 전자의 대표예라 할 수 있다.

즉, 전자는 모든 경우의 수를 유저(플레이어)한테 들은 뒤, 그걸 하나하나 사람이 생각해서 반응을 설정하는 걸 말한다. 물론 사람에 따른 맞춤화로 본다면 이 방법이 가장 맞아떨어지긴 하다. 나처럼 자폐가 있는 동생이~같은 떠올리기 힘든 상황도 맞춤대응해주는 거니까.

하지만 이런 방법이 대응작업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힘든지는 링크에 있는 글을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떠올린 뒤 그걸 일일이 대응하는 건 정말로 피곤한 작업이다. 안 해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후자, 즉 ‘자기가 생각하기에, 여러 배경을 지닌 이들한테 볼만한 가치가 있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려 한다.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의 사정이나 배경상황을 ‘직접 듣고 일일이 대응하는’ 게 아니라, ‘대략 이런 이들한텐 A로, 저런 관점을 지닌 이들한텐 B로’ 보일 걸 상정하는 걸.

즉, 세상엔 폭넓은 배경환경 및 가치관, 사고를 지닌 이가 있으므로 ‘그러한 이들이 있다는 걸 상정해서’ 폭넓은 이들한테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하는, 대략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역시 전자를 아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는 점은 똑같다.

내 머릿속에 있는 예를 들자면, 교류형 게임을 여성이 하느냐와 남성이 하느냐에 따른 구분(이건 크게 생각했을 때), 그리고 고스트가 유저 이름을 물어올 때 입력된 이름 (고스트와 같은 이름. 오라버니. 누님. 바보. 그 밖에 여러가지 부적절한 말들)에 따른 개별반응이 그렇다.

위와 같은 예는 백이면 백 모든 이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걸 다 반응할 순 없지만(‘이런 반응이 있지 않을까’라 상정된 것만 반응), 적어도 전자처럼 앞이 까마득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무엇보다 현실적이란 게 가장 큰 차이다. 이거라면 아마 누구나 할 수 있다.

말하다 보니까 처음 떠올린 거랑 묘하게 얘기가 달라졌는데, 하고싶었던 말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에 모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상정해서 만들기만 해도 실제 캐릭터가 있는 듯한 느낌 및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까란 거였다.

이렇게 수많은 상황을 상정했다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물론 이 뒤 유저의 반응을 보고 그걸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자+후자같은 식으로) 입체감이라 할까, 이 캐릭터가 자기를 알아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