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코믹스는 다른 일반만화와 달리,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작품을 이끌고 있다는(그런 경향이 짙다는) 특징이 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작품을 하게 되면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까’라 생각하기 쉽지만, KR코믹스는 놀라울 만큼 그런 지루함이 없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주체로 작품이 이끌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저 즐겁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일반 만화처럼 ‘등장인물들의 나날’을 다루는 작품을 한다면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지루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KR코믹스는 그런 것 없이 구성되어 있는데도 편하게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오늘은 여기에 관한 내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네칸만화라는 ‘강점’
일단, KR코믹스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보기 편한 까닭으로 ‘네칸만화’란 사실을 들 수 있다. 네칸만화는 원래부터 일반만화와 달리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매체였고, 그러한 사실은 KR이 네칸만화란 매체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대로다. 반대로 일반만화는 발달하는 과정에서 ‘드라마틱한 작품’을 주로 한다는 인상이 짙어졌다. 물론 소소한 나날을 다룬 작품도 여럿 있지만, 대개 일반만화에선 드라마가 또렷한 전개를 바라기 마련이다.
즉, KR코믹스는 다른 레이블보다 ‘일상’만을 다루기 알맞은 레이블이기에, 그러한 장면 및 캐릭터들의 움직임만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이런 매체 특성상, 네칸만화에선 드문 판타지 및 드라마틱한 작품 역시 ‘일상’, 즉 평온한 묘사가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만화라면 평화로운 장면도 돋보이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KR에서는 이런 묘사가 ‘캐릭터가 움직이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제한된 칸이기에 밀도가 높은 페이지
KR의 캐릭터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까닭으론, 밀도가 무척 짙다는 걸 댈 수 있다. 이미 말했듯 KR은 네칸만화고, 따라서 쓸 수 있는 컷이 보통만화와 달리 제한되어 있다. 물론 변칙 컷을 쓰면 좀 늘이거나 줄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 8페이지 원고라면 7*8=56칸, 여기에 네 칸을 더해 60칸만 쓸 수 있을 뿐이다. 자유롭게 컷을 나눌 수 있는 일반만화와 대보면, 매체의 특성상 또렷한 한계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한정된 컷이 작품의 밀도를 짙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즉, 모든 컷에 ‘작품한테 있어서’ 필요한 내용만 들어가있는 것이다. 일반만화라면 컷나눔이 자유롭기에, 등장인물이 아닌 배경만을 위해 여러 컷을 쓸 수 있고, 연출만을 위한 컷을 나눌 수도 있다. 즉,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는 컷이 드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된 페이지(대략 32페이지쯤)와 대볼 때 내용이 느리게 흘러가는 작품도 여럿 나온다.
그러나 네칸만화는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안 그래도 없는 컷을 유용하게 쓰려면 ‘꼭 해야하는 말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넣을 칸도 없는데, 연출에만 온갖 신경을 쏟을 순 없는 노릇이다. 적은 페이지 및 칸을 살리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요소, 즉 등장인물을 많은 컷에 넣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다. 배경만 몇 칸이고 이어지는 네칸만화가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렇게 칸수 제한 때문에 ‘이 작품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만을 담을 수밖에 없는 KR코믹스는, 당연히 일반만화보다 내용이 짙을 수밖에 없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내용이 보통 만화보다 두 배에 가까울 만큼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중요한 내용은 등장인물의 움직임일 때가 많기에, 다른 만화와 달리 ‘핵심만 구겨넣은’ 느낌을 준다. 네칸만화가 보기와는 달리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컬어지는 것 역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독특한 리듬이 캐릭터를 살아나게 한다
마지막으로 댈 수 있는 까닭은, 네칸만화 특유의 템포다. 이 역시 읽어본 이들은 알고 있겠지만, 네칸만화엔 기승전결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즉, 한 줄을 바탕으로 작품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칸에서 ‘결론’이 나는 것이다. 즉, 이 마무리에 따라 네칸만화의 ‘맛’이 결정지어진다 할 수 있다. KR 역시 이러한 리듬을 바탕으로 한 화를 마무리짓고, 이걸 죽 이어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평온한 일상’을 다루는 작품한테 있어선 굉장히 튼튼한 틀 역할을 한다. 즉, 이 리듬이 있기에 KR코믹스는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 만화라면 등장인물들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리듬을 만들면 좋을지 몰라 망설일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네칸만화 형식이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하면 ‘읽기 편한’ 일상이 나타나니까.
즉, 네칸만화 형식을 따르면 특정 주기(네칸)에 따라 작품에 변화구가 생겨, 읽는 템포가 만들어지게 된다. 기복을 만들기 힘든 일상에,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리듬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리듬은 작품에 긴장감을 넣고,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떠올리기 쉽게 한다. 중간중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작품 전체상을 떠올리는 게 한결 쉬워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형식을 이용하면, 일반만화에선 눈에 띄기 어려운 표현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페이지에서 한 줄을 감동적으로 마무리지은 뒤,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줄에선 그 줄을 바탕으로 코미컬하게 마무리짓는 것이다. 이러한 마무리는 자칫 틀에 박힌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 감동노선을 신선하게 만들고, 작품을 더 깊게 만든다. 이렇게 KR코믹스에선 네칸만화의 특징을 써서 작품을 비틀거나 재밌게 만들 때가 많고, 이런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더 맛깔나게 한다.
글을 마무리지으며 – KR에서만 볼 수 있는 캐릭터 묘사의 색다른 맛
그렇기에 네칸만화는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게 보통 만화보다 쉽고, 등장인물의 이런저런 모습을 그리는 데도 알맞다. 특히 KR코믹스는 지금 여자애(여성)의 매력을 그리는 매체 중에서 가장 특출난 곳이라 해도 틀리지 않기에, 이러한 요소가 더 도드라진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게 아주 틀렸다 생각하진 않는다.
이러한 KR코믹스의 인물묘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 곳의 1화 샘플(계열지 하나뿐이지만) 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KR이 어떤 식으로 칸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강약을 넣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네칸만화이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는 ‘캐릭터묘사’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