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발가락에 관한 이야기

오늘은 내 동생과 발가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전에 쓴 적이 있지만, 월드를 이런 식으로 바꾼 뒤엔 나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글도 이제 볼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 써보려 한다.

‘동생’과 ‘발가락’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도 어릴 적, 동생을 특이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견줄 대상도 없었을 뿐더러, 어렸기 때문에 동생이 특이한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동생은 그냥 동생이었고, 같이 부대껴서 지낼 수 있으면 그걸로 된 보통 애였다.

하지만 그런 나라 한들, 동생이 어딘가 ‘다르다’는 건 눈치채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것도 아닌, ‘동생의 발가락’에 관한 거였다.

사실, 여기에 관해선 내 기억이 워낙 흐릿하기 때문에 ‘이랬을 것이다’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실’ 자체는 기억하고 있다. 내 동생한테는 아마도, 발가락이 여섯 개 있었으리란 사실을.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기억이 흐릿하기에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동생이 내가 여섯 살 때 병원에 입원했던 건 기억하고 있다(나와 동생은 4살 터울이다). 그렇지만 병원에 입원했던 건 발가락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동생이 삼겹살판에 다리를 데었기에(이 화상자국은 지금도 남아있다) 입원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흐릿하지만 또렷한 기억

그럼 그 ‘발가락’에 관한 기억은 내 착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내 동생의 한쪽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자국’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이 흐릿하다 한들, 그 자국이 뭘 뜻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자신도 직접 그 발가락을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동생이 지닌 ‘내 것보다 조금 더 묘하게 생긴’ 발가락이 그걸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 아홉 살쯤 되었을 때 같은 반 애한테 ‘내 동생은 발가락이 여섯 개다’라고 떠든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일을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말하기도 했다. 그 때, 나는 그게 그렇게 ‘큰일’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걸 그런 식으로 입밖에 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동생이 보통 아이들과 ‘다른 데’가 있단 걸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동생을 인식하게 된 계기를 거슬러올라가면, 거의 항상 그쯤부터 시작하곤 한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낯설지 않지만, 누군가한테는 틀림없는 ‘현실’

이 발가락이 자폐와 직접 관련있는 것인지에 관해선 나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 때부터 죽 나는 이걸 이런 식으로 적는 경험조차 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보냈다. 동생에 관해 말하는 다른 글도 그렇지만, 이런 글을 쓰는 덴 여러 모로 저항감이 들었던 것이다. 워낙 ‘다른 이들은 절대 할 리가 없는’ 경험이기에, 쓴다는 것 자체에 여러 모로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어서다.

보통 이들과 다른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 눈으로 볼 때, 그러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낯선’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실제로 겪었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현실일 뿐이다. 자기한테 있어 현실인 이야기를 마음놓고 말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 느낌이란 말인가. 그런 일이 이어진다면, 누구라도 자기를 숨기고 싶어질 것이다.

나 자신도 이런 글을 쓰면서,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다. 자기가 겪은 일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그런 느낌일 것이다. 앞으로 ‘이 말을 못 했다’는 생각에 후회할 일이 없으리란 생각과, 그리고 자기자신한테 솔직해질 수 있었다는 기쁨이 뒤섞인 느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