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가족을 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아직 나오지 않은 답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보통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면, 자기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깊이 고민할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남들이 걸어왔던 길’이 눈에 들어올 테니까(물론 고민은 하겠지만).

하지만 조금이라도 ‘남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그렇지 않다.  ‘특수한 환경에서 나고자란 사람’은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은 물론, 앞으로 ‘걸어야만 하는 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길은 아직 만들어지지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모범답안’이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기한테 장애를 지닌 가족이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청소년기 때부터 큰 숙제로 다가온다.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자기 ‘동생’이 삶에 강하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기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앞날을 생각할 때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머릿속에 두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물론 부모님을 모시느냐 어떠느냐에 관해 고민할 수는 있겠지만, 원래 부모님은 자신들 스스로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법이다. 즉, 보통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서만 고민해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집안에 ‘자기 혼자서 삶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러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아주 무시하고 앞날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폐를 가진 내 동생이 그 좋은 예다. 아무리 다른 누구보다 자길 먼저 생각하며 살고싶다 한들, 어쨌든 동생을 아주 무시하고 앞날을 생각하는 건 나한테 어려운 일이다.

다른 이들의 길을 참고하기 어려운 상황

이렇게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둬야한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더 큰 문제는 ‘자기가 아닌 다른 이들의 삶’을 참고하기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아를 둔 형제자매’에 관해 잘 모르고,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고민을 지녔는지도 잘 모른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은 신문같은 매체에서도 잘 다뤄주지 않는다. 만약 다룬다 한들, 거기서 주로 얻을 수 있는 건 장애아를 둔 부모나 자기와 같은 나잇대가 아닌 사람들 이야기다. 뒤에 말하겠지만, 비슷한 장애를 지닌 가족이라 한들 그 장애아의 나이에 따라서 주어진 환경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터울이 있는 집안이라면 내 입장에선 참고로 하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장애아를 둔 가정은 외동아들 및 딸인 경우도 많기에(요즘엔) 더더욱 나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집안은 찾기 어렵다.

즉, 나는 아무도 걷지 않은 길(걸을 필요가 없는 길) 을 제대로 된 지도도 없이 알아서 만들어가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모범답안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 모범답안은 맞든 틀리든 자기가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을 원망하지 않는 삶’

그런 까닭도 있어서, 나는 청소년기(중고등학생) 때부터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꽤 많이 생각한 편이었다. 물론 자세히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또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바로 ‘후회하는 삶은 살기 싫다’였다.

여기서 ‘후회’란 짐작할 수 있듯이, ‘동생한테 얽매여서 후회하는 삶을 살기 싫다’는 말이다. 물론 죽 말하고 있듯, 난 동생을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 지금같은 환경을 원망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런 환경 때문에’ 자기가 하고싶은 걸 참고 사는 것만은 하기 싫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해도, 그건 틀림없이 ‘무조건 후회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나갈 자신은 있었겠지만(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자기가 하고싶은 걸 안 하고’ 대충 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앞으로 내 동생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금 나조차 짐작하지 못한다. 하물며 10년 전엔 당연히 더더욱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없이 대충 길을 걷는다는 건, ‘언젠가 꼭 후회한다’는 말과 똑같았던 것이다. 나는 뒤늦게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상황이 닥치는 게 굉장히 무서웠다.

그것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무렵부터 ‘자기가 살고싶은 삶’을 무척 바라게 되었다. ‘동생을 생각해야 한다’는 장벽이 있긴 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후회없이 살고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들이라면 나보단 훨씬 쉽게 그걸 이룰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게 ‘어렵다’는 걸 잘 아는 나한테는 무척 허들이 높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후회하면서 사는 것보단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쯤부터, 나는 ‘상상꾼’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때도 난 상상하는 걸 무척 좋아했기에, 그거라면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햇다. 지금처럼 생각이 정리되는 데 10년쯤 걸렸지만 말이다.

글을 마무리지으며

지금 내가 ‘가슴 두근대는 삶’을 살려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도 결국 이러한 까닭이다. 나는 ‘지금’을 다른 어떤 때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 두근대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자기를 희생해서 살면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다른 이들 탓을 할지도 모르지만, ‘자기를 위해서’ 살면 자기가 책임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동생을 비롯한 여러 어려움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자기 삶을 자기가 꾸려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리 대악당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볼 때 우스운 삶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목표라는 건, 거기까지 다다르는 게 힘드면 힘들수록, 불가능해 보이면 불가능해 보일수록 달아오르는 건지도 모른다. 나 역시 ‘하고싶은 것만 하는’ 삶을 살기엔 장애물이 많고, ‘평온하게 사는’ 것만을 바라도 장벽이 높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하고싶은 일만 하고, 하기싫은 일은 절대 안 하는 삶으로 가는 길을 걸을 생각이다. 다른 이들과 운명을 원망하며 사는 삶을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슴 두근대는 마음’으로 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