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년 전, ‘이건 나 자신이 아니다’라고 잘못 믿게 된 까닭

오늘은 조금 짧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참고로 이 글은 전에 썼던 ‘내가 자신을 잃어버렸던 순간‘과 관련이 있다. 오늘 갑자기 여기에 관해 뭔가 떠올랐기에, 정리하는 차원에서 잠깐 적을 생각이다.

내가 ‘자기자신’을 부정하게 된 까닭

앞서 말한 대로, 나는 5년 전 자기자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몇 년 동안 ‘이건 내가 아니야’라 생각했다. 뭘 해도, 뭘 봐도, 뭘 겪어도 ‘지금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란 생각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다. 나는 5년 전에도 죽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하나는 그 당시 나한테 ‘자기축’이 없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어느 정도 있었을 억압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자기축이 자라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전 글에도 말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5년 전 ‘자기축’이 자라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하고싶은 건 여럿 있었지만, 나는 자아의 대부분을 ‘상식’, 즉 사회가 보여주는 현실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한테는 자기축이 이만큼도 없었고, 하고 싶은 걸 빼면 모두 사회가 판단하고 사회가 결정한 것만 진실이라 믿었다. 정작 하고 싶은 건 그 ‘사회’와 정반대에 있었지만.

그리고 5년 전(2009년 10월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사회’의 상식에 부정당했다. 즉, 지금껏 미뤄왔던 게 이제야 온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결정한 건 매우 드물었고, 모든 판단과 결정을 ‘사회가 보여주는 현실’에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 즉 몇 안 되는 자기축마저 사회에 부정당한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뒤로 죽 뭘 해도 ‘이건 나 자신이 아니다’라 생각했지만, 사실 나한테는 부정할 만한 자기자신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자기축이 자라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결국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물론, 어떻게 해서든 자기축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아를 만드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자기축이 전혀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따라서 자아조차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뭘 해도 자신이 없고, ‘이건 내가 아니다’라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축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걸 버릇하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나 자신은 이 자기축이 어떻게든 자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내릴 수 있기까지 5~6년이 걸렸다. 이 5~6년은 사람이 태어나서 기본적 성격을 만들어나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앞서 말한 대로, 억압과 열등감을 어떻게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미 길게 말한 바 있다. 이 억압과 열등감이 어느 정도로나마 남아있기에, 나는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비하하면, 당연히 자기축도 자라지 못한다. 자기축은 ‘자기를 존중하니까’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정된 삶’을 바라게 되면 ‘자기축’도 자라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대체 왜 난 지금껏 자기축이 자라지 못했던 걸까? 솔직하게 말해서, 그 때 나는 어쩐지 자기만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우울하다 말하고 힘들다 말하지만, 자기 감정 및 상황과는 묘하게 틀린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생각해본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건 다른 이들과 다른 동생을 둬서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한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른 동생, 즉 자폐를 지닌 동생을 뒀기에 ‘안정감’을 바라게 되었다. 즉, 큰일없이 평화롭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어릴 때부터 바랐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 때, 나는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내리는 것보다 ‘사회가 보여주는 현실’에 따르는 게 훨씬 안전하다 믿었다. 사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10년 전 상황(2002~2007년)을 생각하면, 이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그 땐 사회가 보여주는 현실이야말로 진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걸 뺀 모든 걸 사회가 보여주는 현실에 맡겼기에, 나는 자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대학생이 되었다. 물론 자기축 역시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나는 자기가 아니라, ‘사회가 보이는 현실’에 맞춰 판단하고 결정내렸던 것이다.

만약 보통 이들이라면, 조금이나마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생이라는 불안요소가 있기에 ‘안정적인’ 삶을 바랐고, 그에 따라 조금이라도 안전하리라 믿는 ‘사회’에 모든 자아를 맡기게 됐다. 이것 때문에 나는 한순간에 자기를 잃고, ‘이건 자기가 아니다’라 믿어온 것이다. 사실은 그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글을 마무리지으며 – 자기 삶의 불확실요소가 자아에 미치는 영향

이 글을 보는 분 중 비슷한 까닭으로 힘든 분이 있다면, 나는 이미 겪은 사람 입장에서 ‘자기축을 기르는‘ 걸 추천하고 싶다. 얼마나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자기축이 자랄 수 있게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삶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축이 있으면 우리는 심하게 고민할 일이 무척 줄어들게 된다. 혹시 모르니 억압 및 열등감을 떨쳐버린다면 더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우리의 자기축을 방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렇게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여러 모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5년 전, 아니 10년 전 나는 ‘동생이 있는 삶으로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축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그 땐 가지지 못했다. 사회가 보이는 현실에 충실하면, 당연히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였는데도.

어쩌면 동생이 있기에 생겨난 불확실요소는 이거 말고도 더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건 그다지 수가 많지 않기에, 그리고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기 삶을 바탕으로, 그런 요소들을 조금씩 깨달아갔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위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