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혁은 그 날, 다시 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그 아이’와 만나는 꿈을.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잊어버린 것투성이였다. 모처럼 꿈에서라도 만났으니까 뭔가 말할 게 있었을 텐데, 자기가 한 말조차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깊은 생각없이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도 없이 마구 꺼낸 말이 왜 머릿속에 남아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말은 아직도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가정을 꾸리자.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승혁은 지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 때, 노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서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말 뒤, ‘그 아이’가 지은 표정과 대보면.
그 아이는, 웃고 있었다.
승혁은 꿈과 현실을 통틀어, 그 아이가 이렇게 기쁜 듯 웃는 걸 처음으로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꿈에서 깨어, ‘언제나 그랬듯’ 이 병실 안에 있었다.
“근데 이 게임 이름은 왜 라마의 모험이 아니지? 이거 제목사기 아니냐?”
“맨 처음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면 됐지, 또 무슨 헛소리를…”
오늘도 승혁은 그런 식으로 미래와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기 착각일까. 이젠 회사생활보다 이 생활이 더 익숙해질 것같은 지경이었다.
“무슨 소리야. 가장 귀여운 게 주인공이지.”
“그렇다고 진짜 주인공을 무시해도 되나? 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인가 보지?”
“이야. 오늘도 세상은 참 평화롭다니까. 그지?”
“말 돌리지 마. 그리고 어제 그런 일을 당하고선 잘도 그딴 말이…”
“그치만 댁을 도와준 거잖아. 안 그래?”
미래의 그 말에, 승혁은 할 말을 잃었다. 어제 자기 혼자 ‘그 남자’를 욕보이게 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유사세계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뿐만인가, 자기가 지켜야 마땅할 노을은 가장 먼저 승혁을 지키려 나섰다.
-어제 갑자기 그런 일이 있단 말을 지금 들어서요. 다들 괜찮아요?
‘그 일’ 뒤, 뒤늦게 진호가 승혁의 병실로 찾아왔다. 아마 여기에 세계군단이 한 명이나마 왔단 걸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도 진호는 미안하단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놓인단 표정도 짓고 있었다.
“뭘 걱정해. 우리가 있는데. 멀리 보내주고 왔지.”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며 승혁을 바라봤다. 사실대로 말했으니까 얼른 고개나 끄덕이라는 눈치였다.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승혁은 진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여기에 제가 없어도 될 것 같아서요.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세계군단이 아무리 한 명만 있다 한들, 승혁 씨가 혼자 처리하는 건 어려우리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제가 걱정할 일도 줄 것 같네요. 다같이 있으면 금방 물리칠 수 있으니까. 그렇죠?
그 말에, 승혁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란 건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어서였다. 만약 자기 혼자라면, 그 놈을 쉽게 물리치진 못했을 터였다.
-딱히 뽐내는 건 아니지만, 지금껏 전 제가 아니라면 세계군단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해왔는데, 이렇게 보면 제 생각이 좁았던 것 같네요. 승혁 씨라면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좋은 분들과 힘을 모으면요.
그 말과 함께 속시원하단 듯 웃음을 띄우며, 진호는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진호가 사라진 뒤에도, 승혁은 한동안 창문 너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라면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
맨 처음 들었던 말보단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승혁은 창문 너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승혁은 남의 손을 빌리는 걸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자기가 혼자 모든 걸 처리하지 않으면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부조리한 상황이라 한들, 승혁은 자기 손으로 모든 걸 끝맺고 싶었다. ‘그 아이’를 되찾는 것은 물론, 그 놈들한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하지만, 세상엔 남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게 아무리 자기가 바라지 않는다 한들,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한들.
승혁은 결국,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일이 자기 혼자선 풀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다른 이의 힘을 빌리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승혁도 이 희한한 유사세계 사람들이 싫진 않았다. 겨우 며칠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이들이 나쁘지 않단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승혁 역시, 이들의 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 그들이 승혁을 도와준 것처럼.
자기도 이젠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구나.
승혁은 그러한 사실을 이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다시 찾기 위해서라면 자기 혼자선 안 된다는 걸. 살다 보면 이렇게 남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어쩌면 이건, 승혁이 살면서 가장 크게 다짐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이들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승혁한테는 그러한 일이었다.
미래 말미따나, 이 상황은 마치 게임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자기와 가장 관련없었을 게 이런 식으로 엮였단 걸 생각하며, 승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살아왔던 삶과 가장 상관없는 길이 이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승혁조차 어떻게 걸으면 좋을지 알 수 없는 길이.
“뭐, 이렇게 된 이상 천천히 가자고. 가장 멀리 가는 길이 지름길이란 말도 있잖아. 댁이 지금껏 못 걸어본 가시밭길이란 건 사실이지만…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
“어떻게?”
“댁도 회사에 다니니까 이런 말은 알겠지. 지금 이 상황을 스타트업이라 여기면 어때? 뭐, 댁이 바라고 독립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넌 또 이상한 소리를…”
“이상한 소리라니. 요즘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물론 댁이 아는 상식에 기대는 거 말고 말이야.”
미래의 말에, 승혁은 순간 어이없어졌다. 전엔 남들한테 도움을 받으라더니 이번엔 이거란 말인가. 하지만 미래는 무슨 모순이 있느냔 듯한 표정으로 승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남 일이라고 그렇게 막 말하는 거야?”
“남 일이라니, 내 일이기도 하지. 난 댁이 마음에 들었는 걸. 안 그래?”
미래의 말에, 승혁은 더 할 말도 없었다. 저 흡혈귀인가 뭔가하는 동갑내기는 사람 휘두르는 데 뭔가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던 승혁도, 이젠 차츰 그런 미래한테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다음엔 화면이 좀 큰 놈을 갖고와야겠는데. 이렇게 사람도 많으면 보드게임쯤은 해야지. 안 그래?”
“화면이 큰 놈이라니, 그건 또 뭐야?”
“뭐가 있겠어. 우리 집에 있는 패드…”
“넌 여기서 게임이란 게임은 다 할 작정이야?!”
그 말에 질려하면서도, 승혁은 이제 더 딴죽을 놓을 생각도 없었다. 미래가 하는 일이 꼭 나쁘지만도 않단 걸 알아서였다. 자긴 여기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게임을 하게 될까. 승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보드게임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는 불쌍한 중생을 위해 내가 갖고오겠다는데 뭐 어때? 앞으로 댁도 여기 생활에 익숙해져야지. 다음엔 누가 올지 모르는데.”
“또 누가 온다고?”
“이렇게 특이한 걸 느낄 수 있다면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어디보자, 대략 있을만한 사람은…어쩔 수 없이 모습이 바뀐 외국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있잖아. 만약에 우리가 서양인하고 비슷해진다면…뭐 그런 거.”
“그런 데가 있을 리 있냐?”
“그럼 나랑 내기할래?”
가만히 생각하면, 미래의 말은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봐온 세상도 현실을 크게 빗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더 빗나간다 한들,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뭐, 아님 탐정이 올지도 모르지. 그럼 재밌겠는데.”
“너는 삶을 무슨 재미로…”
“당연한 거 아냐? 즐겁게 안 살면 어떻게 살라고?”
그 말에 승혁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생각에 빠지기도 전에, 누군가 자기 어깨를 뒤에서 감싸안았다. 그 몸집으로 볼 때, 이건 노을이 틀림없었다.
“언니. 앞으로 엄마아빠 찾으려면 기다려야 돼?”
“어, 아마 많이.”
“그치만 이렇게 좋은 언니오빠들 많으니까 꼭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만약에 이게 게임이면, 우리 이길 수 있는 거지?”
“그래. 꼭 그럴 거야. 너도 있으니까.”
그런 말과 함께, 승혁은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다시 만날 그 때가 된다면, 꼭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괜찮냐, 아픈 데는 없냐, 그리고 그 밖에.
“우리도 아이를 가져보자’라 말하고 싶었다.
지금은 이룰 수 없는 그 바람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승혁은 노을의 무게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아직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 놈들이 만든 그 ‘게임’을 다 풀 때까지.
승혁은 약한 힘으로나마,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작정이었다. 지금껏 자기가 평생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그게 ‘주인공’으로서 승혁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었으니까. 승혁은 저 놈들한테 휘둘릴 만큼 변변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하물며 ‘이런 굴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너희들의 눈에 난 주인공이 아닐지 모르지만, 각오나 단단히 해놓으시지. 너희들이 날 어떻게 보든, 난 나답게 너희들한테 맞설 거다. 그 길이 아무리 멀다 한들, 내 앞에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 생각을 하며, 승혁은 다시 ‘그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도 너무나 보고싶은 모습,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동반자.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이런 모습이나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오래 기다렸지, 라고. 이제 우리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라고.
그 아이는 틀림없이, 당황해하면서도 웃어줄 터였다.
아무리 꼴사나운 모습이라 한들, 그 아이가 승혁을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아이만큼 승혁이 자길 데리러 오리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무리 비슷한 세상이 수많이 있다 한들, 그것만은 틀림없으니까.
그 때가 되면,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자기 품에 안아보자.
그 놈들의 상징인 이런 모습이 아니라, 물론 버젓한 원래 모습으로.
“근데 신기하다. 그지?”
“뭐가?”
노을의 말에, 승혁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노을은 승혁의 무릎 위에 앉은 채, 자기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그 아이’처럼.
“이 세상이 이렇게 넓은 거 말이야. 진짜 대단하다. 여기 말고도 세상이 이만큼이나 더 있대.”
“그렇구나.”
“진짜 게임 속에 있는 거 같아. 그러니까 앞으로 재밌는 일이 이만큼 일어났음 좋겠다. 엄마아빠도 만나고. 그지?”
자기 어깨보다 더 크게 손을 벌리는 노을을 보며, 승혁은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자기는 사회에서 지녔던 지위와 대볼 때 터무니없이 어렸다. 이 아이만큼이나 정신이 강한 어른도 아니었다.
하지만, 승혁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모자란 게 있으면 지금부터 채워가는 수밖에 없다고. 누군가의 힘을 빌리는 거도 중요한 일이라고. 그들의 ‘놀이’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