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승혁은 침대에 누운 채, 미래와 노을이 ‘어떻게 하면 마의 20미터를 넘을 수 있을까’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나, 맹호 및 산골 아이들이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이번엔 잘 될 거야. 이번엔’이라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나, 꽃잎이 다른 이들의 게임을 구경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나, 휠체어를 탄 남자가 그를 돕는 여자애의 핸드폰을 보며 ‘그게 재밌나?’란 말을 화면에 뿌리는 걸 보는 거나, 갑작스레 나타난 아이템담당이 ‘그러고 보니 그 게임 뭐예요?’란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게임을 받아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쩐지 승혁한테 이런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몇 년 전부터, 이런 걸 죽 지켜봤던 것만 같았다.
혹시 자기가 원래부터 있었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을까.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우곤 했지만, 승혁은 그 날 가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일에 치여 살았던 며칠 전과는 댈 수도 없을 만큼 평화로운 시간. 그 땐 보이지 않았던 세상의 모든 것.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식으로 저녁이 되어, 하늘은 붉게 물들고, 병실 모습은 아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잠이 들 것만 같은, 평화로운 늦겨울 저녁이었다. 승혁은 문득, 자기가 아침부터 죽 이런 식으로 누워있었단 걸 깨달았다. 아마 며칠 전 자기가 안다면 경악할 만한 나무늘보 생활이었지만, 어쩐지 승혁은 지금 이 순간이 싫지 않았다.
이 순간이 바뀔 수가 있을까. 이 시간이 죽 이어지지 않을 리가 있을까. 마치 승혁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런 공간이 부서질 수 있을까. 누군가 여길 부술 수 있긴 한 건가.
“크하하하하하!!”
그 때, 사방에서 이런 웃음소리가 크게도 들려왔다. 목소리를 볼 땐 한 명밖에 없는 듯했지만, 그 한 명밖에 없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악당이야?”
“왜 악당이라고 생각해?”
“악당은 원래 이렇게 그냥 웃으면서 찾아오는 거야. 목소리가 딱 악당이잖아.”
“그럼 넌 왜 웃으면서 내 앞에 안 나타났는데?”
“내가 언제부터 악당이었어?”
미래가 투덜대는 건 둘째치고, 더 이상 누워있어선 안 되겠단 생각에 승혁은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래는 이미 그 ‘악당’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한 듯했다. 그리고 승혁 역시, 저 ‘악당’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기한테 악당이라 하면, 딱 한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 ‘악당’이 갑자기 병실 안에 나타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크하하하. 여기에 있었군. 잘 지내곤 있었나?”
그 말과 함께, 악당, 즉 가죽잠바를 입은 남자가 병실에 나타났다. 형광바지에 가죽잠바, 여기에 쓸데없이 이것저것 달린 장신구만 봐도 이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물론, 이 남자는 ‘그 놈’들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 때 봤던 사람 중 저렇게 발랑까진 놈은 없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댁도 그 놈들과 한패인가?”
“그 놈들이라니, 버젓한 이름도 있는데 이러면 안 되지. 세계군단이란 멋있는 이름을 놓고 그 놈들이라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어유. 아직도 그게 멋있다 생각하나 보지? 아무튼 단체로 유치해선…”
“흡혈귀 넌 왜 자꾸 우리 일에 끼어드는 거야? 별 것도 아닌 게.”
“어머. 과연 그럴까?”
미래가 비웃듯 그렇게 묻자, 남자는 미래한테서 눈길을 돌린 뒤 승혁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 댁이 그 엘리트라 이거지? 이런 꼴을 보니 우습기 짝이 없군. 하긴 복합세계에서 엘리트같은 조그만 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크하하.”
“그럼 니들은 유사세계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고 있나 보지? 깽판치는 게 다인 주제에.”
“흡혈귀 너, 입 안 다물어?!”
남자는 화가 난 표정으로 미래를 노려봤지만, 승혁은 그것보다 ‘복합세계’가 뭘 일컫는지 떠올리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복합세계도 유사세계도 세계군도 다 같은 말이라 했던가. 같은 개념이 제각기 다른 말로 일컬어지는 게 승혁의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뭐, 아무튼 흡혈귀 넌 됐어. 내가 만나러 온 건 니가 아니거든.”
“그거야 내가 아니겠지. 근데 이런 말도 못 하나?”
“암튼 이게 진짜…”
이를 갈면서도, 남자는 다시 승혁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튼 미래한테 말로는 못 이길 것 같으니, 자기가 여기에 온 목적이라도 이루겠다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쉽게 지는데 ‘별 것도 아닌 게’란 말이 나온단 말인가. 승혁이 볼 땐 그게 더 우습게 느껴졌다.
“이제 농담은 그만하기로 하지. 내가 여기에 온 건 그딴 것 때문이 아니니까. 그래서, 병원생활은 재미있었나? 복합세계란 걸 알게 된 다음, 댁의 그 좁은 세상은 넓어졌나 모르겠네?”
“나랑 싸우자는 건가?”
“크하하. 진짜 웃긴다. 저런 모습으로 나랑 싸우자는 건가, 래! 그런 건 댁 지금 목소리를 생각하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높은 목소리로 낮게 말하면 웃기지.”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고? 댁이 지금 나한테 큰소리칠 입장이 되나? 오히려 잘못했다고 빌어도 모자랄 거 같은데?”
“내가 댁들한테 뭘 잘못한 거야? 댁들이 나한테 잘못을 했다면 모를까…”
승혁이 이렇게 말하자, 남자는 이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마치 승혁이 당치도 않은 말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자, 승혁도 슬슬 머리 위로 피가 솟는 게 느껴졌다.
“아이고 웃겨라. 댁은 우리한테 큰 목소리를 낼 처지가 아니에요. 우리가 누구를 인질로 잡고 있더라?”
“이 자식아, 그게 자랑이야?!”
“그거야 자랑이지. 댁보다 우리가 더 뛰어난 존재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깟 유사세계 하나 아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이 자식들…”
“그럼. 벼슬이지. 특히 우리처럼 ‘상성이 맞는’ 사람들한텐 말이야.”
남자는 마치 어린아이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승혁을 보며 낄낄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듯한 놈한테 이딴 취급을 당하자, 승혁은 저절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댁에 관해선 다 들었어. 그 당시 기록도 다 봤지. 난 거기에 없었지만 아주 재밌던데? 자기가 대단하다 생각하는 엘리트를 맘대로 갖고노는 게 왜 재미없겠어?”
“이 자식이 진짜…”
“솔직히 나라면 그것보단 더했겠지. 내가 없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 니놈의 굴욕이 이쯤에서 끝난 건 다 이 몸 덕택이니까. 알았냐?”
“그러니까 좋은 말할 때 그만두라고…”
“좋은 말? 그렇게 당하기만 했던 댁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뭐, 따지고 보면 우리 잘못이긴 하지. 진호 그 자식을 덮치려던 게 아주 엉뚱한 걸 덮치게 됐으니까. 근데 뭐 어때? 복합세계도 모르는 자칭 엘리트 머저리를 괴롭히는 걸 가지고 벌을 받으면 얼마나 받겠어?”
“이게, 진짜…”
승혁은 이제, 조금만 더 화가 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기 팔힘이 거기에 맞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런 굴욕을 당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남자, 아니 사람도 아니었다. 특히 승혁한텐 더더욱 그랬다.
“아무튼 참 걸작이더군. 특히 댁이 졸 때가 가장 재밌었어. 뭐, 갑자기 몸이 크게 바뀌었으니 졸린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 자기 아내되는 사람이 그런 꼴을 당하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이 자식아!!”
결국, 승혁은 그 남자한테 뛰어들어 멱살을 잡고 있었다. 참으로 분한 일이었지만, 이것도 승혁이 침대 위에 서 있었기에 이룰 수 있는 거였다. 저 남자는 언뜻 봐도 보통 성인남성보다 더 큰 편이었으며, 지금 승혁한테 그만한 키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사과해. 어디 누구 앞에서…”
“어디 누구 앞이긴. 하찮은 엘리트 앞이지. 안 그런가, 주인공만도 못한 조무래기 친구?”
“이, 이, 이 자식이…”
다시 한 번 ‘주인공’이란 말을 듣자, 승혁은 두 팔이 떨리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저 놈의 말이 맞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만들어온 승혁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았다.
“조무래기라고? 이 새끼가, 어디서 그딴 말을 꺼내는 거야?”
“그럼 댁은 자기 손으로 댁 아내를 구할 수 있다 이건가? 그럼 해보시지 그래. 감각도 없으면서.”
그 말과 함께, 남자는 가볍게 승혁을 침대 위로 내쳤다. 그게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승혁은 맨 처음 뭐가 일어난 건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기라고 한들, 저딴 놈한테 한 번에 날아갈 만큼 종잇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이 모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하면.
“거봐. 지금 댁한텐 아무 힘도 없지? 우리가 댁보다 훨씬 위에 있단 걸 이제 슬슬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나? 댁 혼자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잘만 하면 평생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지.”
“이게…”
가면 갈수록 분한 마음에, 승혁은 그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하지만, 어쩐지 그 노려보는 데에서도 자기가 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단지 몸집의 차이는 아닐 터였다. 어쩌면, 그건 ‘누가 더 여유로운가’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지금 자기는, 적어도 힘으로는 저 놈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걸로 이길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일로서, 저 놈을 만약 해치운다 할지라도 ‘그 아이’는 되찾을 수 없었다. 유사세계에 관한 감각이 없다시피한 승혁은, 정말로 여기선 그저 조무래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마라. 어린애 눈빛에 내가 겁이라도 먹을 거 같아? 댁은 이미 졌어. 인생의 패배자라고. 우리한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라도 있나 모르겠네. 아니면 평생 노려보다 말 건가?”
“개자식, 이 쓰레기같은 놈, 이…”
“그러고 보니 댁 이름이 승혁이었던가? 패배자한텐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인데. 설마 한자도 이길 승(勝)인 건 아니겠지? 댁 부모님이 보면 뭐라 하시려나?”
“어디서 그딴 걸 들먹…”
승혁은 이제 정말로, 자존심을 건 채 눈물이 흐르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저딴 놈한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저딴 놈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싫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갑단 말도 하지만, 그래도 난 승혁이가 옛날부터 참 좋더라.
어쩐지 승혁의 머릿속에 ‘그 아이’의 목소리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를, 자기도 그 땐 대충 듣고 넘겼을 말이었다.
-승혁이는 알고 보면 순수할 때가 무지 많은 거 같아.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켜야할 건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는 게 느껴져.
그 때, 승혁은 ‘대체 내 어디가 순수해?’라 되물었을 터였다. 사실 이건, 지금도 승혁이 알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항상 당당하잖아. 난 그런 승혁이가 좋더라. 어쩐지 듬직해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 지금 자기는 어떻덴 말인가. 이게 과연 당당한 모습에 들어가긴 할까.
지금 승혁은 너무나 분했다. 저 놈한테 이런 굴욕을 당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의 믿음을 깨버렸단 것, 그게 승혁은 가장 화가 났다.
정말로 내 힘은 이것밖에 없나.
내가 가지고 있던 힘은, 모두 사회에서 나온 지위가 갖고 있던 것이란 말인가.
“우리 언니 건들지 마.”
그 때, 승혁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순간, 승혁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저 뒤쪽에 있던 노을이, 언제 나왔는지 승혁과 그 남자 사이에 가만히 서있었다. 승혁을 등지고 있기에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이 나이 또래답지 않게 진지한 모습이란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어유. 이 꼬맹이는 또 뭐야?”
“이 꼬맹이라고?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저 놈 앞으로 뛰어나갈 뻔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만 이런 굴욕을 당한다면 그나마 참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아마 정말로 우연히 걸려들었을 이 어린 아이를 다 큰 어른이 놀리는 미친 짓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럼 꼬맹이지 뭐냐? 뭐야, 댁이 실력행사라도 하게?”
“이 놈의 자식이, 사람이 사는 데 도리가 있지…”
“글쎄다. 내 도리는 타고난 감각밖에 없는 거 같은데.”
남자는 아주 기분나쁘게 웃으며 승혁을 빤히 쳐다봤다. 눈앞에 있는 노을은 반쯤 무시하기로 한 듯했다. 그 표정이 승혁을 더더욱 화나게 했다.
“그래서, 넌 니 힘이 딸리니까 이 어린애를 방패삼겠다 이거냐? 일단 사내자식인 주제에…”
“누가 방패야? 누가 그렇게 한대?!”
“자꾸 언니한테 그런 말하지 마. 언니가 오빠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사람이야.”
“아, 그러냐?”
물론, 남자는 노을의 말을 전혀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마치 어린애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단 모습이었다. 사실 노을은 정말 어린아이가 맞았다. 하지만 저런 남자한테 무시당할 만큼 하찮은 존재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노을은, 저 남자보다 몇 배는 더 ‘어른스런’ 아이였다. 적어도 승혁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오빤 나쁜 사람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언니한테 나쁜 짓했잖아. 근데 미안하단 말도 하나 안 해. 진짜 나쁜 사람이야.”
“그래, 나쁠지도 모르지. 어유, 그러고 보니…”
남자가 노을을 보는 눈빛이 아까와 달라졌단 걸, 승혁은 바로 깨달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는 자기보다 훨씬 아래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노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남자는 틀림없이, ‘뭔가 재밌는 걸 보는 듯한’ 눈빛으로 노을을 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승혁한테 그랬던 것처럼.
“너도 복합세계 하나 모르는 애지? 그러니까 여기 말려든 거 아냐. 어디보자, 뭐라고 했더라. 그래, 모습이 바뀌니 어떠디?”
“이 자식이!”
“이런 게 가장 재밌단 말이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말려들게 하는 거 말이지. 물론 원래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 발 앞서 어른이 되어보니 어떠디? 그 ‘언니’보다 더 커지니 재밌든? 아니면…”
“그만 안 해, 이 새끼가?!”
더 이상 참지 못한 승혁은, 노을을 감싸고 자기가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노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아직 승혁의 힘이 더 셀 텐데, 이상하게도 노을의 몸엔 쉽게 움직이게 할 수 없는 묘한 힘이 깃든 것만 같았다.
“나도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거 아냐. 하지만 오빠보단 훨씬 나아. 나랑 같이 게임해줬어. 우리 엄마아빠 찾는다고 말해줬어. 언니도 힘든데.”
“그래서 어쩌라고?”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오빠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야. 오빠는 그런 말할 자격 없어. 내가 아무리 어른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보다 언니가 더 대단해.”
“어유. 대체 댁은 애를 언제 길들인 거야? 아, 그 땐가? 니들 모습이 반대일 때쯤, 모처럼 호기심도 있으니까…”
“얘 앞에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그럼 아무 생각도 안 들든? 내가 볼 땐 그게 더 이상한데?”
“야, 이 개자식아!!”
승혁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기는 저 놈한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원래 모습이라 한들, 저 놈과 맞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망할 놈의 ‘감각’인지 어떤지가, 둘의 격차를 달리하고 있단 건 승혁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견딜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승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자기보다 훨씬 더 힘들 텐데 남을 먼저 생각해줬다. 게임을 하고 있으면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챙겨주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그 아이가 말하는 ‘게임을 하자’는 건, 자길 비롯한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서란 걸 승혁은 이제 잘 알았다. 자기가 힘들어보이니까, 게임이라도 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란 어린아이스러운 생각으로 그런 말을 건넨 것이다. 그걸 노을이 깨닫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런 아이한테,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은 없었다. 자기를 노리개로 하는 것까지라면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한테 저런 자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었다. 어쩌면 이 아이가, 승혁보다 더 ‘어른’일지도 몰랐다. 자기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승혁이 봤던 그 모 습처럼. 비록 그게, ‘저 놈들’ 때문에 바뀐 모습이라 할지라도.
“난 그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곘어. 그치만 처음 어른이 됐을 때 어쩌면 좋을지 몰랐던 건 맞아. 그 땐 많이 놀랐지만, 언니랑 만난 다음에 알았어. 어쩌면 내가 언니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쭈, 그러셔?”
“나는 오빠같은 사람한테 안 질 거야, 오빠같은 사람이 몇 명씩 있어도 안 질 거야. 나도 언니 지킬 거니까. 나도 이젠 그럴 수 있으니까.”
“설마 그게 어른이 된 모습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넌 어린애니까 그런가?”
“그것만 있는 거 아냐.”
노을의 눈빛은, 그 어떤 어른보다도 진지했다. 이 아이는 정말로, 승혁을 ‘지키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같이 놀아준 것밖에 없는 승혁을.
“언니랑 나랑, 재밌는 게임 무지 많이 했어. 미래 언니가 그러는데, 게임을 쓰면 오빠같은 사람들도 물리칠 수 있대. 이것도 언니 구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댔어. 내가 엄마아빠 구하는 게임이라 생각하면 된댔어. 언니랑 다른 언니오빠들 힘을 모으면 그럴 수 있댔어. 게임은 그러는 거니까.”
그 때, 승혁은 미래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 일을 ‘게임처럼’ 생각해보라던 미래의 말. 자기가 말려든 ‘진짜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이 현실.
이 조그만 아이는, 자기보다 먼저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구나.
이 아이는 자기보다 먼저, 다른 이들의 힘을 빌려서 ‘게임’과 맞설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아이한테 난 자존심 어쩌구를 내세우며 자기 힘으로만 맞서려 했단 말인가. 이렇게 어린 아이조차 다른 이들과 힘을 모아야 한단 걸 알고 있는데.
승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보자. 그럼 자기가 이런 꼴이 됐는데 평화롭게 게임만 했다 이건가? 이젠 정신줄도 놨구만. 그깟 게임, 아무 쓸모도 없는 걸…”
“뭐가 쓸모없다고?”
승혁이 미래 앞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악물었을 때,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야말로, 방금까지 승혁이 떠올리고 있던 그 사람, 미래였다. 미래는 마치 누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그 금빛 눈으로 남자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내 앞에서 게임을 까?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끼어들 틈 찾느라 가만히 있어줬더니 이젠 막 나대네?”
“어유. 게임같은 데 그렇게 애정이 많은가 봐? 이런 걸 갖고 열받아하게. 넌 모르겠지만, 세상에 게임만큼 쓸데없는 짓도…”
“닥치지, 이 개자식아?”
옆에서 보기만 해도, 미래가 무척 화나있단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승혁도 매번 감정풍부한 미래만을 봐왔기에, 이렇게 ‘무서운’ 표정은 처음이었다. 실제로 피를 빨아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지만, 그 박력, 그 눈빛만 봐도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란 건 똑똑히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줬더니 이젠 헛소리까지 하네. 승혁이랑 노을이가 단둘이 있는 줄 알아? 여기에 내가 있단 걸 진작 알았어야지.”
“어유 무서워라. 그래서 내가 겁낼 거 같아?”
“너희들 말이야. 좀 센 힘을 가졌다고 니들이 왕인 줄 아는데, 중요한 건 힘이 아니란 건 몰라? 힘이 니들을 잘나게 만들어주는 게 아냐. 그 힘을 제대로 된 데에 써야 잘나는 거지.”
“어쭈. 이젠 설교까지 하시겠다?”
“그럼, 해야지. 날 빡치게 했는데 그냥 넘어가려 했어? 어림도 없는 소리를.”
“뭐, 댁 한 명이 덤빈다고 한들 그깟 거야…”
하지만 미래는 망설이지 않고, 자기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뭔가 묘한 기운이 그 오른팔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모이는 듯한 그 기운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미래는 유사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감각’ 때문이란 말을 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감각이 더 발달한 이는, 다른 힘도 쓸 수 있다고 했을 터였다. 생각해 보면, 저 세계군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도 뭔가 특별한 힘이 있으니까 자기를 비롯한 온갖 이들을 못살게 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미래가 뻗은 오른팔에 모이는 저 기운은.
“그러고 보니 댁도 감각이 또렷한 편이었지? 나랑 한 판 붙자 이건가?”
“왜, 난 못 이길 것 같든?”
“저 남자 하나 때문에 이런 귀찮은 일을 맡아한다고? 정신나간 거 아냐?”
“정신이 나가긴. 오히려 멀쩡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나 친절히 도와주고 있는데.”
“아, 그러셔?”
이젠 남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 역시 오른팔을 뻗어, 뭔가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미래가 말했던 ‘감각’도 이런 걸 일컫는 것일 터였다. 아마 저 세계군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도, 그 감각을 써먹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승혁처럼 유사세계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였지만.
아마 승혁은 저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터였다. 아니, 끼어들 방법도 없었다. 저 놈은 미래가 아니라 자길 비웃으러 온 것인데도, 정작 승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저들이 볼 때 승혁은 단지 조무래기였으니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승혁의 세상에서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승혁은 그렇게 믿고 있었고, 앞으로도 믿을 생각이었다. 저 놈들 말은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자기가 이끄지 못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할까.
자기는 미래처럼 사람을 뛰어넘은 존재도 아니었고, ‘감각’조차 없는 것에 가까웠다. 하물며 저들이 자기를 이렇게 만든 ‘감각’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저 남자도 ‘감각’이 있는 걸로 봐서, 아마 원래 모습이라 한들 쉽게 이길 상대는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이 모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건 노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는 걸까. 아니면.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그 때, 승혁은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창가에 있던 누군가가 성큼성큼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몸집만으로도 승혁은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가장 안 끼어들 것만 같던 사람, 아니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해도 된단 말은 아무도 안 한 거 같은데요.”
“넌…아니, 댁은 또 뭐야?!”
갑자기 나타난 그 존재, 맹호를 보며 남자는 어이없단 듯 이렇게 되물었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가 볼 때, 미래를 뺀 나머지, 즉 승혁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자기와 동등하게 보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여기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보지 않았다 한들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갑자기 덩치가 큰 성인남성(으로 보이는 존재)이 나타나면, 아무리 자기 ‘감각’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라 한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김맹호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잘못된 거 아닌가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저랑 알고 지내는 분인데 당연히 상관이 있겠죠.”
“이, 이 자식은…”
남자가 맹호한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남자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승혁이 모를 리는 없었다. 미래는 얼른 다시 오른팔을 들고는, 남자 쪽으로 그 팔을 크게 ‘휘둘렀다’.
“으, 으악! 뭐야, 이거?”
“뭐긴 뭐야. 기습공격이지.”
“신발. 누가 그딴 걸 물었어? 이런 제기랄…”
여기에 남자가 비틀대자, 맹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남자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마치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을 단단히 넣은 채.
“이, 이 자식이 뭐하려는 거야? 니들처럼 감각도 없는 놈들이 나랑 붙을 수 있을 거 같아?!”
“감각이 뭔진 모르겠지만, 제가 사람이 아니라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란 말은 안 했었나요?”
“뭐?!”
승혁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을 때, 이번엔 다른 쪽에서 지원이 날아왔다. 틀림없이 어제 봤던 그 날카로운 칼이, 남자 쪽으로 망설임없이 날아왔던 것이다. 마치 남자를 찔러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칼은 맹호를 비켜 남자의 심장 쪽을 겨냥했다.
“야, 자, 잠깐만! 이건 뭐…”
“만약 그대로 안 돌아가면, 이 칼을 그대로 꽂을 거예요. 어떻게 될진 알겠죠?”
“뭐 이런 게 다 있…”
꽃잎의 담담하기 이를데없는 말에, 남자는 슬슬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승혁 및 미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노을은 물론, 다른 ‘유사세계’ 사람들 역시 아직까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승혁을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돕는 사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너, 넌 또 뭐야?!”
승혁은 그런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 아이가 도와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해서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승혁은 휠체어를 탄 남자의 인상이 너무나 짙어서 그걸 끌고 다니는 여자애에 관해선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그것’을 남자한테 겨냥하고 있었다. 그건, 승혁의 생각이 맞다면 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정도 묵직한 총이었다.
“자, 장난감이냐? 이런 식으로 놀아봤자…”
“아뇨. 전기충격 탄환이 들어가있는 진짜 총인데요.”
“뭐?!”
여자애는 망설이면서도, 팔을 남자 쪽으로 똑똑히 뻗고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지금 당장 쏠 수도 있단 모습이었다. 승혁은 휠체어에 탄 남자가 ‘또 시작했군’이란 말을 화면 위에 뿌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저 여자애는 물론, 저들이 온 유사세계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승혁은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자애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건 여러 번 해봤단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여러 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생사람 잡는 건 그만두세요. 가셔야 할 데로 돌아가세요. 저희는 감각이 그다지 없지만, 천천히나마 그 쪽 사람들을 따라잡을 테니까요.”
“마, 말만 잘하면 다야? 이, 이런 데서 쪽팔리고 있을 내가 아닌데…”
남자가 그렇게 얼버무리는 걸 보며, 승혁은 감각이 모든 걸 해결하는 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저 ‘감각’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을 지닌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감각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니었다.
승혁은 혼자서 모든 문제를 풀어내고 싶었다. 자기 손으로 모든 걸 되찾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승혁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다른 이들의 힘을 빌려야 풀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승혁은 자기 혼자서 못할 일은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처럼 어느 정도 사회에 지위를 뒀으며, 그에 알맞은 교육도 받은 사람이 혼자 처리하지 못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승혁은 이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분한 일이며, 또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지만, 세상엔 다른 이들의 힘을 모아야만 할 때도 있단 사실을.
그걸 승혁이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할 때.
“어머. 제가 안 늦었나 보네요?”
승혁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이런 시간에, 저렇게 태평한 말투로 창문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사람은 바로.
“그럼, 이걸 던지기 전에 대표님의 연설이나 한 번 들어볼까요?”
물폭탄 비슷한 걸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론 창틀을 잡고 있는 아이템담당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이걸 던지면 곧바로 저 머나먼 유사세계로 넘어가게 된답니다. 원래 있던 데까지 돌아가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거예요. 미래 씨. 뭐 하실 말씀 있어요?”
“그럼. 있지. 이 놈을 위해 해줄 말이.”
미래는 여전히 팔을 든 채, 이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마치 앞으로 있을 일이 좋아서 못 견디겠단 모습이었다.
“이 자식아. 게임을 누가 무시하래? 너같은 놈들이 있으니까 게임이 오해받는 거야. 게임이야말로 사람의 사고를 상징한단 거 몰라? 아, 모르지. 알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이, 이것들이 진짜…”
“똑똑히 들어. 지금 당장 댁들을 때려부술 힘은 우리한테 없지만, 우리는 게임이란 이름의 사고로 덤빌 거다. 그깟 감각에만 의존하는 니들이 우릴 이길 수 있을까? 물론 마지막은 승혁이 쟤가 해야겠지만.”
“다시 만나기만 하면…”
“당분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 쪽도 우리는 동등한 존재 취급도 안 하잖아. 그지? 아이템담당, 그거 빨리 던져.”
“네, 그럼…”
그 말과 함께, 남자한테로 폭탄이 곧장 날아갔다. 승혁이 눈을 깜박이고 나자, 거기에 남자가 있었단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남자는 여기 없었단 듯이.
물론,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모든 이들’이 하나를 목표로 싸운 결과물만은 여기에 남아있었다. 미래가 말했던 것처럼, 마치 게임과도 같은 결과물이.
승혁은 이긴 것이다. 아니, 승혁 ‘일행’이 이긴 것이다.
자기 힘으로 도무지 이길 수 없던 상대를, 모두의 힘을 모아 ‘처음으로’ 물리친 것이다. 비록 그게 저 쪽에서 보면 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질 리 없었지.”
달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짚은 채, 미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승혁은 마치 꿈나라 얘기라도 듣는 것처럼, 아까 그 일을 떠올렸다.
“노을이가 나이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더라구. 어쩌면 댁보다도.”
“누가 모르는 줄 알아?”
“아무튼 이럴 때도 한 성질한다니까. 암튼 그건 둘째치고…”
그 말과 함께, 미래는 저 위에 떠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있을 일과 관련된 건 틀림없었다.
“전에 말했지만, 승혁이 넌 멀리서 봤을 때 주인공이 아닐지도 몰라.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하지만 친구, ‘이 게임의’ 주인공이 될지 어떨지는 항상 자기가 정하는 거야. 안 그래?”
“그래, 니 말대로인 거 같다.”
“물론 멀리선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자기 생각엔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거야. 그럼 뭐든 어떻게 될 거 같지 않아? 내 생각이지만.”
“그래, 그럴지도…”
“그러니까 정말로, 이걸 게임처럼 생각해. 어렵게 볼 건 전혀 없어. 그러니까 게임이거든.”
“넌 게임한테 무슨 맺힌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지.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고서, 미래는 다시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빛은, 침대에서 뒹굴대며 게임을 하던 그 때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
승혁은 마치 태어나서 그런 눈빛을 처음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임이란 말이야, 그냥 세상 중 하나를 뚝 떼서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만든 거 같아. 재밌지 않아? 사람마다 가진 수많은 생각들이 어울려져서 하나의 ‘살아가는 길’을 만들고 있단 게. 노을이는 벌써부터 그걸 알고 있던데.”
“니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어쩌면 말이지, 게임은 승혁이 니가 생각하는 거보다 더 재밌을지도 몰라.”
미래는 여전히, 하늘 위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마치 처음으로 ‘이긴’ 승혁 일행을 축하하는 듯, 저 하늘 높은 곳에서 환한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저 놈들이 만든 ‘게임’에 도전하는 것만큼 말야. 넌 지금껏 몰랐겠지만, 게임은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르지. 니가 어렸을 때부터 죽.”
승혁은 여전히 그 말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래가 자길 생각해주고 있단 것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살아가는 길이 즉 게임이라.
지금껏 웃어넘겼던 말이었지만, 승혁은 이제 그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게 ‘혼자 짐을 짊어지는’ 게 아니란 건 틀림없었다. 다른 이와 힘을 합치는 것. 천천히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모두 승혁과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전히 어렵단 생각을 하며, 승혁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라 한들 잔뜩 풀어온 승혁이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