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래 잠들었을까.
승혁은 눈을 뜨고 나서야, 자기가 침대 위에서 죽 잠에 빠져있었단 걸 깨달았다. 들어오는 햇빛으로 볼 때, 지금은 아침인 듯했다. 어젠 무슨 일이 있었던가. 미래와 얘기했던 것까진 기억났지만, 그 뒤로 기억이 없었다. 아마 그 날 겪은 수많은 일들 때문에 피곤해져서 바로 잠든 듯했다.
그럼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승혁은 잠시, 지금껏 있던 일을 돌아봤다. 그러자 곧바로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는 바람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몇십 개고 일어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유사세계라는 뜬금없는 개념. 그리고 또 갑자기 나타난 ‘승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
그리고 어제, 자기가 미래한테 털어놓은 ‘개인적인 이야기’.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승혁은 머리가 지끈대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무튼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현실은 더 드넓었고, 자기는 거기에 말려들었단 건 알고 있었다. 자기 혼자서 이 문제를 풀 수는 없으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빠르단 것도 알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승혁은 이 사건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승혁 자신은 자기야말로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믿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자기는 조역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 굴욕을 아직 잊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승혁은 자기 손으로 모든 걸 되돌려놓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가기엔 너무 먼 길이었다. 미래가 어제 말했듯, 결국 승혁은 남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자기가 아무리 싫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지금 이 곳은 어떤가.
“뭐야, 벌써 거기까지 갔단 말이야?!”
그 때, 누가 봐도 야생흡혈귀란 게 뻔한 목소리가 이렇게 외치는 게 들렸다. 상황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에 자기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 건 똑똑히 알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20미터 뒤부턴 사람이 갈 데가 아닌데?”
“언니 흡혈귀라 그랬잖아.”
“야야, 흡혈귀도 사람이라 쳐도 이상한 거 아냐. 인간이 아니라서 그렇지.”
“그런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승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누가 생각해도 평소와는 다른 아침이 펼쳐져있었다. 승혁은 어쩐지, 자기가 원래 있던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근데 쟨 아직까지 자나 봐? 그렇게 어제 일이 힘들었나?”
“죄, 죄송해요. 저희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댁 파트너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거같지 않은데.”
“그건 제가 잘 말씀을…아무튼…”
여기까지 듣자, 승혁은 더 이상 자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더 잘 생각도 없으니, 남은 건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뭐야, 다 듣고 있었어?”
“왜 사람 자는 데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댁이 자는 줄 몰랐지…라고 하면 좀 마음이 풀려?”
“그럴 리가 있냐?!”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승혁은 몸을 일으킨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드디어 주위를 둘러보자, 생각보다 훨씬 더 아수라장에 가까운 모습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일단, 미래는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벌러덩 누운 채 노을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거기까진 상상할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맹호를 비롯한 호랑이 일행은 저 쪽 창가에 기댄 채 뭔가에 푹 빠져있었는데, 핸드폰을 손에 든 걸로 봐서 게임인 듯했다. 자칭 괴물사냥꾼이라던 여자애, 꽃잎은 미래와 노을 어깨 너머로 게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편엔 어제 그 남자와, 여자애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승혁을 보고 있었다. 사실 어제 그 남자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사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사람이 많다는 게 아니었다. 지금 승혁이 가장 어이없는 건, 어제 그 사람들이 한 명 빼고 몽땅 그대로 남아있다는 거였다. 물론 아이템담당이니 어쩌니하는 여자는 여기 없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여기 머물러있는 건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야, 아이템담당 찾아? 걔는 올빼미라서 이렇게 일찍 못 와. 저녁에 게임하러 온대.”
“그걸 누가 물었어?!”
아무튼 이 광경을 보자, 승혁은 이들이 쉽게 여길 나가지 않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여기에 머무를 작정인 것이다. 이렇게 당당해도 되는 건가. 승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내보내고 싶으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제 미래와 얘기한 대로, 승혁은 일단 이들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하지만 아직, 승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머나멀단 것과, 그리고 이 많은 이들이 모두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게.
-그럼 우린 놀러갔다 온다.
그 말을 끝으로, 미래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오늘도 미래는 어제 알게 된 새 유사세계를 구경하러 여기저기 다닐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웬일로 여기에 남을 사람도 있는지, 맹호는 창문 밖으로 나가는 대신 승혁 너머에 있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솔이가 ‘다녀올게’라며 손을 흔드는 걸 보면, 나머지는 모두 다른 유사세계로 나가는 듯했다.
그럼 단둘만 남는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어제 그 남자를 휠체어째 끌고나가는 여자애가 창문 밖으로 사라지자, 승혁은 혼자 한숨을 쉬었다. 아침이었다. 어제 처음 만난 자칭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비록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묘한 건 사실이었다.
뭔가 말이라도 걸어야 할까.
혼자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서 대뜸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말하고 싶단 듯한 말투였다.
“저, 엄청 큰 회사에서 일하신다 들었는데요.”
“그래. 그건 그렇지.”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그만큼 머리가 좋아야 하나요? 성적이 좋아야 한다던가…”
그 말을 듣자, 승혁은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며칠 전이었다면, 승혁도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이 사회에서 ‘지위’가 좋은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승혁이라면 당연히 이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 시험같은 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누가 안 그러던가?”
“네?”
“아니면, 굳이 내가 누구 사례라도 들어줘야 되겠어?”
이 말에 맹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승혁이 하려던 말을 알아챈 듯했다. 이런 말을 하는 승혁도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정말로, 지금껏 자기가 해온 공부는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교과서에도 없는 현실 앞에서, 자기가 배워왔던 건 이만큼도 쓸모가 없었다. 물론, 자기가 배운 게 아주 헛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할 때, 그런 건 종잇조각만큼이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기가 지금껏 좇고있었던 건 모두 신기루였단 말인가. 승혁이 혼자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맹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 어제 얘기는 다 들었어요.”
“그래. 그 말대로니까 내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아니, 그, 그러니까…”
맹호를 당황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승혁은 괜히 자기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승혁이 지금껏 있는 줄도 몰랐던 무리들이 갑자기 자기 삶에 끼어든 것뿐이었다.
“그래서, 뭐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 아뇨. 힘드시겠다고…”
“그래. 힘들지. 멀쩡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 앞에서 강해보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승혁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기가 센 척을 한다고 한들 그건 허풍일 뿐이었다. 게다가 맹호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라면, 그런 센 척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 죄송하지만 저도 보면 안 될까요?”
“뭘?”
지금은 자기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맹호의 등짝을 보며, 승혁은 그렇게 물었다. 어쩐지 그 뒤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걸 자기가 먼저 말하는 건 조금 민망했다.
“그, 미래 누나가 말하시던 그 사진…”
“그게 그렇게 보고 싶어?”
“아뇨. 그냥 궁금해서. 저, 그…”
더 이상 안 들어도 알 것 같았으므로, 승혁은 그 사진을 찾아봤다. 일단 어제 한 번 본 사진이라서, 그 때만큼 마음이 무겁진 않았다. 그리고 전처럼, 보여주는 게 망설여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승혁은 맹호한테 그 사진을 건넸다. 틀림없이 지금 자기 모습과 견줘볼 게 뻔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승혁이 괜히 걱정하는 건 다른 데였다.
맹호는 그 사진을 받아보더니, 한동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자기는 사진 속 승혁과 대보면 얼마나 초라하게 보일까. 그런 생각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갑자기 이런 질문이 날아왔다.
“저, 결혼하셨다 들었는데…”
“아, 어. 그렇지. 그런데?”
“그, 결혼하면 어때요?”
“어?!”
이건 정말 짐작치 못한 질문이라, 승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보면, 같이 산 지 두 달은 넘었을 텐데 거기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무 익숙한 사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떻다고 말하면 그게 좀…나도 아슬아슬하게 붙잡은 거라서.”
“아, 그럼 그동안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어. 웃기지?”
“아뇨.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맹호는 그런 말과 함께, 뒤를 돌아보며 승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게 사람이 아닌 ‘맹수’의 눈빛이란 말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승혁은 그 눈빛을 제대로 마주보는 게 버거웠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눈빛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 저도 결혼까진 아니지만, 사귄다는 말도 아니지만, 그래도 잘 챙겨주고 싶은 친구가 있어서…”
“그 솔이란 얘?”
“…네.”
그 풋풋하기까지 한 말투를 들으며, 승혁은 어쩐지 자기가 너무 재미없는 삶만 살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그 아이와 만날 때 조금 더 이성이란 걸 의식하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이젠 지난 이야기였지만.
“그 얘가 좋아?”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 그, 친구고, 그러니까…”
“너라면 괜찮을 거야.”
자기도 모르게, 승혁은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아마 이 맹호란 남학생은, 자기가 원래 모습으로 만났다 한들 그 몸집 때문에 기가 눌렸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등학생이라 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사람’으로 생각하면 이루 말할 데 없이 고등학생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 ‘모호한’ 느낌이 맹호라고 하는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지도 몰랐다.
“정말요?”
“너는 나보다 더 솔직하잖아. 어, 그리고..”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어, 승혁은 말꼬리를 흐렸다. 맹호도 마음은 알아챘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솔이란 친구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지 승혁은 몰랐지만, 아무튼 저렇게 생각해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면 별 문제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전부터 죽 생각했어요. 솔이한테 친구는 나밖에 없는 거나 마찬가진데, 내가 그 하나밖에 없는 친구여도 좋은 걸까. 나는 이렇게 못하는 게 많은데…라고요. 솔이는 참 다정한 친구지만 모르는 사람하고 말은 잘 못 해요. 제가 거기에 얼마나 도움을 줬는진 모르겠지만…”
“너 정도면 아무 문제없을 거 같은데?”
“고,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맹호를 보자, 승혁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미래는 전에, 자기한테 ‘지금 모인 친구들한테 네가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거꾸로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게 대략 이런 뜻일까. 어쩐지 승혁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뒤에 맹호가 꺼내놓은 건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저, 그런데 라마가 뭐예요?”
“엉?”
“아니, 솔이가 자꾸 라마 귀엽다길래…근데 전 한 번도 못 봐서…”
그거야 당연하지. 한반도에서 라마를 볼 일이 어디 있겠어.
란 말을 속으로 꿀꺽 삼킨 채, 승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한테 라마를 설명한다는 건 참으로 머리아픈 일이었다.
잠시 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승혁은 이제 자칭 괴물사냥꾼이라 하는 꽃잎이란 여자애와 마주보고 있었다. 같이 있는 사람이 어느새 바뀐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도 그랬지만, 승혁은 이 애 앞에서 어쩌면 좋을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놓아야 하나.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같은 데가 하나도 없는 애한테 꺼내놓을 ‘무슨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뭘 해야 할까. 라 승혁이 혼자 생각하고 있을 때.
“이거 재밌던데.”
이젠 눈에 익다 못해 화면을 외울 것 같은 그 라마게임을 보이며, 꽃잎은 승혁한테 말을 걸어왔다. 저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오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승혁은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그런 게임 많이 안 해봤어?”
“이런 게 있단 것도 처음 알았어.”
그 담담한 말을 듣자, 승혁은 자기가 ‘유사세계’에서 지내는 이와 이야기하고있단 걸 다시 한 번 똑똑히 느꼈다.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세상이, 이렇게 넓게 퍼져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때?”
“재밌어.”
“아, 그렇구나.”
여전히 감정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말을 들으며, 승혁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는 승혁을 닮은 것같기도 했다. 그다지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 할 말만 하고 끊는 것. 자기 말고 이런 사람을 그다지 만나지 못했던 승혁은, 굉장히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가 재밌었어?”
“라마가 스키타는 거.”
너도 그거였냐. 그 생각에, 승혁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보면 감성은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자칭 괴물사냥꾼이라 그런지 감정은 좀 무딘 듯했지만.
“괴물사냥꾼이라 들었는데, 그러니까 뭘 하는 거야?”
“괴물이 나타나면 물리치는 거.”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 잡아가면 안 되니까 내가 물리쳐.”
“그러니까, 그…”
승혁은 물론 그런 말을 듣고싶은 게 아니었다. 그 괴물은 무엇인가. 왜 물리치고 있는가. 그걸 듣고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애는 승혁의 그런 마음을 잘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건 참 재밌다. 그지?”
꽃잎의 이 아무렇지 않은 말에, 승혁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살던 세상은 어떤 곳일까. 자기가 살던 곳과 어떻게 다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혁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닌 ‘세상’이 궁금해졌다.
“내 얘긴 미래한테 들었어?”
“응.”
“그런데 딱히 물어볼 건 없고?”
이 말에, 미래는 이상하단 듯 승혁을 쳐다봤다. 마치 길을 가다 뭐에 걸려 넘어진 이야기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잖아.”
그 반응이, 승혁한테는 충격에 가깝게도, 그리고 묘하게 신선하게도 느껴졌다.
“살다 보면 여러 일이 있을 수 있는 걸. 내가 그걸 다 알진 못하지만, 힘들단 건 알 것 같아. 만약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울게.”
그 말과 함께, 꽃잎은 승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승혁은 뭐라 할 말을 잃은 채,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저녁이 다가올 즈음, 승혁은 아주 불편한 자리를 견뎌내야 했다. 어제 그 휠체어를 탄 남자와 단 둘이 남겨진 것이다. 마치 누가 짜고치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지만 할 말은 없었다.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대체 저런 사람하고 무슨 얘길 하란 말인가. 승혁은 눈앞이 까매지는 걸 느꼈다.
사실, 승혁은 아직도 어제 일을 잊지 않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 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승혁한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는 있을까. 어제 미래의 말에 반쯤 동의하긴 했지만, 이런 남자가 자기한테 힘을 빌려줄 리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동안 그런 식으로 침묵이 흘렀다. 그 남자는 물론, 승혁도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남자는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가지고 있는 화면에조차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화석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으니, 지금 어떤 마음인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만큼, 침묵도 점점 깊어졌다. 이대로 어색하게 있다가 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승혁은, 갑자기 남자 품에 들린 화면에 뭔가 글씨가 쓰여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나?
이 말을 보자마자, 승혁은 머리로 피가 쏠리는 걸 느꼈다. 이 자식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승혁이 이런 도발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게 댁이 할 소리야?”
-어제 이야기는 들었다. 내가 오해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 사과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남자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기보다, 화면에 아무 말도 ‘띄우지’ 않았다. 승혁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다시 침묵이 일던 뒤, 드디어 화면에 문자가 나타났다. 마치 나름대로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글자가 나오는 빠르기는 전보다 조금 더 느렸다.
-그렇게 내 말이 충격이었나?
“그딴 오해를 받고 기분좋을 남자가 세상에 어딨어?!”
이제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뒤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 놈한테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기가 우습게 보인 것도 참을 수 없었지만, 그 아이까지 우습게 보이는 것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사진이 나오자, 승혁은 바로 그 남자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자, 이게 증거다. 이것도 못 믿겠다 이건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쩐지 저 남자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였다. 지금 자기가 가장 찔리면 아픈 데를, 저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푹 찔러댔다. 물론 몰라서 그랬다면 넘어갈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찔린 데가 아픈 건 여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팔을 들고 있었을까. 승혁은 아파오는 팔에 이를 악물다가, 저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한단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저 남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기가 품고있는 ‘화면’에 글자를 내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자기 사진에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화면에 글자를 내보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동안 승혁은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어쩌면 이 남자는 이미 대답을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화면은 바로 눈앞, 즉, 승혁이 고개를 숙인 바로 그 자리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승혁은 속으로 조금 당황했지만, 거기에 뭔가 적혀있는지 보려고 눈을 똑바로 떴다.
그 화면엔 틀림없이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그 여자는 네 아내인가?
“그래, 그럼 어쩔 건데?!”
-그 사람이 잡혀갔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들었겠지만…”
-그렇다면 댁도 나와 같군.
“어디가…아.”
거기까지 듣고서야, 승혁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남자라고 좋아서 이런 모습이 된 건 아닐 터였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삶을 바라진 않았을 터였다.
그런 점은 그야말로 지금 승혁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승혁은 어쩐지, 너무나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댁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지?”
-이젠 말하기도 싫은데. 굴욕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그런 마음이라면 믿겠어?”
-그 흡혈귀란 여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그 말에, 승혁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줬단 생각에서였다. 사실, 승혁은 자기처럼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이는 딱 한 명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사세계만큼이나, 실제 ‘현실’은 무척 넓었다.
-나도 내가 모르고 그런 말을 했단 건 인정하지. 미안하게 됐군.
“뭐, 지금이라도 사과했으면 난 상관없지만…”
-댁도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았지? 그리고 지금 그것 때문에 비참할 테고. 나도 그랬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세상에 사정없는 사람이 어딨어? 됐어. 나도 더 안 물을 테니까.”
-그럼 이젠 내가 물어봐도 되나?
“…뭘?”
남자는 여전히 바뀔 수 없는 표정으로 승혁을 보다가, 이런 말을 단말에 내보냈다. 그 말은, 승혁이 짐작하던 걸 아득히 뛰어넘는 거였다.
-대체 왜 라마가 스키를 타고있는 거지?
그건 저 남자가 아니라, 승혁이 먼저 묻고싶었던 거였다.
한편, 승혁은 아이템담당이라 하는 여성과도 잠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미래 말에 따르면, 아이템담당은 유사세계 여기저기를 쏘다니기 때문에 바쁘지만, 이런 상황은 드무니까 시간을 쪼개서 온 거라는 듯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승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이템담당은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이거 어떠세요? 지금 사시면 샘플도 드릴 수 있는데.”
“…그건 또 뭔데요?”
“이건 물고만 있으면 가장 즐거웠던 때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건데, 사탕같은 거라서 다 빨아먹으면 거기서 끝…”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맛인데요?”
“아, 박하 맛이에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즐거웠던 때에 온 신경을 쏟으면 맛은 그다지…”
“됐어요. 그냥 가져가요.”
승혁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대체 뭘 파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얘기해본 느낌은 어때?”
이제 밤도 깊어질 무렵.
자기 침대에서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자로 누워있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어이없단 눈빛을 보냈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저게 안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건 배포가 좋아도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느낌 말이야?”
“오늘 유사세계 사람들하고 얘기 좀 나눴잖아. 이제 좀 알 거 같지 않아?”
“그러니까 뭘…”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승혁은 미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지금껏 승혁은 유사세계는 물론, 거기서 온 이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야기하면서 조금이나마 그들을 알 것 같으냐고 미래는 묻고싶었을 터였다.
“그래, 조금 알 거 같긴 해.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금은.”
“다행이네. 댁이 그렇게 마음먹을 수 있었다니.”
“뭐가 말하고 싶은 거야?”
승혁이 화내자,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대던 핸드폰을 옆에 뒀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선, 승혁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솔직히 그렇잖아. 댁만 유사세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유사세계 쪽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 봐. 갑자기 이상한 데로 넘어왔는데 댁이 있으면 다들 수상해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난, 수상한 존재가…”
“저 친구들도 마찬가지란 거지. 다들 그 망할 자식들 때문에 엮인 것뿐이야. 같은 처지란 걸 이해하면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어때?”
“그야 뭐, 어…”
사실 승혁은 저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러니까 정체는 뭔지에 관해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저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면 힘을 빌릴 때도 있을 텐데, 서로에 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승혁은 지금도 될 수 있으면 혼자서 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서로를 알아야 친밀감도 들 거 아냐. 앞으로도 오래 알게 될지 모르는 사인데. 아, 내 얘긴 안 했던가?”
“잠깐만, 니 맘대로 얘길 끌고가지 말고…”
“그러고 보니 내가 흡혈귀란 증거도 안 보여줬네. 뭐, 보여달라고 해서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햇살 아래서 못 돌아다니는 거 아니었나?”
“누가 그래?”
정말로 신기하단 듯 되묻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유사세계의 큰 벽을 느꼈다. 자기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도, 미래가 보면 신기한 듯했다.
“내가 아는 흡혈귀는 그러하니까…”
“진짜? 신기한데. 왜지?”
미래는 그게 큰 수수께끼라도 되는 듯 고개를 갸웃댔지만, 이내 ‘뭐, 그런 건 됐고’라며 다시 승혁을 바라봤다. 그리곤 자기 품속에서, 뭔가 새빨간 팩을 꺼내 승혁한테 보여줬다.
“그거, 설마…”
“설마가 사실이지. 내가 비상용으로 들고다니는 피.”
“정말이야?”
“뭣하면 냄새라도 맡아볼래?”
그 말과 함께, 미래는 팩을 살짝 뜯어서 승혁한테 내밀었다. 하지만 승혁이 가까이 갈 것까지도 없었다. 마개를 따자마자 짙은 냄새가 여기까지 퍼졌던 것이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살아있는 증거를 나타내는 냄새였다.
“흡혈귀라고 만날 피만 마시는 건 아냐. 그냥 밥이나 망고주스도 마실 수 있지. 굳이 말하자면 영양제나 밥하고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네. 때때로 안 마시면 건강이 나빠지는 건 다르지만.”
“그래?”
“그렇지. 이렇게 가끔 마셔줘야 흡혈귀란 걸 알아주는 사람도 있잖아. 안 그래?”
미래는 그렇게 말하며, 빨대를 구멍에 꽂고는 가만히 그 ‘피’를 빨아먹었다. 빨간 액체가 빨대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미래가 그걸 마치 스포츠음료라도 되는 듯 시원하게 꿀꺽 마시는 것이 승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이는 게 좀 민망했는지, 잠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던 미래는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뭐, 이래도 안 믿으면 어쩔 수 없지. 댁 피라도 마셔볼까?”
“무, 무, 무슨 소리야?”
“그럼 믿을 거 아냐. 나도 생사람 피는 잘 안 마시지만, 뭐, 마시게 해주면 안 마실 것도…”
“누가 안 믿는대?!”
그러거나 말거나, 미래는 승혁한테 갑자기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살짝 보이고 있는 미래의 이가 조금 눈부셨다. 만약 승혁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송곳니가 틀림없었다. 물론 그걸로 흡혈귀를 말할 순 없지만, 승혁은 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승혁을 쳐다보는 금빛 눈동자.
승혁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미래가 갑자기 웃어보였다. 지금껏 가진 긴장이 모두 풀어지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뭐야, 진짜 마실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남의 피 막 마시는 사람 아니다. 그것도 결혼한 사람한테.”
“그, 그럴 리가…”
“근데 왜 표정이 새파래?”
“이건 그냥…아무튼 니가 흡혈귀란 건 알았으니까 더 안 보여줘도 돼.”
“그래?”
미래는 이렇게 말하며, 승혁을 바라본 채 실실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편한 자세로 앉은 채, 이런 말을 이어나갔다.
“뭐, 야생흡혈귀란 건 이제 알겠지? 흡혈귀라고 별 건 아냐. 물론 망고주스가 없어지면 난 죽겠지만.”
“또 장난하는 거야?!”
“아니,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방랑흡혈귀란 건 말이야, 나라에서 흡혈귀한테 지는 의무를 무시하는 존재를 두고 말하는 거야. 흡혈귀로 태어나면 져야 할 의무가 좀 있거든.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느니, 군 훈련을 하라느니, 어딜 가도 꼬박꼬박 확인을 해야 한다느니…”
“그게 싫어서 떠돌아다닌다 이거야?”
“그렇게 되지. 난 나라한테 봉사할 생각이 이만큼도 없었거든. 그러니까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거야. 그럼 나라에서 흡혈귀한테 해주는 지원을 못 받지만, 뭐 상관없지. 나도 안 바라니까. 어차피 쥐꼬리만한 거고.”
그 말을 들은 뒤, 승혁은 왜 미래가 자기를 야생흡혈귀라 했는지 깨달았다. 그저 따르고 싶지 않은 의무를 지기 싫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미래가 유사세계를 잘 아는 것 역시, 그런 의무에서 벗어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의무가 그만큼 부조리한 건가?”
“흡혈귀로 태어났단 까닭만으로 온갖 걸 다 하라고 하면 그거야 부조리하지. 게다가 그런 걸 정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고. 우리가 정한 규칙이 있긴 하던가? 물론 나라에 반기를 들 생각은 이만큼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취급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도 싫은데.”
그렇게 말하다, 미래는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는지 승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이 하도 강해서, 승혁은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가, 갑자기 뭐야?”
“아니. 이렇게 보니까 사진 속 댁하고 눈앞에 있는 댁이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 그게 지금 할 말이야?!”
갑자기 터져나온 엉뚱한 말에, 승혁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가만히 생각하면 미래는 이미 원래 자기 모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노을을 빼면 남은 이들 중에선 가장 그럴 터였다.
“아니, 나도 가끔 신기할 때가 있어서. 그 고집센 표정이 특히 그렇단 말이야. 아무튼 엘리트는 참.”
“그러니까 그게 지금 할 말이야?”
“아, 목소리도 닮았다. 말투랑 톤이.”
“아니, 그, 그러니까…”
이제 승혁은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건든단 말인가. 승혁은 지금 자기에 관해서 누군가한테 건드려지고 싶지 않았다. 까닭은 물론 단 하나, 이건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쯤 억지로 이렇게 된 걸 가지고 뭐라 그러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래한테 느끼는 감정은 싫다기보다, 아무튼 민망해서 쥐구멍이라도 판 뒤 숨고 싶다는 데에 더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댁도 삶은 즐겼어? 결혼도 했다매.”
“넌 대체 아까부터 무슨 얘길 하고싶은 거야?”
“어차피 같은 20대 후반인데 이런 얘길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참고로 난 그다지.”
“누가 궁금하대?”
라고 말하긴 했지만, 결혼까지 했는데 그런 경험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승혁도 그 아이와 가정을 꾸리기로 마음을 굳힌 뒤로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모습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는 이런 모습이 되고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와 마음을 나눌 때 알맞은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게 승혁의 원래 모습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기 모습을 볼 때마다,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걸 떠올리고 있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이성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당연히 그 아이뿐이었다. 자기가 이런 모습이 돼서 즐거운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혼자 모르는 곳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래, 예를 들면…
“어쩌면 댁도 이런 느낌 아냐? 어떤 여자애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상한 나라에 있는 느낌. 물론 댁한테 흰토끼는 없었겠지만.”
“그래서?”
마치 자기 마음을 읽힌 느낌을 받으면서도 승혁은 그렇게 물었다. 미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이런 말을 담았다. 지금껏 승혁이 봤던 표정 중, 지금 이게 가장 ‘따뜻한’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당황했겠지만, 이젠 알 거 같지 않아?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이상한 나라라 한들, 가만히 보면 재밌는 데도 꽤 많단 거 말이야. 그리고 댁이 혼자가 아니란 것도.”
거기까지 말하던 미래는 갑자기 다시 침대에 눕더니, 핸드폰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지. 잠시 생각하다, 승혁은 미래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근데 넌 지금 뭘 하는 거야?”
“나? 올해 반나절쯤 지나면 못 할 게임 하는데.”
“그런 게 있어?”
“업데이트 안 해주면 옛날 앱은 다 잘리거든. 이런 게 바로 문화유산이란 건데…”
“댁은 게임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잘 하지도 못하면서.”
“꼭 잘해야만 좋아할 수 있는 건가? 댁은 노을이보다 못하면서…”
“뭐가 어째?”
그렇게 화를 내긴 했지만, 승혁은 전보다 저 야생흡혈귀란 여자를 훨씬 더 잘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까 미래가 말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것이었을 터였다.
좀 열받게 할 때도 있지만, 아무튼 얜 나름대로 자길 생각해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승혁은 더 이상 미래한테 딴죽을 걸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날짜가 바뀔 즈음.
“언니, 피곤해?”
“아? 어, 응…”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불이 꺼진 병실에 승혁은 노을과 나란히 누워있었다. 시끄럽던 사람들이 다 자기 갈 곳으로 돌아가고 나니, 어쩐지 병실이 텅 빈 것 같았다. 고작 하룻동안 알고지낸 사이인데도, 그 텅 빈 병실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승혁은 바로 지금, 자기가 놓여있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신기하단 생각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버젓한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한 뒤 그 아이가 있는 집에 돌아가야 할 텐데, 지금은 어디에 박혀있는지도 모르는 병실에, 지금껏 모르고 있던 여자애 옆에서 누워있었다. 게다가 지금 자기 주위를 둘러싼 세상은 원래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승혁이 바뀌었기 때문이지만, 이제 승혁은 둘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옆에 누워있는 노을은 그런 생각이 이만큼도 없는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부모님도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모습까지 바뀔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 아이는 여전히 밝았다. 이게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더 센 점일까. 자기도 모르게 승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만약 노을이 내 아이였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다, 승혁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아이를 가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일은 여러 번 했지만, 아직 자기한테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선 승혁도 미래와 같은 생각이었던 셈이다. 사실 얼마 전이었다면, 승혁은 이 나잇대 아이한테 이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 아직 이르다 여겼을 터였다.
그런 승혁이, 처음으로 ‘이런 아이가 있었으면’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지금 승혁이라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기가 어떻게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기가 아낄 수 있는, 그런 아이를 ‘그 아이’와 함께 만나고 싶었다.
이건 대체 무슨 느낌일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승혁은 뭔가 노을한테 묻고 싶어졌다. 지금껏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정상 묻지 못한 여러 가지를.
“노을이 너는 안 힘들어?”
“나? 내가 왜?”
“엄마아빠랑 만나지 못하고 있잖아. 그리고, 어제 그…모습이…”
그건 자기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승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을도 어제 일, 그리고 미래가 해준 말 덕택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있을 터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노을은 승혁의 원래 모습도 알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이렇게 어린아이한테 ‘그런 일’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승혁은 아직도, 이걸 노을한테 묻는 게 무서웠다. 자기 일도 아닌데, 자기 일보다 그게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아무 생각도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혁은, 노을 앞에서 이런 얘길 꺼내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노을은 승혁을 빤히 보더니, 이윽고 방긋 웃어보였다. 이렇게 착한 아이가 세상에 있을까, 란 생각이 들 만큼 밝게.
“응. 엄마아빠는 보고 싶어. 그치만 언젠간 꼭 볼 수 있잖아. 나 기다리는 거 잘 해.”
“힘들 텐데도?”
“그치만 언니가 있잖아.”
이 말에, 승혁은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을한테 있어 승혁은 어떤 존재일까. 우연히 같이 놀아준 뒤, 자기와 같은 상황에 놓인 ‘언니’일까. 아니면 또 다른 뜻도 지닌 걸까.
“내 얘긴 들었지? 난 네 언니도 아니고, 어, 그렇게 다정한 사람도 아냐. 그런데 날 믿을 수 있어?”
“그치만 언니는 언니잖아. 나도 사진 봤어. 언니가 다른 예쁜 언니하고 사진찍은 거.”
승혁은 그 사진을 떠올린 뒤, 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이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그 사진을 봤을까. 승혁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힘든 데가 있어도 이렇게 같이 있으면 되니까. 언니랑 아직 안 해본 게임 해보고 싶다. 그지?”
“아…어, 그러게.”
승혁은 그런 말과 함께, 이제 달빛만이 비치는 천장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 예고도 없이, 자기 삶은 전혀 현실과 가깝지 않게 바뀌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도 틀림없이 여기에 있었다.
하늘은 대체 자기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걸까. 이 아이를 지켜주는 거라도 바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푹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