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13. 내가 살아온 이야기

그 뒤로, 승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옆에서 저 새로 들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곤 있었지만, 어쩐지 승혁의 귓속으로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깨어있는 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틀림없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거기에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분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이렇게 글씨로만 의지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저는 어쩌다 보니 이 분을 돕게 돼서…
아까 그 여자애가 말하는 게 들렸지만, 승혁의 머릿속은 그저 새하얗기만 했다. 저들이 유사세계에서 이리로 온 또 다른 사람들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자기 사정을 모르고 그런 말을 했으리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승혁은 얼른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혼자 외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정말 승혁은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러고보니 이제 밤인가? 애들아, 잠깐 부탁이 있는데.”
“뭔데, 언니?”
미래의 말에, 노을이 궁금하단 듯 이렇게 되물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던 승혁한테, 갑자기 미래의 이런 대답이 또렷하게 들렸다.
“얘가 지금 정신줄을 살짝 놓은 거 같은데, 다들 다른 데 잠깐 가있을래? 자세한 얘긴 좀 이따 하자.”
“그럼 맹호야, 우리 집에 데려가는 건 어떨까? 엄마랑 아빠랑 다 상관없어할 텐데.”
“이렇게 많은 친구를 한꺼번에 데려간 적은 없어서…”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결국 이야기는 솔이와 맹호의 유사세계에 잠시 있는 걸로 매듭지어진 듯했다. 저 집은 얼마나 널널하기에 저런 말이 나오는 걸까.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지금 승혁은 아무 것도 생각할 기운이 없었다.
-저, 죄, 죄송해요. 이 분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 그…
여자애가 나가기 전 사과하는 말을 했지만, 여전히 승혁한텐 실감이 들지 않았다. 물론 알고 그랬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쳤단 것 자체가, 승혁한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승혁은, 다녀오란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미래를 뺀 나머지 아이들(및 그 남자)이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온다.
그 말을 남긴 채, 승혁은 일단 며칠동안 지내던 병실을 나왔다. 지금 당장은 미래와 단둘이 남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디든 좋으니, 잠시동안 혼자 있고 싶었다.
낯선 화장실로 들어간 뒤, 승혁은 바로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물론 뚜껑을 덮은 뒤였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되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크게 터져나오는 걸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건 기분 탓일까.
그런 생각과 함께, 승혁은 새삼스레 자기 자신을 내려다봤다. 지금까지도 ‘이 모습’을 아주 안 보고 지낸 건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서 피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승혁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모르게, 이제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 아이가 지금 자길 본다면 뭐라 말할까.
지금껏 가장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걸, 승혁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승혁은 자기 모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를 부끄러워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자기가 변변찮은 인간이란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승혁은 ‘자기’를 보면 볼수록 비참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건 결코 아니었다. 승혁은 이게 자기자신이 맞단 건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괴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이 모습은 자기가 ‘바라는’ 자기자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놈들이 멋대로 남의 몸을 주무른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자기에 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승혁한테, 가장 큰 굴욕은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기가 이런 병원에 갇히다시피한 것도 굴욕이었지만, 승혁은 자기 정체성이나 다름아닌 ‘모습’을 저 놈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 게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마냥 가볍게만 보이는 모습은 자기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물론 그 아이라면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었지만, 그러니까 그걸 ‘자기 자신’한테 바란 건 아니었다.
원래 자기한테 없었던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며, 승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지금, 자기는 ‘그 아이’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건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 세상, 아니 이 유사세계 어딘가에 그 아이는 틀림없이 있을 터였다. 저 놈들이 무슨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만날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승혁은 자기 모습을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이렇게 한다고 그 아이를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결혼 뒤부터 이성의 모습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도.

승혁이 병실로 다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승혁이 뭘 했는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거기’엔 그다지 관심이 없단 눈치였다.
그렇게 불이 켜진 병실엔 승혁과 미래, 다시 둘만 남았다.
둘만 남은 뒤에도, 승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목구멍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승혁은 지금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자기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잠에 빠졌는지조차 모호하다 여기고 있었다.
둘은 서로 마주본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지만,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미래의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저 여자와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게 해 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참 그렇지만, 이런 느낌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껏 여러 위기를 겪었지만, 승혁은 이럴 때 어쩌면 좋을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마치 새하얀 종이가 눈앞에 있는데, 뭘 그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승혁이 거기에 관해 배운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왜 세상에선 꼭 필요한 것만 알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껏 상식을 믿고 살아온 승혁은, 결국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미래의 말에, 승혁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말 그런지는 자기도 잘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자기자신이, 오늘따라 유난히 알기 어렵기만 했다.
“정신은 안 들었네. 뭐, 내 멋대로 이야기를 좀 하자면…”
그 말 뒤, 미래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밤 열 시가 넘어갈 무렵이라, 주위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어른’들한테 더 알맞은 시간일지도 몰랐다.
“니가 지금 어떤 느낌일진 대충 알아. 너야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그러겠지만.”
“아, 그래?”
그렇게 쏘아붙이는 말조차, 지금은 기운이 없어서인지 약하게 들릴 뿐이었다. 승혁한테 이렇게 들리는데, 미래한테 어떻게 느껴질지는 안 물어봐도 뻔했다.
“뭐, 여러가지 있겠지. 난 댁을 만난 게 오늘로 처음이지만 표정만 봐도 대충은 알아. 뭐야, 내가 댁 마음은 전혀 몰라주는 줄 알았어?”
“그딴 게 궁금한 게 아니라…”
라고 말하면서도, 승혁은 미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지금 자기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이럴 때는.
“솔직히 댁도 당황했겠지. 갑자기 듣지도 못한 말이 나오지 않나, 생각지도 않은 일이 막 일어나지 않나. 혼자 남겨진 거 같은 느낌 안 들었어? 나도 댁 달래줄 시간이 없어서 지금껏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아니, 난 달래달란 말은 전혀…”
“그거야 댁은 그렇게 말하겠지. 댁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겠지만.”
여전히 승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병실 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미래가 이런 말을 꺼내들었다.
“지금 댁이 힘든 건 알겠는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솔직히 댁이 화낼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거든.”
“그러니까 뭔데?!”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다가, 승혁은 다시 입을 닫았다. 자기가 이렇게 흥분하는 성격은 아니었을 터였다. 지금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최승혁답지 않았다.
“뭐, 화내도 어쩔 수 없긴 한데…댁은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된 거야?”
“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래가 묻는 것이니 뭔가 이상한 것이리라곤 짐작했지만, 이렇게 엉뚱한 게 날아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해서였다.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데?”
“전에도 한 번 말했잖아. 댁같은 사람이 연애를 하게 된 게 신기하다고. 게다가 결혼까지 했다며?”
“그게 그렇게 이상한 짓이야?!”
“그 쪽 성격을 보면 그렇단 말이지. 솔직히 연애할 것처럼 안 보이는 성격이거든. 그런데 어떻게 이 나이에 거기까지 갔을까, 뭐 그런…”
“내가 지금 결혼한 게 그렇게 이상해?!”
“댁은 모르겠지만, 난 동갑내기가 결혼을 한 시점에서 지금 신기하기 그지없단 생각밖에 안 들거든. 그야 나도 언젠가는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솔직히 너무 빠른 거 아냐? 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긴데.”
“웃기긴 뭘 웃겨. 젠장…”
미래의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며, 승혁은 그렇게 중얼댔다. 요즘 시대니 20대에 결혼하는 게 아주 흔한 일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상하게 보일 일도 아닐 터였다.
“넌 내가 너랑 동갑인데 결혼한 게 이상한 거야, 아니면 내가 누굴 사귀었단 게 이상한 거야?”
“둘 다.”
“이게 진짜…”
그렇게 화를 내긴 했지만, 승혁도 그 말이 아주 이상한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학생시절부터 ‘니가 누굴 사귀는 게 상상이 안 된다’는 말은 많이 들어와서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으로 치면 조금 이른 시기에 결혼까지 했단 건 틀림없이 희한한 일이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럼 이 자리에서 지금껏 있었던 연애라도 다 말해보라 이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승혁은 일단 마음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연애라 한들 해본 건 처음밖에 없었을뿐더러,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승혁한테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 번 했던 게 그대로 결혼까지 간 건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
“그럼 더 궁금하지. 말했잖아. 난 댁이 누굴 좋아하는 거부터가…”
“가만히 안 있어?!”
결국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튼 이 얘길 안 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무척 말하기 힘든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입에 담아야 했다.
“안 웃을 거지?”
“남의 연애갖고 그렇게 웃는 사람 아니다, 나.”
“댁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거 같은데.”
“내가 덕을 잘못 쌓았나…암튼 말해 봐. 어떻게 된 거야?”
그 말에 어이없어하면서, 승혁은 천천히 입을 뗐다. 자기가 지금 가장 뱉고싶지 않은 목소리로, 자기가 지금 가장 말하기 힘든 일을 입에 담기 위해.
“그럼, 너무 웃지 마.”
숨을 가다듬었다.
“나한테는 정말 진지한 얘기니까. 알았어?”

승혁이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틀림없이 고등학생이 된 지 어느 정도 지났을 때였다.
미래가 말한 대로, 승혁은 누굴 사귄다던가 뭐 그런 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성한테 관심이 없었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누굴 사귈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그런 승혁이 고등학생 때 ‘그 아이’를 만난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웠다. 그 기나긴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어, 둘은 이렇게 맺어질 수 있었으니까.
-여기 앉아도 돼?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없이 책을 읽던 승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생긴 여자애가 승혁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른 자리가 없어서 여기에 앉으려던 듯했다.
딱히 거절할 까닭도 없어서, 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과 가까이서 앉은 건 오랜만이었지만, 그 땐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 뒤로 가끔 그 여자애가 옆에 앉았지만, 그 때도 승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여자애가 가끔 과자를 주거나 모르는 데를 물어볼 때도, 오늘 날씨가 좋다는 얘기를 할 때도, 승혁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가 이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승혁과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가끔 만나게 된 건 그저 그 때 인연 때문이었다. 승혁도 그 여자애한테 가끔 배우곤 했으며, 나쁜 아이도 아니었으니 친구 비슷한 느낌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둘이 다니는 학교도 가까웠기에, 만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대학생 무렵엔 그저 그렇게 여겼을 뿐이었다. 2년 동안 직접 보지 못할 때에도, 대학을 졸업한 뒤 회사에 들어간 다음에도, 둘의 만남은 이어졌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된 나머지, 승혁은 자기가 이 사람을 잃으면 얼마나 허전할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건 고작 반년 전쯤, 그러니까 프러포즈하기 전 일이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와 얘기하던 승혁은, 들을 리가 없는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나가는 듯 이렇게 말한 건 틀림없었다.
-누가 그러더라구. 나한테 사귀는 사람 없어요? 라고.
그 말에 승혁은 망치로 머리 뒤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 아이가 자기 삶에 있단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식할 일조차 없을 만큼 자연스러워서, 없어지리란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다른 누군가와 사귀는’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이성과 가까이 지내는 걸.
그 날 밤, 승혁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 그것도 이성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지우고 싶어도 자꾸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애가 누군가와 사귄다면,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면, 그런 생각이 자꾸만 승혁을 괴롭혔다.
왜 지금껏 이렇게 쉬운 걸 모르고 있었을까. 왜 이런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까.
결국 30년 남짓한 삶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깊이 고민한 끝에, 승혁은 둘이 자주 돌아다니던 조용한 공원으로 그 아이를 불렀다. 어째서였을까. 항상 냉정한 편인 자기 손이, 그 때는 가느다랗게나마 떨리고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승혁은 살면서 가장 큰 용기를 냈고,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실감이 나지 않는 결혼을 했고, 당분간 둘이서 행복한 나날을 누렸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만 없었다면.

거기까지 말을 듣고, 미래는 잠시 동안 혼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이 혼자 고개만 끄덕대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그냥 아무 말이나 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털어놓은 건 솔직히 말해서 이 야생흡혈귀가 처음이었기 떄문이었다.
승혁은 자기 얘길 남한테 털어놓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말할 일이 없었던 것도 그렇지만, 자기 얘길 밖에 내놓기 싫어했단 게 더 컸다. 지금 미래한테 이런 식으로 자기 연애담을 풀어놓은 건, 드물어도 무척 드문 일이었다.
“뭐야, 할 말 없어?”
“댁이 웃지 말라매? 그러니 할 말은…”
“이게 웃기단 말이야?!”
“아니, 딱히 웃기진 않았어. 나 진짜 진지하게 들었거든. 궁서체처럼.”
“무슨 헛소리를…”
미래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말했지만, 표정은 그 말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웠다. 아까처럼 갑자기 황당한 농담을 던져댄 것도, 오히려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려던 게 아닐까 여겨질 정도였다.
“일단 미안. 댁이 그렇게 진지하게 연애하는 사람일 줄 몰랐어.”
“내가 화내는 걸 그렇게 보고 싶어?”
“아니, 진짜로. 물론 내가 댁을 멋대로 생각한 것도 있지만…이제야 댁 마음을 좀 알 것 같아서.”
그 말에 승혁은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미래가 한 말이 진심이란 게 느껴져서였다. 저 여자가 자길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이야기에 공감해줬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댁도 참 순수한 사람이네. 적어도 연애할 땐.”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결혼했단 말이잖아. 난 아직도 내 또래가 결혼했단 게 실감 안 나지만, 너야 했으니까…”
“또 그 얘기야?”
어이가 없긴 했지만, 승혁은 이제야 그 말도 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승혁 자신도 자기가 이렇게 빨리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언뜻 봐도 자유로운 성격일 터인 미래가, 자기 또래인 승혁을 보고 ‘실감이 안 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나도 이 나이에 해야겠단 생각은 안 했어. 그저 상황이 그렇게 됐으니까, 그리고…”
“뭐, 댁답긴 하네. 어떻게 보면.”
“그래?”
“들으면 들을수록 그런 느낌인데?”
그 말을 듣자, 승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저 여자한테 있어 최승혁이란 인간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물론 둘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처음 만난 느낌이 이렇게 묘한 것도 드물 터였다. 물론 연애대상으로 본다기보다 ‘자기와 아주 딴판인 사람’이란 데에 더 가까웠지만.
생각해 보면,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얼마나 현실감을 잃었는지, ‘당연한’ 평소 생활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아이와 맺어진 뒤 나름대로 다정하게 지낸 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일했던 게 잘 떠오르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드디어 승혁은 자기가 여기에 있단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는 여기에 살아있단 것, 자기가 겪어온 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것.
“이런 말을 들으니까 댁을 다시 보게 되네. 진짜 의외로 순수한 데가 있어. 댁은.”
“이번엔 또 뭐야?”
“댁이 엘리트란 건 알겠는데, 아직도 순수한 데가 남아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아까 그 친구들 말이 틀렸던 건 아닌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뭐가…”
라고 말하면서도, 승혁은 어쩐지 미래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자기도 뒤늦게 고백한 건 죽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자긴 이제 어느 정도 세상을 알았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지도 몰랐다. 자기가 그렇게 순수한 존재인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사진 있어? 댁하고 같이 찍은 거.”
“잠깐, 갑자기 그건 왜?”
“당연히 궁금하니까 그러지. 댁 손가락에 있는 반지 하나가지곤 감을 잡기 힘들거든.”
“그러니까 무슨 감…잠깐만 있어 봐. 찾아볼 테니까.”
미래한테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혁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틀림없이 미래한테 보여주려 찾고있는 사진인데, 승혁 자신이 그걸 보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이 손가락에 낀 반지는 나름대로 승혁이 정말 진지하게 골랐던 거였다. 그럴 가치가 있는 여성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승혁은, 드디어 그 사진을 찾아냈다.
“…찾았다.”
라고 말하면서도, 승혁은 미래한테 그걸 보여주는 대신 자기가 먼저 그 사진을 빤히 쳐다봤다. 가만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사진이었다. 대략 반년 전쯤에 찍었을까. 고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승혁은 그 때도 자기가 이렇게 빨리 가정을 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사진 속에서, 둘은 웃고 있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웃고 있는 건 그 아이뿐이었고, 승혁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이었다. 자기가 잘 웃지 못한다는 건 승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땐 기뻐서 평소보다 더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
“뭐야. 혼자 보려고? 어디 보자. 이야, 엄청 참하게 생겼네. 댁이 반할 만한데?”
“그렇지?”
자기도 모르게, 승혁은 혼자 이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자기한테는 분에 넘칠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학생시절부터 지금껏, 승혁은 그걸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었다.
승혁은 그런 사람을 그따위 놈들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사회에서 알아주는 신분인데도, 바로 그 자리에선 그런 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 때, 갑자기 승혁한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아이가 무사히 어딘가에 있다고 치자. 어떻게든 살아남아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 치자. ‘이런 모습’을 보면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저 놈들의 굴욕에 물든 모습을 보고, 그 아이는 괜히 슬퍼하고 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승혁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단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승혁은 이를 꽉 물고 있었다. 우는 것만은 싫었다. 약하게 보이는 것만은 싫었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그것도 눈앞에 누가 있을 때 보이고 싶진 않았다.
“댁도 참, 아직 어리다니까.”
갑자기 앞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눈앞이 갑자기 새까매졌다. 그와 함께 사람 특유의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힘든 게 있으면 그냥 울면 돼. 댁은 자존심이 너무 세단 말이야. 자기 마음을 보여주는 게 그렇게 무서워? 누가 댁을 무시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
“뭐, 왜인지는 알겠어. 그거야 짐작도 되지. 암튼 댁은 지금 울어도 돼. 내가 모처럼 이렇게 해주고 있잖아.”
“아니, 그러니까…”
승혁은 그 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기엔 미래가 여성이란 까닭도 있었다. 아무리 연애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한들, 일단 기혼자 입장에서 이런 건 조금 민망한 일이었다. 이제와서 여성한테 껴안기는 걸 갖고 두근댈 신분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사실은 더 중요한 까닭이 있었다. 승혁은 지금껏 운 적이 무척 드물었다. 특히 어른이 되어 회사에 들어간 뒤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자기가 우는 모습같은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자기가 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 한들, 자기는 울고싶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이 쓰라려도, 승혁은 여기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뭐야, 자존심이 있어서 안 울겠단 거야? 뭐, 꼭 울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자리를 깔아줬는데…”
“시끄러.”
“어, 어쩐지 나한테 고맙단 느낌이 묻어나는데? 울진 않겠지만 고맙다 이건가?”
“시끄럽다고 했지. 아무튼…”
그 말과 함께, 승혁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어떻게든 참았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 세상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울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혔다. 절대 눈물을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다. 자기는 지금 울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짐승처럼 누군가한테 안겨 울고싶다 한들, 승혁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자기는 약해지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승혁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가, 바로 이거, 그러니까 미래의 품에 안기는 것뿐이었다.

“있잖아. 댁이 지금 이렇게밖에 못 하는 건 알겠는데.”
“…그런데?”
“일단 다른 사람들은 좀 믿지 그래? 그러니까 오늘 만난 친구들.”
“갑자기 또 무슨 소리…”
“설마 댁 혼자서 다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진호라도 못 해. 이럴 때 남의 도움을 받아야지. 모처럼 친구들도 많이 모였는데.”
“그러니까 왜 그런 걸…”
“내가 아는 전자생명체가 이런 말을 했는데 말이야.”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마치 친구한테 들은 얘기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항상 그렇지만, 이 여자의 속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우리한텐 제각기 목적이 있는 거야. 그게 무슨 목적인지는 그 사람만 알지만, 아무튼 그걸 해결하면 끝나는 게임을 다같이 하고있는 거지. 물론 댁한테도 있고, 나한테도 있어. 그리고 댁의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힘을 지닌 이를 누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댁이 남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댁은 노을이랑 게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원래 게임 잘 안 하는 성격이지? 생각보다 재밌단 생각쯤은 하지 않았나?”
“그럼 어쩔 건데?”
“암튼 이럴 때도 센 척한다니까. 댁은 지금껏 게임을 자기랑 상관없는 거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안 그렇단 말이야. 게임 덕분에 깨달은 삶의 진리도 없진 않지? 게다가 댁이 그만큼 높은 점수를 낸 것도 노을이라는 천재가 있어서였을 거고.”
“하고싶은 말이 뭐야?”
이 말에, 미래는 기다렸단 듯 씩 웃어보였다. 드디어 자기가 하고싶은 말에 다다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으로 배울 수 있는 걸 좀 응용해보잔 말이야. 모처럼 새 친구들이 잔뜩 생겼는데, 그 친구들한테 도와달라고 말하지 그래? 댁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게 혼자 발버둥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물론 댁이 싫음 그만이지만.”
승혁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자기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같았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힘을 빌리는 게, 혼자 애쓰는 것보다 더 빨리 먹힐 터였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승혁은 지금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우리는 제각기 게임을 하고있는 거야.
승혁은 며칠동안 했던 그 게임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껏 게임과 인연이 없다 여긴 승혁이었지만, 이 ‘이상한 일상’ 동안 게임에서 배운 게 없진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 혼자서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없단 건 이미 몸으로 배운 바 있었다. 세상엔 자기 혼자 발버둥쳐선 안 되는 일이 있단 걸, 승혁은 그 때 깨달은 것이다. 분한 일이긴 하지만.
“왜,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어려워? 뭐, 댁이라면 힘들겠지만…”
“아니, 그러지.”
“진짜? 웬일로?”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튼 솔직하지 못해선. 모처럼 특이점에 왔는데 좀 즐기는 게 어때? 여기선 댁이 생각지도 못한 온갖 가능성하고 만날 수 있잖아. 댁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 말이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미래는 전혀 승혁한테 질린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니 변명은 됐으니 앞으론 그렇게 해보자고’에 가까운 말로 들렸다. 그것도 장난에 가까운 듯한 느낌.
정말로 지금 자기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좀 더 목적지에 가까워진다면.
너무나 오랜만에 남의 손을 빌려야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여전히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전처럼 혼자서 모두 하고 싶었다. 오늘 만난 그 ‘친구’들이 싫단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분해서 견디지 못할 만큼, 승혁은 이 ‘현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