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뭐라고?”
이제 밤도 깊어질 무렵.
승혁은 그 ‘새로운 친구’한테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에 관한 얘길 듣고 있었다. 물론 승혁만 여기에 있는 건 아니었다. 미래를 비롯해, 지금껏 모인 ‘친구’들이 병실 여기저기 앉은 채 여자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 그건 괴물이고, 난 그걸 처치하러 왔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승혁은 그 말과 함께, 자기 이마를 짚고 싶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오늘은 정말 무슨 날인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 일’ 뒤부터 자기한테 뭔가 씐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런 걸 안 믿는 승혁이라 한들,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이 하룻동안 연달아 일어나면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을 굳이 정리하자면 이랬다. 갑자기 자칭흡혈귀가 나타나 유사세계니 뭐니란 말을 하더니,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 뒤엔 아이템팔이라는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이번엔 증강현실이라도 되는 듯한 괴물과 그 괴물을 처치한 여자애가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지금껏 상식 그 자체인 삶을 살아왔던 승혁한테,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하면 승혁은 ‘정말 중요한 문제’를 두 개나 까먹고 있지 않았던가.
“뭐야, 왜 자기만 혼자 불구덩이 속에 빠진 표정짓고 있어?”
“그게 누구 탓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적어도 내 탓은 아닌 거 같은데. 엉뚱한 데 화풀이하지 말고 얘기나 들어, 이 친구야.”
“이게 진짜…”
미래의 핀잔을 들으며, 승혁은 이를 갈았다. 사실, 정말 미래 탓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사세게 탓도 아니었다. 모든 건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만약 이 일이 일어나기 전 자기한테 말했다간 코웃음쳐질 바로 그 현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미래는 승혁을 무시한 채, 그 긴머리 여자애한테 말을 걸었다. 이렇게 가만히 보면, 여자애는 참 단정하면서도 감정표현이 서툰 느낌이었다. 아마 10대 후반쯤으로 보였지만, 그 나이 또래의 밝고 산뜻한 느낌이 조금 떨어졌다. 굳이 말하자면, 학교에서도 말이 없고 항상 조용히 있지만 존재감은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주는 긴머리 여자애는, 잠시 생각하다 담담하게 이런 말을 뱉었다. 승혁은 물론,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없어.”
“뭐?!”
이 말도 안 되는 말에, 승혁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놀랐다. 미래도 이건 짐작치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없다니, 그런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하물며 아까 그 괴물이라 할지라도.
“자, 잠깐. 그럼 아까 그 괴물은?”
“없어.”
“거짓말이지?!”
이제 미래는 몸까지 일으킨 채 이렇게 묻고 있었다. 아무리 미래라 할지라도 모든 유사세계를 아는 건 아닌 듯했다. 그거야 대충 듣기만 해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말 없어. 그냥 이름없는 괴물.”
“…그럼 너는?”
“나는 말하면 안 돼.”
“아, 그런 거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미래는 무척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건 승혁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없단 게 너무나 낯선 개념이라서,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조금 잔 다음에 다시 생각하면 안 될까. 이미 한 번 잤는데도, 승혁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네 그거. 이름없는 괴물사냥꾼. 이렇게 부르면 어때?”
“그건 너무 긴 거 같은데요.”
“그런가? 그럼 사냥꾼.”
“잠깐. 저 애 생각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미래와 맹호가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자, 승혁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이렇게 멋대로 얘기가 이뤄져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긴머리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다들 그렇게 불러.”
“자기 이름이 없는데 괜찮다고?”
“어차피 말하면 안 되니까.”
승혁은 이제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미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래는 어쩐지 그게 아쉽단 듯, 잠시 생각하다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그렇다고 사냥꾼이라 말하는 것도 재미는 없지. 그럼 내가 이름 지어줘도 될까? 여기서만 불러도 되는.”
“뭔데?”
“어…이제 봄이니까 꽃잎 어때? 맘에 들어?”
“난 상관없어.”
이렇게 해서 자칭 사냥꾼 여자애의 이름은 꽃잎으로 굳어졌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승혁은 더더욱 뭐라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쁜 일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제 승혁은 얼마나 비현실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담담할 것 같았다. 며칠, 특히 오늘 승혁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깟 비현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임이라도 할까.
참으로 오랜만에, 승혁은 ‘스스로’ 게임을 할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비현실에서 고개를 돌리려면 그런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야 뭔가 좀 가라앉은 것 같자, 승혁은 핸드폰을 꺼내 미래가 그렇게 노래부르던 라마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듯한 꽃잎은 미래한테 뭐라 묻고 있었지만, 지금 승혁한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게임 속에 빠져있으면, 자기한테 닥친 모든 일들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자기 모습조차 그랬다. 지금껏 한 번도 게임을 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은 적이 없단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게임에 빠져들었다.
게임을 하다 문득, 승혁은 세상이 참 아름답단 생각을 했다. 물론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멍하니 눈길을 달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바쁘게 사느라 세상이 흘러가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한 승혁한테는, 어느덧 해가 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해가 뜨는 광경조차 신기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불어대는 비바람, 눈송이, 그리고 자연의 소리들. 아무 생각없이 넘겨왔던 별 것 아닌 것들이, 오늘따라 승혁의 마음 속 깊이 와닿는 것 같았다.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참으로 뜬금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게임에 빠져들어 아무 생각이 안 들 때도 가끔 그런 느낌에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었다. 굉장히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이런 꼴이 되고 나서야 승혁은 세상이 아름답단 걸 새삼스레 깨달았던 것이다.
이 세상이 이렇게나 평화로운 곳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승혁은 반쯤 어이없어졌다. 진짜 자기는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게임 너머는 너무나 평화로워서였다. 다들 이런 생각으로 게임을 하는 걸까. 그동안 게임과 담을 쌓아왔던 승혁한테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승혁이 그런 식으로 아무 생각없이 게임에만 빠져있을 때였다.
“자, 잠시만요!”
“이번엔 또 뭐야?!”
또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이젠 더 이상 찾아올 사람도 없겠지, 란 생각과 함께.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는 데, 그리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저, 저건 또 뭐…?”
아까처럼 일그러진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들어온다기보다 ‘태워진 채’ 오고 있다 말하는 게 더 맞았다. 창문 너머로 나타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휠체어였던 것이다. 여긴 병원이니 저걸 보는 게 낯선 일도 아니었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이 특이점에서 휠체어를 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일이었다.
게다가, 휠체어 뒤엔 그걸 밀고 들어오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금…어?”
그 사람,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여자애는 멍한 표정으로 병실 안을 살피고 있었다. 물론, 병실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있었다. 이제 좀 쉬려 했는데 또 다른 일이 일어났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희한한 건 휠체어에 앉아있는 젊은 남성이었다.
남성은 어느 정도 몸집이 있었는데, 대략 보기에 승혁과 비슷한 나잇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성격도 비슷한 것 같았다. 자기 특유의 빈틈없는 성격이 이 남자한테도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어쩐지 전문직, 특히 의료관련 일을 하고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가느다란 은빛테 안경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이 남성이 눈에 띄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이 패드는 뭐야?”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남자의 팔엔 큰 글자가 적힌 패드가 들려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걸 본 뒤 자세히 살피면, 이 남자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일단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눈은 깜박이고 있었지만, 그걸 빼곤 마치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또 무슨 유사세계란 말인가. 승혁이 그렇게 생각할 즈음, 갑자기 패드에서 글자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이 말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내가 더 묻고 싶은데. 눈앞의 이 계집은 뭐지?’
“…뭐?”
순간, 승혁은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을 눈앞에서 들은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뭐라고? 지금 저 사람한테 난 어떻게 보이는 거지?
하지만, 남자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보이나? 그 잘난 척하는 계집은 누구냐고. 내가 이렇게 사는 데 그렇게 불만이 있나보지?’
그걸 보자, 승혁은 머릿속이 텅 비는 걸 느꼈다. 뭔가 무척 큰 오해가 생겼단 건 알았지만, 그 뒤로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지금 누구와 같은 취급을 받았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단 말인가.
“야, 왜 그래?”
미래가 자기 어깨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지만, 승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기는 자기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회사에서 작은 실수를 하는 것보다도, 길을 가다 잠시 발을 헛디뎠을 때도, 승혁은 이렇게 자기가 무너질 만큼 비참하다 느껴진 적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