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10. 이상한 유사세계의 음식점

“아이템…담당?”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채, 승혁은 이렇게 물었다. 아이템이라니, 게임에서 말하는 그 아이템이란 말인가. 그게 무엇이든 승혁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 틀림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분도 있고, 아이템팔이라 하는 분들도 있죠. 이 유사세계가 조금 특이한 것 같아서 찾아왔는데, 아무튼 하나 어떠세요?”
“자, 잠깐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승혁이 미래를 보며 이렇게 묻자, 미래는 오랜만에 본다는 듯 그 여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이내 그 아이템팔이란 여자를 꼭 껴안았다.
“진짜 오랜만인데. 아직도 장사하는 거야?”
“저야 이게 해야 할 일인 걸요. 미래 씨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당연하지. 여기선 좀 일이 있었지만.”
“아,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네요?”
“그럼. 이 특이한 느낌만 봐도 알 거 같잖아.”
미래와 여자의 이야기에 따라가지 못한 채, 승혁과 그 밖의 아이들은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걸 좀 설명해줄 수 없을까. 마치 자기만 남기고 세상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잠깐. 사람 말 좀 들으라고.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다른 유사세계에서 온 아이템파는 친구지.”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거야?”
“알았대도. 지금부터 말하면 되잖아. 거 참, 성질도 급해요.”
“이게 진짜…”
승혁이 화내거나 말거나, 미래는 이 상황을 짧게 이야기했다. 다들 알다시피 유사세계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 중 자기와 비슷한 ‘감각’을 지닌 친구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자기 세계에서도 온갖 묘한 아이템을 파는데, 요즘엔 ‘감각’을 지닌 다른 유사세계 사람들하고도 거래하는 듯했다. 물론 미래는 자기도 그 주고객 중 하나라며,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어깨를 펴곤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아이템이야?”
“한 번 보실래요? 이걸로 말하자면 시간을 10초쯤 멈출 수 있는…”
“아, 아니. 괜찮으니까 가만히 계세요.”
다짜고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승혁은 얼른 말을 멈추게 했다. 대체 이 유사세계는 얼마나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각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걸까.
그 때, 미래가 갑자기 더 뜬금없는 말을 꺼내놓았다. 그것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란 듯한 말투로.
“야, 우리 쟤네 유사세계 구경 안 갈래? 어차피 조금만 있음 저녁인데.”
“어딜 가자고?!”
승혁은 입을 딱 벌렸지만, 미래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왜 지금 이걸 떠올렸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사세계가 무슨 이웃동네 마실다니는 것도 아니고, 왜 이 여자는 갑작스런 말을 이렇게 자주 꺼낸단 말인가.
하지만 미래는 승혁의 생각엔 별 관심없단 듯, 자길 아이템담당이라 일컫는 여성과 얘길 주고받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지금 당장은 좀 재미없고, 좀 잔 다음에 가지. 저 친구가 다니는 골목에 재밌는 게 많거든. 밤이 더 시끄러운 동네 맞지?”
“네. 그렇다고 위험하진 않아요. 겉으로 드러내기 좀 어려운 곳도 몇몇 있지만…”
“저희가 가도 괜찮을까요?”
“아, 학생이세요? 괜찮아요. 겉으로 드러내기 어렵단 건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맹호가 조심스레 묻자, 여성은 이렇게 대답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미래와 달리, 이 여성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저 나잇대로 느껴졌다.
“그럼 가보자. 나도 무지 신기한데, 그지?”
“뭐, 뭐 그럼…”
“언니. 우리 재밌는 데 가는 거야?”
“그, 글쎄다…”
이젠 노을까지 자기 어깨를 잡고 이렇게 물어오는 바람에, 승혁은 고작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 삶이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란 생각은 이제 질려서 들지도 않았다.

그 뒤 생각하는 것도 지겨워져서, 승혁은 곧바로 침대에 누운 채 잠이 들었다. 낮에 잠들다니 얼마나 오랜만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물론, 그 잠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나 잤을까, 미래가 이런 말과 함께 승혁을 흔들어깨운 것이다. 그것도 무척 세게.
“야, 일어나 좀. 이제 저녁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벌써?”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잠시 잠든다 한 것이 네 시간을 넘길 줄은 몰라서였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다가 일어난 아이도 있었고, 뭔가 열심히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아이템팔이라 자기를 일컫는 여성과 솔이는 뭔가 무척 재밌는 걸 얘기하고 있는지, 둘 다 입 쉴 틈도 없이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럼. 잠꾸러기는 내버려두고 갈까하다 내가 착해서 이렇게 깨우는 거지. 아무튼 얼른 일어나.”
“누가 착하다고?”
어이없어하면서도, 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을 보니 벌써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렇게 오래 잤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 맞다. 나도 옷차림 좀 다시 해야지. 이렇게만 가면 재미없잖아. 잠깐만 기다려.”
“야, 너야말로 사람 말 좀…”
승혁이 부르거나 말거나, 미래는 그 말과 함께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떨어졌다기보다, 그야말로 ‘사라졌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승혁은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저 너머로 사라졌던 미래는, 잠시 뒤 뭔가 묵직한 걸 들고 나타났다. 게다가 묵직한 것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뭔가 둘러입고 있었다.
그건, 뒤에 흰색 궁서체로 ‘야생’이라고 또렷하게 적힌 검정 패딩이었다.
“…그건 뭐야?”
“뭐긴 뭐야. 야생이란 증거지.”
“지금 나랑 장난해?”
“이래뵈도 공식에서 낸 건데…”
“무슨 공식이야?!”
승혁이 화내거나 말거나, 미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옷이 표준장비라도 되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승혁이라면 절대 저런 걸 두르고 밖에 나가지 않겠지만, 저 망할 야생흡혈귀는 다른 듯했다.
게다가 미래는 승혁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신경쓰지 않겠단 듯이, 자기가 들고 온 짐, 즉 옷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잠시 그걸 보던 승혁은, 저 옷이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그건 누가 입으라고 가지고 온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댁이지.”
“…나라고?”
잠깐 가만히 있던 승혁은, 문득 자기가 입고있는 게 환자복이란 걸 오랜만에 깨달았다. 그야 이런 모습으로 밖에 나돌아다니면 이상한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승혁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유사세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물어. 그 모습 그대로겠지.”
“왜 그렇게 되는 거야?!”
“그냥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또 설명해줘야 돼?”
미래의 말에, 승혁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보다 유사세계에 관해 잘 아는 건 당연히 눈앞에 있는 이 흡혈귀였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구조이든, 승혁은 미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댁은 지금, 이 유사세계에 얽매여있는 거야. 물론 그 놈들 탓이지. 그러니까 댁 세계가 아닌 이상, 댁은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어. 억울하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지. 느리겠지만.”
“잠깐, 설마 노을이도 그래?”
“그럼. 내가 말했지. 여긴 지금 무척 특이하게 묶여있다고. 둘 다 영향을 받고있는 거야. 그걸 다시 말하자면.”
미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뗐다. 마치 승혁한테 벌이라도 내리는 듯한 묘한 말투였다.
“댁하고 노을이가 원래 모습으로 같이 있는 건 무척 어렵단 말이지. 물론 이 특이점이 어떻게든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진 그래.”

잠시 뒤.
“어때, 옷은 대충 맞아?”
“맞긴 맞는데, 이거 댁 옷이라면서?”
“그래. 내가 공짜로 빌려주는데, 불만있어?”
자신만만한 미래의 목소리에, 승혁은 또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지금 자기가 입고있는 건 회색 스웨터에 검정바지라는 참으로 담백한 옷차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여자의 옷을 빌려입는다는 게 무척 묘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설마 환자복으로 밖에 나가려고 했던 건 아니지? 이쯤이면 딱 맞네. 아주 좋아.”
“여긴 비워도 괜찮은 건가?”
“그야 당연하지. 그 놈들이 수를 써놨을 테니까. 댁을 여기에 가두려고 이런 자리를 만들었을 텐데, 그게 깨지면 번거롭지 않겠어?”
그 말을 듣자, 승혁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비현실에 가까운 상황에 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미래 말대로, 정말 이게 ‘실제 세상’이었단 말인가. 자기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세상은 알고 보니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잠기기도 전에, 미래가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처럼 그 창가를 ‘넘어’ 다른 유사세계로 가려고 한다는 걸, 승혁은 바로 알아챘다.
“아, 여기엔 모르는 친구들이 많지? 별 거 아냐. 그냥 창문을 훌쩍 넘으면 돼. 그럼 가는 거니까.”
“감각이 없는 애들은 어쩌란 거야?”
“감각이 있는 친구의 손을 잡으면 되지. 일단 감각이 있는 사람이 한 번 길을 만들어주면, 솔직히 감각이 없더라도 넘어오기 어렵진 않을 거야.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나 참…”
그 말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승혁은 조심스레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껏 비현실에 가까운 일은 수도없이 겪었지만, 이렇게 ‘죽을 각오로’ 비현실을 겪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이대로 넘어가도 된단 말인가. 정말 이대로 넘어가도 그대로 떨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승혁이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먼저 움직인 건 미래였다.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등 뒤에 있는 ‘야생’이란 큰 글씨를 휘날리며 창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곤 아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그럼 저도 먼저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아이템팔이란 여성도 그 말과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가더니,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들 멍하니 있는 동안, 새별이 맹호와 솔이의 팔을 이끌고는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괘, 괜찮을까?”
“응. 나 알 거 같애. 괜찮아.”
“새별이가 괜찮음 나도 괜찮은데…맹호는 무서워?”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어…”
라고 말하는 사이 셋 다 창문 너머로 사라졌기에, 남은 건 노을과 승혁뿐이었다. 이거 정말 믿어도 되나. 승혁은 자기가 놓인 상황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언니, 우리도 가자.”
노을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승혁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노을은 아직 어린아이기에 이런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승혁의 생각이긴 했지만.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더 어린아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승혁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승혁은 창문 난간에 다리를 걸쳤다. 일단 어른인 자기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겠단 생각에서였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창문 난간에 다리를 걸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걸치는 것 자체야 쉽지만, 걸친 다음이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혁은, 지금 자기가 알아서 죽으러 가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바깥을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아랫세상이 펼쳐져있었다. 하늘은 조금씩 저물고 있었지만, 그 하늘조차 유난히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2월 말의 거센 바람이 승혁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고소공포증이 없는 승혁이라 한들, 여기서 ‘뛰어내리는’ 건 조금 생각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잇. 될 대로 되라지.
결국 그 생각과 함께, 승혁은 난간에서 다리를 떼어놓았다. 잠시동안 믿기 어려울 만큼 무중력에 가까운 느낌이 승혁을 감쌌다. 혹시 떨어지지나 않을까, 란 생각에 텅 빈 발 아래의 느낌을 맛보던 순간.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승혁은 ‘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듯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자, 틀림없이 병원 창가에 앉아있었을 승혁의 눈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저녁즈음이란 건 그대로였지만, 이 주위는 도무지 병원이라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병원 이전에 여기는 길이 여기저기 배배꼬인 뒷골목이었다.
설마 여기가 그 ‘유사세계’ 중 하나인가.
“언니, 여기 어디야?”
그 때, 승혁은 등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단 걸 깨달았다. 아니, 이건 낯설다기보다 어색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목소리를 들은 건 바로 오늘이었다. 바로 오늘 그런 목소리를 들었기에, 승혁은 세계군이니 유사세계니 야생이니 뭐니하는 말을 하루종일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등 뒤에 있는 사람은.
“아, 여기선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노을’도 그걸 알아챘는지, 바로 뒤에서 이상하단 말투로 이렇게 물어왔다. 승혁도 뭐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가자. 어디든…”
“아, 이제 온 거야?”
바로 근처에 있는 수상쩍은 가게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승혁은 무심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짐작대로 거기엔 고개만 빼꼼 내민 미래가 있었다. 그걸 볼 때, 아마 먼저 온 다른 이들은 모두 저 가게 안에 있는 듯했다.
“여기야 여기. 오늘 가려고 했던 데가.”
“먼저 나와서 기다릴 순 없어?”
“미안. 나도 뭐 시키느라 까먹었거든.”
“시켰다고?”
“그럼. 음식점에서 먹을 걸 시키지 뭘 시켜?”
너무나 당연하단 듯 그렇게 말하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짜고짜 음식점이라니, 왜 이런 데 와있단 말인가. 물론 다른 데에 있어도 비슷한 말을 했겠지만.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픈 느낌인데.
점심도 제대로 안 먹은 승혁이니, 이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픈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이것까지 생각하고 이리로 오자고 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그 알 수 없는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미처 간판을 볼 생각도 하지못한 채.

“어머. 미래 친구들이야?”
승혁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들려온 건 처음 듣는 20대 중후반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물론 그게 미래 및 아이템팔이 여성이 아는 사람이란 건 안 물어도 뻔했다.
“그럼. 내가 오늘 얼마나 희한한 일을 겪었는데. 니들도 보면 알 거 아냐. 유사세계 중 하나가 엄청 희한해진 거.”
“아, 두 개가 하나로 묶인 걸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런 짓을 저지른 놈들이 누군지 안 말해도 알겠지?”
거기까지 들은 뒤 승혁이 본 건, ‘그거야 뭐’라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20대 중후반 여성들이었다. 대략 네다섯 명쯤 될까. 말하는 것만 보면 미래와 거의 동갑인 것 같았다. 여성들은 모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여기가 유사세계다’란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음식점 안은 지극히 현대적인 느낌이었는데, 나무무늬 벽이나 가라앉은 불빛이 그런 가게에 사람느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여성들을 빼고 안에 승혁이 아는 사람밖에 없는 걸 봐서, 그리 붐비는 가게는 아닌 듯했다. 대체 여긴 뭘 파는 데지. 음식점이라면 있을 메뉴판조차 벽에 붙어있지 않았다. 나무로 된 동그란 탁자를 봐도 메뉴판처럼 보이는 건 얹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걸 보고 있던 자칭 아이템담당 여성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뭘 좀 먹을까요? 이 분들 얘기만 죽 하느라 저도 까먹었는데…”
“아, 그럼 아이템담당 댁이 쏘는 거지?”
“저도 요즘 지갑사정이 안 좋아서…싸게 해주실 거죠?”
“어유. 이렇게 나왔네. 뭐, 일단 보고 정하지.”
여성 중 가장 싹싹하게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다시 여길 뒤돌아봤다. 마치 중요한 것 하나를 깜박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근데 먼저 먹을 친구는 누구지?”
“아, 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래는 곧바로 승혁을 가리켰다. 너무나 모든 게 빠르게 이뤄졌기에, 승혁은 자기가 손가락질당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 아무 거나 해줘도 되는 거야?”
“뭐, 여기서 해줄 게 별 거 있어? 하던대로 해. 처음 온 손님이니까.”
“그럼 다른 친구들은? 같이 해줄까?”
“이왕하는 거 같이 해 줘. 대신 이 친구 먼저.”
“잠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자기를 내버려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여성진을 보며, 승혁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마치 커다란 음모에라도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여성진들이 안쪽으로 사라진 동안, 승혁은 반쯤 억지로 테이블 앞에 앉아 그 요리란 걸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짜잔. 뒷그늘 최고의 별미 중 하나인 치즈라면…뭐야, 얘 표정이 왜 이래?”
“이런 걸 처음 봤으니 그렇겠지. 니들도 좀 알아줘라.”
“…치, 치즈라면?”
드디어 그 알 수 없던 요리의 이름을 알자, 승혁은 고작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데려와놓고서 먹는 게 고작 치즈라면이란 말인가. 물론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지만, 승혁은 김이 빠지는 걸 느꼈다.
“뭐야, 지금 라면 무시하는 거야?”
“여긴 대체 뭘 파는 데야? 메뉴판도 없고..”
“이런 걸 파는 데다. 불만 있냐?”
미래는 어이없단 듯, 승혁을 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가 무슨 여기 주인이라도 되나. 어이없어하면서도, 승혁은 눈앞에 있는 치즈라면 그릇을 빤히 쳐다봤다.
일단, 라면 자체는 그럭저럭 잘 끓여져 있었다. 고들고들한 면 위에 가루형 치즈가 부어져 있었는데, 평소 그다지 라면을 안 먹는 승혁한테도 어느 정도 맛있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건더기도 꽤 괜찮아보였는데, 버섯에 파같은 것들이 꽤 큼직하게 들어가있었다. 고작 라면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기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끓였단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승혁이 먹을 일은 없었겠지만.
그런데, 승혁은 그 라면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다지 라면을 안 먹는 자기가 할 말은 아니지만, 뭔가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하나가 뭔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승혁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뭔가 다른 게 하나 놓였다.
그건 지금껏 승혁이 왜 없는지 생각하고 있었던 달걀 두 알이었다. 그것도 껍질이 까여진 달걀. 짐작하건대, 아마 저 달걀은 두 알 다 반숙인 듯했다.
“이걸 같이 먹으라는 거야?”
“그럼 왜 줬겠어? 여기선 이렇게 먹는 거야. 따로 안 말하면.”
“근데 그걸 왜 니가 멋대로 결정해?!”
“처음엔 이렇게 먹는 게 맛있으니까 그렇지. 일단 먹은 다음 말해도 되지 않겠어?”
결국 미래의 말에 떠밀리듯이, 승혁은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튼 지금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고, 이걸 먹어서 큰일이 날 리도 없으리라 여겨서였다. 일단 면을 먹어보니, 눈으로 봤던 것처럼 꼬들꼬들한 느낌이 썩 괜찮았다.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마셔보니, 이것도 꽤 괜찮은 맛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저 반숙달걀인가.
승혁은 잠시 생각하다, 옆에 있던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 그대로 반숙달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반으로 가르고 나서, 한쪽은 다른 달걀이 있는 곳에 마저 놓고, 다른 한쪽을 그릇 안에 떨어뜨렸다.
그 다음, 승혁은 젓가락으로 면과 반숙달걀을 같이 집은 뒤, 그대로 입에 넣었다. 물론 반숙달걀까지 젓가락으로 집는 건 쉽지 않아서 한 번 떨어뜨린 뒤 다시 입에 넣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라면을 먹어보니.
…맛있는데.
묘하게 분하긴 했지만, 결국 승혁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반숙달걀과 치즈라면은 잘 어울린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마치 달걀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면을 그다지 안 좋아하는 승혁이었지만, 이거라면 가끔은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그 때였다.
“야, 얘 은근 귀엽다. 어떻게 안 거야?”
“자, 잠깐. 뭐라고?!”
승혁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등 뒤에선 누가 껴안는 듯한 느낌이 틀림없이 전해져왔다. 아니, 껴안는다기보다 밀어닥쳤다 하는 것이 더 알맞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승혁은 ‘덮쳤다’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만큼 뒤에 있는 사람이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니, 어쩐지 귀여워보이지 않냐? 달걀 갈라서 먹는 게 그, 다람쥐같은 느낌이…”
“내 어디가?!”
승혁이 소리지르거나 말거나, 그 주인처럼 보이는 여성은 팔을 풀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이 여성뿐만 아니라, 가게에서 일하는 걸로 보이는 다른 여성들까지 승혁을 감쌌다.
“야, 미래 너도 괜찮은 애를 데려왔는데? 어쩐지 엄청 귀여워보이지 않아?”
“내 말이 그거라니까. 그, 묘하게 서민하고 다른 느낌? 근데 그게 귀엽다 이거지.”
“야야, 귀엽단 말만 너무했다. 사랑스럽단 말도 같이 해야지.”
“아, 그런가?”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승혁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누가 말해줄 수 있다면 말해달라 조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래 및 아이템담당이라 하는 여성은 자길 아주 재밌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 즉 노을과 그 밖의 아이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승혁을 보고 있었다. 노을은 특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근데 지금 언니 칭찬받는 거야?’같은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어른스런 모습으로.
아니,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전히 여성들한테 둘러싸인 상황에서, 승혁은 진심으로 머리를 싸매고 싶어졌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럴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