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이제 게임을 해볼까?”
잠시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다, 갑자기 미래가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승혁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미래를 쳐다봤다.
“무슨 게임을 해?”
“게임하고 있었다매. 핸드폰으로.”
“이런 상황에서 게임을 하자고?”
“그럼 그걸 하지, 뭘 해?”
미래의 말에, 승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래 말대로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승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래 말대로 정말 ‘게임이나 하는’ 것뿐이었다.
“노을이 말을 들으니 아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던데. 무슨 게임인지 구경이나 하자 야.”
“자, 잠깐만. 갑자기 또 무슨 소릴…”
“그럼 언니도 라마랑 놀자. 응?”
“그걸 하겠다고?!”
이제 상황은 승혁이 손쓸 수 없는 데로 굴러가고 있었다. 정말 이래도 된단 말인가. 아무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들, 다시 게임이나 하며 지내자니.
하지만 이것 말고,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승혁은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승혁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병실 안에서 죽 있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승혁이 가만히 앉아서 ‘영웅’이 모든 걸 해결해주길 기다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도움이 되는 거라면, 우습게도 게임일 터였다. 게임은 병실 안에서도 할 수 있고, 미래가 말한 대로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뭔가를 깨달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럴지는 승혁도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어린 노을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뭐라도 하기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건 굳이 말하자면 게임이었다.
“그럼 맘대로 하든가.”
“아싸. 언니한테 무슨 게임인지 말해줄래?”
“응, 이런 게임인데…”
이제 미래는 승혁의 말을 들을 생각도 않은 채, 노을과 함께 게임 이야기에 푹 빠져있었다. 아무튼 이 번거로운 여자도 참. 어이없어하며 다른 곳을 돌아본 승혁은, 문득 자길 빤히 보고있는 호랑이귀 여자애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를 제대로 본 거 이번이 처음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승혁은 묘하게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듯한 그 여자애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가만히 보면, 노을만큼이나 순수하게 느껴지는 아이였다. 아마 아는 사이인 듯한 맹호와 솔이만큼이나 별 거 아닌 옷을 입고 있었지만(흰 티셔츠에 헐렁한 갈색바지), 위에 쫑긋 솟은 호랑이귀 때문인지 그 존재가 더 독특하게 느껴졌다. 아까 맹호란 남학생이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라 들었으니, 아마 이 아이도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왜 맹호와 달리 호랑이귀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그렇고, 이 애는 무슨 이름이지.
승혁 자신이 놀랄 만큼, 지금껏 거기에 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맹호와 솔이의 이름은 들었지만, 이 아이의 이름은 아직 몰랐다. 사실, 승혁은 맹호 일행과 이 아이가 어떤 관계인지, 앞뒤상황은 어떻게 된 건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일단 호랑이귀 여자애 몸에서 산 속 특유의 냄새가 나는 걸 보아, 이 셋이 산속에 있었던 건 틀림없는 듯했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참 빨리도 묻는다. 진작 궁금해했어야지.”
“넌 그냥 게임이나 해. 알았어?!”
“게임 무시하지 마. 이 자식아!”
그 말과 함께 자기한테 날아온 방석을 붙잡으며, 승혁은 다시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물론 승혁도 이제 게임을 가볍게만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 말이 방석을 날릴 정도로 심했단 말인가. 저 야생흡혈귀라 하는 이상한 여자는 그렇게 여겼던 것 같지만.
“아,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런 둘을 보고있는 게 좀 그랬는지, 맹호가 다시 둘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현직 고등학생이란 게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존재감에 반쯤 기가 눌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승혁은 ‘그럼 그렇게 할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얘는 제 친척…이라고 할까 아무튼 저와 동류인데…”
“응? 나 아빠 딸 아니었어?”
“아니, 그러니까 그건 뒤에 말하기로 했잖아. 그건 그렇고…”
진땀을 빼며 말을 이어가는 맹호를 보며, 승혁은 속으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기만큼이나 말하기 어려운 일이란 건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같이 지내는 애인데, 이름은 김새별이라고 해요. 아, 저랑 솔이는 원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지금 겨울방학이라서 솔이네 집에 다시 돌아왔고, 어…”
“겨울? 그 옷차림으로 괜찮겠어?”
“아, 저랑 새별이는요. 솔이는 오면서 코트가 벗겨졌던가?”
“응. 근데 여기 따뜻하니까 괜찮아.”
맹호의 말에, 솔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어보였다. 이걸 보면, 저 솔이란 아이는 마치 화내는 걸 모르는 아이같았다. 아마 승혁이라면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터였다.
“맹호는 호랑이니까 추위 잘 안 타요. 겨울에도 집에선 만날 반팔이고.”
“솔이 너도 그런 걸 막 말하지 말라니까.”
“그치만 재밌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나는 좀…”
그걸 보고 있으니, 승혁은 어쩐지 이 아이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저 나이때쯤엔 저만큼 친한 친구도 없었고, 있는 친구라 한들 서로 거리를 두는 게 보통이었다. 승혁 자신이 누군가와 찰싹 붙어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이 아이들은 자기와 달랐다.
“뭐, 일이 재밌어진 건 틀림없네. 여기를 그냥 기지로 삼지 그래? 아니, 성역은 어떨까?”
“무슨 기지야? 성역은 또 뭐고?!”
“여기가 성운종합병원 809호실이었던가? 세계의 교차점씩이나 되는 곳이니 쉼터로 쓰면 좋지 않겠어? 예를 들자면 게임같은 거. 재밌고 좋잖아. 댁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고.”
“그런 말하기 전에 좀 사람이 가만히 있을 틈을 좀 주지, 나 참…”
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승혁 역시 이 병원, 특히 ‘병실’이 특이하단 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이리로 오는 간호사도 그리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시끄럽게 지내는데도 보러오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그 놈들이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여기가 ‘특이한’ 곳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고 노을이 너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
“하루.”
“진짜?!”
한편, 저 너머에선 노을과 미래가 아무렇지 않게 얘길 주고받고 있었다. 노을의 말에 놀라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 때로부터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승혁은 어쩐지 그게 한참은 더 된 옛일처럼 느껴졌다.
“마, 말도 안 돼. 이 많은 걸 한 번에 건너뛰었다고?”
“그치만 언니도 무지 잘했는데. 나도 그거 보고 배웠거든.”
“…쟤?”
노을의 말에, 미래는 눈빛으로 승혁을 가리켰다. 저 여자는 뭐가 또 불만인가. 승혁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자기 역시 그 쪽을 가만히 쳐다봤다.
“응. 내가 10까지밖에 못 갔을 때 언니가 가르쳐줬어.”
“그렇다고 하루만에 이만큼 가? 대단한데…”
“그래. 난 안 대단하다 이건가?”
“게임이나 하고 있으라매? 지금 와서 무슨 투정을…”
“뭐가 투정이야?!”
승혁이 열받아하자, 미래는 ‘쟤 또 저런다’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아마 자기도 거기까지 가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미래는 분한 듯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거 은근히 어렵잖아. 어떻게 하룻동안 여기까지 갈 수가 있어?!”
“근데 하면 됐어.”
“이씨. 천재가 그런 말하면 어떡해. 난 게임 잘 못한단 말이야. 저 엘던가 뭔가하는 놈은 왜 이렇게 빨라?!”
“게임을 못하는데 좋아한단 말인가?”
“그래, 불만있냐?”
승혁의 말에, 미래는 쏘아붙이듯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게임 세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볼을 부풀려가면서도 어떻게든 점수를 더 내려 낑낑대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조금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잘 하지도 못하는데 저렇게 푹 빠질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승혁이라면 절대 그러진 못할 것 같았다.
“근데 이거 진짜 재밌는데. 완전 라마런 아니냐, 이거?”
“넌 좀 조용히 게임할 수 없어?”
“거 참. 사람 진짜 재미없네. 사회에서 어떻게 지냈을지가 안 봐도 뻔…”
“자꾸 그러지 말라고 했지?!”
승혁이 화를 냈을 때, 갑자기 창가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금빛에 가까운 갈색 외투를 입은 영문을 알 수 없는 20대 초반 여성이 이리로 건너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또 누구야?
금발머리를 어깨까지 내린 뒤, 검은 바지에 갈색 외투를 입은 여자를 보며 승혁은 다시 한 번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설마, 라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껏 있던 일을 떠올려보면 이 여자의 정체는 하나밖에 없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아이템 하나 안 사실래요?”
“아이템?”
“네.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아이템팔이하고 있거든요.”
승혁은 그 말에,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흡혈귀에 호랑이 다음에 나타난 건, 자기를 아이템팔이라 일컫는 더 이상한 여자였던 것이다. 물론 다른 유사세계에서 왔을 게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