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8. 자유의 모순

“근데,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잠시 뒤, 승혁은 병원을 둘러보고 온 노을한테 팔이 붙잡힌 채 이런 말을 몇 번이고 듣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니 궁금한 게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얘길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닌 아이한테 그런 걸 털어놓을 순 없었다. 게다가 그 얘긴, 들어서 재밌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좀 얘기했지. 그러니까 같이 게임하는 거?”
“진짜?”
미래가 옆에서 놀리듯 말하자, 노을이 얼굴에 함박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럴까, 자기가 놓인 상황보단 ‘놀 수 있다’는 게 더 기쁜 것 같았다. 물론 자기 마음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엄마아빠랑은 언제 만나는 거야?”
“우리끼리 재밌게 놀다보면 만나게 될 거야. 그동안은 이렇게 놀면서 기다리자. 알았지?”
“응. 언니 무지 착하다.”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노을의 칭찬에 조금 으쓱해하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한텐 느린 걸음을 각오하라더니 저기선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린아이한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건 승혁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승혁은 미래가 하는 행동이 다 열받게 느껴졌다. 물론 회사에서도 자기와 안 맞는 이를 곱게 보진 않았지만, 미래는 그런 상황과 달리 좀 더 얄미운 느낌이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이것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뭐, 댁도 좋지 않겠어? 이번 기회에 자유란 걸 누리는 것도…”
“자유는 무슨 얼어죽을 자유야?!”
“그거야 자유지. 갑자기 찾아온 봄방학이라 생각하면 어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여전히 태연하게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미래를 보며, 승혁은 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이렇게 가볍게 말해도 된단 말인가. 물론 미래 역시 이 일이 해결되길 바라고 있겠지만.
“이런 자유를 얻느니 차라리 회사에 가는 게 낫겠군. 젠장.”
“어유. 그래? 나라면 푹 쉬면서 뒹굴댈 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잘도 그러겠다. 이 여자야.”
아무리 봐도 병실 그 자체인 주위를 둘러보며, 승혁은 미래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자기도 그렇게 편히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것도 그랬지만, 미래의 성격은 특히 승혁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때, 미래가 뭔가 떠올렸단 듯 손뼉을 탁 쳤다. 마치 이 중요한 걸 왜 지금껏 깨닫지 못했냐는 표정이었다.
“잠깐만. 승혁아.”
“뭐야, 그 반말은?”
“그럼 댁은 날 뭐라 부르게? 이 여자?”
“마음대로 해.”
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결국 승혁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앞으로 오래 있을 사이인데,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건 불편할 게 뻔했다. 게다가 둘은 동갑이니(그렇다고 미래가 말하니) 말을 놓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말을 놓은 건 처음부터였고.
“근데 니가 결혼했단 건 진짜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벌써 결혼이라니 말이 돼?”
“그럼 난 뭐야?!”
이젠 어이가 없어져서, 승혁은 주위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이렇게 소리쳤다. 나이 스물아홉에 결혼한 게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옛날로 보면 오히려 느린 편인데.
“아, 댁은 좀 특이할 거 같긴 하네. 그치만 요즘엔 30까진 혼자 사는 게…”
“넌 남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 좀 특이하다 싶어서. 하긴 니 말도 맞긴 맞네. 요즘엔 스물일곱에도 결혼하는 사람이 있던데…”
“아무튼 뭐가 이상하단 말이야?”
마치 멸종위기종이라도 보는 것처럼 자길 쳐다보는 미래의 모습이, 승혁한테는 어쩐지 더 열받게 느껴졌다. 남이 언제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거야말로 자기 마음일 텐데.
“난 지금까지 결혼해야겠단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거든. 내 또래가 결혼까지 했단 말을 들으니 실감이 확 나서.”
“그래서?!”
“그냥 그렇단 말이지. 나도 이젠 때가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뭐 그런 거 말이야.”
그게 뭐가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승혁은 더 이상 말하는 걸 그만뒀다. 하지만 미래는 아직도 수수께끼가 남아있었는지, 아까보다 더 이상하단 표정으로 승혁을 쳐다봤다.
“근데 신기하네. 댁이 결혼한 건 그렇다치고, 대체 누굴 어떻게 사귀었는지…”
“남의 일에 신경 좀 꺼, 이 여자야!!”
결국 승혁은 노을 및 지금껏 여기있던 걸 잊고있던 호랑이귀 여자애와 그 친구들 앞에서, 미래한테 대고 크게 소리지르고 말았다. 하필이면 목소리도 높아진 탓에, 괜한 짓을 한 것처럼 목구멍이 마구 아파오는 게 느껴졌다. 대체 저 여자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승혁은 그렇게도 생각했지만, 지금와선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저희도 하나 말해도 될까요?”
“어?”
그런 생각을 하던 승혁한테, 갑자기 지금껏 제대로 듣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혁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그 낮은 목소리를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금 여기있는 사람 중, 저런 목소리를 가진 건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일단 얘기는 들었는데, 저흰 뭘 하면 되죠?”
그 남학생, 맹호는 아직 잘 모르겠단 표정으로 승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사정은 이미 들었을 테니, 앞으로 자기들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그냥 가끔 놀러오면 돼. 어차피 이리로 오면 시간도 멈출 테니까. 너희들 덕분에 이 형이 큰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거든. 게다가 맹호 넌 호랑이라면서?”
“호랑이…잠깐, 무슨 소리야?!”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 거지. 저기 꼬마친구도 마찬가지고. 맹호가 좀 더 둔갑을 잘하는 거같긴 하지만.”
“정말이야?”
이젠 익숙할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승혁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만 해도 충분히 비현실의 극치였는데, 여기에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라니. 아무리 둘이 다른 유사세계에서 왔다 한들, 상식 속에서 살던 승혁을 당황케 하기엔 충분했다.
“이 친구가 호랑이귀를 달고 있는데 그런 짐작도 못했단 말이야? 이름만 봐도 알겠다 야.”
“그런 게 현실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안 그래?”
“어유. 어떡하죠 친구. 현실은 여기있는 거 같은데.”
승혁은 이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승혁은 평소와 달리 조그만 것에도 크게 놀라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크게 놀라지도 않을 것이며, 항상 그렇듯 냉정한 표정 그대로였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된 뒤엔 모든 게 바뀌었다. 유사세계니 세계군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승혁의 삶에 끼어들었다.
이상하다. 원래 자기는 이것보다 더 냉정했을 텐데. 왜 이렇게 자꾸만 놀라는 일이 많아질까. 왜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는 거지. 대체 왜.
“아니, 전 괜찮아요. 저도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게 당연한 세상은 아니거든요.”
“응. 맹호는 나랑 있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잖아. 그지?”
“그래. 솔이 너 한 명뿐만은 아니지만…”
이렇게 둘이 주고받는 걸 들으면, 맹호란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도 어딘지 모르게 살짝 학생다운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보면 얼굴도 호랑이만큼 매섭긴 했지만 순한 느낌이었고, 옆에 있는 친구 솔이가 자기보다 몸집이 두 배나 작은데도 조심스레 대하는 걸 보면 남을 생각하는 성격인 건 틀림없었다. 몸집과 아우라에 가려지긴 했지만, 이 친구는 사회에서 봤을 때 틀림없이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까딱하면 맹호보다 더 어리게 느껴지는데도 자기와 비슷한 느낌인 미래와 대보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와 달리, 맹호의 친구(아마 동갑)처럼 느껴지는 솔이는 무척 느낌이 달랐다. 순해보이는 느낌은 같았지만, 어쩐지 맹호보다 조금 더 호기심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눈빛을 갖고 있었다. 키를 봐도 뭘 봐도 같은 고등학생, 아니 동갑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린아이같으면서 어딘지 깊은 데가 있는 표정이 승혁의 인상에 남았다. 어깨에 다다를 것만 같은 머리카락과 맹호만큼이나 편해보이는 옷, 그리고 자기한테 겁은 먹었지만 누군가를 돕고자하는 마음. 이 아이가 맹호와 다른 존재란 건 알았지만, 그와 함께 결국 비슷한 아이란 것도 승혁은 잘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다 한들 그게 당연한 세상인 건 아니구나.
자칭 야생흡혈귀라 하는 이상한 여자 때문에, 승혁은 유사세계에 관해 조금 착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물론 유사세계에 따라 상황은 다르겠지만, 이쯤이라면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겼다.
“그건 그렇고, 고등학생?”
“네. 솔이랑 저랑 고등학교 2학년이요.”
“근데 아무도 안 믿는다. 교복 안 입으면.”
“뭐, 나도 그렇고, 솔이 너도 그렇고…”
맹호는 대답하기 어렵단 듯 그 말과 함께 눈길을 돌렸다. 왜 대답하기 어려워했는지는 승혁도 곧장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어른처럼 보이는 맹호는 물론, 솔이란 아이도 고등학생으론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맹호 곁에서 팔을 붙잡는 모습만 봐도 중학생 아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호랑이귀 여자애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꼭 박혀있는 듯한 축이, 솔이가 고등학생이 맞단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승혁이 아까 보며 느낀 것처럼.
“아, 그런데 이름은?”
“전 김맹호라고 하고, 이 친구는…”
“한솔이요. 앞으로 많이 도와드릴게요.”
“아, 어. 그래…”
순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오는 솔이를 보며, 승혁은 단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마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들과 만날 일도 없었겠지. 고등학생과 회사원이란 신분 이전에, ‘사는 세상’이 정말로 다르니까.
대체 자유란 왜 바라지 않을 때 찾아오는 걸까.
승혁은 그저,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