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7. 모르는 게 약이었던 세계의 진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때?”
잠시 뒤.
노을과 호랑이귀 여자애 및 같이 딸려온 아이들이 병원을 둘러본다고 나간 사이, 승혁은 침대에 앉은 채 건너편에 걸터앉은 미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승혁은 지금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지만, 저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분은 무슨, 최악인데, 뭘 이런 걸 궁금해해?”
“당연히 물어야하는 거 아냐? 모처럼 도와준다는 친구도 나타났는데.”
“그래서 지금 당장 내 상황이 바뀌어?”
승혁은 이제, 자기가 미래한테 괜한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미래는 자기를 생각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저 자기자신이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겪는 게 싫어서 어린애처럼 투덜대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최승혁이 이딴 존재로 내려앉았지. 어쩐지 승혁은, 지금껏 있던 일보다 이게 더 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모습밖에 보일 수 없단 게 분하기 이를데없었다. 아니,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알고있던 사실이었지만.
승혁은 지금, 자기가 놓인 이 상황을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마치 갑작스레 남의 손에 밀려 깊은 구멍 속으로 떨어져, 자기가 바라지 않았는데도 엉뚱한 곳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흰토끼는 물론이며, 주위에 기댈 존재는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이 세계가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 역시 현실이라 한들, 승혁은 전혀 이런 사실을 알고싶지 않았다. 이건 자기 뜻과 아무런 상관없이 멋대로 이뤄진 것이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승혁은 지금까지 알던 것만 현실이라 믿고 살고 싶었다. 유사세계든 세계군이든 다 좋으니,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기가 되고 싶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까지처럼’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당연한 현실은 물거품으로 바뀌어버렸다. 마치 자기를 가지고놀기라도 한 것처럼.
“왜, 꿈이라도 꾸는 거 같아?”
마치 놀리는 것처럼, 혹은 걱정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미래가 갑자기 그렇게 물어왔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승혁은 미래가 의외로 자기를 진지하게 대해주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이 여자가 이런 말투란 건 이제 잘 알 것 같았으며, 그 말투를 기준으로 보면 의외로 꽤 진지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꿈이고 뭐고, 벌써 1년은 지난 거 같다. 어이가 없어서.”
“아, 그래?”
승혁의 말에,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것쯤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투였다.
“아무리 어이가 없다해도 지금 이게 현실이란 것쯤은 알 거 같은데, 안 그런가?”
“뭐…”
자기가 생각해도 얼빠진 대답이었지만, 승혁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실감나는 꿈이 있으면 자기가 보여달라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껏 자기가 알던 상식과 아무리 다르다 한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일 따름이었다.
“암튼 상황이나 정리하지 뭐. 댁은 그 놈들한테 휘말려서 여기 놓인 거고, 그 노을이란 여자애가 있던 유사세계랑 하나로 엮인 거지? 이걸 풀기 위해서는 당연히 걔들을 어떻게든 해야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댁이 직접 할 수 없고…”
“정말 나한텐 아무 힘도 없단 말이야?!”
“그나마 그 놈들 덕분에 ‘감각’이란 개념이 댁 몸에 생기긴 했잖아. 그게 끝이지. 물론 천천히 계단을 밟아올라가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감각이라는 것도 일단 발달하는 거고.”
“그럼, 만약 그 감각이 좀 더 나아지면 그 놈들과 맞설 수 있단 말인가?”
“그야 그렇지만 현실성은 없지. 나만해도 어릴 때부터 감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유사세계에 관한 개념이 생긴 건 청소년기 후반이거든.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닐 즈음. 게다가 이런 건 훈련도 어려워. 굳이 말하자면 이런저런 유사세계에 다녀오는 방법이 있겠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지 않아? 헛수고도 엄청 할 거고.”
“그래도,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그래. 가능성은 있지. 대신 느린 걸음을 각오해야 할 거야. 내가 오늘 이 말만 몇 번을 하고 있지만.”
미래의 말에, 승혁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승혁은 자기 앞에 다다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적이 거의 없었다. 만약있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대개 잘 마무리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떨까.
지금 승혁은, 30년 남짓한 삶에서 가장 궁지에 몰려있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능력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게 떠오르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혁은 지금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일지도 몰랐다.
이럴 땐 어쩌면 좋을까.
아무리 승혁이라 한들, 학교나 부모님한테서 배우지도 않은 걸 스스로 깨달을 도리는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당연히 진호한테 맡기는 거겠지만, 물론 그것도 빨리 끝나진 않을 거야. 그래도 너 혼자 하는 것보단 훨씬 빠르겠지만. 앞으로 어쩔래. 어차피 기다리기만 하는 성격도 아닐 텐데, 뭐라도 해볼 거야?”
“적어도 여기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순 없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거야. 단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많다 이거지?”
승혁은 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한들, 이 ‘다른 사회’에서 자기는 그저 무력한 존재였다. 지금 당장 뭘 하면 좋을지 알 수조차 없을 만큼.
“뭐, 뭣하면 내가 도와주지. 나도 이걸 그냥 보고 넘어갈 만큼 매정하진 않거든.”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단 건, 댁을 돕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단 게 아닐까?”
“뭐, 나야 상관없지만…”
승혁은 미래의 도움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그 뿌리가 호기심에 있다고 해도 그랬다. 지금 미래는 승혁보다 훨씬 더 ‘사회’를 잘 아는 존재였다. 게다가 저 성격으로 볼 때, 자기를 대충 다룰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승혁 나름의 생각이긴 했지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얼마나 아득할까. 승혁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즈음, 갑자기 미래가 막 떠올랐단 듯 이런 말을 걸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
“어떻게?”
“댁이 노을이란 친구랑 게임을 했다고 말했잖아. 그 스마트폰으로 말이지.”
“그래서?”
“이것도 일종의 게임이다, 라 생각하고 천천히 나아가는 거지. 원래 게임이란 게 참을성도 필요한 거잖아. 레벨 올리는 거라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어차피 게임이 손에 익으면 레벨도 빨리 오를 거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그럼 댁이 알만한 어려운 말 좀 써보지 뭘. 게이미피케이션이라고 알고 있나?”
“…아.”
승혁은 이제야, 이 미래란 여자가 뭐라 말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게임과 담을 쌓은 승혁이라 한들, 그 말은 알고 있었다. 요즘 자기가 읽는 여러 매체에서 많이 보였던 말이었으니까.
“아마 우리말로 하면 게임화란 말이지. 게임이 아닌 앱같은 걸 ‘게임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 말이야.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지만. 게임을 응용한다 생각하면 편해. 앱은 물론 다른 데에도 써먹을 수 있단 거지. 질문 있어?”
“그러니까, 이 상황을 게임처럼 여기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내가 볼 땐 게임이야말로 세상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말을 하면서, 미래는 자기 호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뭔가 앱을 실행시킨 뒤, ‘이거 좀 봐’라며 승혁한테 내밀었다. 화면엔 웬 초록색 올빼미가 나타나있었다. 아래로 죽 내려가면 나오는 온갖 항목으로 볼 때, 아마 영어공부용 앱인 듯했다.
“이게 뭐?”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지. 매일 얼마씩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경험치를 쌓는 거야. 물론 해야 할 과제를 클리어해야 얻을 수 있지. 친구를 새로 집어넣으면 서로 붙을 수도 있고, 매일 이걸 하면 얻는 사과로 아이템도 살 수 있어. 그런 거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서, 니가 하고싶은 말은…”
“이쯤이면 알 텐데? 게임과 현실은 따로 떨어져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볼 때, 게임만큼 현실 원리를 제대로 상징하는 것도 없어. 그러니까 댁도 게임과 좀 친해지면 생각하기 편할 거란 말이지. 이런 좋은 예도 있잖아. 그지?”
승혁은 그 말까지 듣고, 또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껏 승혁은 게임을 그런 식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이미피케이션이란 말도, 자주 읽는 경제지나 사이트에서 가끔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래의 말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자기와 가장 멀리 있다 생각했던 게임이, 사실은 이렇게나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게임이 현실의 상징이란 말은, 아주 그대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승혁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그 놈들이 그런 짓을 한 것도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마음에서였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승혁은 미래한테 그걸 묻고 싶어졌다. 물론 그 놈들이 착각을 해서 자기한테 이런 짓을 했단 건 승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짓을 했는지까진 승혁도 알지 못했다.
“하나 물어도 돼?”
“뭘?”
“그 놈들이 나한테 잘못 찾아왔는데도 그딴 짓을 한 게 왜라 생각해?”
“아, 그거?”
미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또 뭔가 했네’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기가 대답할 것까지도 없단 태도였다.
“그거야 뻔하지 뭐.”
“그러니까 뭔데?”
미래는 이 말을 듣자, 아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별 거 아니란 듯, 승혁한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당연한 거 아냐? 그런 짓을 하는 게 재밌어서겠지. 그거말고 다른 게 있겠어?”

그 말을 듣자, 승혁은 잠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밌어서’라니, 고작 그것뿐이란 말인가. 그거야 그 놈들이니, 깊은 생각을 했으리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엘리트 신분인 자기를 곯려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보다도 더 가벼운 까닭이라 생각진 못했지만.
재밌어서, 겨우 재밌어서로 끝이라니.
차라리 승혁은, 자기같은 엘리트가 얄미워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을 듣는 게 더 속편할 것 같았다. 그저 재밌어서라니. 결국 아무 생각도 없었단 말이 아닌가. 이래뵈도 승혁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마치 장난감다루듯 ‘재밌어서’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니.
“뭐야, 무슨 고상한 까닭이라도 바란 거야?”
미래는 어이없단 듯, 승혁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사실 승혁도 그렇게 거창한 까닭을 바라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 좋고 나쁘고도 없으니까. 하지만 자기가 ‘고작’ 재밌겠단 까닭으로 이런 꼴이 된 것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멋대로 한 것도.
“뭐, 그다지 좋은 놈들은 아니지. 걔들은 꼭 어떻게 될 거야. 그게 댁 몫은 아니겠지만.”
“그 진호란 사람이 처리한다 이거지?”
“만약 댁이 처리하려면 여기저기 좀 뒹굴어야지. 그럴 각오는 있어?”
“있다면 어쩌게?”
“그래도 말은 잘 나와서 다행이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댁 상식하고 아주 다를 거야. 그건 특히 각오해.”
미래의 말에, 승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여기를 영화라도 찍듯 위에서 본다면, 이상하게 넓게만 느껴지는 병실에 20대 초반 여성 한 명과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는 10대 후반쯤의 여자애가 비칠 터였다. 물론 그건 실제와 아주 딴판이었지만, 남의 눈으로 볼 땐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 말은, 승혁한테 힘이 없다는 말과 똑같이 들렸다. 물론 모습이 바뀐 것만으로 ‘힘이 없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사회에서 쌓아올린 지위, 그동안 가졌던 상식, 그 모든 게 휴짓조각처럼 바뀌었단 뜻이었다.
이런 현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이젠 지겨워지기까지 한 그 생각을, 승혁은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