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혁은 잠시동안, 이젠 눈에 익은 것만 같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미 생각지도 못한 일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승혁은 이 망할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세계군이든, 흡혈귀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든, 승혁한텐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훨씬 나았다고도 여겨졌다. 그 땐 그저 알 수 없는 일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됐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에 이렇게 좌절할 일도 없었다.
“언니는 자?”
이제 자기가 그 언니가 아니란 건 알고 있을 텐데도, 노을은 승혁을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뭐라 말하는 것조차 번거로워서, 승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래는 그런 승혁이 재밌기라도 한지, 창가에 기댄 채 멀찍이서 둘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승혁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서였다. 언제까지고 좋으니, 이대로 죽 자고 싶었다. 모든 걸 잊은 채, 이대로 아무 생각없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빠지기도 전에, 갑자기 창문 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창문을 넘어오는 듯한, 그다지 듣고싶지 않은 소리였다.
“뭐, 뭐야?!”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승혁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이미 온갖 일을 다 겪어서 더 놀랄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짐작이란 걸 이렇게 빨리 깨달을 줄 몰라서였다.
창문 너머에선, 틀림없이 호랑이 귀를 달고 있는 노을 또래의 여자애가 이 쪽으로 낑낑대며 들어오고 있었다. 물들인 듯한 노란색 머리카락이었지만, 옷차림은 흰 티에 헐렁한 바지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보면, 이리로 오면서 경계심같은 건 전혀 가지고있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여자애는 전혀 여기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까 미래와 나눈 얘기를 생각하면, 그 까닭은 안 물어도 뻔했다.
“설마 이것도 그 복합세계인가 뭔가하는 거 때문이야?”
“오. 그런 거 같은데?”
미래는 놀라기는커녕, 아주 일이 재밌어졌단 표정으로 낑낑대며 들어오는 호랑이귀 여자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미래는 마치 이 수라장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승혁과 달리.
“지금 그런 말이 나올 때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뭘 어떻게 돼. 내가 말했잖아. 지금 여긴 엄청 눈에 띈다고.”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할 때야?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지. 남의 일이라고 진짜…”
“거 참 걱정도 팔자네. 가만히 좀 있어봐. 얘가 못 들어오잖아.”
미래가 그 말을 끝낸 순간, 그 호랑이귀 여자애는 읏차, 란 말을 끝으로 창가에서 병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마치 딴세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승혁 및 병실 속 사람들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라고.
승혁은 진지하게 이마를 짚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저 애도 그, 복합세계에서 왔단 말이야? 너처럼 감각이 있어서?”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 않음 여길 알아챌 수도 없었을 테니까. 복합세계를 지금 처음 알았을 수는 있겠지만.”
“뭐?”
“그러니까, 자기한테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라서 복합세계란 개념도 모르다가, 갑자기 감각이 세져서 알게 된 거지. 아마 이 애도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럼 내가 또 설명을 해야겠는데…”
“잠깐만, 뭐, 뭐라고?!”
승혁이 이렇게 놀라거나 말거나, 그 여자애는 여전히 주위를 빤히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달린 호랑이귀가 마치 나보라는 듯 꿈틀대고 있는 게 보였다. 흰 티에 노란 바지. 여자애는 그런 옷차림을 한 채, 눈앞에 있는 세상을 신기하단 듯 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아, 맞다!”
갑자기 미래가 그런 말과 함께, 승혁 쪽으로 뛰어나왔다. 마치 지금껏 중요한 걸 죽 잊고 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승혁이 ‘뭐, 뭐야?’라 말하기도 전에, 미래는 갑자기 여자애 쪽으로 집게손가락을 죽 내밀곤 이런 말을 꺼냈다.
“눈앞에 야생호랑이가 나타났다! 야생호랑이, 넌 내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인간은?”
“인간이라니, 야생흡혈귀라니까, 흡혈귀!”
자기도 야생이면서 대체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제 승혁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침대에 주저앉은 채 이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노을은 그냥 이게 재밌었는지, ‘우아, 신기하다’라며 눈빛으로 저 둘을 지켜보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미래는 아주 신났는지 입으로 노래까지 부르며 그 호랑이귀 여자애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물론 호랑이귀 여자애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으로 미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 있는 승혁도 마찬가지였다.
“짜라라란~. 짜라라라란~~.”
“대체 뭐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린데?!”
“무슨 소리긴. 배경음악이지.”
“그러니까 그걸 왜…”
마치 공이라도 든 것처럼 손을 주먹쥔 미래를 보며, 승혁은 더 이상 묻는 걸 그만뒀다. 자기가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단 걸 깨달아서였다. 미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주먹을 여자애한테 내던질 기세였다. 물론 그건 ‘때린다’는 게 아니라, ‘던진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자, 얼른 공격해. 공격!!”
“아니 그러니까, 얘한테 그게 무슨 소리…?”
“이렇게?”
승혁이 어이없어하던 중, 갑자기 그 호랑이귀 여자애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노을보다도 순수해보이는 호기심많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자기 생각보다, 이 여자애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여자애는 그 말과 함께, 휙 할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정말 야생호랑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저걸 진짜 야생호랑이가 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유. 잘 하는데? 그럼 언니도…에잇!”
“뭐, 뭐야?!”
그 말에 승혁이 놀라자, 이번엔 미래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무슨 전자파라도 내는 듯한 것처럼 여자애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한 짓이었다. 이미 상황은 승혁의 상식 저 너머에 있었다.
“아 맞다. 나 이거 알 거 같애.”
“어?”
갑자기 노을이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노을은 핸드폰으로 뭔가 실행시키더니,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게임에서 저런 거 봤어. 주위에 나오는 몬스터를 있잖아, 이걸로 잡는다?”
“…뭐라고?”
승혁이 가만히 보자, 그건 자기도 어릴 적 본 거 같은 게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모습도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단지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자기도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뜬금없이 여기서 할 까닭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방은 그저 어린아이가 아닌가. 호랑이귀가 달린 걸 보면 유사세계에서 온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애한테 지금 뭐하는 거야?”
“뭘하긴 뭘 해. 노는 거지.”
“지금 장난해?!”
“응. 장난인데?”
이젠 미래는 물론, 호랑이귀 여자애까지 이상하단 눈으로 승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노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단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젠 승혁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자체가 이상한 곳이라서 그런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승혁은 어쩐지 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 때였다.
“뭐지, 여긴?”
이번엔 20대 전반쯤으로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왔던 진호란 남자보다 더 묵직한 걸 보니, 또 유사세계에서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맹호야. 왜 그래?”
이젠 1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린 목소리이긴 했지만, 어쩐지 초등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둘 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이상한 데에 와서’, ‘어딘데?’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승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든 말든, 미래와 같이 놀던 호랑이귀 여자애는 ‘오빠다!’란 말과 함께 저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마치 길잃은 어린아이가 아빠라도 만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멀리에 있는 여자애는 남성을 맹호라 불렀다. 이 여자애가 호랑이귀를 하고 있는 걸로 볼 때, 저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
승혁이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으, 으악!”
갑자기 남성이 이런 말과 함께 창문 앞에서 고꾸라지더니, ‘아야…’란 말과 함께 도무지 일어나려하지 않았다. 아마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진 바람에 넋이 좀 나간 듯했다.
“우아. 우리 맹호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뒤에서 쫓아온 걸로 보이는 여자애가, 창틀에 주저앉은 채 남성을 보며 이런 말을 걸었다. 물론 남성은 아까 일로 넋이 빠진 탓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병실 바닥에 엎어져있었다.
그런 둘을, 미래는 아주 재밌단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걱정도 안 되나. 미래의 표정만 보면, 마치 이건 길가다가 잘못해서 넘어진 것만큼 보통 일인 것 같았다. 창문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시점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일 텐데.
“오빠. 왜 그래. 괜찮아?”
“어, 자. 잠깐만…”
맹호라 불린 남성이 엎어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자, 호랑이귀 여자애는 옆으로 가더니 그 남성을 가만히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맹호라는 남성은 일어나긴커녕,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내버려둬도 될까.
승혁이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드디어 미래가 주저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아까 승혁을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감각이 있는 건 이 친구뿐인가?”
“…누구지?”
여전히 엎어진 채(어떻게든 일어나려곤 했지만), 맹호란 남성은 그렇게 되물었다. 그 낮은 목소리와 큰 몸집이 놀랍지도 않은지, 미래는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누구게?”
“이 언니 흡혈귀래. 야생흡혈귀!”
“야생?”
맹호가 이상하단 듯 묻자, 이젠 창가에 앉아있던 여자애가 그 맹호란 남자의 등에 주저앉았다. 겉으로 보기엔 잘 봐줘도 중학생쯤 되어보이는 어린 인상의 여자애였다. 하지만 승혁은 어쩐지, 이 여자애가 중학생보단 더 나이를 먹었으리란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쯤. 물론 저 느낌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맹호야. 많이 아파?”
“일단 솔이 니가 옆으로 좀 비켜줘야 일어날 수 있을 거 같은데…”
“아, 맞다. 그럼 내가 옆으로 갈게.”
솔이라 불린 여자애가 옆으로 비키자, 맹호란 남성은 드디어 등뼈를 부여잡으며 쿨럭쿨럭대는 기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진 탓에 몸이 여기저기 삐끗대는 듯했다. 그거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니, 갑작스럽게 여기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맹호란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승혁도 여기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긴 어디지?”
“어딘 거 같애?”
“지금 장난해?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결국 참다못해, 승혁은 미래한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맹호는 물론, 솔이라 불린 여자애부터 호랑이귀 여자애까지 모두 자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인 미래는 돌아보긴커녕, ‘거 참 성질도 급하네’라며 킬킬댔다. 물론 승혁은 거기에 더 약이 올랐지만, 이 이상 큰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게 훨씬 더 짜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거야 사람이 나타났지. 근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어차피 유사세계에서 왔을 텐데.”
“그럼 사정도 모를 거 아냐. 다짜고짜 이렇게 굴어도 되나?”
“물론 모르겠지. 내가 볼 때 감각이 있는 건 이 아이뿐인 거 같은데. 나머지는 아마 말려든 거고. 아닌가?”
미래가 묻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맹호 및 솔이란 여자애는 서로를 보다가 상황을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아까 그 호랑이귀 여자애와 달리, 둘이 말려들어온 건 맞는 것 같았다.
“아, 그건 그렇고 자기소개를 못 들었네. 난 성미래라 하는데, 친구들은 누구지?”
“아까 야생흡혈귀라고 했던 사람인가?”
“이 언니 진짜 그랬어. 자기가 야생흡혈귀라고.”
호랑이귀 여자애가 맹호한테 말하자, 미래가 ‘그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호가 승혁만큼이나 수상쩍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럼. 거기 호랑이 친구만큼이나 그냥 사람이라 말하기 어려운 존재지.”
“흡혈귀라고?”
“그럼.”
맹호의 물음에, 미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대답하며 씩 웃어보였다. 문득 승혁은, 방금 전 저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뒤부터 고작 몇 시간밖에 안 지났단 말인가. 심정만 보면 2주일은 가볍게 지나간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긴 어디지?”
“어디인 거 같아?”
“병원.”
“그래. 근데 더 물어볼 게 있겠어?”
저 여자는 지금 장난하나.
자기가 이야기하고있는 것도 아닌데, 승혁은 괜히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좀 성실히 대답하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그냥 원래 저런 성격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열받는 건 열받는 거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럼 이 친구 말을 들어볼까? 이 친구 쫓다가 이리로 온 거지, 그지?”
미래의 말에, 맹호는 물론 솔이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게 더 빠르겠네’란 말과 함께, 미래는 자기 앞에 있던 호랑이귀 여자애한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여기로 왔어? 어쩐지 이리로 오고싶어서 온 거 아냐?”
“아, 맞다. 있지…”
그제야 호랑이귀 여자애는 할 말이 떠오른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승혁과 미래는 물론, 다른 이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그냥 숲에서 놀고 있었는데, 어쩐지 저만치에 뭔가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왔더니 여기였어.”
“그러니까 그 때 감각이 또렷해졌다 이거지? 그걸 보던 너희 둘이 말려든 거고?”
“감각?”
“그래. 네 친구랑 내가 가지고 있는 감각. 말하자면 긴데…”
여기서 또 이야기가 길어진단 말인가.
승혁은 이제 한숨을 쉬며, 영문을 몰라하는 몸집 큰 남자 맹호 및 눈을 동그랗게 뜬 솔이라 하는 작은 여자애한테서 몸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웠다.
“아, 그렇게 된 거구나.”
미래가 모든 걸 말해주자, 호랑이귀 여자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걸리던 게 드디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한편, 맹호 및 솔이는 여전히 수수께끼란 표정으로 그런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아마 그 감각이 이제야 눈떠서 그랬을 거야. 물론 여기가 보이진 않았겠지만, 직감으로 여기가 어쩐지 이상하다는 건 알았겠지.”
“맞다맞다. 그래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구나.”
호랑이귀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옆에서, 맹호 및 솔이는 여전히 알 수 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승혁도 저 둘과 생각이 비슷했다. 물론 자기는 미래한테서 이미 얘기를 들은 바 있지만, 고작 몇시간 전에 들은 걸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유사세계?”
“그래. 너희들은 이 아이 덕분에 이리로 말려들어온 거지. 감각이 없는 이는 있는 사람한테 말려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감각이라니, 대체 무슨…”
“너희들은 몰라도 돼. 그냥 유사세계를 느낄 수 있는 직감이라고만 생각해. 어차피 이 친구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으니까. 물론 여기로 올 수도 있고, 다른 세계로도 갈 수 있고.”
“아니, 지금껏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맹호란 남자는 마치 꿈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래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언뜻 보면 힘 좀 쓰게 생긴 장정이었는데, 아까 솔이란 아이와 하는 말을 보면 아직 고등학생인 듯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저렇게 빨리 자란단 말인가. 사실, 승혁도 여기엔 조금 놀랐다.
“그거야 놀랍겠지. 여기 뒤에 있는 엘리트 형도 못 믿었는 걸. 안 그래, 승혁아?”
“아니, 그러니까 왜 다짜고짜 말을 까…잠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자기한테로 이야기가 넘어오자,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승혁은 깜짝 놀랐다. 왜 이럴 때 자기한테 말을 걸어온단 말인가. 자긴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은데.
“형?”
“아, 그러니까 여기엔 또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뭐, 내가 대신 말해도 되지? 좀 굴욕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 일이 있어서 이 친구들도 이리로 온 거고…”
“그렇게 남 생각해줄 마음이 있으면, 왜 따로 떨어진 데서 안 말하는 거야?”
“아. 그 방법이 있었네. 잠깐 나가자. 얼마 안 걸릴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미래는 맹호 및 솔이, 그리고 호랑이귀 여자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일단 호랑이귀 여자애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잘못하면 들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승혁이 이 모양이니, 그것도 어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데, 그럼 저 언니오빠들도 새 친구야?”
“뭐가?”
겨우 한숨돌리게 된 승혁이 아무 생각없이 되묻자, 노을은 다시 승혁 앞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문 밖을 가리키며, 승혁이 그다지 듣고싶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치만 나랑 동갑이잖아. 아까 미래 언니랑 놀았고. 그럼 친구 아냐?”
“그, 글쎄…”
솔직히 말해서, 승혁 눈에도 저 아이들이 나빠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엉뚱한 사람이 더 말려드는 건 그다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승혁은 그저 가만히 있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자신이라는 존재를 되찾기 전까진.
하지만, 지금 승혁은 혼자서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미래는 이걸 알고, 저 ‘유사세계’에서 온 아이들의 힘을 모으려 하는지도 몰랐다.
잠시 뒤.
“자, 다들 좀 기뻐하지?”
“뭘 기뻐하란 거야?!”
승혁이 어이없어하자, 다시 병실로 돌아온 미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마치 승혁이 중요한 것 하나를 아주 무시하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기뻐해야지. 여기 새 친구가 나타났는데.”
“그러니까 친구는 무슨 친구…”
“댁 사정을 듣고 도와주겠단 말을 했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닌가? 내가 말했지. 댁은 느릿느릿하게 나아가는 걸 각오해야 한다고.”
“잠깐, 도와준다고?”
승혁의 말에, 이번엔 미래 뒤에서 아까 나갔던 맹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봐도 사람 기를 누르는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승혁은 그 모습을 침대 위에서 쳐다봤다.
“저, 말을 들었는데,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내가 너희들은 감각이 없으니 별 도움이 안 될 거라 말했는데도 그렇게 말하더라고. 어때, 괜찮지 않아?”
“아니, 나야 싫진 않지만…”
승혁은 지금,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알지도 못했던 자기 연하의 남성이, 자기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마 승혁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이런 걸 해서 자기한테 돌아오는 게 있을 리 없으니까.
정말 고등학생이 맞긴 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과 함께, 승혁은 그 맹호란 ‘남학생’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등학생보단 20대 초중반이 더 맞는 듯한 듬직한 몸집이었다. 몸집뿐만 아니라, 얼굴생김새도 그랬다. 흰 셔츠에 헐렁한 바지만 입은 모습, 그리고 짧은 머리가 그런 생각을 더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도 표정은 얼굴생김새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순한 느낌이 있었지만.
아무튼 잘못하면 원래 자기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맹호를 보며, 승혁은 이런 모습밖에 보일 수 없단 게 큰 굴욕처럼 느껴졌다. 원래 모습이라도 긴장할 법한 상대한테 이런 모습이라니, 같은 남자로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저희도 어떻게 말려든 거지만, 아무래도 고생이 심하신 거 같아서…불편하세요?”
“아니. 그건 아냐.”
일단 승혁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맹호라 하는 남자는 이제야 마음을 놓은 듯, 뒤에 숨어있던 솔이란 여자애한테 ‘괜찮대’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승혁의 30년 남짓한 삶에서 가장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