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5. 주인공이 아닌 엘리트

“그럼, 난 그저 말려들었단 말인가?”
잠시 뒤, 아까 그 병실에서.
뒷머리가 묶여진 느낌에 자기가 ‘그 모습’이 된 걸 다시금 깨달으며, 승혁은 여자애랑 같이 여성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물론 ‘밖’에서 해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날도 추운데다가 여자애가 ‘다른 모습’에 당황하는 걸 그대로 두고싶지 않아서였다. 여성은 아무렇지 않게, 승혁 일행이 자리잡자마자 그 얘길 다시 꺼냈다.
“그럼.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어?”
“아니, 내가 묻고싶은 건 그게 아니라…”
승혁은 이 여성한테 묻고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뭐부터 물어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모습은 어떻게 된 건가. 그 놈들은 어디로 간 건가. 그 전에 저 여자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다다른 걸까. 그 밖에 여러가지.
“그건 그렇고 같은 사람은 맞네. 그 딱딱한 표정도 그렇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물론 아니지. 그냥 혼자 생각한 것뿐이야.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승혁은 지금,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것처럼 보이는 저 여자를 침대 위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런 승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서서 승혁을 내려다본 채 말을 이었다.
“해야 할 말은 아직 많이 있으니까, 하나씩 천천히 말할게. 일단 이 세상 말인데, 두 가지 세계가 서로 겹쳐있다고 말했지?”
“그게 어때서?”
“겹쳐져있다고 해서 샌드위치같은 걸 떠올리면 안 돼. 밖에서 봐도 엄청 희한하게 겹쳐져있거든. 내가 볼 땐 두 가지 세계를 교차시켜서 매듭으로 묶은 거 같은데. 그 매듭이 당연히 이 병원이고.”
“매듭?”
그러고 보니, 승혁은 아까 이 여성한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두 세계는 지금 하나로 붙어있다는 말을. 하지만 그게 대략 어떤 식으로 붙어있는지에 관해선 승혁도 잘 알지 못했다.
“아까는 자동차를 대고 얘기했는데, 사실 그건 알기 쉽자고 한 말이야. 지금 두 세계는 아주 하나로 붙어있는 게 아니거든. 딱 하나있는 특이점으로 두 세계가 이어져있다 보면 돼. 세계는 서로 따로 떨어져있지만, 이 병원때문에 한데묶여서 하나의 구조체처럼 보이는 거라고.”
“특이점?”
“그래. 이 병원. 당연히 이걸 누가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물론, 승혁도 그건 알고 있었다. 자길 이렇게 만든 ‘그 놈들’이 틀림없을 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놈들’한테는 누워서 떡먹는 것만큼 쉬운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 병원을 나오면 모습이 바뀌는 건가?”
“그렇지. 지금은 무척 특이한 상황이라 생각하면 될 거야. 내가 멀리서 봤을 땐 젓가락 두 짝같던데? 아무튼 희한하게 생긴 건 틀림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댁은 어떻게 이리로 오게 된 거지?”
사실, 여성의 얘기를 들은 다음 가장 궁금해해야 하는 건 이거였다. 만약 그렇다면, 각 세계에 사는 이들은 서로 만날 수조차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 놈들을 봐도 이 여성을 봐도, 그러한 세계군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존재가 있단 건 틀림없었다.
“그래, 그걸 먼저 물어야지.”
여성도 이제야 승혁이 마음에 놓인다는 듯,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그냥 확.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승혁은 잠자코 여성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드물게 그런 감각을 지닌 이들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세계군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거지. 그럼 남은 건 폴짝폴짝 뛰어서 넘어가는 거야. 요즘 그 게임 알지? 길거너 뭐시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내 맘이다. 아무튼 그 게임이랑 비슷해. 세계랑 세계를 뛰어다니는 거야. 당연히 멀리서 볼 수도 있지. 세계군은 자기 머릿속에 펼쳐지는 거기도 하니까.”
“그러다가 여기가 이상하단 걸 알았다, 그거야?”
“그래. 이제야 좀 말을 알아듣네. 내가 하고싶은 말 알겠어?”
이 망할 여자를 어떻게 해야 좋지. 속으로 화가 나는 걸 참으며, 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도 ‘감각이 없는 사람한텐 좀 어려운 개념이니까 알아들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란 말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물론 많은 건 아냐. 많았다면 이쯤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아무튼 엄청 드물다고 생각하면 돼. 벼락맞아 죽을 확률쯤?”
“그만큼 있단 말이야?”
“뭐, 그렇지. 그런데 여긴 그 인간들이 만져둔 덕택에 좀 특이하게 바뀌었어. 밖에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안에서 나오긴 좀 힘들게 말이야. 물론 여기 있는 둘은 아예 감각도 없으니까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없어야 하지만…”
“하지만?”
“둘 다 그 인간들 덕택에 영향을 받았지? 그럼 조금이나마 감각 자체는 있을 거야. 물론 나보단 약하겠지만, 적어도 그 인간들 때문에 다시 골때리는 일은 없을 테니 마음 놔.”
“왜지?”
“일단 한 번 그런 감각의 영향을 받게 되면, 좀 시간이 지난 뒤엔 면역이란 게 생기거든. 그러니까 걔들 때문에 모습이나 기억이 바뀌거나 뭐 그런 일은 절대 없단 거야. 더 힘든 일은 없을 거란 말이지. 이제 마음이 놓여?”
승혁은 여전히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자기 삶과 아무 상관없다 생각했던 비현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알고 보니 현실이었다니.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승혁은 머리를 쥐어잡고 싶어졌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되는 거지? 난 둘째치고, 이 아이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냐.”
“물론 그렇지. 근데 댁 힘으론 안 될 거야. 아니, 못 해.”
“뭐야. 왜 그런 식으로 딱 잘라말해? 못한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이쯤되자, 승혁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여자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침대 위에 서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있지. 그건 말이야…”
“아, 여기 있었구나?”
여성이 말을 이으려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창밖을 보니,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창문 너머로 병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뭐지?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알겠지만, 승혁은 이 사람이 누군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 저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니, 어쩐지 승혁은 저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 드디어 왔네. 엉뚱한 사람이 둘이나 말려들어갔는데, 어떡할 거야?”
여성은 그 말과 함께, 드디어 창문에서 내려온 남성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지만 그 표정은 진지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같은 걸 궁금해하는 느낌이었다.
“엉뚱한 사람…아, 세계의 특이점 문제?”
“그래. 덕택에 잘 살던 엘리트에 여자애까지 말려들었잖아. 그 놈들도 참.”
“그건 어떻게든 해봐야지. 지금 당장 어쩔 순 없지만…”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미안하단 눈빛으로 승혁을 바라봤다. 어쩐지 그게 살짝 열받아서, 승혁은 조금 건방지게 이런 걸 물었다.
“그런데, 댁은 누구지?”
“아, 그 사람들한테 당해서 모습이 바뀌어있던가요? 처음 뵙습니다. 저는…”
“그런 건 됐으니까 얼른 말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승혁은 그딴 말이나 들으려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도, 아내도, 여자애도, 다 여기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그 놈들을 족치지 않으면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세계군을 돌면서 안 좋은 짓을 하는 일당들과 맞서고 있는 한진호라고 합니다. 여러모로 지금 많이 억울하시겠지만…”
“그럼, 설마 그 놈들과 맞서싸운다는 게 당신인가?”
“네. 그렇게 되겠죠. 그 놈들…그러니까 일당은 자기네들을 세계군단이라 일컫습니다. 세계군들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겠단 거죠. 굉장히 안 좋은 놈들이 감각을 가져서 문제가 좀 되고 있지만, 제가 어떻게든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혼자는 아닙니다. 일단 여기에 도움을 주는 친구가 있구요.”
“난 가끔 만나서 술이나 얻어먹는데 뭘.”
여성은 그 말에 킬킬대며 웃었다. 하지만 승혁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우리 아내는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하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이 아이 가족은?”
“저, 그러니까…”
“얼른 대답해. 얼른!!”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은 죄송하지만, 짚고넘거가야 할 문제가 많아서…하지만 꼭 제가 어떻게든 해 드릴 테니…”
“됐어. 니가 안 하면 내가 한다. 어떻게 하면 돼? 어떡하면 저 자식들을 족칠 수 있는 거야?!”
승혁의 말에, 남자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승혁을 더 열받게 만들었다. 지금 자기는 저 사람한테 ‘저렇게’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남자는 드디어 입을 뗐다. 혹시 승혁이 화내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아마 그건 힘드실 거 같습니다.”
“뭐라고?!”
승혁이 화내든 말든, 남자, 즉 진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미안해서 어쩔 수 없단 말투였지만, 한편으론 자기 말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목소리에 가득 담겨있었다.
“승혁 씨는 ‘감각’이 없다시피하니까요. 이런 건 ‘감각’이 예민한 사람만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젠장…”
진호가 간 뒤에도, 승혁은 한동안 침대에서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이 몇 시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성은 승혁을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할 말이 떠올랐다는 듯, 가만히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뭐가?”
“댁이 왜 힘들어하는지는 알아. 지금껏 사회에서 인정받고 지내왔으니 이런 취급받는 것도 억울하겠지. 하지만 댁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그건 진호가 아까 말했던 대로고.”
“그래서?”
“예를 굳이 들자면 이런 거지. 세계군단을 어떻게저떻게 하는 건 댁이 할 일이 아냐. 그건 주인공이 하는 일이지. 주인공이라 하면 영웅일 테고, 그럼 진호말고 더 있겠어?”
“뭐라고?”
“굳이 말을 고르자면 그렇단 말이지. 댁은 정말로 할 일이 없어.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건 진호가 가장 잘하는 일이야. 걔한테 맡겨.”
“미쳤냐?!”
이제 승혁은, 아까처럼 그 여성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도 오늘로 두번째였다. 아니, 그 전에 승혁은 이 여성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고작 가만히 앉아서 그걸 기다려야 한다고? 내 아내는 어쩔 건데. 그리고!”
“그리고, 뭐?”
여성이 너무나 침착하게 묻는 바람에, 승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는 틀림없이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인재라 한들, 이런 망할 상황에서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그 영웅인가 뭔가하는 사람이 구해주는 걸 기다려야 하는 존재였다.
“이걸 받아들이라고?”
“댁이 주인공이 아닌 걸 말하는 거야?”
“지금 나보고 그런 취급을 받아들이란 말이야?!”
“적어도 세계군단하고 그걸 막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선 그렇지. 어쩔 수 없어. 댁은 감각도 없잖아. 안 그래?”
승혁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껏 살면서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니.
자기가 그저, 가만히 도움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여야만 한다니.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성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주 조금이긴 했지만.
“정 하고싶으면 느린 걸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어. 댁한텐 감각도 뭣도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해도 일이 빨라지는 걸 조금 도와주는 정도겠지만.”
“…우리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이 상황이 부조리하다 여기는 거지? 그 마음은 알아. 난 아직 결혼 안 했지만…”
“20대 전반 아닌가?”
“댁이 스물아홉이라매? 그럼 동갑이지 뭘.”
“뭐?!”
승혁은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요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잘 봐야 대학생이라 여겼던 것이다. 성인으로 안 보인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난 흡혈귀니까 당연하지. 그건 그렇고, 이 상황이 부조리하다 이거지?”
승혁이 더 대답하지 않자, 여성은 한숨을 한 번 쉬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맨 처음 만날 때처럼, 마치 세상의 진리라도 읊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하나 말해줄게. 대개 사람들이 여기는 ‘조리’란 말이야, 사실은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실제 조리는 딴 데에 있는데, 이런 게 조리있는 거라 믿고있는 거지. 그러니까 부조리란 말도 우스워. 자기가 멋대로 착각해놓고선 이상한 말하는 거잖아.”
“그래서?”
“댁은 부조리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세상에 부조리한 일은 그렇게 없단 말이지. 내 말이 차갑게 들려?”
“이런 젠장…”
승혁의 말에, 여성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인 승혁한테 손을 내밀고는 자기 이름을 댔다.
“자꾸 댁이라 하니까 내가 더 미안하네. 승혁이라고 했던가? 난 성미래라고 하는데, 앞으론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때?”
“성미래?”
“그래. 내 이름인데, 불만있어?”
승혁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자기 또래라는 자칭 야생흡혈귀는 대체 어떤 성격이기에 이렇게 구는 걸까. 자기는 도무지 저렇게 굴 수 없을 것같단 생각에, 승혁은 결국 고개를 들어 손을 잡았다.
“동갑끼리 존대하는 것도 이상하니 그렇게 하든가. 아, 그러고 보니…”
“이노을.”
“어?”
“이노을. 내 이름.”
여자애, 노을은 그렇게 말하면서 승혁을 바라보며 웃었다. 승혁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그저 ‘그렇구나’란 말만 돌려주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