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33.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오늘은 도진이 훈련이다. 알았지?”
일하던 중 전화를 받은 비상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이마를 짚고 말았다. 물론 전화를 건 사람은 강산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다짜고짜 할 말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훈련?”
“넌 전에 그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아무튼 비상이 되묻자, 강산은 어이없단 듯 이런 말을 꺼냈다. 사실 그 말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저런 말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던 것이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웃긴 것도 좋지만 도진이 그 놈이 불쌍해서라도 연장자들이 도와주기로 했다는 듯했다. 연장자 형들이라면 그럴 만하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참고로 이 역시 강산의 말에 따르면, 몇몇 연소자들도 이 꼴을 ‘구경’하러 온다는 듯했다.
“그러니까 비상이 너도 좀 가르쳐줘라. 알았냐?”
“연장자 형들끼리 하면 되지 않아?”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강산은 갑자기 씩씩대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한테 누가 시비라도 건 듯한 모습이었다.
“니가 온다고 아무 말 안 한단 말이야. 암튼 와라. 엉?”
그 말이 끝나자마자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비상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형은 아무튼 성질이 문제라니까. 왜 자기를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 야단인지 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오늘 저녁 그 연습을 보러 갈 작정이었다. 딱히 안 갈 까닭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끝난 뒤, 비상은 그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에 다다라보니, 연장자는 물론 연소자도 ‘몇몇’보단 조금 더 많이 와있는 게 눈에 띄었다. 누가 보면 마치 장이라도 선 듯한 느낌이었다. 구경거리란 점으로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한데모인 연장자 및 연소자들은 대부분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는데, 이걸 보면 오늘 ‘구경거리’를 보러 온 건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저만치에 있는 강산이라면 웃으러 왔을 터였다. 진지한 마음도 있긴 있겠지만.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도진이 옥상에 나타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저기서 장난끼가 섞인 박수 및 환호가 들려왔다. 개중엔 ‘우리 주인공 오셨네’라며 킬킬대는 팀원도 있었다. 물론 도진은 이게 무척 민망했는지, 손까지 내저으며 몸서리를 쳤다.
“민망하게 그러지들 좀 마세요. 진짜.”
“당연히 이래야지. 남 놀려먹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아, 그럼 강산이 니 학점 여기서 불어도 되는 거냐?”
“뭐라고, 이별밤 이 자식아?!”
옆에서 끼어든 별밤한테 달려들기 시작한 강산은 둘째치고, 지금 도진의 주위엔 온갖 연장자 및 연소자가 가득했다. 인지부조화 상태인 강산은 아직까지도, ‘이 놈이 무슨 헛소리야’라며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내버려둘 수 없었는지, 결국 뒤에 있던 의영이 손뼉을 치며 상황을 매듭지었다.
“아무튼 1초가 아까운 상황이니까 얼른 시작하자. 알았지?”
물론 이 형 말을 안 들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도진을 놀려먹던 연장자 및 연소자들은, 다들 흩어져 오늘 자기가 맡은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야, 넌 무슨 손을 그렇게 덜덜 떠냐?”
어떤 연소자가 겨울인마냥 손을 떨고 있는 도진을 보며 이런 말을 건넸다. 비상이 봐도 저건 좀 이상하게 보였다. 아무리 자기가 못해서 하는 연습이라 한들, 저렇게까지 긴장할 까닭이 안 떠올라서였다.
“대체 왜 저러는 거죠?”
“의영이 형하고 아까 얘기했거든. 그러니 그럴 만하지.”
별밤의 말에, 그제야 비상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저 둘의 나이차는 정말로 띠동갑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둘이 이야기를 나눴다니, 긴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궁금증이 풀리자, 비상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바쁘게 움직이는 저 너머를 바라봤다. 오늘은 정말 도진의 훈련만 있는 듯하니,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물론 강산이 뭘 해달라고 부탁하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옆에서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상아, 너도 좀이따 도와줘라. 알았지?”
“쟨 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같은데.”
멀찍이 끌려나가는 도진을 보며, 비상은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저만큼 긴장하고 있으니, 그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야, 저 몸집에 돼지는 뭐냐. 그냥 사형수라 하자. 아무튼 불쌍하지만.”
비상의 진지한 말에, 강산이 그렇게 대답하며 킬킬댔다. 사실 지금 도진은 정말 지구라도 무너질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연장자들이 ‘오늘은 제대로 할 거야. 알았냐?’란 식으로 겁을 주고 있는 탓이었다. 심지어 근처 연소자들도, ‘형들 말 제대로 들어라’란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기 일이라도 그렇게 여기리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넌 몸이 어떻게 되먹은 거냐? 이런 거 하나도 못하고.”
“…제가 더 궁금한데요. 뭐.”
저 너머에선 어이없어하는 연장자들과, 그런 연장자들을 앞에 두고 좌절하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도 몇 분이고 저걸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저 너머는 죽 저런 분위기였다. 심지어 저걸 구경하러 온 연소자들조차 ‘불쌍해서 못 보겠다’란 말과 함께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할 정도였다.
멀찍이서 그걸 보던 비상은, 도진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저건 자기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아마 하늘이 놀이는 물론 운동도 하지 말라고 내려준 몸이겠지만, 지금은 형들이 저런 말을 하니까 어떻게든 해보려고 낑낑대는 게 틀림없었다. 여전히 온갖 자세로 연장자들을 웃기고 있는 도진을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중, 뭔가 희한한 소리가 들려서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정말 할 일이 없었는지 말싸움을 하고 있는 연소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산도 그게 어이없었는지, 도진한테 한소리하다 말고 연소자들 쪽을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학교에서 그런 걸 왜 막는지 아냐? 젊은 나이에 허리 망가지면 어떡할 거야. 엉?!”
이 말을 듣자, 말귀를 알아들은 몇몇 연소자들이 킬킬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허리를 굽히고 있던 다른 연소자 몇 명은, ‘그걸 빨리 말씀하셨어야죠’라 툴툴대며 느릿느릿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랐다.
“그럼, 형은 안 했어?”
“했으니까 이러지, 젠장…”
“이야, 그럼 강산이 너도 고민 많겠는데?”
“죽을래, 이 자식아?!”
잎새가 옆에서 이렇게 놀려대자, 강산은 곧장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연소자들은 코미디라도 보는 것처럼 킬킬대고 있었다. 참고로 상황이 진정된 뒤 강산이 한 말에 따르면, 애초에 사귄 여자 자체가 없는 듯했다.
한편, 도진은 이제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따지고들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든다기보다 발악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제, 제가 이렇게 몹쓸 놈이에요?!”
“왜 엉뚱한 사람한테 난리야. 저건?”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던 강산이, 도진 쪽을 쳐다보며 어이없단 듯 이런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도진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강산이었으니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 도진은 물론, 강산의 말조차도.
강산도 오늘 죽 도진을 돌봐준 것 때문인지, 잠시 뒤 한숨을 쉬며 도진을 다시 봤다. 마치 니가 불쌍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본 걸로만 치면 그렇지. 이 자식아.”
“나, 나도 다리 두 개 팔 두 개 있는 사람인데…”
여기에 열이 받쳤는지, 도진은 이런 식으로 혼자 중얼대기 시작했다. 강산은 측은하단 표정으로 그걸 보다가, 다시 난간에 걸터앉아 도진이 혼자 연습하는 걸 가만히 구경했다. 도진도 자기가 이런 취급받는 게 억울한지,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별밤이 옆에서 킬킬대는 가운데, 연장자들은 도진을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물론 도진보고 잘되라는 뜻에서 하는 것이지만, 부담이 될 만큼 묵직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 그럼 다시 해보자. 알았지?”
의영의 말에, 도진은 뭐라 말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은 안쓰럽단 눈길로, 저만치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구경했다.

“주, 죽다 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도진은 그런 말과 함께, 허리를 손으로 짚은 채 비상 옆으로 흐느적대며 걸어왔다. 아마 정신이 없어서 자기 옆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비상도 억지로 말을 걸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모처럼 난간에 몸 좀 뉘러 온 놈을 쫓아낼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든 도진은 비상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혀, 형도 계셨어요?!”
“내가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비상은 어이가 없어져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웃겼는지, 뒤에서 배를 잡고 웃던 강산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으이구. 이 자식은 비상이 니가 있어서 불편한 거야.”
“제가 언제요!”
“일단 넌 허리부터 먼저 펴라. 아까 형 말 못 들었어?”
비상이 이렇게 말하자, 도진은 곧바로 구부정하던 허리를 곧게 폈다. 아까까지 어깨를 짚고있던 놈이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우아. 형 앞에선 이게 진짜 쉽네요.”
“넌 그냥 24시간 비상이랑 같이 있어라. 그럼 허리 망가질 일은 없겠다. 야.”
“또 허리타령이야? 형도 안 쓰면서…”
“뭐라고?!”
항상 그렇듯 강산이 달려들자,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피했다. 그런 둘을 도진이 신기하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친구도 아직은 어린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실랑이를 겪은 뒤, 비상은 뭐라도 도움이 될 말을 해주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줘야겠단 생각에서였다. 물론 자기가 할만한 말은 이미 연장자 형들이 다 했겠지만, 그래도 별 거 아니라 지나친 게 있을 수 있었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그 ‘별 거 아니라 지나친 것’ 중 하나라 여기는 것을 입에 담았다.
“너, 강화는 제대로 했냐?”
“강화요?!”
이 말을 꺼내자마자, 도진은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아무도 이 생각을 안 했나. 한숨을 쉬면서도, 비상은 그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현직 고등학생인 도진한테, 강화가 부담되는 일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 돈 없냐?”
“그렇게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하라구요?!”
강산이 다짜고짜 그렇게 따지자, 도진은 어이없단 듯 이렇게 대답했다. 도진은 강산도 조금 무서워하는 건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있었다.
“강화 전에 한 번 시킨 거 아니었어? 뭘 시킨 거야?”
“그게, 저, 아무것도…”
“진짜냐?!”
도진의 말에, 강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이었다. 자기 생각이 맞았단 걸 느끼며, 비상은 강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훈련보다 먼저 할 일이 있네. 자기 무기 강화하는 거.”
“이런 젠장…”
강산은 잠시 이마를 짚고 있다가, 이윽고 몸을 다른 데로 틀었다. 연장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쟤들하고 얘기할 거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알았냐?”
“혀, 형! 이러시면…”
“시꺼. 등이나 잘 관리하고 있어. 이 자식아.”
도진이 당황하는 걸 보다가, 비상은 대체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지금 강산은, 도진보고 비상과 같이 있으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진보고 등 굽히지 말란 말이었다. 비상 입장에선 펴든 안 펴든 아무 상관없었지만, 도진의 모습은 전혀 안 그런 것 같았다.
“어, 그러니까…”
혼자서만 어색한 모습인 채, 도진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쟨 대체 왜 날 이렇게 겁내는 거지. 비상은 이 상황이 어이없었지만, 아무튼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던 중, 도진이 다시 입을 뗐다. 여전히 말을 더듬은 채였다.
“혀, 형 전에 싸우는 거 봤어요.”
“넌 긴장부터 좀 풀어라. 안쓰러워 죽겠다.”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도진의 어깨를 탁탁 쳤다. 물론 도진은 전혀 진정하지 않았지만, 비상은 다시 입을 뗐다.
“그래, 그 땐 졌지?”
“근데 저보다 훨씬 멋있었잖아요. 저는 뭐…”
“아무튼 유명해졌으니 됐지 뭘.”
“이딴 걸로 유명해지는 게 뭐가 좋아요?!”
도진이 또 열받아하는 가운데, 비상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 친구 등도 좀 편하게 해주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비상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난 잠깐 밖에 나갈 거니까 푹 쉬어라. 알았지?”
“아, 네. 다녀오세요, 형.”
그 말을 끝으로, 비상은 도진한테서 등을 돌렸다. 옥상을 나서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니, 도진이 난간에 쓰러지듯 기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자기 앞에선 등 안 펴는 게 어려운가.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일을 해결한 비상이 화장실에서 나오려 할 때였다.
뭐지, 이 느낌은?
뭔가 쌩한 느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져, 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틀림없이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자기자신이었다.
설마 또 바뀌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길 보자, 비상은 짐작이 맞았단 걸 알아챘다. 아까 괜히 몸이 차가웠던 것도 이것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갑작스런 일이긴 했지만.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비상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옥상 쪽 문에서 누가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면 가장 골치아픈 놈이었다.
“거기 누구야?”
비상은 바로, 그 목소리가 도진 것임을 알아챘다. 물론 비상은 절대 되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비상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도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게다가 이번엔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붉은 밤이지? 왜 이런 데 있어?”
그와 함께, 비상은 자기 팔이 누군가한테 잡혔단 걸 깨달았다. 물론 그 누군가에 관해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도망칠 수 없단 걸 깨달은 뒤, 비상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서 입을 뗐다. 물론 뒤돌아보진 않은 채였다.
“뭐, 할 말 있어?”
비상의 말에, 도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뭔가 단단히 착각했는지, 대뜸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에이. 민망해서 그래? 뭐, 나도 못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뭘. 같이 올라갈래?”
“알았으니까 나중에. 먼저 간다.”
그 꼴을 더 견딜 수 없어서, 비상은 이 말과 함께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거기서 1초라도 더 있었다면, 여러 모로 정신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겨우 계단을 내려온 비상이 고개를 들자, 거기엔 역시 지금 만나면 민망한 사람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비상은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 오, 오랜만이네요. 비상 씨.”
“네. 그러게요.”
비상은 그 사람, 혜은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그 일 뒤로 혜은을 만나는 게 어색해진 건 맞지만, 특히 이런 상황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도망갈 곳이 필요했다. 그 도망칠 곳이 어디든간에.
그래서 비상은, 실례를 무릅쓰고 대뜸 이렇게 물었다.
“어디로 좀 같이 가실래요?”
“네?!”
비상은 혜은의 모습이 전혀 의외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만큼 자기답지 않은 행동이 있었던가. 살면서 비상도 여러 상황과 맞닥뜨렸지만, 이런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지만 혜은은 잠시 뒤, 비상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건네왔다. 마치 태어나서 가장 큰 용기를 내는 것처럼.
“그, 그럼 제 집이 가까운데…”
“그럼 그 쪽으로 가죠. 이런 상황에 죄송하지만…”
그 말과 함께, 비상은 혜은의 왼팔을 덥석 잡았다. 비상은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혜은은 거기에 당황했는지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혜은은 정신을 차린 듯, ‘이 쪽이에요’란 말과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무척 염치없는 짓인데, 이거.
비상도 뒤에 가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비상은 혜은을 따라 ‘남의 집’에 가게 되었다.
뒤늦은 생각이긴 했지만, 비상은 자기가 큰일을 저질렀단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알고있는 사람이라 한들,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집에 데려다달라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이성이 아닌가. 지금은 별 상관없겠지만.
“저, 먹을 거라도 사올게요.”
혜은도 비슷한 생각인지, 거의 다 왔을즈음 근처 편의점에서 발을 멈췄다. 비상이 밖에서 기다리자, 잠시 뒤 비닐봉투를 들고 나오는 혜은이 보였다. 하지만 혜은은 나오다 말고, ‘아, 맞다’란 말과 함께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이번엔 민망한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편의점에서 나왔다.
“지, 지갑을 놓고 와서…”
“그럴 수도 있죠, 뭘.”
혜은이 민망한 듯 그렇게 웃어보이자, 비상은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혜은은 뭔가 걸리는 게 있었는지,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린 채 이렇게 중얼댔다.
“제, 제가 자주 그래서…”
사실, 비상은 그게 전혀 의외로 느껴지지 않았다. 혜은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혜은은 비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민망한 듯했다. 정작 비상은 혜은보다 더 민망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 일 뒤, 둘은 다시 혜은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혜은은 여전히 그 일이 걸렸는지, 비상 쪽으로 제대로 눈길을 주려하지 않았다. 비상도 여러 까닭 때문에, 혜은한테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여성의 자취방에 자기가 함부로 들어가게 되다니.
그나마 문제는 없는 모습이었지만, 비상의 머릿속에선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혜은의 자취방 앞에 다다르자, 혜은은 이제야 뭔가 깨달았단 표정을 지었다. 마치 뭔가를 지금껏 잊고 있다가, 지금 와서야 떠올린 듯했다.
“아, 저, 정리를…”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혜은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불이 꺼져있었기 때문에, 방 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실 혜은도 비상을 자기 자취방에 데리고 오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두운데 그냥 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그래도…네. 그, 그럼…”
비상의 말에, 결국 혜은은 가만히 불을 켰다. 사방이 환해지자마자, 비상은 왜 혜은이 그렇게 망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방 여기저기에 입었던 옷 및 속옷이 퍼질러져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비상한테 보이고 싶진 않을 터였다.
“잠시 자리라도 비울까요?”
“아, 네. 그래주시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비상은 문 밖으로 나왔다. 물론 문 너머에선 혜은이 어질러진 것들을 하나둘씩 치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실 전에 강산의 집에 갔을 때도 온갖 옷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있던 걸 본지라(못본 척했지만), 지금 비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사람이란 다 비슷하구나, 란 거였다. 물론 혜은 입장에선 민망할 테고, 그렇기에 못 볼 꼴이라도 보인 듯한 다급한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잠시 소란이 있은 뒤, 혜은이 머뭇대면서 이렇게 말을 거는 게 들렸다.
“드, 들어오셔도 돼요.”
그 말에, 비상은 다시 혜은의 집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들어가보니, 정말 혜은의 방은 아까보다 깨끗하게 정리되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든 치우려 고생한 게 빤히 들여다보였다. 다만, 아무리 혜은이라 한들 자잘한 데까진 손이 가지 못했는지,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여전히 구석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방이 엉망진창이라서…”
“아뇨. 사람 사는 방이니까요.”
강산의 방을 떠올리며,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형도 조금 민망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말하면 물론 맞겠지만.
그 뒤,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상도, 여기로 도망온 뒷일은 전혀 생각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갑자기 비상을 자기 집에 들이게 된 혜은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저 너머에 벽이 있는 걸 보고 일단 이렇게 입을 뗐다.
“일단 앉을까요?”
참고로 혜은의 방엔 소파는 물론, 침대도 없었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잘 때 쓰는 걸로 보이는 매트리스가 접혀있었지만, 거기에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방석이 근처에 있어서, 비상은 그걸 등진 채 벽에 몸을 뉘었다. 혜은도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비상이 하던 대로 했다. 서로 떨어져앉긴 했지만.
그렇게 둘은, 불을 켰는데도 어둑한 방에서 조금 떨어진 채 앉아있었다. 불빛이 흐릿한 걸로 볼 때, 아마 전등이 곧 나갈 것 같았다. 잠시동안 쥐죽은 듯이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혜은은 여전히 민망한 게 남아있었는지, 비상한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될까. 그런 생각에, 비상은 뭘 좀 물어보기로 했다. 이럴 때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물을 일도 없으리라 여겨서였다.
“하나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네? 마, 말씀하세요.”
혜은은 그게 전혀 짐작치 못한 일이었는지, 또 몸을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사실 지금 물어볼 게 많은 사람은 비상이 아니라 혜은이겠지만, 아무튼 자기가 먼저 말을 걸었으므로 비상은 말을 이었다.
“제 어디가 그렇게 괜찮게 보이세요?”
“아, 네?”
“절 무척 좋게 봐주시는 거 같은데, 어딜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거기까지 묻고 나서야, 비상은 이 질문이 얼마나 여기와 안 맞는지를 몸으로 깨달았다. 아니, 안 맞는 걸 떠나서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런 걸 ‘이런 모습’으로 물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비상이 혜은을 웃기려 했다면 제대로 된 행동이었지만.
“그, 그러니까, 왜 멋있다고 생각했느냐, 그런 거죠?”
“그런 거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엔 비상이 고개를 돌렸다. 가면 갈수록 지금 이 상황이 코미디처럼 느껴져서였다. 비상은 왜 이럴 때 이런 걸 물어봤을까란 생각과 함께, 다른 사람 눈엔 이게 얼마나 우스울지에 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지금 자기가 ‘멋있다’는 말과 동떨어졌단 건 틀림없었지만.
“아, 그래도 전 지금 비상 씨가 멋있다 생각해요.”
조금 말을 더듬으면서도, 이윽고 혜은은 그렇게 대답했다. 불빛이 어둡다 보니, 그 표정은 잘 알 수 없었다. 안경을 안 써도 앞이 잘 보이는 지금에 와서도.
“그래요?”
“정말이에요. 기분 맞춰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비상이 되묻자, 혜은은 목소리에 힘을 더 줘서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아까, ‘자기 기분을 맞춰주려는 게 아닐까’라 비상이 생각했던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 비상 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아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저라면 절대 고개 못 들 거 같거든요. 혼자 민망해서. 하지만 비상 씨는 언제나 거침없이…”
거기까지 말하다가, 혜은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말을 정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모습이었다. 비상도 혜은이 지금 자길 달래려 거짓말을 하고있는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 말투가 진심이란 건 여기서도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비상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아녜요. 전…”
혜은은 또 뭔가 말하려 하다가, 역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뒤론 둘 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묵직한 곳에 가만히 있으니, 비상은 마치 시간에 질감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것만 같았다.
잠시 뒤.
“사람이 자기 이름을 걸고 사는 건 얼마나 무거운 일일까요?”
혜은은 용기를 냈는지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엔 아까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주 딴판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게 무거우세요?”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나서요. 오늘 일도 그렇고…”
혜은은 그렇게 말하며, 쑥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사실 그런 생각은 오늘 자기가 더 많이 한 것 같지만, 비상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달랑 남은 거 같아서, 모든 걸 자기가 판단해야 한다는 게 가끔 부담스러워서, 자기 이름을 걸고 산다는 무게감이 커질 때가 있어서…이상하죠? 저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다 큰 어른이라고 신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잠시 생각한 뒤,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자기자신한테 들려주는 것처럼. 혜은은 자기가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는 것도 모를 테지만.
“그럼, 비, 비상 씨도 느끼세요?”
“느낄 때도 있죠. 당연히.”
그렇게 짧게 답한 뒤, 비상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주위에서 ‘어른’으로 인정하는 나이까지 다다른다 한들, 자기 이름을 걸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바로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20대 중반 직업인인 비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자기가 ‘어른’이란 걸 받아들인 사람이 지닌 숙명인지도 모르겠는데. 혼자 그렇게 생각하던 비상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것보단 훨씬 이를 터였다. 그래, 예를 들자면 중고등학생즈음부터 천천히.
거기까지 생각하다, 비상은 저절로 피곤해짐을 느꼈다. 아마 오늘 마음에 부담되는 일이 많아서, 안 그래도 작아진 몸이 더 피곤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혜은한테 상황은 말해야하는 게 아닐까. 비상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저, 피곤하세요?”
“어떻게 아셨죠?”
마치 자기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혜은의 말에, 비상은 속으로 놀라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혜은은 조금 멋쩍은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며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고, 고개를 가끔 끄덕거리셔서…”
“아, 그랬구나.”
거기까지 티가 났단 말인가. 쓴웃음을 지은다 한들, 이미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이미 시간도 늦었으니,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자고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실례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더 큰 실례를 저지른 비상 입장에선 오히려 이게 더 마음편한 일이었다.
“그럼, 죄송한데 오늘…”
“괜찮아요. 이불은 제가 깔게요.”
그 말과 함께, 혜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비상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가는 것쯤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저 분은 자길 정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그 ‘특별함’이 어떤 감정이든, 그건 틀림없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은 잠자리 좀 빌릴게요.”
“아니에요. 저도 졸려서…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이 들리는 것과 함께, 비상은 쓰러지듯 이부자리에 누웠다. 혜은은 결국, 오늘 비상의 사정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무방심하다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
요즘들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많아지는데.
그런 의식조차, 깊은 잠과 함께 저만치 깊은 곳에 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