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4. 세계의 교차점

그렇게 병원을 나오자마자, 승혁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건…”
승혁이 놀란 건, 병원 바깥 풍경이 아니었다. 병원 밖은 자기가 창문 너머에서 보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승혁이 놀란 건 다른 것, 즉 자기자신이었다.
틀림없이 환자복을 입고 있던 자기가, 그 날 입었던 양복을 다시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옷이 딱 맞는 것만 보면 알 수 있듯,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가있었다.
하지만, 승혁이 놀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승혁은 지금, 정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 자기 또래의 남자한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 남자한테 딱히 이상한 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승혁의 눈길은, 그 남자가 쥐고 있는 핸드폰에 머물러있었다.
저 핸드폰은 틀림없이 처음보는 게 아니었다. 승혁은 저 핸드폰을 본 건 물론, 만진 적도 있었다. 심지어 만진 건 방금 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승혁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 자기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면, 혹시나, 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남자의 묘하게 천진난만한 인상은, 승혁이 기억하는 그 아이와 묘하게 비슷했다.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올 정도니, 혹시나.
틀릴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승혁은 그 사람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네?”
남자는 승혁이 더 놀랄 만큼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정면에서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애의 아버지나 오빠쯤은 될 것 같았다. 물론 열 살짜리 아이한테 이렇게 큰 오빠가 있긴 어렵겠지만.
“혹시 아까 그걸로 게임하지 않았어요? 남의 병실에서.”
“어, 어, 어떻게…”
역시나, 승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 당황해하는 모습, 우물쭈물하는 말, 어딜 봐도 자기 또래라기보단 초등학생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 아이’스러운 느낌.
잠시 생각하다, 승혁은 자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보여줬다. 그걸 보여주자마자, 남자, 아니 그 아이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이거, 누구 건지 알겠니?”
“아, 그, 어, 아니, 음…”
“거기까지 안 말해도 돼. 네 생각대로니까.”
드디어 진실을 확인한 뒤, 승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한둘이 아니었지만, 어느 걸 생각하든 머리가 지끈대는 건 마찬가지였다. 왜 병원 밖에선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그리고 이 아이는 왜.
“그럼, 나처럼…”
“아니,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라면 믿겨?”
“어…음…”
여전히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그 아이는 승혁을 빤히 쳐다봤다. 어차피 이 아이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자기 일도 믿어줄 터였다.
잠시 뒤, 그 아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지, 진짜?”
“그래. 다 진짜야.”
그 아이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승혁의 팔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물론 아프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승혁은 상당히 놀랐다.
“다, 다행이다…”
그 아이는 마치 산신령이라도 만난 눈빛으로 승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직 상황 이야긴 전혀 듣지 못했지만, 승혁도 이 아이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 팔목이 잡혀있으면, 해야할 이야기도 제대로 할 수 없을 터였다.
“일단 어디서 좀 앉을래?”
여전히 팔목을 잡고 있는 그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승혁은 이렇게 물었다.

“아, 그랬구나.”
승혁이 자기 사정을 말하자(물론 어린아이가 듣기에 좋지 않은 대목은 얼버무렸지만), 그 아이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지금 근처 벤치에 나란히 주저앉아있었다. 이야기할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됐던 거야. 내가 이런 모습이라서 무서워?”
“아니. 그런 건 아냐.”
승혁이 묻자,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병실에 있던 사람과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란 건 알아준 듯했다. 거기에 마음이 놓이자, 승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승혁은 자기 사정을 말했으니, 다음은 이 아이 차례였다.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자기를 생각하면 대충 감이 오지만, 그래도 승혁은 어느 정도 자세한 얘길 듣고 싶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된 거야?”
“아, 나는, 그…”
그 아이는 망설이면서도,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엄마를 잃어버린 건 승혁과 처음 만난 그 날인 듯했다. 어떻게든 엄마를 찾아보려고 병원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끝내 안 보였다고도 말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지만, 틀림없이 안내방송을 해준다 말했는데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반쯤 포기한 여자애는, 일단 병원을 나와보기로 했다. 그리고 병원을 나오니, 자기가 아주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집 전화번호도 없는 번호란 말만 나왔다.
밤중이라 병원에 돌아갈 수도 없어진 여자애는, 그냥 밖에서 잔 다음 내일 다시 병원을 찾기로 했다. 어쩐지 지금 ‘이 모습’으로 있는 세상은 자기가 살던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깐, 밖이라고?”
“응. 이런 벤치에서.”
“네가 무슨 노숙자야?!”
물론 지금 모습이라면 큰일은 없겠지만, 승혁은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그래서 창문 너머로 아이의 모습이 안 보였단 말인가. 여자애는 다음 날에도 병원을 뒤졌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잠깐, 병원 안에서 집엔 전화해봤어?”
“응. 근데 이상한 소음만 나고 끊겼어.”
이상한 소음이라.
잠시 생각하던 승혁은, 일단 여기가 자기가 죽 있던 그 세상인지 어떤지를 알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물론 자기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걸 아는 게 먼저였다.
지직, 지직.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가운데, 그런 소음이 핸드폰 너머에서 죽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자기는 여기서 어떻게 되어있단 말인가. 회사 동료들한테 전화를 걸까란 생각까지 하다, 승혁은 일단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아내는 물론 자기도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더 벌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이 아이까지 묘한 일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땠어?”
“어제랑 똑같았어. 병원에서 나오면 이런 모습이 되어있고…오늘도 벤치에서 자야 하나?”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승혁은 이제,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돌아가면, 자기는 또 그런 모습으로 바뀔 터였다. 그렇다고 이 아이를 이런 모습으로 이런 데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를 어쩐다.
그 생각이 멈춘 건, 갑자기 뒤에서 누가 이렇게 말을 걸어왔을 때였다.
“어유. 복합세계는 처음이지?”
“대, 댁은 누구야?!”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승혁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상대방은 여기에 놀라리라 생각도 못했는지, 오히려 승혁을 보고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승혁을 더 열받게 만들었다.
“댁은 누구냐니까?”
“거 참.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냐? 그냥 못 본척할 수도 있었구만.”
“이 인간이 진짜…”
참고로 상대는 2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여성이었는데, 가슴께에 가깝게 기른 보랏빛 머리카락을 말총머리로 묶은 뒤, 조금 파란빛이 도는 흰 티에 청바지라는, 담백하기 이를데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좀 날서긴 했지만, 자길 어떻게 하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기보다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승혁은 이 여자한테서 묘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여성의 눈빛은 흥미진진한 편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이 여자는 춥지도 않나.
2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지만, 승혁은 아직 날씨가 풀리려면 한참 멀었단 걸 알고 있었다. 저런 옷차림으로 밖을 나돌다니, 대체 추위에 얼마나 세단 말인가. 사람이 아니면 모를까.
“인간이라니. 아니, 틀린 말도 아니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여성은 신이라도 났는지, 손가락으로 승혁을 가리켰다. 마치 세상의 진리라도 알려주겠단 듯한 시원시원한 모습이었다.
“나는 인간이라기보다 흡혈귀지. 그래, 야생흡혈귀.”
“뭐?”
어이없어하는 승혁과 달리, 그 아이는 ‘진짜?!’라며 무척 신기해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 끝에 만난 사람이 흡혈귀라니.
“이제 현실이 얼마나 댁 생각과 다른지는 받아들여야하지 않겠어?”
“그래. 그건 받아들이지. 흡혈귀란 개념은 도무지 못 받아들이겠지만.”
“거 참. 아프게 안 해요. 그냥 가끔씩 비타민제처럼 피를 마시는 것뿐인데. 야생이지만.”
“뭐가 야생이야?!”
“흡혈귀쯤이면 등에 ‘야생’이라 적힌 검정패딩쯤은 입어야하는 거 아냐? 오늘은 놓고 왔지만.”
“이게 지금 장난하나…”
승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자칭 야생흡혈귀라는 여성은 나름대로 진지한 모습이었다. 사실, 이런 망할 상황이라면 흡혈귀는 물론 천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뭐, 정식으론 방랑흡혈귀라 하는데, 난 야생이란 말이 좋거든. 원래 흡혈귀는 야생에서 거칠게 사는 존재잖아. 뭐야, 표정 왜 그래?”
“갑자기 나타나서 남 휘저어놓고 그런 말이 나오냐?!”
승혁이 아무리 화를 내도, 그 흡혈귀인가 뭔가하는 여성은 아무 상관없단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둘, 특히 승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 참. 누가 엘리트 아니랄까봐 성격도 참 모났네. 모처럼 복합세계를 멀리서 구경하다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 데가 있어서 놀라와본 거뿐인데.”
“…구경?”
“그래. 댁들은 전혀 모르는 거 같아서 자원봉사할 겸 말해주러 왔는데, 하지 말까?”
“자, 잠깐. 그걸 왜 먼저 안 말한 거야?”
“내 맘이지. 그건.”
이제 승혁은 더 할 말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저 망할 여자를 믿는 수밖에 없어서였다. 자기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방은 승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럼 말해 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디 보자.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이제 여성은, 아무렇지 않게 승혁과 그 아이 사이에 끼어들어가있었다. 언제 앉은 거야?라 생각하면서도, 승혁은 그 여성이 꺼내드는 핸드폰을 가만히 쳐다봤다.
“일단 이걸 봐.”
여성이 보여주는 영상을, 승혁과 그 아이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거리처럼 보이는 큰 길에 차들이 나다니는 영상이었다. 아주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든 차들이 제멋대로 다니고 있는데도 사고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차가 다니고 있는데도 부딪치는 차 하나 없다니, 이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때. 자기가 아무 생각없이 쓴 엉망진창인 코드가 멀쩡히 돌아가는 거만큼 신기하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영상에 같이 붙어있던 말. 댁은 프로그래머가 아니라서 잘 모르나?”
“아무튼, 결론이 뭐야?”
승혁이 다시 화를 내자, 여성은 ‘어유, 무서워 죽겠네’란 표정으로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둘을 번갈아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냈다.
“만약 세상도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면, 어떨 거 같아?”
“뭐?”
“그러니까 수많은 세상이 있는데, 그 세상들이 멀리서 보면 이런 식으로 서로한테 영향을 안 미치고 돌아다니는 거라면 어떠냐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나?”
승혁은 이제, 이 여성한테 말로 이기는 건 무척 짜증나는 일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의 말은 거의 다 맞았던 것이다.
“아까 말했지? 멀리서 보면 수많은 세상이 있다고. 그 세상들은 원래라면 절대 서로 겹치지 않아. 아슬아슬하게나마 서로 비켜가니까. 그래서 여기가 특이한 거지. 세계의 특이점 아냐, 여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옆에 있는 친구는 가만히 듣고 있는데, 어른이 이게 뭐람.”
“아무튼 결론을 말해. 어떤 상황이지?”
승혁이 대놓고 화내자, 여성은 ‘아무튼 못말린다니까’란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망할 표정이 승혁을 더 열받게 만들었지만, 일단 지금은 참기로 했다.
“복합세계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야. 유사세계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자기 궤도를 빙글빙글 도는 거 말이지. 물론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만.”
“유사세계?”
“그래. 모든 세계는 대개 비슷해. 조그만 차이가 좀 크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세계라 말할 것까진 아니지. 그렇다고 병렬세계도 아니야. 아무리 작은 차이라 해도, 세계들은 따로 떨어져있거든.”
“그래서 유사세계라 하는 건가?”
“그래. 아마 댁이 두 눈으로 보면 알겠지만, 거의 비슷한 세계를 이세계라 할 수도 없잖아?”
너무나 현실과 빗나간 말이었지만, 승혁은 그 말에 묘한 설득력을 느끼고 있었다. 여성 말대로, 자기가 말도 안 되는 걸 직접 겪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진짜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아무튼 이렇게 자기만의 궤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니는 세계들을 세계군이라고 해. 즉 세계들의 모음이지. 복합세계란 말이 많이 쓰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이런 말을 쓸 때도 있어.”
“그래서?”
“여기부터가 재밌는데 말이야. 혹시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말도 안 된다고?”
너무나 새삼스러운 말이라서,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있었다. 승혁한테 있어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서였다. 하지만 여성은 ‘이 사람도 얼빠진 데가 있네’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모든 유사세계는 절대 부딪치지 않는다고.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서로 겹치거나 부딪칠 일은 전혀 없어. 그런데 지금 세계 두 개가 하나로 겹쳤단 말이지. 저 병원을 특이점으로 해서.”
“…특이점?”
“그래. 누가 일부러 서로 다른 세계 두 개를 겹쳤단 말이야. 그게 누군지, 내가 안 말해도 알 거같지 않아?”
“이런 망할…”
승혁은 이제야, 그 날 본 남자들을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하면, 복합세계란 말도 그 남자들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한다 한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단한 놈들이지. 세계군을 자기 멋대로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뭐, 자기들이 남들보다 더 잘나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 같은데…”
“그럼, 이 모든 게 그 놈들 짓이란 말이야?”
“그렇지. 근데 댁을 물먹이려고 한 건 아냐. 이건 장담할 수 있지. 그 놈들 적은 따로 있거든.”
“뭐?”
“자세한 건 좀 뒤에 말하는 게 낫겠네. 지금 이것도 간신히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냐? 나처럼 복수세계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 말대로였다. 승혁의 머리는 지금 무척 복잡했다. 29년에 가깝게 만들어졌던 ‘현실’이란 상식이, 지금 아주 종이조각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지적해야 할 게 있는 것 같지만, 도무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댁도 머리가 아파서 물어봐야 할 것 중 하나를 까먹은 거 같은데, 이건 정말 예외에 가까운 상황이야. 내가 말했지. 세계들은 각자 정해진 궤도를 돈다고. 그리고 그 궤도는 아슬아슬할지 몰라도 절대 부딪치지 않는다고. 그런데 지금 세계 두 개가 겹쳐졌단 말이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알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이 애랑 댁이 있던 세상은 하나로 묶여있는 거야. 물론 원래 옆에 있었으니까 이렇게 될 수 있었겠지만, 두 세계가 원래 가야 할 궤도를 벗어났단 말이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지금 두 세계는 서로 위아래로 붙은 자동차같은 거야. 물론 다른 세계랑 부딪칠 일은 없겠지만, 두 세계 다 원래랑 다른 궤도로 나아가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위아래로 겹쳐있는데, 원래 나아가야 할 궤도를 서로 지나가지 않고 있단 말이지?”
“그렇지. 세계 자체가 변질됐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 아주 다른 세계 둘을 억지로 붙인 느낌. 물론 다르다곤 해도 유사세계니까 분별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런데 왜 사고가 안 나는 거지? 궤도가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두 세계는 서로 비슷한 궤도를 다녔거든. 그러니까 원래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두 세계 다 ‘원래랑 비슷한’ 궤도로 다니는 셈이지. 그러니까 다른 세계랑 부딪칠 일도 없는 거야. 물론 이상한 상황이지. 댁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런 짓을 해서 뭘 얻으려는 거지?”
“그 망할 놈들을 물리치려는 존재가 있거든. 그 존재를 깔아뭉개려다 댁한테 잘못 간 거겠지. 그래서 계획하곤 다르지만, 아무튼 세계를 하나로 붙인 것일 테고.”
“나 하나 때문에?”
“아니. 댁은 뭔가 착각을 하는 거 같은데…”
이쯤되자, 여성은 아주 안됐단 표정으로 승혁을 바라봤다. 지금껏 유능하단 말만 들어온 승혁한테, 그런 눈빛을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슨 착각이란 말이야?”
“댁이 뭔가 대단한 존재라 착각한단 말이지. 물론 그럴 거야. 댁 세상에선 엘리트였으니까. 하지만 복합세계를 아는 사람한테 그깟 엘리트가 대단하게 보일 거 같아?”
“뭐?”
“그러니까.”
여성은 이제 말하는 것도 번거롭다는 듯, 승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댁 때문에 세계의 특이점이 생긴 게 아니란 거야. 모든 건 그 ‘존재’랑 맞서려고, 망할 놈들이 한 짓이란 말이지. 물론 댁은 안중에도 없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