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3. 엉뚱하지만 평온한 일상

“언니, 오늘은 이거 같이 하자.”
다음 날 아침에도 여자애가 자기 병실을 찾아오자, 승혁은 깜짝 놀랐다. 어제 엄마와 같이 집으로 돌아갔던 게 아니었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엄마는?”
“안 보여. 오늘도 찾아보려구. 언니랑 놀고 나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승혁의 머리를 스쳤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여자애랑 놀아주는 게 낫겠다고 승혁은 생각했다.
“어제 그걸 또 하려고?”
“아니, 언니는 어제 했어?”
“그래. 네가 한 만큼은.”
그런 말과 함께, 승혁은 자기 핸드폰을 여자애한테 내보였다. 이런 걸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우아. 언니도 거기까지 갔네.”
여자애는 놀라더니, 이윽고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거기엔 어제와 다른 새로운 게임이 띄워져있었다.
“그건 뭐야?”
“요즘 나온 게임. 처음 몇 판까진 공짜야.”
“그래?”
그 게임이 공짜인지 어떤지엔 관심이 없었지만, 할 일도 없었던 승혁은 그 게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은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자기도 초등학생 시절,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 게임을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승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여자애는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이 게임은 어제 그 게임처럼 앞으로 나아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되는데, 이전 게임과 달리 시간제한이 있으며, 특수한 보석같은 걸 먹으면 스테이지가 바뀌는 듯했다. 시험삼아 승혁의 옆에 앉은 여자애는, ‘나도 이건 며칠 전에 받았는데’라면서 게임을 해보였다.
여자애가 게임을 하는 걸 보자, 승혁은 자기가 어릴 때 했던 그 게임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화살표를 안 눌러도 알아서 앞으로 뛰어간다는 것이었다. 핸드폰으로 하려면 그게 더 편하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거 봐, 여기서 뛰면 버섯 나온다. 먹으면 몸이 커져. 신기하지?”
“그래. 신기하다.”
어릴 적 게임을 해서 잘 알고 있지만, 승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 아이한테는 모든 게 새로우리라 생각해서였다. 승혁은 아직 자식을 두지 않았지만(계획도 없었지만), 이 아이의 부모님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기쁨이겠구나, 라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나, 아직 보석 다 못 모았어. 다 먹는 게 힘들어서…”
“나보고 해보라고?”
승혁의 말에,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이 여자애는 승혁을 진심으로 믿고있는 듯했다. 물론 게임에 관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응. 난 아직 잘 못해서.”
“뭐, 나도 지금이 처음이지만…”
어제 여자애가 하던 걸 떠올리면서도, 승혁은 그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이 게임은 어릴 적 봤기 때문에, 어제 했던 것보단 훨씬 알기 쉬웠다.
요즘 게임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며, 승혁은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겼다.

“자, 이제 알겠어?”
한 스테이지에서 보석 다섯 개를 다 모은 뒤, 승혁은 그렇게 물었다. 조금 어렵긴 했지만, 생각보다 쉬운 편이었다. 오히려 옛날 생각이 나서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다.
자기가 이런 식으로 게임을 생각할 수 있게 되다니. 복잡한 마음이긴 했지만, 아무튼 승혁한텐 좋은 일이었다.
“우아. 언니 게임 잘한다.”
“글쎼. 난 잘 모르겠는데…”
자기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쳐다보는 여자아이를 보며, 승혁은 눈길을 돌렸다. 이런 아이와는 좀 다른 상황에서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까, ‘언니’라 안 불려도 되는 상황에서.
“그럼 나 엄마 찾아보고 올게. 언니는 게임하고 있어. 알았지?”
“왜 내가 그 게임을…”
승혁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여자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승혁은, 이번엔 저 애가 엄마를 무사히 찾아낼 수 있을까, 란 생각에 잠시 빠졌다.
찾아보고 온다니, 엄마를 찾은 뒤엔 어쩔 생각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결국 눈앞에 있는 핸드폰을 쥐었다. 어쩐지 저 아이의 말은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언니!!”
여자애가 다시 들어온 건, 노을이 막 질 무렵이었다. 여자애 빼고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여전히 엄마는 찾지 못한 듯했다.
“엄마는?”
“못 찾았어. 근데 이거 봐라?”
“뭔데?”
승혁은 여자애가 가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승혁도 여자애가 없는 사이 게임을 조금 했기 때문에, 무료로 할 수 있는 스테이지는 모두 클리어한 상태였다. 보석 다섯 개는 그 뒤로 아슬아슬하게 못 먹고 있었지만.
하지만, 여자애가 보여주는 건 또 승혁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 이거 다 깼다? 그리고 보석도 다 모았어. 이거 봐라.”
“…뭐?”
승혁은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 아이와 헤어진 지 고작 네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자기는 여기까지밖에 못 했는데.
“자, 봐.”
화면을 보자, 여자애 말대로 세 스테이지가 모두 클리어돼있었다. 게다가 이 역시 여자애 말대로, 보석 모두 깔끔하게 모아져있었다. 보석 다섯 개를 모으면 새로운 보석 다섯 개가 나타나는데, 이것마저 다 채워져있었다. 다행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보석을 다 모으면 나타나는 마지막 보석은 다 모으지 않은 채였다.
“대체 언제 다 모은 거야?”
“엄마 찾다가. 중간중간에 의자 앉아서 했어.”
“아, 그래?”
승혁은 이제, 자기가 게임에 관해선 이 친구한테 두손두발 다 들었단 걸 느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잘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기도 깊게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여기고 있었는데.
“다른 스테이지도 하고 싶은데 그건 유료래. 아빠가 쓸데없는 데 돈쓰면 안 된다 했는데.”
“아, 그래…”
멍하니 있던 승혁이 신기했는지, 여자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승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제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대는 걸 느꼈다.
“근데, 언니 이름은 뭐야?”
“어?”
이 역시 갑작스런 질문에, 승혁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상황에서 그걸 입에 담아야 하나. 하지만 여자애가 저걸 묻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최승혁.”
“우아. 이름 멋있다.”
“그래?”
승혁은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자기 이름을 입에 댄다는 게 묘하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애의 반응은 승혁의 생각과 달랐다. 어쩐지 승혁은 지금, 그게 묘하게 고마웠다.
“근데 언니, 머리 안 묶어?”
“어?”
그 말을 듣고서야, 승혁은 자기 머리카락이 ‘묶을 수 있을 만큼’ 길단 걸 깨달았다. 머리를 기르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지금껏 그걸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나 머리끈 있는데, 묶어줄까?”
“아, 뭐…”
승혁이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망설이자, 여자애는 승혁의 뒤쪽으로 돌아서더니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원래 머리를 묶는다는 건 이런 건가. 당연히 이런 경험은 없기에, 승혁은 묘하게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여자애는 이런 데 익숙한지, 승혁의 머리카락을 한묶음 잡고는 끈으로 깔끔하게 묶어줬다. 아무리 머리를 기른 적이 없는 승혁이라도, 이런 꽁지머리가 훨씬 더 편하단 건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 긴 머리카락도 아니라서, 정말로 ‘꽁지’머리이긴 했지만.
“와, 언니. 이거 뭐야?”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여자애가 이런 말을 걸어왔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그 쪽을 보니, 자기 왼손 약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있었다.
그걸 보자, 승혁은 가슴이 멎는 걸 느꼈다. 왜 이걸 이제 깨달았을까. 훨씬 더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 일인데.
“아, 맞다. 혹시 언니 남자친구 있어? 그래서 낀 거야?”
“그, 글쎄. 어떨까…”
사실 애인을 넘어 결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승혁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꺼내도 설명하기 어려울뿐더러, 자기 비참한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된 걸까. 자기 일 챙기기에 바빠서, 차마 거기까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좋겠다, 언니. 그지?”
“아, 뭐…”
승혁은 자기답지 않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에 맞춘 반지였을 텐데, 지금 이 손가락에도 딱 들어맞아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노을이 들어오는 병실에서, 승혁은 이를 악물고 화나는 마음을 참아야만 했다. 뒤에 있는 여자애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여자애가 다시 사라진 뒤, 잠시 생각하던 승혁은 다시 핸드폰을 잡았다. 자기도 저 여자애한테 질 수 없다 생각해서였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지금껏 눈길도 안 줬던 게임이 승혁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저 여자애한테 받은 도움도 크지만.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걸 다 모을 수 있는 거지?
일단 첫번째 보석은 세 스테이지에서 다 모았지만, 두번째가 문제였다. 엉뚱한 데에 숨어있을 때가 많아서, 찾는 것부터 힘들었던 것이다. 설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애는 잘 돌아간 걸까.
사실, 승혁은 아까부터 그게 죽 신경쓰였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이틀이 넘도록 부모님을 찾을 수 없단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자애가 돌아다니는 곳은 놀이공원도 뭣도 아닌 그저 병원이었다. 물론 큰 병원이긴 했지만, 이런 곳이라면 부모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일단 아까 엘레베이터를 타는 건 봤는데, 그럼 지금쯤은…
승혁은 창가로 다가가, 병원 정문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개 정문으로 나다니는 사람들이 많기에, 여자애가 나간다면 저 쪽으로 나올 게 틀림없었다. 일단 입출구는 다른 데에도 있었지만, 그 쪽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드물다는 말을 어제 간호사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애는 나오지 않았다. 여자애가 틀림없이 ‘그럼 나 갈게’라고 말했으니, 만약 나간다면 이리로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10분, 20분, 40분,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애의 모습은 여기에서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잘못 본 건가.
괜히 그 여자애가 걱정돼서, 승혁은 가만히 일어났다. 그 여자애가 부모님을 만났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돌아가는’ 데가 어디인가, 그게 알고싶었던 것이다.
벌써 날도 어두워지려는 늦겨울에, 승혁은 복도를 나와 로비 쪽으로 내려갔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탓에 가끔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승혁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환자도 뭣도 아니니, 이런 걸 가지고 망설일 까닭은 이만큼도 없었다.
로비에 다다른 승혁은, 여자애가 입구 옆에 서있는 걸 알아챘다. 그럼 아직 안 나간 건가. 하지만 주위에 부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는 걸 볼 때, 오늘도 혼자였던 듯했다.
하지만 여자애는 승혁이 있단 걸 모른 채, 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걸 따라잡으려던 승혁은, 순간 뭔가 중요한 걸 깨닫고 멈칫했다.
틀림없이 거기에 있던 여자애가, 문을 넘어서자마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승혁이 눈을 몇 번 깜박거려봐도, 그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헛것을 봤나.
그런 생각이 들자, 승혁은 자기도 모르게 문 너머로 뛰어가고 있었다. 주위에선 좀 눈에 띌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진짜 환자도 아닌 승혁한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승혁은,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자기 생각이 제발 틀리기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