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2. 엉뚱한 일상

승혁은 맨 처음,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짐작한 일도 아니었다. 여자애는 그런 승혁의 마음도 모른 채, 자길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나이 또래다운 치마와 스웨터가, 여자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엄마라고?”
“응. 우리 엄마가 안 보여. 나랑 여기까지 왔는데.”
여자애의 모습을 보니, 이미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닌 듯했다. 대체 이 병원에선 길잃은 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한단 말인가. 속으로 투덜대며, 승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에만 있어서 모르겠는데.”
“그럼 언닌 우리 엄마 몰라?”‘
“당연히…아니 그게 아니라…”
승혁의 말문이 막힌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무렇지 않게 ‘언니’라 불렸단 걸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것도 다 그 놈들 탓이란 생각에, 승혁은 마음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난 모르니까 다른 데에…”
“근데, 언니는 혼자 있으면 안 심심해?”
“나만 1인실을 쓰는 것도 아닐 텐데, 뭐가?”
자기가 생각해도 담담하기 이를데없는 말투로 승혁은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자기는 가만히 생각하면 환자도 뭣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놈들 때문에 이런 소꿉놀이에 말려든 것뿐이었다. 물론 할 일이 없는 건 맞았지만.
“그럼 나, 엄마 못 찾으면 여기 다시 올게.”
“그럴 것까진…”
“안녕!”
승혁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 여자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겨진(물론 원래 혼자였지만) 승혁은, 마치 귀신에라도 씌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의 병실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그 생각이 든 건, 여자애가 사라진 지 한참 지나서였다.

그것도 잊어버린 채, 승혁이 쓸모도 없는 핸드폰을 만지작댈 때였다.
“언니, 나 왔어.”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짓, 즉 핸드폰으로 시간때우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즈음, 그 여자애는 다시 승혁 앞에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저녁에 가까워져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안 보여.”
여자애는 고개를 저으며, 승혁이 있는 병실 안으로 가만히 들어왔다. 아마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꽤 지친 듯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면, 아직도 어딘지모르게 생기가 넘쳤다.
어린아이니까 그렇겠지. 승혁은 그런 생각과 함께, 자기 침대로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애를 봤다.
“여긴 왜 왔어?”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함부로 들어와도 돼?”
“나 여깄음 안 돼?”
그 말에, 승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아이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는 승혁도 물론 모르지만, 차라리 돌봐주기라도 하는 게 핸드폰을 만지는 것보단 더 유익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돌봐준다고 한들 별 도움도 안 되겠지만.
“잠시만이다. 알았지?”
“응. 근데 언니는 핸드폰 있어?”
침대 한쪽에 앉은 여자애가 다짜고짜 그런 말을 꺼내자, 승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핸드폰을 안 만지려 이 아이와 같이 있으려 했는데, 엉뚱한 질문이 날아와서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핸드폰으로 게임하자, 우리.”
“뭐?”
이 말에 승혁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핸드폰은 물론, 다른 게임조차 안 한 지 몇 년이 되어가서였다. 어릴 적에야 조금은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대학생이 되면서, 승혁과 게임은 점점 멀어져갔다. 승혁은 요즘 무슨 게임이 나오는지조차도 잘 몰랐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갑자기 게임은 왜?”
“나, 핸드폰 갖고 게임하는 거 무지 좋아하거든.”
“아, 그래?”
승혁은 고작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거야 저 나이쯤 되는 아이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즘엔 모바일용 게임이 대세이니, 핸드폰으로 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혁과 게임은 어떻게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승혁 자신도, 핸드폰은 들고 다니지만 게임은 안 한 지 오래 된 사람이었다. 물론 이 아이가 그걸 알 리 없지만.
“난 게임을 안 하는데.”
“진짜? 이렇게 재밌는데?!”
승혁의 말에, 이번엔 여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없단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실 이 아이라면, 아직까지 그걸 믿는다 한들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뒤에 여자애가 꺼낸 말은 승혁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럼 이거 한 번 해보자. 응?”
“뭐?”
승혁이 어이없어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자기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보였다. 요즘엔 초등학생들도 이런 걸 갖고 다니나. 새삼스럽게 그런 걸 생각하며, 승혁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 이 게임 좋아하는데, 언니는 이거 해봤어?”
“그러니까 난 게임을 안 한다고…”
라고 말하면서도, 승혁은 여자애가 보여주는 게임을 가만히 바라봤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승혁은 처음 보는 게임이었다. 여자애의 말에 따르면, 아빠가 사줬다는 듯했다.
핸드폰 너머엔 눈덮인 산속으로 보이는 풍경과, 라마처럼 보이는 걸 지키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분위기는 좋은데. 승혁이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여자애가 이런 말을 걸어왔다.
“근데 난 이거 잘 못해. 만날 죽어.”
“무슨 게임인데?”
승혁이 묻자, 여자애는 승혁 옆으로 다가와선 가만히 앉았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한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승혁은 순간 깜짝 놀랐다. 어차피 자기는 진짜 환자도 아니니 상관없겠지만.
“스키타고 죽 가는 게임인데, 만날 쫓길 때 죽어. 아님 절벽에 빠져서 죽거나.”
“자주 하면 되지.”
“그럼 언니는 할 수 있어?”
이 말에, 승혁은 말문이 막혔다. 말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자기가 한다고 치면 정말 그럴지는 보증할 수 없어서였다. 물론 승혁은 대개 뭐든 잘 했지만, 십 년 넘게 담을 쌓아온 게임까지 잘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줘 봐. 어떻게 하는 거지?”
“그냥 화면을 누르면 뛰고, 이걸 먹으면…”
“그렇단 말이지?”
여자애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손에 쥐며, 승혁은 그 게임이 어떤 식인지를 파악했다. 어쩐지 어릴 적 하던 게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게임이야 거의 비슷하겠지만.
“어디 보자…”
승혁은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손가락으로 눌러 게임을 시작했다. 주인공이 스키를 타고 산을 넘고 있는데, 장애물이나 그런 걸 피하면서 점수를 올리면 되는 듯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기에, 승혁은 바로 적응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게임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승혁의 게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화면을 보던 사이, 갑자기 나타난 큰 절벽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다음 번엔 행운이 있기를’ 같은 말을 보면서, 승혁은 오랜만에 욱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 언니도 거기서 죽네. 어떡해야 돼?”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는 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이 얘는 내가 시범을 보여줘야 아 그렇구나, 라 말해줄까.
결국 승혁은, 자세를 바로잡은 뒤 핸드폰을 양손으로 잡았다. 적어도 시작한 지 20초만에 죽는 일만은 없기 위해.

“자, 알았어?”
어느 정도 갈 때까지 간 뒤에야, 승혁은 뒤에서 구경하던 여자애한테 말을 걸었다. 무척 잘했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20초 안에 죽진 않았을 터였다.
“우아, 언니는 5천미터나 갔네.”
“그냥 잘 보고 잘 뛴 다음 잘 피하면 돼. 이게 어려워?”
“아니,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애.”
그렇게 말한 뒤, 여자애는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선 게임에 집중했다. 아마 승혁이 하는 걸 보고, 대충 이렇게 하는 거라 감을 잡은 듯했다.
승혁도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 싫진 않았다. 산 속을 달린다는 느낌도 좋았고, 백플립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이 여자애는 자기가 말하기 전까지 백플립하는 법도 몰랐지만.
아무튼 잘 됐다고 치자. 지금은.
그런 생각과 함께, 승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별 것도 안 했는데, 묘하게 졸려왔던 것이다.

“언니, 언니!”
누가 흔들어깨우는 바람에, 승혁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 그 여자애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무척 들뜬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거 봐라. 나 여기까지 갔다?”
“뭔데…어?”
방금 눈을 뜬 참인 승혁은, 멍하니 그걸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잠깐 게임을 만진 승혁이라 한들, 지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자기한테 보여주기 전까진 고작 10쯤 됐던 레벨이, 고작 두세시간만에 40에 다다라있었던 것이다.
“너, 이 게임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응. 10까진 아빠하고 같이 했어. 나는 잘 못 해서. 근데 언니가 하는 걸 보니까 알 거 같아서…”
“그렇다고 여기까지 올라가?”
“그냥 하니까 되던데. 나 라마도 얻었다?”
“…라마?”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은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를 쓸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아마 레벨 10에 다다를 때마다였을 테니, 벌써 이 아이는…
“라마 너무 귀엽다. 그지?”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승혁은 이제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자고있던 두시간 동안, 이 아이는 대체 얼마나 게임에 깊이 빠졌던 걸까? 이런 게임엔 운도 따라야 할 텐데, 설마 이게 다 우연은 아니겠지?
물론, 승혁이 이렇게 혼자 생각해봤자 나올 답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승혁은, ‘그럼 나 갈게’라고 손을 흔드는 여자애를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무슨 게임이 이렇게…”
결국 승혁은, 밤이 깊은 지금도 자기는커녕 일어나서 그 게임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여자애의 핸드폰은 이제 없으니, 자기가 알아서 내려받은 것이었다.
대체 난 어떤 존재가 되어있기에 유료 앱을 받을 수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혁은 자기로선 참 드물게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 어쩐지 여기서 여자애만큼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무척 분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바보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였는데 게임이나 하고 있고.
그런 생각도 조금 했지만, 이내 승혁의 머릿속에서 그 마음은 싹 사라졌다. 아무튼 자기는 여자애를 이겨야 하는 것이다. 지금껏 누구한테나 인정받았던 승혁이, 고작 게임을 가지고 자기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린 여자애한테 질 순 없으니까.
그런데 이 게임도 생각보단 더 어려운데.
아까와 달리, 지금 승혁은 무척 진지했다. 그런데도 여자애가 클리어했던 2시간은 도무지 해낼 수 없었다. 결국 승혁은, 지금 4시간에 걸쳐 한가지 게임에 빠져있었다. 지금껏 게임을 제대로 잡은 적이 없다시피했는데도.
그런 승혁이라 한들, 그래도 유능한 덕택인지 레벨 39까지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운도 받쳐줬지만, 그 전에 승혁이 온갖 노력을 다한 결과였다. 여자애만 아니었다면, 승혁의 기록 역시 대단하긴 했을 터였다.
그리고, 몇 번을 거듭해서 게임을 하고 또 한 끝에.
“나왔다…”
원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것같기도 한 낮은 목소리로, 승혁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드디어 여자애가 다다른 레벨까지 온 것이다. 이런 걸로 기뻐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쩐지 승혁은 지금 마음이 무척 편했다.
그래서, 이게 라마란 말인가.
승혁은 반쯤 지친 눈빛으로, 그 라마인가 뭔가하는 새 캐릭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면, 저 라마란 캐릭터는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 천진난만한 아이라면 무척 좋아했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 저 라마를 보려고 게임에 빠졌을 가능성도 무척 높았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해서 좋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승혁은 이미 목표에 다다른 게임을 아무 생각없이 되풀이했다. 라마가 밤에도 낮에도 스키를 타고 산을 누비고 있었다. 그 우습지만 어쩐지 묘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게, 지금 승혁의 처지와 똑같았다. 물론 저 라마는 자기처럼 비참한 기분이 아닐 테지만.
그런 식으로, 승혁은 잠이 올 때까지 그 게임만 붙잡고 있었다.
라마가 라마를 잡으러 스키를 타고, 더블백플립을 하고, 윙슈트로 하늘을 날기도 하는 희한한 세상을 오랫동안 바라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