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1. 소꿉놀이같은 현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혁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맨 처음, 승혁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치 기나긴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개연성이 없는 현실이었다. 자기가 아까 봤던 건 꿈이 아니란 말인가. 여기에 자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자기가.
“이게 현실인가…”
자기도 모르게, 승혁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온 자기 목소리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사람은 어딘가에 자기 목소리를 녹음하면 실제와 다르게 들린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 승혁이 들은 자기 목소리는 ‘실제와 다르게’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기 목소리를 녹음한다 한들, 이렇게 ‘높게’ 느껴지진 않을 테니까.
주위를 둘러보다, 승혁은 이윽고 자기 모습을 살폈다. 물론 거울도 뭣도 없었기에, 그저 손으로 여기저길 더듬어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방금 그 일이 꿈이 아니란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머리카락은 어깨를 살짝 넘길 만큼 길지 않았다.
게다가, 그다지 느끼고 싶지 않은 가슴팍의 이 느낌은.
승혁은 얼른 주위를 더듬어, 여기가 어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자기가 누워있던 곳은 틀림없는 침대였으며, 자기가 입고있는 옷도 환자복이 틀림없었다. 일단 1인실로 보이긴 하지만, 대체 왜 자기가 여기에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놈들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내 몸이 정말 아픈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승혁은 생각 끝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놈들이라면, 자기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억지로 병원에 밀어넣는 것쯤은 가볍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어제 퇴근하기 전까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승혁은 코웃음쳤을 터였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은 승혁이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부조리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가 어제, 그리고 지금 겪고있는 일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긴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한참 생각하던 승혁은, 결국 주위에 있던 손거울을 가만히 쥐었다. 아무리 보기 싫다 한들, 확인할 건 확인해야 해서였다.
그렇게 손거울을 들고 자기 자신을 보자.
“…”
승혁은 정말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보통 때라면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지금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채 거울만 가만히 보고있을 뿐이었다. 거울 너머에 있던 자기가,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어서였다.
거울에 비친 승혁은, 아무리 봐도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머리카락을 가진, 그것도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애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혁의 인상이 전과 아주 딴판이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승혁은, 거울 너머에 비친 자기가 틀림없는 최승혁이란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상 자체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만약 자기한테 여동생이 있다면 이와 비슷하리라 승혁은 장담할 수 있었다. 굳은 의지가 담긴 눈빛이나 표정이 자기자신 그 자체라서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승혁은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어떤 걸 봐도 동요하지 않는 승혁이었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현실과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자기자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승혁을 더더욱 당황스럽게 하고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거울을 보기 전부터 승혁은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짐작하는 것과 ‘두 눈으로 보는’ 건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틀림없이 자기는 맞지만 중요한 게 달라진 자신. 승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천천히 손으로 몸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대충 짚어봐도, 자기 몸집이 줄었단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대체 그 놈들이 자기한테 뭘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원래 모습보다 팔다리가 더 가늘어졌단 건 틀림없었다. 피부가 묘하게 새하얀 것도 승혁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혁을 화나게 했던 건 그딴 것들이 아니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
마치 자기자신이라도 떠나보낸 듯한 허무감에, 승혁은 한참동안 앞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간호사가 상황을 보러 자기 병실 문을 두들기기 전까진.

그로부터 하루쯤 지나서, 승혁은 자기가 놓인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병원에 입원한 상황이었다. 말을 들어보면 입원할 때도 최승혁이란 이름이었으며, 나이는 지금 모습과 맞게 적혀있는 듯했다. 하지만 대체 어디가 아픈지는 승혁도 알 수 없었다. 일단 몸은 예전처럼 건강한데, 간호사들은 마치 조금 큰 병에 걸린 것처럼 승혁을 대했다.
이것도 그 놈들 짓인가.
어제처럼 병실 침대에 가만히 앉은 채, 승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기한테 남겨진 거라곤, 이 휑한 곳과 일단 원래 쓰고있던 핸드폰뿐이었다. 다만 시험삼아 걸어본 연락처가 없는 번호로 나오는 걸 볼 때, 이걸로 뭔가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았다. 핸드폰 일정 앱에 남겨진 자기의 ‘오늘’ 스케줄만이, 최승혁이란 사람이 어제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존재했단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아니, 올 일이 없을 터인 병실.
마치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에 말려든 듯한 느낌으로, 승혁은 조금 멀리 떨어진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승혁은 이 병원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알게 된 건, 여기가 꽤 큰 병원이란 것이었다.
나를 두고 세상이 자기 멋대로 돌아가다니. 이런 걸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란 말인가.
회사에서 인정받아온 엘리트였던 승혁은, 그 생각만 하면 몸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자기가 ‘여고생’으로 기록되어있는 이 병원에서, 승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어떻게 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자기자신.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다시 승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껏 온갖 위기를 겪어온 승혁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경험을 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자기 혼자 외딴 곳에 남겨진 느낌.
하지만, 설사 무인도에 남겨졌다 해도 이렇게 허탈하진 않을 것 같았다.

똑똑.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간호사인가.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는 듯한 그 느낌이, 승혁은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내민 사람은 간호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승혁이 가장 짐작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언니. 우리 엄마 어딨는지 알아?”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온 건, 이제 열살에서 열한살쯤 되었을 법한 양갈래머리 여자아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