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X POINT 0. 압도적인 갑과 부조리한 을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부조리한 일과, 자기가 그 부조리에 맞서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다 뭐야?”
그 남자, 최승혁이 ‘그걸’ 보자마자 처음 내뱉은 말은 그러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있어서였다.
이제 막 결혼한 참인 자기 아내가,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들한테 사로잡혀있었다.
물론, 승혁은 이 현실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풍경이 너무나 ‘상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승혁은 직장에서 꽤 유능하단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20대 후반이란 젊은 나이치곤 머리도 잘 돌아가고 판단하는 것도 빠르단 말을, 승혁은 회사에서 몇 번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역시, 그걸 전혀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승혁이 그런 말을 듣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또래들처럼 게임에 빠진 적은 없다시피했지만, 성적은 언제나 가장 위에 있었다. 대학교를 나온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누구나 들으면 아는 회사에 들어간 다음에도 승혁은 또래보다 훨씬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물론, 이 역시 승혁은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자기한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당연히 그런 하루가 이어져야 할 터였다. 그것이 자기한테 있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당연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승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벌어진 이 어이없는 상황을 보며, 승혁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서 이런 상황에 다다랐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눈앞에 저 남자들은 무엇인가, 대체 왜 자기 아내가 저들한테 사로잡혀있는 것인가, 그보다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밖에 여러가지.
승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차가운 눈빛을 보냈지만, 남자들은 이만큼도 거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마치 승혁이 자기보다 몇 배는 더 낮은 존재인 것만 같은 태도였다.
이 갑작스런 일에 승혁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을 때, 갑자기 남자 중 하나가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 자식, 그 놈하곤 상관없는 거 아냐? 들었던 거랑 다른데?”
“어디보자. 그러고 보니 그 말과 다른데. 그럼 우리가 잘못 찾아온 건가?”
마치 승혁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승혁이 그들을 내치려 앞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갑자기 다른 남자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뭐, 그게 어쨌단 거야? 어차피 이 세상의 진리조차 모르는 놈인데. 막 다룬다고 별 일 있겠어?”
“하긴 그도 그런데. 그 놈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그냥 즐겨도 되지 않겠냐?”
이 말을 듣자, 승혁은 머리에서 이성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저 놈들은, 틀림없이 자기를 아주 깔보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래뵈도 실력을 인정받는 입장에서, 승혁은 절대 그 말을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승혁이 다가가려는 것보다 빨리, 갑자기 뒤에서 누가 자기 손을 틀어막는 게 느껴졌다.
“뭐야?!”
승혁이 그런 말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 짓을 저지른 남자들은 그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끈으로 승혁의 팔목을 단단히 틀어막더니, 이윽고 바닥에 억지로 앉혔다. 태어나서 이렇게 굴욕적인 일은 처음 겪었기에, 승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노가 온몸을 휘어감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승혁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느꼈다. 평균 성인남성만큼은 몸집도 힘도 있는 승혁인데, 고작 이걸 당했다고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는 건 이상한 이야기였다. 뭔가 자기보다 더 강한 힘이 승혁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들이 자기를 무시할 만큼 압도적인 힘이.
그리고 승혁은, 두 눈으로 똑똑히 그 ‘꼴’을 보고 말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내가, 저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 손에 더럽혀지는 것을.

이런 걸 보고싶어할 사람은 절대 없겠지만, 고개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기에, 승혁은 어쩔 수 없이 그 망할 꼴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눈길이라도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자기와 저 남자들은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회에서 보면 틀림없이 반대여야 할 역학관계가, 지금은 부조리하리만치 정반대로 바뀌어있었다.
이렇게 분했던 적이 지금껏 있었던가.
승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를 부드득 갈기 시작했다. 이미 이성은 어딘가 먼 곳에 가있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억지로 비춰지는 풍경이, 이제 뭘 뜻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승혁의 몸엔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때, 승혁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걸 깨달았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자기 모습이 ‘바뀌고’ 있단 걸 알아채고 만 것이다.

맨 처음, 승혁은 마치 갑작스런 감기라도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몸이 차가워짐과 함께, 자꾸만 심장이 펄떡대는 걸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쓸 틈새도 없이, ‘그 일’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바닥에 억지로 앉혀있던 승혁은, 어쩐지 아주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 지금 자기한테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승혁의 몸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젊어지는 물이라도 마신 것처럼, 승혁은 눈에 익은 집안이 갑자기 점점 커져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착각’인지는 승혁도 알 수 없었지만.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승혁은 마치, 자기 몸이 물에 젖은 찰흙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어디라곤 말할 수 없지만, 몸 여기저기가 간지럽단 게 똑똑히 느껴졌다. 특히 간지러워지면 안 되는 곳이나, 간지러워지면 이상한 곳이 자꾸만 간질거려 견딜 수 없었다. 항상 몸에 가득했던 젊은이 특유의 힘도, 지금은 어쩐지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야, 끈이 헐거워졌잖아. 제대로 묶어야지.”
“아, 그거 때문인가? 이 놈도 별 수 없는데?”
옆에 서있던 남자는 이런 말과 함께, 승혁을 옭아매고 있던 끈을 더 단단히 묶었다. 어쩐지 승혁은, 바로 옆에 있는 이 남자의 몸집이 전보다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팔에 묶인 끈 역시, 아까보다 더 꽉 끼는 것 같았다. 왜인지는 자기도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승혁은 이내, 대체 왜 자기가 이런 느낌을 받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건 상식만을 바탕으로 살아온 승혁한테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자기가 입고있던 정장, 즉 셔츠가 이상하리만치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셔츠뿐 아니라, 바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바지가 커졌는지, 결국 ‘안 맞게 된’ 바지가 미끄러질 정도였다.
그 떄가 되어서야, 승혁은 자기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아주 느릿하게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과 가슴팍에 생겨난 무언가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 승혁은 저 망할 놈들한테 있는대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자기 몸이 바뀌었는지, 승혁은 잠시 눈앞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는 아내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승혁한테는 저 망할 놈들한테 화낼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자기도 정말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몸이 갑자기 크게 바뀐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겨왔던 것이다. 갑작스런 일이 몇 개고 겹치는 바람에, 온몸이 피곤해서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단하게 묶인 밧줄 때문에, 승혁은 그조차 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벽에 기대서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상황조차, 승혁을 덮치는 피곤함은 이겨내지 못했다.
꾸벅, 꾸벅.
어느새 승혁은 그런 느낌과 함께,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에 빠져들려 하는 자신을 알아챘다. 물론, 지금은 마음편하게 잠이나 잘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얼른 일어나, 저 알지도 못하는 놈들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하지만, 승혁은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돌이라도 하루종일 이고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강한 피곤함이 파도라도 되는 듯 승혁을 덮쳐왔다.
이런 데서 잘 셈이냐. 이런 데서 잠이 온단 말인가.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려봤지만, 그래도 자꾸만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얼빠진 짓이란 말인가.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한가하게 졸고나 있다니.
“야, 이 자식 조는데?”
그런 승혁을 알아챘는지, 옆에서 낄낄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너무나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단 말투였다. 승혁 역시, 그렇게 보이리라 생각했다. 만약 이게 자기 일이 아니었다면.
“이야, 갑자기 피곤해졌나 보지? 우린 아무 일도 안 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좀 웃기긴 하지만.”
“저 자식, 번듯하게 생긴 거 보면 잘난 놈 아니야? 대충 명함을 보니까 좋은 회사 다니는 거 같던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복합세계조차 모르는 바보같은 인간인데.”
“그건 그렇지. 크하하.”
이제 승혁의 귀엔, 그런 목소리와 어디서 많이 들은 높은 목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그럴수록 잠은 점점 더 깊게 승혁을 끌어당길 뿐이었다.
정말 이런 데서 잠들 셈인가.
승혁은 졸음과 맞서싸우면서도, 한편으로 엄청난 굴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 자체가, 최승혁이란 인간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 가소롭지도 않은 것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니.
저 놈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승혁의 정신은 점차 몽롱해졌다. 눈에 힘을 주면 줄수록, 자꾸만 눈꺼풀은 무거워졌다. 마치 승혁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겠단 것처럼.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귓가에 들리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한테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승혁의 의식은, 거기서 아주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