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비상은 파랑한테 전화가 걸려왔단 걸 깨달았다. 바로 전화를 받자, 파랑은 전에 없던 큰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비상아, 내가 오늘 멋있는 모습 보여줄게. 알았지?”
“그게 말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내가 오늘 너무 재밌을 거 같아서. 지금도 가슴이 쿵쾅대거든. 그럼 저녁에 보자.”
그 말과 함께, 파랑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비상은 잠시동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단 느낌에서였다.
물론, 비상은 앞일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까닭도 없이 그런 느낌이 비상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비상은 어이없단 생각을 하며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체 하늘이 무슨 꽁꽁이속인지, 자긴 또 ‘다른 모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젠 반쯤 포기한 채, 비상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큰길로 들어섰다.
그 때였다.
“어?”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자길 빤히 보고 있단 걸 알아채서였다. 가만히 보니, 그 누군가는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광교산 사건 때 비상을 보고 있던, 금빛 밤 팀원이었다.
내가 볼 땐 이 사람도 예의는 없어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비상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저번 광교산 사건으로, 아마 금빛 밤 연장자들은 비상한테도 패널티가 있단 걸 깨달았을 터였다. 만약 자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짐작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잘 알고있는 게 아닐까.
“붉은 밤 쪽 사람이지?”
아니나다를까, 남자는 비상 쪽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이런 말을 건넸다. 저 밤 사람들은 몇 명을 빼곤 죄다 버릇이 없나 보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비상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 때랑 똑같네. 말투 하나하나가 재수없어.”
남자는 그 말과 함께, 혀를 차며 비상을 바라봤다. 자기와 아주 안 맞는 사람을 눈앞에 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댁이야말로 실례 아닌가?”
“뭐, 나도 비겁한 짓 저지를 생각은 없으니, 나중에 보자고.”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비상한테서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비상은,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경기 시작 직전에 붉은 밤에 시비를 걸었던 사람 역시 저 남자였던 것이다. 즉, 저 사람은 틀림없이 연장자가 아니라, 그저 연소자였다. 하지만 비상이 그 날 식당에서 저 사람을 본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 중, 연소자 한두 명이 끼어있었단 말인가.
비상도 그걸 다 기억할 자신은 없었기에, 아마 그렇겠구나, 란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들, 그것도 비슷한 인상을 지닌 이들을 분간하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비상은 저 남자와 오래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아무튼 이런 일은 너무 갑작스러운데.
고개를 몇 번 저으면서도, 비상은 자기가 가야 할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비상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파랑이었다. 마치 혼자 노는 듯이 다리를 찢던 파랑과 눈이 마주치자, 비상은 얼른 그 쪽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일찍 오셨네요.”
“당연하지. 오늘 내가 나가잖아.”
“그런데 오늘은 어떤 밤하고 싸우는 거죠?”
씩 웃어보이는 파랑을 보며,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파랑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말과 함께 다시 다리를 찢기 시작했다.
“아, 비상이 넌 모르는구나. 파란 밤 쪽 사람이야. 좀 어린 친구.”
파란 밤이란 말을 듣고, 비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번 사건을 봐도 놀이에 미친 게 틀림없는 금빛 밤과 달리, 파란 밤은 조금 온순한 느낌이 있었다. 물론 누구처럼 예외에 가까운 이도 있었지만, 비상은 그나마 중립에 가까운 파란 밤와의 놀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오, 파랑이 니가 싸운다며?”
잠시 뒤, 삼삼오오 붉은 밤 팀원들이 옥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들 파랑을 놀리러 몰려가는 가운데, 비상은 그 사이에 끼어들려던 별밤한테 어제 읽은 책을 내밀었다.
“어제 책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갖고. 책은 어땠니?”
“형은 참 희한한 걸 좋아하시네요.”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별밤은 킬킬대며 웃었다. 그러곤 천천히 이런 말을 꺼냈다.
“뭐, 이런 식으로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이 나오는 것도 상상의 좋은 점이지.”
“지은이가 의도한 바를 알아채는 게 아니라요?”
“그런 건 만든이 한 명만 알면 되지 않을까? 모두 작품을 보고 아주 똑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그게 더 무서울 거 같은데? 자기가 필요없단 말이니까.”
“그런 생각은 지금껏 못해봤는데요.”
비상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라 놀랐다. 자기라면 절대 떠오르지 않을 생각이라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즐거움일지도 몰랐다.
한편, 저 너머에선 강산이 파랑한테 시비를 걸고 있었다. 물론 강산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야, 오늘은 진짜 볼 수 있는 거냐?”
“그럼. 이렇게 다리도 찢고 있잖아.”
“몸은 괜찮고?”
이번엔, 항상 그렇듯 흰 티를 입은 의영이 그렇게 물었다. 파랑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다시 한 번 씩 웃어보였다.
“쌩쌩해요.”
이렇게만 보면, 이 형은 평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대체 이 형은 어떻게 ‘놀이’를 할 생각일까. 평소 파랑의 사람좋은 웃음만 봐오던 비상은, 여전히 그게 짐작되지 않았다.
“그런데 좀 어린 친구라니, 누구죠?”
그 말과 함께, 비상은 파란 밤이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눈에 익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몰려있었다. 예를 들어, 여길 보며 손을 흔드는 은솔과, 또 그걸 막으려고 뒤에서 몸을 꽉 잡고있는 나라는 비상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다지 좋은 까닭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나머지는, 아무리 봐도 비상이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파란 밤은 금빛 밤에 밀려 존재감이 약했기 때문에, 기억나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금빛 밤 사람들도 성질이 더럽단 걸 빼면 모르는 사람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존재감은 강한 편이었다.
“저기 보이니?”
의영은 그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상록 옆에 선 고등학생을 가리켰다.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그렇게 짐작하긴 했지만, 잘만 하면 성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남학생은 언뜻 봐도 성실하게 생겼는데, 상록과 진지하게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었다.
“고등학생인가요?”
“그런 거 같던데.”
의영은 그 말과 함께,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비상한테 이야기했다. 의영의 말에 따르면, 저 친구는 승지 및 은솔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며(승지도 저 친구를 아는 듯했다), 이름은 한성종이라고 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의영도 저 친구에 관해 자세히 알진 못하는 듯했다.
강산은 이제, 연소자 및 연장자들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마 자기와 친한 파랑이 나가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흥분한 듯했다. 그런 강산 옆을 둘러싼 연소자들을 보며, 별밤이 이런 말을 던졌다.
“니들 강산이한테 술 줄 생각은 안 하고 있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무척 상관있지, 대한아. 이런 날 마시면 개가 되니까…”
거기까지 말하다, 별밤은 강산한테 목이 조인 채 켁켁대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우스웠는지, 삽시간에 옥상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 중 유일하게 안 웃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게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상조차 웃음기를 띄우고 있었으니까.
“누가 개야, 이 신발놈아?!”
“이것도 다 찔리니까 하는 말 아니겠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별밤은 또 강산한테 등을 두들겨맞았다. 아까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옥상을 맴도는 가운데, 비상은 우연히 어떤 연소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 세림은 킬킬대다 말고, 아주 불쾌하단 표정으로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저 사람은 대체 나한테 뭐가 불만이지.
그걸 보며, 비상은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비상 자신이 딱히 연소자를 피하는 게 아닌데도, 저 주세림이란 사람은 자길 그런 까닭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저 사람한테 좋은 인상을 얻으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체 왜 그런 까닭으로 자길 저렇게 대하는지 비상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 인상 때문에 연소자들이 말을 걸기 어려워해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오늘 경기하는 두 사람은 저만치서 서로를 마주봤다. 파랑이 들고 있는 무기는, 비상이 전에 본 것처럼 뽁뽁이가 잔뜩 달린 투명 야구방망이였다. 사실 방망이라기보단 풍선에 더 가까웠지만, 지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파랑의 무기를 잠시 본 뒤, 비상은 반대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대편에 서있던 상대방, 즉 성종이 쥐고있는 건 보통 배드민턴채였다. 파랑의 방망이라면 모를까, 저걸로 어떻게 공격을 한다는 것인지 비상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상의 마음과 달리, 파랑은 아주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저 멀리에 있는 성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자기보다 열 살쯤 더 아래일지 모르는 남학생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사실 둘 다 몸집은 그럭저럭 있었기에, 언뜻 보면 동갑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게다가 놀란 건 비상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성종의 앞에 나타난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은 초록색 공이었다.
야구공만한 크기를 지닌 채 공중에 떠오른 그 공(처럼 보이는 것)에, 붉은 밤 모두가 넋을 잃고 있었다. 설마 이게 ‘강화’인가.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앗!”
앞에서 이 놀이를 지켜보던 연소자 중 하나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 공이 ‘빛’이 되어, 곧장 파랑 쪽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랑은 망설이지 않고, 순식간에 그 ‘빛’을 크게 내쳤다. 너무나 금방 벌어진 일이라, 붉은 밤 쪽에선 곧바로 ‘우아!’란 탄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놀이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파랑이 내리친 빛은, 다시 저 쪽에 있는 성종한테로 날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 빛은 다시 파랑 쪽으로 재빠르게 되돌아왔다. 그 때부터, 마치 빨리감기라도 한 것처럼 빛이 빠르게 이쪽저쪽을 맴돌기 시작했다. 너무나 현실과 빗나간 이 광경에, 다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빛은 점점 더 빠르게 양옆으로 달려나갔다. 게다가 그 거리 역시,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이제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빛이 있는 쪽으로, 있는 힘껏 몸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파랑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쪽으로 온 ‘빛’을 있는 힘껏 쳐낸 다음, 바로 옆에 있는 건물 쪽으로 몸을 비틀어 내려앉았다. 이제 붉은 밤 팀원들은, 모두 대단하단 표정으로 파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빛은 물론, 저 둘의 움직임조차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 다들, 저 ‘빛’을 눈으로 쫓는 건 포기한 듯했다. 대신 다들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 빛의 재빠른 움직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은 그 빛을 보면서, 어쩐지 어릴 적에 별똥별을 어떻게든 보려 애썼던 걸 떠올렸다. 이젠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보니, ‘멀미할 거 같아’라면서 눈길을 돌리는 사람마저 나타났다.
초록색 불빛은, 마치 마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밤하늘에 반짝대는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이미 온갖 비현실을 다 겪은 비상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그보다 더 큰 기적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비상은, 파랑이 이렇게 ‘진지하게’ 놀 수 있단 것에 속으로 정말 놀라고 있었다. 파랑은 여전히 불빛이 나아가는 곳으로 몸을 던진 뒤, 그 빛을 있는 힘껏 받아치고서 다시 다른 데로 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 파랑은 바닥에 제대로 발을 붙이고 있는 것같지 않았다. 물론 그건 상대방인 성종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다들 파랑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신기한지, 어지럽다면서도 눈을 떼려하지 않았다. 이젠 벽에조차 발을 대지 않는 둘을 보며, 강산이 어이없단 듯 이렇게 소리쳤다.
“저, 저건 뭐, 공중부양이냐?”
“그럴지도 모르지. 우린 지금 인간의 기적을 보고있는 거야.”
“배잎새 이 자식아. 내가 그런 말 들으려고 이랬는 줄 알아?!”
그렇게 연장자 둘이 투닥대는 사이에도, 둘의 움직임은 전혀 멈출 줄 몰랐다. 빛 너머로 보이는 표정으로, 저 둘이 얼마나 진지하게 ‘놀이’에 미쳐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치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 둘은 빛을 서로 주고받느라 바빴다. 공중에 붕 뜬 채 빛을 따라 종횡무진하는 그 모습은, 영화보다도 더 땀을 쥐게 할 정도였다.
그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 일어났다. 갑자기 성종이,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 빛을 날려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로 빛을 보냈던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 갑작스런 일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탓에, 다들 입만 딱 벌린 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랑은 이상하리만치 망설이지 않았다. 빛이 나아가는 곳을 보자마자, 파랑은 재빠르게 그 쪽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것도 허공에 몸을 눕힌 채.
“저, 저 놈 뭐야?!”
이렇게 소란스런 강산은 물론, 다들 너나할 것 없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저러다 진짜 떨어지는 거 아냐?!’란 말조차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상도 저 형이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파랑이 간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놀이’이므로 저러다가 죽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놀이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냐?!”
강산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비상은 성종조차 저 멀리 파랑이 간 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마 자기도 저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이러던 중에도 빛은 저 너머 큰길 쪽으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고, 파랑 역시 그 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젠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젠장. 난 가까이서 봐야겠다.”
결국 강산은 그 말과 함께, 건물 사이를 뛰어 파랑이 몸을 던진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파랑이 걱정되는지, ‘괜찮을까?’란 말만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비상마저 숨죽인 채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저 멀리에서 뭔가 휙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건 틀림없이, 방금까지 있던 그 초록색 빛이었다.
하지만 다들 거기에 놀라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 말을 듣고서야, 다들 상황을 알아챘다. 파랑이 지고 만 것이다. 물론 질 까닭이라면 대략 하나밖에 없었다. 빛이 이리로 날아온 걸 보면, 아마 땅에 몸이 닿아서 지게 됐을 터였다. 그러던 와중 강산은 별밤한테 전화를 걸어선, 지금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 대충 설명해주고 있었다.
“파랑이 이 자식이 바닥에 눕다시피하고 있더라. 안 다친 건 신기하다. 진짜.”
별밤이 이 말을 다른 팀원들에게 전하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럼 대체 어떻게 그 ‘빛’을 위로 내던졌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비상 역시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아무튼 놀이가 끝나자, 다들 너나할 것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오히려 보는 이들이 더 지쳤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조차 있었다. 물론, 이건 붉은 밤만이 아니었다. 파란 밤 쪽에서도 똑같은 박수가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파랑이 강산과 함께 이 쪽으로 다시 돌아오자(참고로 파랑 본인은 아주 신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영이 바로 앞에 나와선 파랑의 손을 꽉 잡았다.
“파랑아, 너도 참 대단하다.”
“에이, 이런 건 진지하게 해야죠. 그러니까 재밌게.”
“놀이에 미쳤네. 아주 그냥.”
드물게도 강산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파랑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이렇게 강산을 놀려댔다.
“그런 걸 만날 재밌다고 보러오는 건 강산이 너같은데?”
“뭐라고 이 자식아?!”
그렇게 강산이 파랑을 덮치려들자, 다들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오늘 진 팀의 분위기라고 하기엔 너무 밝았다. 하지만 비상은 이게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파랑의 ‘놀이’를 봤다면, 누구나 그렇게 여겼을 터였다. 아무리 졌다 한들, 파랑의 ‘놀이’가 숨막힐 만큼 박진감넘쳤단 건 다들 알고있을 테니까.
난 과연 이 놀이에서 저 형만큼 진지해질 수 있을까.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파란 밤 쪽에서 누군가가 이리로 날아왔다. 그 모습은 어쩐지 낯익었지만, 묘하게 비상의 기억과 달랐다. 일단, 저 사람은 틀림없이 20대 중반이었다. 물론 요즘 고등학생들은 성인과 비슷한 느낌일 때도 많지만, 이건 틀림없이 ‘고등학생’과 다른 느낌이었다.
“아, 누구시죠?”
파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남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런 말이 돌아올 줄 몰랐던지, 잠시 가만히 있던 남자는 이윽고 입을 뗐다.
“아까 싸웠던 사람인데요.”
“뭐?!”
그 담담한 말에, 주위에 있던 붉은 밤 팀 대다수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파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걸었다.
“아, 그럼 패널티?”
“그렇죠.”
파란 밤 주장 못지않게, 성종 역시 짧게 그 말에 대답했다. 여기에 다들 흥분했는지(대체 왜 흥분하는지 비상은 알 수 없었지만) 사방에서 ‘오오’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가장 이런 데 흥분할 법도 한 강산만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저 둘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아까 진지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워해야할 거 같은데 뭘.”
성종이 고개를 숙이자, 파랑은 그런 말과 함께 자기 오른손을 내밀었다. 둘이 손을 굳게 잡자, 주위에서 갑자기 다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강산은 여전히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과 함께 손뼉을 두세 번 느릿느릿 쳤다.
“그래. 니들 징하더라, 이 자식들아.”
“그건 칭찬이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비상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물론 이 놀이를 즐기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저렇게 ‘미칠 듯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당장 자기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문득, 전에 천사가 한 말이 비상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런 놀이에 진지해지는 건 우습다 생각하세요?
이젠 흐릿해진 천사의 말을 되짚으며, 비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다고 뭔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놀이가 끝난 뒤 돌아가려 할 때에도, 붉은 밤 팀원들 입에선 오늘 경기 이야기가 그칠 줄 몰랐다. 비상 역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자기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곧장 뒤돌아보니, 거기엔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20대 후반쯤의 남성이 있었다. 어쩐지 비상은, 이 사람이 금빛 밤의 연장자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누구시죠?”
“금빛 밤 연장자 되는 사람인데.”
그 거침없는 말을 들으며, 비상은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비슷한 인상을 얼마 전에 이런 옥상에서 본 것 같았다. 연장자는 비상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다짜고짜 이런 걸 물어왔다.
“저번에 우리 연장자들이 그 쪽한테 덤벼들었다며?”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저번 그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그 때 안 보였던 것 같았다. 금빛 밤 쪽 사람들은 대개 비슷해보여서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뭐, 잘 해결됐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젠장. 내가 거기 있었으면 그 놈들 다 뜯어말리는 건데, 그 놈의 패널티 때문에…”
비상이 대답하자,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이를 갈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비상의 기억 속에선, 이 사람은 같은 팀원한테 욕하는 연장자였다. 그리고 패널티를 지녔다는 것도.
“그 쪽도 그 문제로 힘들겠네요.”
“말도 마, 아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렇게 보면, 전에 본 그 고등학생 풋내기처럼 보이던 사람과 눈앞의 이 연장자가 같단 게 묘하게 믿기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남자 말에 따르면, 올해로 스물여덟인 듯했다.
“아무튼 우리 쪽에서 먼저 잘못한 건 맞으니까, 내가 대신 그 쪽한테 미안하다 말하러 왔어. 그 놈 자식들은 내 말을 들어야 말이지. 그나마 해원이를 따르는 건 다행인데, 난 패널티라과 듣는 척도 안 할 때가 많아서…”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이를 갈았다. 이렇게 강한 인상인데도 듣는 척을 안 한다는 건, 아마 그런 까닭이리라 비상도 짐작했다.
“그것도 참 큰일인데요.”
“특히 그 중에서도 성질 더러운 놈이 있어서…댁을 눈여겨보는 거 같던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설마 저번에 패널티 받은 그 연소자인가요?”
비상의 말에, 남자는 코웃음쳤다. 사실 비상도 문득 떠오른 사람을 댔을 뿐, 그 놈이 위험하단 생각은 처음부터 들지 않았다.
“걘 조무래기고, 더 심한 놈이 있다고. 그 놈이 요즘 내 말도 무시하려 드는데…댁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비상한테서 등을 돌렸다. 그걸 보던 비상은, 저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어떤 연소자가 대들었던 걸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 연소자 역시 비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체 이 놀이가 뭐기에 다들 이렇게까지 되는 걸까.
깊은 밤하늘을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집에 돌아온 뒤, 비상은 드물게도 이런 시간에 누가 자기한테 전화했단 걸 깨달았다. 얼른 받아보니, 그 사람은 비상의 아버지였다.
“잘 지내냐?”
전화를 받자, 비상의 아버지는 근엄한 목소리로 대뜸 그렇게 물었다. 거기에도 익숙했기에,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야 잘 지내죠.”
“일은 잘 되고 있고?”
“네. 잘 되고 있어요.”
항상 그렇듯, 비상은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답은 그러한 것이라서였다. 게다가 비상의 답은 틀린 것도 아니었다.
“너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괜히 이상한 짓하지 말고 네 일에 충실해라. 알았지?”
“제가 그런 걸 어긴 적이 있었나요?”
“물론 없었지. 나중에 또 연락하마. 그럼.”
그 말과 함께, 비상의 아버지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 비상은 그대로 침대에 누운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어져서였다. 오늘 본 ‘놀이에 미친’ 사람들. 그리고 비상 자기자신에 관해. 아버지가 기대하는 비상,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대개 옳다고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비상에 관해.
물론,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한들 제대로 정리될 리가 없었다. 결국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비상은 그 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