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비상이는 힘든 거 없어?”
그 이야기 뒤로 잠시 시간이 지나서, 비상이 잘 채비를 하려 이불을 펼 즈음 소파에 앉아있던 현이 갑자기 이런 말을 걸어왔다. 너무 갑작스런 말이라서, 비상은 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렇게 물었다.
“갑자기 또 무슨 소리니?”
“뭐 힘든 거 있는데 숨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현의 눈빛을 보면, 그 말은 진심인 듯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가만히 대답했다.
“딱히 그런 건 없는데…그게 궁금했니?”
“난 이런 모습이면 힘든 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힘들 땐 힘들더라구. 오히려 내 친구들이 더 세보일 때도 있던데.”
“같은 사람인데 강하고 말고가 있겠니?”
“그래서 물어본 건데.”
현의 말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현의 눈엔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 마치 자기보다 힘이 더 세단 걸 알고 있는 운동선수를 보는 것처럼.
“난 정말로 괜찮…”
“정말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어?”
현이 자꾸만 물어오자, 비상은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이런 말을 꺼냈다.
“힘들면 말할 테니 너무 걱정 마. 알았지?”
“지금 이런 모습이어서 조금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원래 모습이면 이렇게 편하게 있진 못할 거 같아서.”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이번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자기한테 건넨 말도 그렇고, 오늘 현은 다른 때보다 더 묘한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못미덥니?”
하지만 비상은, 현의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단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원래 모습보다 지금이 더 낫단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둘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잘 자’란 인사와 함께 이불에 몸을 뉘었다. 참고로 현은 아침에 뭔가 일이 있는지, 인사 뒤에 ‘먼저 일찍 일어나서 나갈게’란 말을 덧붙였다.
현이 너도 그럴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기분이 묘해지는 걸 깨달았다. 물론 워낙 피곤한 날이었으니, 그 생각에 더 빠지기도 전에 비상은 곧바로 잠에 들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비상은, 어제 그 말대로 현이 자리에서 사라진 걸 알아챘다. 그걸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핸드폰으로 누군가 연락해왔다. 확인해보니, 그건 바로 별밤이었다.
-오늘 쉬는 날이지? 우리 집 한 번 안 올래?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그 메시지에 답했다.
-갈게요.
마침 오늘은 일도 없었으니, 못 갈 까닭도 없었다. 대답한 다음 떠오른 것이었지만, 저 형의 자취방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별밤이 말해준 대로 길을 걷던 비상은, 저 멀리에서 아주 눈에 익은 사람이 걸어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저 형도 연락받은 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비상은 저만치 멀리 있는 강산을 불렀다.
“형도 가는 거야?”
“까, 깜짝아!!”
비상이 말을 걸자, 강산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 겁쟁이 형을 가만히 쳐다봤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그것도 아침에.”
“니가 뒤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
그렇게 투덜대긴 했지만, 결국 강산은 비상과 함께 별밤의 자취방에 가게 되었다. 어차피 가는 데도 똑같으니, 같이 못 갈 일도 없어서였다. 강산 말에 따르면, 자기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별밤의 집에 가는 듯했다. 이 형이라면 언제나 그럴 것같기도 했지만.
그 때, 비상은 강산의 손에 뭔가 들려있단 걸 깨달았다. 이제야 깨달은 자기도 신기하다 생각하면서, 비상은 말을 걸었다.
“그건 또 뭐야?”
“저번에 끝낸 과제다. 이 자식아.”
“그러니까, 그 과제를 왜 가지고가는 거야?”
“내가 볼 땐 괜찮은 거 같은데 강의에서 C를 받았단 말이야. 별밤이 이 놈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봐야겠어.”
“그럼 나중에 나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
“맘대로 해라. 이 엘리트 놈아.”
그 말과 함께 강산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과제인데 저렇게 짜증을 내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참고로 그 과제는 수필인데, 교양강의 때 낸 물건인 듯했다. 물론 뭐라고 썼는지는 아직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니 과제까지 오란 말은 안 했는데?”
별밤은 둘을 알아채자마자, 이런 말과 함께 반갑게 맞아줬다. 강산은 그 말에 열받았는지, 그 종이뭉치를 냅다 별밤의 자취방 안쪽에 휙 내던졌다.
“시꺼, 너도 이 부조리한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돼.”
“뭐, 그건 둘째치고…”
“뭐라고, 이 자식아?!”
둘이 투닥대는 걸 들으면서, 비상은 별밤의 자취방을 휘 둘러봤다. 비상의 눈에, 별밤의 집은 적절히 깔끔하고 적절히 어지러웠다. 어떻게 보면 질서가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정돈된 느낌이었다. 비상이라면, 이렇게 엉거주춤한 데선 오래 못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성격 탓이긴 했지만.
“아, 미안. 잠깐 전화 좀 받고 나서.”
핸드폰이 울린단 걸 알아챈 뒤, 별밤은 이 말과 함께 잠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또렷하게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몇 마디쯤은 여기서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같이 번역일하는 친구인가 본데. 들어보니까.”
“형은 그게 궁금해?”
“그냥 궁금한 거지, 그게 뭐 잘못됐냐?!”
아무튼 강산의 말대로, 별밤은 자기 동업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물론 동업이라곤 해도, 별밤 역시 본업을 번역으로 삼고있는 건 아니었다. 자기 생각이 맞다면, 별밤은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 취미삼아 부업으로 외국어를 옮기고 있을 터였다. 비상이라면 바빠서 절대 못 할 일이었지만.
“어유. 오래 기다렸냐?”
그 말과 함께, 별밤은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강산은 대놓고 지루한 표정을 짓더니, ‘내가 왔는데 아무것도 안 만들어놨단 말이야?!’라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비상이 그걸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으니, 갑자기 별밤이 이런 말을 꺼냈다.
“뭐라도 좀 읽을래?”
별밤이 가리킨 데엔, 책꽂이 한가득 꽂힌 책들이 있었다. 대충 봐도 그 숫자가 하나둘 셀 게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강산은 어이없었는지, 책꽂이를 죽 훑으며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이 형이 가진 책 중 희한한 게 조금 많아서인 것 같았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왜, 뭐 관심가는 거라도 있냐?”
“누가 그렇대? 그냥 책이 희한하니까…”
강산이 그렇게 말하자, 별밤은 다른 쪽에서 책 한 권을 뽑은 뒤 건넸다. 아마 강산한텐 고르게 하는 것보단 자기가 맞다 여기는 걸 주는 게 빠르다 여긴 듯했다.
“니가 뭘 고르는 것보단 내가 골라주는 게 빠르니까, 이거나 봐라.”
“뭔데?”
“전세계의 희한한 물건 카탈로그.”
“그, 그딴 걸 왜…재밌어보이잖아…”
마치 잎새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투덜대며, 강산은 그 책을 집어들었다. 강산이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이번엔 별밤이 비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 쪽으로 좀 와줄래?”
비상이 그 쪽으로 가니, 이번엔 또 다른 책꽂이에 책들이 가득 꽂혀있었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대개 크기가 비슷한 책들이 많았다. 그걸 보자, 비상은 이 책들이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이게 그 전에 빌려주신…”
“그렇지. 원서도 많고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도 많아.”
별밤의 말에 따르면, 이 책꽂이엔 좋아하는 책 및 자기가 옮긴 책과 우리나라에서 쓰여진 책들이 뒤섞여있다는 듯했다. 그 중 유난히 두꺼워보이는 책을 손에 쥐어보며, 비상은 이런 말을 건넸다.
“이만한 두께를 옮기는 것도 힘드시겠네요.”
“뭐, 나랑 잘 맞거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쓰인다고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안 그러니?”
그 말과 함께, 별밤은 아래쪽에서 다른 책을 뽑아줬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비상이 너라면 이런 것도 맞을 거 같다’란 말과 함께.
비상은 건네받은 책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책은 전처럼 그림으로 되어있는 표지에, ‘한낮의 명탐정’이란 제목이 크게 적혀있었다. 참고로 별밤의 말에 따르면, 시리즈물인 듯했다.
비상이 책의 겉부분을 대충 보자, 파란 하늘 아래에 건물 옥상으로 보이는 곳에서 주인공처럼 보이는 20대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펜스에 기대고 있었다. 그 주위엔 여성캐릭터 몇 명이 서있었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책을 뒤집어보자, 거기에도 표지 그림이 이어져있었다. 여기에도 아까 표지와 이어져있었는데, 캐릭터가 앉아있기도 하고 하늘을 보고 있기도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읽는 비상조차도, 이 책이 꽤 전위적이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이죠?”
“관심있니?”
책을 대충 넘겨보는 비상을 보면서, 별밤은 말을 이어갔다. 별밤에 따르면, 이 책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도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건에 말려들며 그걸 해결한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어떤 특징이요?”
비상이 묻자, 별밤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자기파괴 본능이라고 할까, 자기가 세상에 있어야 할 까닭을 못 찾게 된 사람이야. 그런 것치곤 작품이 가볍지만.”
“그런 사람인데도요?”
“그게 재밌는 거지. 갈 때마다 여자가 꼬이고, 본능으로 사건 해결을 바라니까 멋있는 모습도 보이고, 하지만 자기는 여전히 헤매고. 다른 사람들은 믿을만하다 생각하는데 정작 자기는 풀리지 않는 파괴충동으로 괴로워하는 거지. 근데 정말 가볍게 읽기 쉬운 작품이야.”
“그럼, 코미디에 가깝단 말씀이세요?”
“아니, 이런 배경치곤 가볍게 읽기 좋단 말이지. 진지하게 읽으면 무거운 데도 많아. 그걸 가볍게 보여주는 게 대단한 거지.”
그 말을 잘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비상은 그 책을 별밤한테서 빌리기로 했다. 자기가 보고 판단하는 게 낫겠다 여겨서였다. 무엇보다 표지의 그 파란 하늘과 옥상,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비상을 이상하리만치 사로잡고 있었다.
그 때, 별밤이 이번엔 이런 말과 함께 자기 컴퓨터를 가리켰다.
“잠깐 게임이라도 안 할래?”
“형도 별 걸 다 보여주시네요.”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걸 확인할 겸 해줬으면 좋겠는데.”
“확인이요?”
“그래, 우리말이 자연스러운가 뭐 그런 거.”
혹시 번역 검수나 뭐 그런 건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형이 부탁할 거라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중간부터 하게 해서 미안하다.”
그런 말과 함께, 별밤은 뭔가를 실행시켰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단 생각이 들자, 비상은 별밤한테 말을 걸었다.
“무슨 게임이죠?”
“그냥 게임 속 인물들하고 주인공이 교류하는 게임이야.”
“그래요?”
그 말과 함께 비상이 자리에 앉자, 별밤은 이 게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은 자기가 취미삼아 한글화, 즉 번역하고 있는 작품인데, 남한테 공개할 생각은 없지만 그냥 좋아서 하고 있는 듯했다.참고로 게임 텍스트 분량은 2MB를 훌쩍 넘긴다고 했다.
“형도 미쳤네요.”
“나도 알아.”
비상의 말에, 별밤은 그렇게 킬킬댔다. 이 형 말에 따르면, 완성은 5년 뒤를 상정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최악일 때 그렇단 말이지만, 이 형도 심심풀이치곤 큰 짓을 하는구나, 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에도, 별밤은 게임 내용을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이름은 ‘프로젝트 원더’라 하는데, 텍스트 분량만큼 긴 게임과 많은 헤로인이 특징이라고 했다. 별밤의 말로는, 그냥 시트콤을 널널하게 본다는 생각으로 1년 잡는 게 좋다는 듯했다. 비상은 이런 게임에 관해 잘 몰랐지만, 텍스트량이 2MB를 훌쩍 넘기는 게임을 밤새서 클리어하는 게 미친 짓이란 건 알 것 같았다. 줄거리를 대충 말하자면, 어떤 사정으로 학교에서 다들 피하고 다니지만 쓸데없이 대범하고 여자를 밝히는 주인공이, 자기만큼 특이한 유명인한테 갑자기 ‘주지육림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란 말을 듣고 그 유명인이 있는 낙락부로 스카웃되었다는 내용이라 했다.
“그거 참 전위적인데요.”
“뭐, 이 동네에선 가벼운 편이야. 그런데 너한텐 처음부터 해달라는 게 아니라…”
이제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세이브파일을 찾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 해달라는 말은 아닌 듯했다.
“중간부터인가요?”
“응, 그건 맞는데, 상황을 좀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뗐다. 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게임은, 주인공 시점으로 헤로인과 교류해서 그 중 한 명의 루트로 들어가는 식인데…”
거기까지 가서, 별밤은 또 뜸을 들였다.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일인가. 비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잠깐 생각 좀 정리하려고.”
그 말과 함께, 별밤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제 마음이 정리되었는지,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이 주인공이 이런저런 헤로인들을 학교에서 만난 뒤 교류한다 이거지. 그런데 이 주인공이 자기는 소중하게 안 여긴단 말이야. 여성 앞에선 신사인데, 자기 얼굴은 보는 것도 꺼려해. 자기 몸도 막 다루고 말이야. 자길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무심코 그렇게 되곤 한단 말이지. 왜 그렇다 생각해?”
“글쎄요. 무슨 전제라도 있어요?”
비상이 묻자, 별밤은 또 뜸을 들였다. 오늘따라 이 형답지 않게 뜸을 많이 들이는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게임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 이래. 세상에서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지만, 일어나지 못하는 일은 어떻게 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걸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우리 놀이만큼 비현실스러운 건가요?”
“거기까지 알면 됐다. 미안한데 좀 해볼래?”
그렇게 말한 뒤 어떤 세이브파일을 누른 별밤은,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비켰다. 비상은 자리에 앉은 채 헤드폰을 끼고 그 게임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째 우리말로 바뀌어있는 걸 보면, 게임, 즉 프로그램을 좀 만진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엔터만 누르면 되는 건가.
어쩐지 비상은, 이 게임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곧장 알 것 같았다.
※※※
“저,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갖고. 가련한 소녀를 구하는 게 내 일인 걸.”
“어, 선생님 아니세요?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보였는데…”
“선생님은 아니지. 소녀라면 누구든 구하고 싶어하는 그냥 학생이야.”
“죄,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이상한 말해서…”
“뭐, 이젠 귀에 익었어. 오히려 신선한데. 지금 그런 말을 들으니까.”
“네?”
이 아인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가장 하기싫은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그냥 예로 드는 거니까, 그냥 가만히 들어줄래?”
“네.”
“어디에 말이야, 누구랑 쏙 닮은 남학생이 살고 있었어. 걔도 누구처럼 소녀만 보면 넋이 빠져서, 학교에선 선생님들한테 항상 눈총받곤 했지. 뭐, 어떻게 하겠어. 난 그런 성격이었는데.”
“…”
“그 중에서도, 특히 그 학생하고 사이가 안 좋은 선생님이 있었어. 뭐, 여자애들은 많이 따르던데, 나하곤 무척 상성이 안 맞았거든. 만날 싸우기만 했어. 서로 ‘넌 최악이다’라고 욕했지.”
“그, 그래서요?”
“그 자식, 몇 번이고 말하지면 겉은 나쁘지 않거든. 게다가 여자애들한텐 또 다정해요. 그러니까 문제아 취급은 내가 다 받았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식이 날 두고 쓰레기 중 쓰레기라 말한 적도 있었고. 아마 나같은 놈을 걘 가장 싫어했을 거야.”
“…”
“뭐, 거기까진 괜찮아. 그 자식하고 난 생판 남이었으니까. 졸업하면 다 잘 될 터였어. 실은.”
“네?”
아차. 너무 ‘자기 일처럼’ 말했는데. 좀 말을 바꿔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야. 그 날도 학생하고 선생님은 싸우고 있었지. 그 땐 목소리까지 크게 높혀서 서로 욕했어. 그 자식은 차가운 눈길로 ‘넌 이 학교의 수치다’고 말하더군. 아직까지 떠오르른데. 그 자식의 우월감에 젖은 얼굴 말이지.”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 뒤부턴, 나 자신의 숨이 탁 막히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예로 들었다곤 했지만, 나한텐 예로 든 것도 뭣도 아니었으니까.
“그야 물론, 몸으로 싸웠지. 그런 걸 듣고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었거든. 그 자식도 학생이 아니라, 짐승이라도 보는 것처럼 걜 보고 있더군. 그래서 그 둘은 크게 싸운 거야. 그것도 교실에서, 다들 집에 가려던 평화로운 시간에 말이지.”
“…”
“원래대로라면 거기서 끝났어야겠지. 물론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수습은 됐을 테니까. 그 때,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어. 아니, 일어나고 말았지.”
“그, 그건 대체…”
“뭐, 그 선생님하고 학생의 인격이 서로 바뀐 거야. 별 거 아니지?”
“…”
소녀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는 하기 싫었는데.
“세상이 참 재밌게 되어있는 게,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일어나. 참 이상하지.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조차 모른다니 말이야.”
“…”
“그러니까, 그 학생은 자기가 가장 죽이고 싶은 놈의 몸을 갖게 되었단 말이지. 참 딱한 이야기야. 내 얘긴 아니지만.”
“저, 저, 오빠…”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가장 불쌍한 건 그 학생이야. 자기가 혐오하는 존재가 된 것도 문제지만, 그게 다가 아니거든. 그 자식하고 학생은 나이차가 꽤 있어. 누가 어떻게 보든 선생님만 잘 된 일이었지.”
“…”
“뭐, 30대니까 그렇게 못 써먹을 것도 아니지만, 한 번 생각해 봐. 갑자기 학생이, 나이도 엄청 처먹은 어른이 되었단 말이야. 당연하지만 체력으로 동년배들한테 못 이겨. 걔들은 나랑 달리 아직 쌩썡하거든.”
“저, 저, 저…”
“뭐, 그건 됐다 치자고. 본 사람이 워낙 많아서, 우리가 인격이 바뀌었단 건 다들 받아들였으니까. 그치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냐. 그런 문제를 일으킨 놈을, 같은 반 애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거 같아?”
“…”
“원래 난 같은 반 애들하고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어. 싸움도 자주 했지. 덕택에 환경은 최악이었어. 그 학생이 이렇게 먼 데까지 이사올 만큼.”
“…”
“자, 참 재미없는 얘기지?”
난 더 이상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학교에 다니면, 그거야 누구나 희한하단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까 시비걸던 불량배들도 그랬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교복을 입은 남성은 개그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열받는 건 그게 아니었다.
매일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는 것보다, 더 굴욕에 가까운 게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저, 오빠. 저도 이제 오빠가 다니는 학교로 들어가요. 그, 신입생으로요.”
“그래. 축하한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 소녀, 아니, 동생이 날 생각해서 말하고 있단 건 잘 안다. 뭐, 이런 말을 듣고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도 자기 일이 아니었으면 도망갔을 거다. 그래, 자기 일이 아니었다면.
“오빠는 지금 학교생활 어떄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는 있어요?”
“그래. 있지. 한 명. 걘 참 좋은 놈이야. 너한테 소개하고 싶을 만큼.”
“아, 아니, 전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
동생이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그 태도면 됐다. 이 세상도 참 잔인한 데라서, 나란 존재 자체를 피하는 놈들도 많으니까. 그게 당연하긴 하지만.
“저, 오빠.”
“응. 왜?”
동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안아주면 좋았겠지만, 업고 있는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뭐, 이 망할 몸으로도 그쯤은 된단 이야기다. 은근히 열받지만.
“저, 학교에 가면 꼭 오빠를 찾을게요. 그리고 찾은 다음엔,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점심도 같이 먹고, 공부도 같이 하고.”
“너 2학년 수업에 따라올 수 있니? 나도 자신없는데.”
“그, 그건 모르겠지만, 제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오빠 옆에 있을게요. 오빠 주위에 적밖에 없다 할지라도, 저만은 오빠 편을 들래요. 아, 그치만 친구는 있으시다고…”
“그러니?”
이 동생은 참 착한 아이인 거 같다. 학교에서도 꺼려하는 사람을 돕겠다 스스로 나서다니, 희한한 아이였다. 하지만 난 이런 아이가 싫지 않다. 오히려 이런 아이와 만나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이 모습이 말이야, 좋긴커녕 엄청 싫어.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아요. 오빠가 좋은 사람이란 건 알 거 같거든요.”
“내 모습은 이게 아냐. 진짜 내 모습은 저기 어딘가에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지. 그건 어떠니?”
“그래도 괜찮아요. 전 오빠를 알 거 같거든요.”
“네가 얼마나 ‘진짜’ 날 만져보고 싶더라도, 아마 그건 절대 안 될 거야. 그래도 상관없니?”
“네. 저, 지금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느끼고 있어요.”
“무슨 고백같은데. 좀 민망한 걸.”
“그, 그건 아닌데, 그치만 저, 오빠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이 동생은 참 끝없이 다정했다. 좀 기가 세보이지만, 날 생각해준단 건 잘 알 수 있었다. 이 아인 참 ‘좋은 아이’였다.
그래서 난 더욱 괴로워졌다.
만약 이 아이와 사귄다 한들, 난 아무 것도 줄 수 없다. 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 자식’이 가진 것뿐이니까.
※※※
“이게 형이 옮긴 거라구요?”
그 장면을 끝마친 뒤, 비상은 뒤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별밤은 이런 말과 함께 씩 웃어보였다.
“그래. 어차피 혼자 놀자고 하는 거라서 엄청 과격하게 했지.”
“외국어를 모르는 저조차 과감한 걸 알겠던데요.”
“아무래도 남의 작품을 옮기려면 신중하게 갈 수밖에 없지. 그런데 거기 사로잡히면 자연스런 말이 안 나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취미로는 이렇게 막하는 거야.”
“차라리 그럴 바엔 자기가 직접 하는 게 낫지 않나요?”
“뭐, 그게 맞는 사람은 그렇게 하겠지.”
그 말을 들으며, 비상은 번역 일도 쉽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건 그렇고, 게임은 어땠니?”
그 때, 별밤이 이렇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걸 깜박했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입을 뗐다.
“형은 이 게임이 좋아서 혼자 옮기시는 거죠?”
“뭐, 그렇지. 배포하게 되면 불법이니까 남한테 보여줄 수도 없고.”
“어쩐지 형이 왜 좋아하는지 알 거 같던데요.”
“그러니?”
그 말과 함께, 별밤은 다시 웃어보였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별밤은 아까처럼 조금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뗐다.
“나는 말이야, 그 말이 어쩐지 맘에 들어. 이 세상에 일어날 일과 안 일어날 일이 정해져있지만, 그걸 완전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놀이처럼 말이야. 어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요.”
게임을 대신 끝내주는 별밤을 보며, 비상은 이렇게 말했다. 비상도 이런 류의 게임을 한 건 처음이지만 어쩐지 묘한 동질감을 주인공한테서 느꼈던 것이다. 어쩌면 자기도 좀 특이하단 인식이 어릴 적부터 있어서였을지도 몰랐다.
그 때, 저 쪽에서 짜증나죽겠단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들끼리만 재밌는 거 하지 말고 내 과제 좀 봐달라고!”
“뭘 그렇게 큰소리치고 그래.”
그 말에 킬킬댄 뒤, 별밤은 비상 쪽을 돌아봤다. 비상은 이 형이 뭐라 말하려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럼 나갈까?”
“그러죠 뭘.”
그 말과 함께, 비상은 별밤의 방을 나왔다. 아까 일로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찬찬히 정리하기로 했다.
그 뒤, 비상은 강산한테서 그 과제란 걸 건네받았다. 그걸 잠시 보다가, 비상은 머리가 지끈대는 걸 참으며 강산한테 과제를 돌려줬다.
“이것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너무한 점수는 아닌 거 같은데.”
“뭐라고?!”
강산은 곧장 이렇게 소리쳤다. 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단 말투였다.
“무슨 근거로 그딴 말을 하냐?!”
“일단 읽기 어려워.”
그 말과 함께, 비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도 어려운 자료는 많이 보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안 들어오는 글은 참 오랜만이었다.
“말을 읽기 쉽게 써야지. 괜히 어렵게 쓰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잖아.”
“뭘 어렵게 써?!”
아무튼 이 형도 참.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 그 과제를 손으로 짚어줬다. 이 형한테 도망갈 데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한자말이 너무 많아. 왜 이렇게 쓸데없이 한자말을 많이 쓰는 거야? 풀어써도 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닌데.”
“그, 그럼 어렵냐?”
비상의 말을 듣자, 강산은 진지하게 그런 말을 꺼냈다. 아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꼭 있어야 할 거 아니면 풀어써. 우리가 살면서 조우란 말을 얼마나 많이 쓸 거 같아?”
“젠장. 그건 그렇지.”
그 말을 받아들였는지, 강산은 그렇게 투덜댔다. 한편, 옆에서 그걸 보던 별밤은 마치 개그라도 보는 것처럼 킬킬대고 있었다.
“게다가 글귀 앞뒤가 안 맞잖아. 이게 한둘도 아니고, 이만큼 나오는데 설마 A를 바란 거야? 형, 이거 다시 읽고 나서 고쳐봤어?”
“시, 신발. 게임하다 보니까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퇴고를 왜 해…”
비상이 이렇게 따지고들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정말 먼산을 바라봤다. 물론 저 너머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근데 넌 어려운 말 안 쓰냐?”
이젠 자포자기했는지, 강산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마 학점이 억울하단 생각은 이제 접은 듯했다.
“어려운 말을 써서 어디 써먹는데?”
“니같은 엘리트는 괜히 어려운 말쓰는 거 아니었냐?”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지는 걸 느꼈다. 이 형은 그걸 진지하게 믿고 있었단 말인가. 그 생각에 어이없어지면서도, 비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엘리트인지 어떤진 둘째치고, 읽기 쉬운 게 먼저지, 멋있는 척하는 게 먼저야?”
“그러고 보니 넌 영단어도 안 섞어쓰긴 하더라.”
“내가 외국에 다녀온 것도 아니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 니가?! 외국 안 가봤냐?”
“적어도 오래 산 적은 없는데. 그거야 가본 적은 있지만.”
이 말과 함께, 비상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형은 아직도 자기한테 뭔가 편견을 가진 듯했다. 그 편견이 고작 엘리트로 끝나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비상은 어느덧 저녁이 되었단 걸 깨달았다. 요즘엔 해가 길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상은 이런 말과 함께,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먼저 나간다.”
“오늘은 경기 자체가 없지 않냐?”
“혹시 누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이없어하는 강산의 말을 뒤로 한 채, 비상은 신발을 신었다. 비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하자, 강산이 어이없단 듯 이렇게 투덜댔다.
“쟨 나보다 더 놀이를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
“조심해서 갔다와라, 비상아.”
“제가 조심할 건 저 형밖에 없죠 뭘.”
그렇게 별밤한테도 인사한 뒤, 비상은 곧장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선, ‘이 개자식이!’란 소리와 함께 뭘 던지는 소리 및 맞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엔 신경도 안 쓴 채, 비상은 곧장 그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옥상으로 가자, 비상은 흰 티를 입은 사람 한 명만이 자기하고 등을 진 채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마 오늘은 저 형과 비상 빼곤 여기에 오지 않은 듯했다. 비상도 이 형과 얘기를 나눈 건 여러 번 있지만, 이렇게 ‘정말 단둘’이서 이야기하게 되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저 오셨어요?”
“아, 니가 먼저 왔니?”
비상이 가만히 말을 걸자, 의영은 뒤를 돌아보며 이제 알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마 자기 생각에 빠져서, 비상이 올라왔단 걸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저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의영은 혼자서 담배라도 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넌 담배 안 피지?”
그 말과 함께, 의영은 피우던 담배를 난간에 지져버렸다. 아마 비상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듯했다.
“고맙습니다.”
“이런 걸로 뭘.”
의영은 그 말과 함께, 다시 저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오늘도 여느 날처럼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비상은 문득, 이 형 집에 흰색 말고 다른 사복은 있을까 궁금해졌다.
“너도 내 옷 보냐?”
그걸 알아챘는지, 의영은 이 말과 함께 킬킬댔다.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렇게 대답했다.
“이젠 형이 흰 옷을 입든 뭘 입든 신경도 안 쓸 거 같은데요. 너무 당연해서.”
“나도 갈 때까지 갔구나.”
그 말 뒤, 둘은 난간에 나란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은 의영처럼 난간에 팔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형도 가만히 보면, 어떤 점에선 자기와 참 닮은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의영이 이런 말을 건넸다.
“나도 참 희한한 놈이지?”
“흰색 옷만 입는 거요?”
“아니, 내 성격.”
그 말과 함께, 의영은 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마 전에 들은 그 ‘미친 개’란 말을 아직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아냐. 난 예전부터 죽 이랬어. 고등학교 때도. 대학생 때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서도.”
의영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읊조렸다. 그 말만 들어도, 비상은 이 형이 주먹다짐 꽤 하며 살아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그걸 의영 자신이 안 바랐다 할지라도.
“덕택에 이중인격이란 말도 들었지. 고등학생 때 같은 반 애들이 장난삼아 한 말이지만. 뭐, 이상한 것도 아냐. 한 번 열받으면 나도 멈추기 어렵거든.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겨우 멈춰. 이상하지?”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상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다, 의영은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이건 내가 혼자 생각하는 것뿐이지만, 사람이란 자기를 지닌 채 이 세상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를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 그게 참 이상하지. 어떤 사람한텐 세상의 한부분이 힘든데, 어떤 사람한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사람마다 힘든 부분도 다르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비상의 말에, 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하늘을 본 뒤, 의영은 말을 이어갔다.
“난 죽 그걸로 고민했던 거 같다. 어쩌면 지금도 그래. 왜 사람은 그런 걸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걸까?”
“글쎄요.”
비상은 그렇게 대답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도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의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비상의 생각이었지만.
“네가 볼 때, 내가 주장 몫을 잘하고있는 거 같니?”
“형만큼 믿음직하단 말 듣는 사람도 몇 없을 텐데요.”
“그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의영은 그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자기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저도 형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요, 뭘.”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쩐지 정말 그런 거 같은데?”
“원래 목소리 톤이 이래서…”
비상은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지만, 의영이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건 고마웠다. 사실, 둘도 나이차가 꽤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린 지금 별하고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과 함께, 의영은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걸 보며,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별 좋아하세요?”
“시골에서 태어났거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의영은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일이라도 생각하는 듯한 정겨운 표정이었다.
“어릴 땐 별에 한 번이라도 닿아보는 게 바람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이룰 수 있을까?”
“조금이나마 닿았으니 좋은 게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
그 말과 함께, 의영은 킬킬댔다. 마치 지금 지닌 모든 시름을 잊으려는 것처럼.
“가끔 말이지,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가 있어.”
의영은 다시, 가만히 입을 떼어놓았다.
“사정없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괜히 자기 삶이 드라마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니?”
“형은 그렇다 느낄 때가 있단 말씀이죠?”
“뭐, 그렇지. 우습지만.”
그렇게 말하며, 의영은 다시 하늘을 봤다. 아마 이 형은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특히 이렇게나 깊은 밤하늘을 보면.
“세상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란 걸 느껴본 적이 있니?”
“글쎄요.”
“자기가 너무나 무력해서, 거기에 있단 것만으로도 괴로웠던 적은?”
“형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비상이 묻자, 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기에 있단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뭔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승지랑 내가 처음 집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어. 뭔가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더라.”
비상은 어쩐지, 지금 의영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잠시 둘은 그렇게 가만히 하늘을 보기만 했다. 아마 둘 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한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비상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뒤 비상과 의영이 나란히 옥상에서 내려오자, 거기엔 짐작치 못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현과 승지가 건물 앞에서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비상은 현이 눌러쓴 검정색 야구모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
“둘이서 여기 있었니?”
“밤중에 누구랑 얘기하는 건 궁상맞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말과 함께, 승지는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의영이 없는 쪽이었다.
“그런데 너희들도 여기서 무슨 얘길 나누지 않았니?”
“뭐, 그냥 마음속 고민을…”
그 말과 함께, 승지는 비상한테서도 눈길을 돌렸다. 이제 승지가 도망갈 수 있는 데는 현이 있는 곳뿐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우리처럼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닐까?”
“괜히 기다리게 했구나. 미안.”
비상의 말에 뒤이어, 의영이 이렇게 말하며 미안해했다. 아마 자기가 승지한테 방해가 됐다 여긴 듯했다.
“그냥 우리도 궁상맞다 치자.”
“그건 좀…”
현이 진지하게 말하자, 승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승지도 이 일은 아예 포기한 듯했다.
이렇게 해서 이 일도 잘 마무리되었다. 아마도.
집으로 걸어가며, 비상은 이번에야말로 생각이 정리되는 걸 느꼈다. 비상은 다시 한 번, ‘놀이’를 하게 된 뒤 자기가 만난 이들을 되짚어봤다. 조금 마음이 시원해지는 건 느꼈지만, 여전히 어딘가 뭉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뒤, 비상은 침대에 몸을 기댄 채 별밤이 빌려준 책을 꺼냈다. 지금 읽으면 마음이 제대로 정리될 것 같아서였다. 한참동안 책을 읽던 비상은, 드디어 마지막 장까지 넘긴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별밤이 준 책도 그렇지만, 이번 책도 쉽게 읽긴 어려웠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별밤의 말대로 정말 읽기 쉬웠다. 주인공과 헤로인 사이의 관계도 코미컬한 데가 많아서, 이 작품이 진지하단 걸 가끔 잊어버릴 정도였다. 제대로 말하자면 진지한 주인공이 묘한 데가 있는 헤로인들한테 휘둘리면서도 믿음과 호감을 얻는 내용이었지만, 그 상황이 무척 알아보기 편했다. 헤로인한테 휘둘릴 땐 멋있는 모습은 물론 그다지 우울한 모습도 안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혼자 있을 때에만 볼 수 있는 그 끝없는 적막감은 그 전 장면과 대볼 때 꽤 임팩트가 있었다.
비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 작품의 대목 하나를 떠올렸다. 어쩐지 자꾸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대목이었다. 그 대목은 이러했다.
-사건을 해결하려 할 때 나는 유일하게 살아있단 걸 느낀다. 그 뒤로 남는 건, 극도의 허무함과 알 수 없는 자기파괴 충동, 그리고 이 무정한 햇살뿐이다.
별밤 말에 따르면 시리즈물인 듯하니, 비상은 생각이 나면 뒷권도 읽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을 이만큼 믿고 따르는데, 정작 주인공은 허무감에 휩싸여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게 다시금 묘하게 느껴졌다.
그 뒤, 비상은 침대에 누워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제 현이 한 말, 오늘 읽은 책이나 게임, 의영의 말을 다시 되짚어보면서였다. 비상은, 어쩌면 사람들에겐 제각기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어서, 그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 좋을지 모르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자기를 숨기는 게 아니라, 자기를 있는 그대로 가지는 것으로서 성립할 터였다. 어쩐지 정체성이란 말과 공존이란 말이 머리를 맴돌지만, 그게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또렷한 게 있다면, 정체성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이 말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며, 공존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이런 걸 고민할 일도 없으리란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중요하긴 할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파랑이 형의 경기가 있던가, 란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