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날, 비상은 원래 모습으로 잠에서 깼다. 비상이 일어나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어보니, 전화한 사람은 어제 그 연소자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그런 생각에 전화를 받자, 저 너머에선 쿨럭대는 소리만 자꾸 들려왔다. 일단 연소자가 뭐라 말하곤 있었지만, 목이 아주 맛이 가있어서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즉, 이 연소자는 어제 몸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감기에 걸린 것이다. 그만큼 비를 온몸으로 맞았으면 몸조리 정도는 해야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결국, 비상은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다가 이런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내가 누구라도 보낼 테니 그렇게 알아. 그럼.”
물론 연소자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겠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죽 듣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비상은 바로 현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현은 이 이른 시간에 비상의 전화를 받아주었다. 목소리로 볼 때, 원래 모습인 듯했다.
“간호?”
사정을 듣자마자, 현은 그렇게 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갑작스런 이야기란 생각을 하며, 비상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래. 혹시 괜찮겠니?”
“오늘 할 일도 없으니까 알았어.”
그 말을 들은 비상은 마음을 놓은 뒤, 그 연소자네 집을 알려주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대체 현도 안 걸린 감기를 왜 나이도 더 먹은 연소자가 걸렸단 말인가. 머리가 지끈댔지만, 어차피 비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참고로 연소자의 주소는, 어제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다. 열한 시에 역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 ‘혹시 모르니까 우리 집 주소 보낸다’면서 연소자가 자기 집 주소를 보내온 것이다. 그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렇게 연소자 문제를 처리한 뒤, 비상도 연구소로 가려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저건 뭐지?”
우연히 베란다를 보던 비상은, 누군가 자기 맨션 근처에서 어슬렁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수상쩍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이런 아침부터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쩐지 비상은, 저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게 자기자신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이 맨션을 나오자.
“와, 까, 깜짝아!!”
그 어슬렁대던 상대방은 이런 말과 함께 뒷걸음질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곤 비상 쪽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깜짝 놀랄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상대방한테 다가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 네. 무, 물론이죠. 아하하…”
그 상대방, 혜은은 여전히 눈길을 돌린 채, 비상의 손을 잡고 가만히 일어났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일’ 뒤로 처음 만났다는 건 사실이었다. 혜은이 자기 손을 잡고 일어난 뒤, 조심스레 몸을 터는 걸 보면서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저, 마,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오고 나서 생각하니 전화도 없이 이렇게 일찍 오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과 함께, 혜은은 얼굴을 붉혔다. 사실, 비상 입장에선 자기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더 궁금한 일이었다. 물론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여길 아신 거죠?”
“그, 다, 다녀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비상이 조심스레 말하자, 헤은은 이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비상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한 뒤, 비상은 다시 혜은에게 말을 건넸다.
“많이 힘드시죠?”
“네, 네?!”
그 말에 놀랐는지, 혜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는 모습이었다.
“그 쪽 밤에 좀 험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 그것도 그렇지만, 어, 어제 일을 듣고…”
혜은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비상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아마 어제 있던 그 일을 어디선가 듣고 온 듯했다.
“그건 이제 괜찮아요. 잘 끝났거든요.”
“그래도 저희 밤이…”
비상이 그렇게 말했지만, 혜은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걸 보다, 문득 뭔가 떠오른 비상은 다시 한 번 혜은한테 이런 말을 걸었다.
“그 쪽 밤에 있기 힘드세요?”
“아, 네?”
혜은은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곤,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힘들다기보다, 격한 사람이 많으니까…여자도 별로 없고…”
그 말을 듣자, 비상은 혜은이 금빛 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혜은 역시 그 고집들과 지내려면 꽤 힘들 터였다.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비상은 혜은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자기가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혜은도 이걸 알고 있을 터였다. 알면서도 견디기 힘들어 비상을 만나러 온 것이겠지만.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오늘 제 말 들어주셔서 마음이 좀 놓였어요.”
혜은도 그걸 아는지, 이 말과 함께 비상한테서 몸을 돌렸다.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혜은을 보며,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대로 죽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비상 역시 연구소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쩐지 오늘은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게 될 거 같은데.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비상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도 잊은 채, 비상이 연구소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쩐 일이지?”
현이 전화를 건 걸 보고, 비상은 혼자 이렇게 중얼댔다. 하지만 여기서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다음, 비상은 가만히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전화 너머에선 자주 들어온 낮은 목소리가 이런 말을 꺼내들고 있었다.
“이 사람 이상해.”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니?”
비상은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치곤 참 드물기 이를데없는 말이라서였다.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자꾸 손을 내저어. 감기몸살인데.”
현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비로소 쓴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자기한테 전화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저 놈은 누구한테 도움받는 걸 지지리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때, 전화 너머로 제대로 쉰 목소리가 이렇게 외치는 게 들려왔다.
“이 자식아. 왜 얘를 보내?!”
“그럼 누굴 보내란 거야?”
비상이 어이없어서 이렇게 대답하자, 현이 연소자한테 대신 전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소자는 그 말이 열받았는지, 아까보다 더 크고 더 쉰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누가 보내달래?! 이런 망할…”
“그럼 전화는 왜 한 거지?”
“시꺼! 쿨럭쿨럭…”
그 이를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이 이렇게 묻자, 연소자는 아까보다 더 이를 갈며 이렇게 외쳐댔다. 저 놈은 목도 안 상하나.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불에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볼 때, 연소자는 피곤해져서 결국 다시 누운 듯했다.
그 때, 이번엔 연소자도 현도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로 볼 때, 아마 그 사람은 연소자의 어머니인 듯했다.
“모처럼 남자친구가 왔는데 너는 또…”
“이씨. 누가 좋대?! 쿨럭!!”
연소자가 소리를 지르며 쿨럭대는 걸 듣다가, 비상은 슬슬 전화를 끊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현한테, 비상은 이렇게 일러두고 전화를 끊었다.
“적절히 보고 있다가 나오면 또 연락해. 알았지?”
현의 대답을 볼 때 더 걱정할 건 없어보였지만, 아무튼 일이 희한하게 꼬인 건 사실이었다. 자기가 전혀 짐작치 못한 데서, 상황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비상이 연구소를 나오려 할 때였다.
“어?”
어디선가 자길 보는 눈빛을 느낀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어제도 본 금빛 밤 쪽 남자가 있었다. 비상이 자길 본 걸 알아챘는지, 남자는 곧장 저만치 사라졌다. 이건 비상의 짐작이었지만, 어쩐지 저번에도 저 남자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타고 큰길로 들어선 비상은,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이리로 걸어오고 있단 걸 깨달았다. 상대방도 비상을 깨달았는지,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잘 지내셨죠?”
“네, 그렇죠. 저야말로…”
그 사람은 ‘놀이’를 하는 팀원도 아니고, 천사조차 아닌, 그 가게의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여자애였다.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이야. 사실 여자애가 걸어온 말은, 비상이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밖에 나갈 수도 있어요?”
“잠시 나돌아다니는 건 자주있는 일이거든요.”
비상이 조심스레 묻자, 여자애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싹싹하게 대답했다. 비상도 이 여자애가 가게에서만 있을 수 있으리라 짐작했기에,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무슨 볼일이라도?”
“그냥 나돌아다니는 게 좋아서요.”
“평소엔 안 나가시나 봐요?”
“아뇨. 아랫일이 신기해서…아차.”
여자애는 마치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입을 다물더니,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곤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고쳤다.
“여긴 밖인데 못할 말을 한 거 같네요. 죄송해요.”
“아랫일이요?”
“저는 하늘 쪽 존재라서…”
“그러니까 천사같은 존재인가요?”
“아니에요. 그거야 가깝긴 하지만…전 여기서 지내려고 여러 방법을 쓰고 있고…”
이쯤되자, 비상은 정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이 여자애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천사는 아닐지 몰라도, 그것과 ‘비슷한’ 존재란 건 틀림없었다.
그래서, 비상은 다시 물었다.
“방법이라구요?”
“그러니까, 전 여기서 오래 지내려고 조금 특이한 방법을 쓴단 말이에요. 길게 말할 순 없지만, 일단 나이도 여러분들보단 좀 많고, 그것뿐만 아니라…”
여자애는 그리 대답하다, 잠시 말을 멈췄다. 마치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정리했는지, 여자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헷갈리시겠지만, 비상 씨의 눈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과는 다를지도 몰라요.”
이 말을 듣고, 비상은 이 여자애, 라기보다 ‘가게 주인’도 보통사람이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보통사람이란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자기 생각보다 이 사람은 더 대단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제 멋대로 연하처럼 대하거나, 여성처럼 대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인가요?”
“대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할 생각이 없지만, 대략 그렇다 생각하시면 돼요. …아.”
그렇게 대답하다, 여자애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마치 가야할 곳을 찾아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전 이 쪽을 둘러볼게요.”
그 말과 함께, 여자애, 라기보다 가게주인은 저 쪽으로 휙 사라져버렸다. 비상은 잠시동안 거길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였다.
그 때였다.
“윤비상. 같이 가지?”
비상의 등 뒤에서 이런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어깨를 탁 쳤다. 물론, 그게 누군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형은…웬일로 이렇게 모인 거야?”
그런 말과 함께 돌아선 비상은, 강산을 비롯한 연장자들 모임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의영과 의지는 없었지만, 나머지 연장자들은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강산은 그게 별거라 여기지도 않는지, 오히려 비상한테 큰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가다가 니가 나타난 거지, 이 자식아.”
“그건 또 무슨 자기중심 사고야?”
“뭐라고?!”
강산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비상을 팰 기세로 덮칠 채비를 했다. 그걸 보던 잎새가 하도 웃겼는지,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쟨 또 저런다니까.”
“야, 너 나 욕했냐?”
“그럼 누구겠냐. 우리 비상이를 깔 수는 없지.”
“이 자식이 진짜…”
그렇게 강산이 비상 대신 잎새의 멱살을 잡는 사이에도, 하늘은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하늘이 이렇게 물들었단 건, 이제 곧 밤이 찾아온다는 걸 뜻했다.
“또 만났네.”
그 때, 이번엔 아래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보니, 역시나 현이 아무렇지 않게 비상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곰귀 후드티를 눌러쓴 채였다.
강산은 그게 그렇게나 신기했는지, 갑자기 현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야, 넌 그 모자 좀 벗어보면 안 되겠냐?”
“왜?”
“뭘 왜야, 궁금하니까 그렇지.”
그 말과 함께, 강산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 때다 싶었는지, 잎새는 이런 식으로 신나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우리 강산이가 이젠 자기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친구한테…크억! 목 좀 조르지 마!!”
“넌 아까부터 나한테 불만있냐?!”
그렇게 산소가 부족해 헥헥대는 잎새를 데리고, 비상 일행은 오늘 경기가 있는 옥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비상의 눈엔 참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참새!”
갑자기 맨 앞에서 걷던 잎새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모든 걸 깨달았는지, 강산이 킬킬대며 뒤에서 이렇게 맞장구쳤다.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
“코끼리!”
잎새가 그렇게 외치자, 잠시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산은 어이가 없었는지, ‘야, 뭐야?!’란 말과 함께 잎새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꿀꿀.”
현의 이 대답에, 잠시동안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 사건은 강산이 ‘되지도 않는 건 하지 마. 이 자식아’라 투덜대는 걸로 좋게 끝났다.
그러던 와중, 비상 일행은 반가운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지금 다들 같이 가는 거구나? 그럼 나도 같이 가야지. 그지?”
의지는 아무렇지 않게, 비상 일행에 끼어들며 이렇게 말했다.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 의지는 곧장 궁금한 걸 비상 일행한테 물어오기 시작했다.
“뭐하면서 왔어?”
“동물원 놀이.”
“아, 참새 짹짹같은 거?”
현의 말에, 의지가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딱 쳤다. 아마 친구들과 여러 번 해본 적이 있는 듯했다.
“매머드 코끼리는 뭐게?”
그 때, 강산이 무척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의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음…꿀꿀?”
이 말에, 비상 일행은 현을 빼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강산마저 뭐라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비상 일행은 어느덧 옥상 가까이에 다라라있었다.
“아, 다들 왔어?”
옥상으로 가자, 흰 티를 입은 의영이 반갑게 비상 일행을 맞아주었다. 승지도 먼저 와있었는지 눈에 띄었지만, 의영과는 이상하리만치 멀리 떨어져있었다.
“둘만 먼저 온 거예요?”
“아…뭐, 그렇지.”
별밤이 묻자, 의영은 눈길을 돌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분위기가 어색하다 느꼈는지, 갑자기 잎새가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야, 의영이 형 너무 놀리면 안 되잖아.”
“너도 뭘 이런 걸 가지고.”
의영의 그 말 뒤로, 이야기는 어제 있던 그 일로 바뀌었다. 물론 지금은 정리된 일이지만, 다들 느낀 게 많았는지 이런저런 말을 꺼내놓고 있었다. 승지도 여기엔 관심이 있는지, 이 쪽으로 눈길을 주는 게 보였다.
이 뒤, 연소자들이 삼삼오오 옥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물론, 연장자들은 모두 옥상에 있었으므로 더 올 일도 없었다). 연소자들은 어제 그 일을 오늘 처음 알았는지, 친한 연장자 아무나 붙잡곤 어떻게 된 건지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내가 왜 이래야 되냐?!”
강산도 호기심많은 연소자들(드물게도 군청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사이에 낀 채, 투덜대면서도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해주고 있었다. 그걸 다 들은 대한은 아쉬웠는지,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왜 절 안 부르신 거예요?”
“너도 패널티받게?”
옆에서 잎새가 놀리는 가운데, 도진은 어제 그 소동에 크게 감동받은 듯했다. 심지어 눈까지 반짝이며, 강산을 보면서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우아. 진짜 멋있었겠다.”
“넌 빨리 꿈에서 좀 깨라. 이 자식아.”
강산이 그런 도진한테 한마디하고 있을 때, 비상은 또 누가 자길 본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엔 붉은 밤 쪽이었다. 설마라는 생각을 하며 그 쪽을 보니, 아니나다를까, 거기엔 세림이 자길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나한테 무슨 불만이 이렇게 많은 거지.
물론 전에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비상은 아직도 그걸 잘 알 수 없었다. 설마 이 모든 게 다 연소자 하나 때문일까. 어쩐지 자기가 모르는 까닭 하나둘쯤은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세림한테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엔 또 자주 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 채비를 하던 파란 밤 쪽에서, 비상을 알아챈 은솔이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뒤에서 끌어내려고 난리지만, 그래도 은솔은 끝까지 손을 흔들려들었다. 그걸 보며 쓴웃음을 짓던 비상은, 이 광경을 파란 밤의 다른 팀원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팀원은 2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남성이었는데, 상록과 얘기하다 말고 자기네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 비상이었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곧 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비상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드물게도 각 밤 주장 세 명이 모여서 뭔가 얘기하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걸 멀찍이서 보고 있던 비상한테, 갑자기 의영이 말을 걸어왔다.
“비상이 너도 일로 안 올래?”
“뭐, 그러죠.”
딱히 못 갈 까닭도 없었으므로, 비상은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원은 곧장 반갑게 맞으며, 대뜸 이런 인사를 건네왔다.
“아, 형이 그 등 못 편다는 분이세요?”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떠도는 거지?”
“그건 제가 더 궁금한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그렇게 오른팔을 내민 해원과 악수를 한 뒤, 비상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상록이 자길 보고 있었다. 이 사람하곤 참 이상한 인연이란 말이지. 똑같이 안경도 끼고있으니 말이야.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상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전상록입니다.”
“윤비상이라 합니다.”
“스물일곱이신가요?”
“한 살 아래라 하는 게 맞죠.”
“그럼 연소자?”
여기엔 상록도 놀랐는지, 조심스레 그런 말을 꺼냈다. 비상이 ‘네’라 대답하자, 이젠 해원조차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연장자인 줄 알았는데요?!”
하도 많이 들은 말이라 이제 흘려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비상은 이런 말이 나오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자기의 어디가 연장자처럼 보인단 말인가. 원래 자기 일은 잘 모르는 법이지만.
“그런데 어제 일에 관해 하늘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어제도 죽 마음에 걸렸던 걸 물어봤다. 천사와 만날 일이 많은 각 밤 주장들이라면, 이 역시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였다.
“아, 안 그래도 어젯밤에 물어봤어. 천사 말대로라면 크게 사고난 것도 아니니 괜찮다더라. 물론 무기 대신 손을 썼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저희 밤 죽는 거죠. 그럼. 정신적으로.”
의영의 대답에, 해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마 어제 마음고생을 꽤 한 듯했다.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건 다행인데, 이렇게 규칙이 널널해도 되는 거예요? 빠듯하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데…”
“우리도 그걸 물었는데, 천사가 괜찮다 하더라구.”
“왜죠?”
비상이 묻자, 의영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 자긴 들은 대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아직 의영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만약 돌발상황이 생기면 그 때 생각하면 된다고 하던데. 어차피 이 놀이에 그렇게 큰 게 걸린 것도 아니고, 비겁하게 이기려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라고.”
“그래요?”
“하늘에선 그렇게 생각하나 봐. 아마 그 쪽에선 너무 빡빡하게 하면 ‘놀이’가 아니라 여기는 듯한데…하늘도 모든 걸 다 짐작할 순 없잖아. 그때그때 알맞게 대응하는 게 아닐까?”
사실, 그 말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게 스포츠가 아닌 ‘놀이’인 이상, 짐작하지 못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비상이 가끔 보는 예능에서도, 제작진이 전혀 의도치 않은 행동을 출연자들이 하는 바람에 갑자기 협상이 이뤄지거나 어떻게저떻게 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아마 이번 일도 그렇게 넘어간 듯했다.
“그럼, 하늘에선 어쩔 수 없을 때 빼곤 놀이에 관여하지 않는 거죠?”
“저도 그렇다 들었는데요. 어차피 이 놀이 특성상 한쪽 밤에 유리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그럴 수 있다 해도 저지른 자한테 큰 패널티가 간다 들었는데.”
“거기도 패널티가 가나요?”
상록의 말에,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하늘이 이 놀이에 ‘그런 식으로’ 관여하는 일은 없는 듯했다.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놓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상은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늘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놀이를 하는 걸까.
곧 시작되는 경기를 기다리며, 비상은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겼다.
“이야. 오늘도 집안이 깨끗한데?”
그렇게 경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 비상은 이 망할 형들을 이끌고 자기 집에 들어왔다. 물론 비상이 바라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저 저 형들이 덮치고 싶어서 저러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남의 집엔 왜 쳐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비상은 형들을 집으로 받아들였다. 집안에 들어온 형들은,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더니 자기네들 아지트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크게 떠드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이가 없어진 비상은 안주라도 만들려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뭐 만들 거냐?”
비상이 안주를 만드려 한단 걸 깨닫자, 저 뒤에 있는 형들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야, 이런 것 좀 만들어봐라’란 말을 던지는 건 물론, 밖에 나가서 뭔가 두둑히 사오기까지 했다. 물론 이 시간에 문을 여는 데라곤 편의점밖에 없겠지만, 비상의 눈엔 여전히 어이없게 보였다.
결국, 탁자 위에 어디서 얻어온 건지 먹음직한 김치과 삼겹살이 놓이는 걸 보고, 비상은 머리를 짚었다. 그리곤 연장자 형들을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던졌다.
“그런 걸 식탁에 두는 건 나 보라는 친절인가?”
그걸 깨달은 순간,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격하게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물론 연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산을 뺀 다른 연장자들은, 소파를 짚어가며 자지러지게 웃느라 바빴다.
결국, 강산은 자기 혼자 뒤떨어지기 싫었는지, 주위 연장자들의 어깨를 흔들어대며 여기저기 물어대기 시작했다.
“야, 왜 웃는 거야?!”
“넌 문과면서 문학 공부도 안 했냐?”
“신발. 10년 전 걸 어떻게 다 기억해?!”
잎새가 대답해주자, 강산은 더 어이없단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그렇게 웃겼는지, 옆에서 별밤이 이렇게 끼어들었다.
“고3으로 10년이면 아직 멀었을 텐데…쿨럭!”
물론, 별밤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강산한테 목을 조이고 말았다. 이런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파랑이 신기하단 듯 아직까지 웃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비상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비상이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보네.”
사실, 비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치곤 참 드물게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몸까지 휘청이면서.
대체 뭐가 그렇게 웃겼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여전히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 말투(및 목소리 톤)가 무슨 연극이나 드라마에 가깝게 들린단 말을 중고등학교 때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상도 자기 말투에 관해선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자기자신이니 고칠 생각은 그다지 없었지만.
“근데 그게 그렇게 웃기는 말이었나?”
파랑이 다시 말을 꺼내자, 강산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비상을 빤히 봤다. 그리곤 어이없단 말투로, 멀찍이서 이런 말을 던져댔다.
“야, 정신 좀 차려라. 이 아우라야.”
“나도 내가 이렇게 웃을 줄은 몰랐는데.”
이제야 천천히 일어나며, 비상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걸 보자 더 어이가 없어졌는지,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투덛댔다.
“너도 짚이는 건 있었나 보지?”
“그런 말은 많이 들었거든.”
그건 정말이었다. 비상이 의식한 적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곤 했던 것이다. 사실 이상하단 생각은 그리 하지 않았지만, 조금 특이한 말투가 입에 뱄단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비상은 어릴 적 일을 떠올리곤 했지만, 그 어릴 적 일조차 요즘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 일도 마무리되자, 연장자 형들은 사온 소주를 까며 안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구석에 있던 떡볶이에 다들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가운데, 잎새는 그 쪽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게 신기했는지, 강산이 자기 몫을 먹다 말고 갑자기 이런 말을 내던졌다.
“그렇게 매운 게 싫냐?”
“그래서 불만이냐, 이 자식아?”
“그럼 라면은 어떻게 먹었어?”
“야, 라면 못 먹으면 어떻게 사냐?”
잎새가 이렇게 투덜대자, 다들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치도 같이 먹던데?’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올 정도였다.
참고로 잎새 말에 따르면, 라면 및 배추김치쯤은 먹을 수 있지만, 불닭볶음면이나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건 절대 못 먹는다고 했다. 잎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연장자들한테 이렇게 물었다.
“근데, 대체 그딴 걸 왜 먹는 거냐?”
“몸이 매운 걸 바라니까.”
강산의 그 당당한 대답에, 비상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도 매운 걸 저 형만큼 꺼리진 않지만, 굳이 자기가 알아서 그걸 찾아다니진 않아서였다. 물론 이것도 자기 나름이겠지만.
그렇게 술잔이 몇 번 비워진 뒤, 강산은 제대로 취했는지 소파 뒤로 목을 뉘었다. 저 정도 마셨는데도 얼굴이 그대로인 걸 보면, 이 형은 틀림없이 주당이었다.
“이야, 가슴이 펄쩍펄쩍 뛰는구만.”
“넌 다시 태어나면 앙골라토끼라도 되는 거 아니냐?”
“그게 뭐야?”
별밤이 놀리듯 말하자, 강산이 어이없단 듯 그렇게 되물었다. 별밤은 자기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 봐라. 니랑 몸집은 비슷한데 더 귀여운 토끼지 뭘.”
“이 자식아. 죽을래?!”
“아니, 니가 앙골라토끼한테 씌는 방법도…”
“뭔 헛소리야! 이 자식아!!”
멱살을 잡힌 채 별밤이 말을 잇자, 강산은 더 열받았는지 팔에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그 사진을 보던 잎새는, 킬킬대며 이렇게 거들었다.
“몸집만 비슷하네. 옆으로 조금 긴 게…아야!”
결국 잎새는 입 하나 잘못 놀려서, 강산한테 얻어맞는 불쌍한 피해자가 되었다. 한편, 파랑은 사진을 보며 ‘큼직한 게 대한이랑 비슷하네’라 말하고 있었다. 이런 대소란 속에서, 여전히 멱살이 잡힌 별밤은 ‘기껏 귀여운 토끼를 대줬더니 왜 날 때리려드는지 원…’이라며 어이없단 듯 중얼대고 있었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지.
멀찍이서 그걸 보던 비상은, 이제 어이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연장자 형들이 날짜가 바뀐 뒤 사라지자, 갑자기 누가 벨을 눌렀다. 깜짝 놀란 비상이 화면을 보자, 거기엔 야구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가만히 서있었다.
“현이구나?”
“응.”
굳이 이렇게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비상은 현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이젠 현이 이렇게 늦게 자길 찾아오는 것도, 갑작스레 찾아온 현을 들이는 것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가운데 자리를 비운 채였다. 비상은 생각에 잠겨있었지만, 현이 어떤지는 사실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기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고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비상은 이 조용한 느낌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마음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래왔던 것처럼.
그 때, 현이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까 누가 왔어?”
“아, 연장자 형들이 쳐들어왔거든.”
“그럼 술냄새네?”
“그래, 현이 넌 술냄새 별로 안 좋아하지?”
현의 말에, 비상은 이렇게 되물었다. 물론 현이 전혀 모르고 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
“남이 마시는 건 상관없어.”
“그래?”
자기가 마시지만 않으면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다시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침묵이 흐르고 있었지만, 둘한텐 그리 답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간이 잠시 지난 뒤, 갑자기 현이 이런 말을 꺼냈다.
“난 비상이가 친구라 생각하는데, 비상이 생각은 어때?”
“응?”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물어오면 우스울 법도 한데, 현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그런 느낌조차 전혀 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가만히 되물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친구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니?”
“아니, 그냥.”
그 말을 들은 비상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둘의 관계가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였다. 물론 나이차가 있다 한들 친구라 해서 이상할 건 없지만, 어쩐지 비상은 둘의 관계가 그것과는 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연애감정이란 뜻은 결코 아니지만.
어쩌면 현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비상한테 그렇게 물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친구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둘의 관계 중 하나를 입에 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가 섞인 관계, 그게 비상과 현을 이어주고 있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현은 마치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비상이랑 있으면 마음이 편한데, 왜 그럴까?”
“내가 널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서가 아닐까?”
“내버려둔다고?”
비상의 말에, 현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상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윽고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난 자기가 바꿀 수 있는 건 자기 한 명밖에 없다 여기거든. 난 다른 사람을 절대 바꿀 수 없어. 그 사람이 알아서 바뀌는 거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책에서 그런 말을 봤거든.”
그렇게 대답하며, 비상은 잠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자기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떠올라서였다. 그 책을 사준 건 아버지였지만, 정작 아버지는 자기가 지금처럼 ‘버젓한’ 길을 가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그걸 말로 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말하는 사람 별로 없는데, 신기하다.”
“그러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비상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 말이 맞단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책을 읽기 전까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길 바꾸려는 사람보단, ‘남을’ 바꾸려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니까.
“그런 생각이 퍼지면 다들 행복할 텐데. 그지?”
“그렇겠구나.”
현의 말에, 비상은 가만히 대답했다. 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면 다들 같이 지낼 수 있을 텐데.”
비상 역시,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다시금 자기와 같은 높이에서 비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있는 것처럼, 그렇지?”
“그렇겠지.”
잠시 뜸을 들인 뒤,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다함께 지낸다, 는 말이 너무나 어려워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자기와 현이라는 이질적 존재가 이렇게 있는 데엔 틀림없이 뜻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을 비롯한 다른 이와의 인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까닭 중 하나는, 둘이 지금 어떤 면에서는 ‘동등’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소파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는 현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이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고 있다면, 자기와 동년배인 ‘보통’ 남성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란 생각과 함께.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건 전혀 틀리지 않았다.
현과 비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진지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참이든 거짓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