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28. 파랑주의보

다음 날 아침, 조금 일찍 잠에서 깬 비상은 아직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잠시 생각하던 비상은, 이윽고 핸드폰을 꺼내 현한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군가, 그것도 이성한테 전화를 거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 비상은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현과 비상, 둘의 사이라면.
“응?”
전화를 받은 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너도 지금은 ‘다른 모습’이구나, 란 생각을 하며, 비상은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안 만날래?”
“음, 그럼 우리 집 근처 놀이터…”
잠시 생각하더니, 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 목소리에 졸린 느낌이 남아있었지만, 자기도 비상과 만나고 싶다는 말투였다. 비상 역시, 현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그럼, 거기서 보자.”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많이 이른 시간이지만, 현과 따로 만나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아, 먼저 와 있었구나.”
비상이 놀이터로 들어서자, 현은 벤치에 가만히 앉은 채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이라서 그런지, 모자는 눌러쓰지 않은 채였다. 비상은 가까이 다가가, 현을 보며 말을 걸었다.
“일찍 깨워서 피곤하니?”
“아니,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부비는 현 옆에, 비상은 가만히 앉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여섯 시. 여름이니 이미 아침해가 하늘에 떠올랐지만, 사람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조용한 놀이터에, 아침부터 오는 사람이 많을 리도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비상은, 이윽고 마음을 굳힌 뒤, 현한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어차피 이렇게 이른 아침이니, 누군가한테 들릴 걱정도 없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며 그 때 자기가 생각했던 것, 모두를 현한테 털어놓자, 현은 혼자 ‘흐음’이라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혼자서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난 별 생각 안 들었는데.”
그러다가, 현은 입을 뗐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투였다.
“익숙하지 않을 텐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
현의 말에, 비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만 괜히 겁냈던 건가, 란 생각에서였다. 현은 그런 비상을 가만히 보더니, 다시 입을 뗐다.
“그치만 그 마음은 알 거 같아.”
그 말에, 비상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이 아이는, 적어도 자기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비상은 그걸로 모든 게 다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왜인지는 자기도 잘 알 수 없었지만.
“근데 신기하다.”
그 때, 현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마음을 놓고있던 비상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이렇게 되물었다.
“뭐가?”
“그, 남자 거기를 놀리는 말로 조루나 고자나 뭐 그런 게 여러가지 있잖아. 근데 여자는 별로 없단 생각이 들어서.”
좀 엉뚱한 말이긴 했지만, 비상 역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단 느낌이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절벽쯤 될까. 그걸 빼곤, 비상도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 때, 현이 뭔가 떠올랐단 듯 눈을 크게 뜬 채 비상을 바라봤다.
“아, 불임은 어떨까?”
“그거, 정말 절박한 분들이 들으면 고자 정도로 안 끝날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결혼한 친구도 없네. 그럼 소용없겠다.”
비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현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이 또 묘한 느낌에 빠진 사이, 현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상이는 거기 괜찮은 거야?”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운데.”
현이 정말 궁금하단 듯 이렇게 묻자,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나 모순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나도 가슴이 있긴 있는데.”
비상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려던 순간, 갑자기 현이 그런 말을 꺼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비상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난 관심없으니까 상관없어. 정말로.”
“근데 얼마나 있었더라…”
지금은 없는 자기 가슴팍을 가만히 보며, 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비상은 그 말을 듣자, 엉덩이가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그나마 자기한테 관심을 안 가져주는 게 다행이라 할까. 민망한 건 마찬가지지만.
“있잖아, 그런 걸 가지고 막 놀리거나 신경쓰이는 게, 사람이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비상한테 그렇게 묻고 있었다. 마치 중얼대는 듯한 말투였지만, 비상은 현이 자기한테 말을 걸고있단 걸 잘 알 수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르지. 자식을 남기라는.”
“그럼, 자식을 안 낳을 땐?”
그 말에, 비상은 할 말을 잃었다. 요즘 세상이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라서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걸 놀리려드는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상은 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단 걸 깨달았다. 이제 연구소로 갈 시간이 된 것이다.
그걸 깨달은 뒤, 비상은 옆에서 뭔가 가만히 생각하는 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난 지 한 달 남짓이지만, 비상은 아직도 이 현이란 여자애를 제대로 알고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았다. 순수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자기가 끼어들기 힘들 만큼 ‘자기 색’으로 물들어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어쩌면 자기가 어렵게 생각하고 있을 뿐, 현 자체는 의외로 알아보기 쉬운 아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 비상은 현이 자길 쳐다보고 있단 걸 꺠달았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현이 비상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비상은 현을 생각하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현이 자기를 보고 있었단 건 묘하다면 묘한 일이었다.
“왜 그러니?”
“그러고 보니 인상이 그대로인 거 같아서.”
현의 말을 듣고, 비상은 아까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 현은 그 말을 죽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뭐,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그럼 나는?”
그 말을 듣고,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은 대체 어디서 꺼내왔는지, 이젠 검정색 야구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있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글쎄. 어떨까…”
“그럼 나중에 말해줘.”
그 말과 함께, 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본 비상은, 자기도 이 자리를 떠야 할 때란 걸 깨달았다. 지금부터 채비를 하지 않으면, 연구소에 늦게 다다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둘은 인사를 나눈 뒤, 제각기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물론 비상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를 생각해서, 미리 짐도 챙겨온 참이었으니까.

그렇게 연구소에서 묘한 시간을 보낸 뒤(물론 원래대로 돌아간 상황이었지만), 비상은 강산을 만나러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저 형이 또 ‘오늘은 파랑이네 가는 거다. 알았냐?’라고 비상을 불러낸 탓이었다. 왜 하고많은 연소자 중 자기만 이렇게 불러내는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비상은 그 말대로 강산과 만나려하고 있었다. 딱히 안 갈 까닭도 없어서였다.
약속한 데로 다다르자, 강산은 손을 흔들며 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저 형은 참 기운이 넘친다니까. 비상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강산이 이렇게 외치는 게 들렸다.
“오늘은 파랑이네를 터는 거야. 알았냐?”
이걸 보니, 강산은 아마 나만 당할 수 없단 생각에서 여기로 온 듯했다. 왜 잎새나 별밤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안 한 파랑의 집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둘은, 파랑이 자취하는 맨션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른 순간, 비상과 강산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에 큼지막하게 이런 말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던 것이다.
-여름잠자고 있으니 깨우지 마세요.
“이 자식이 장난하나…”
강산이 이를 가는 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맨션은 안에서 허락해주지 않으면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상과 달리, 강산은 다른 데가 더 열받는 듯했다. 강산은 곧장 이런 말과 함께, 파랑의 집 문을 냅다 차기 시작했다.
“여름잠자고 있으니 깨우지 마세요’라고? 김파랑 이 미친 놈아. 겨울잠도 못 봐주겠는데 뭐, 여름잠?!”
“아니. 형, 좀 진정을…”
“신발. 이렇게 더워죽겠는데 무슨 여름잠이야! 당연히 깨지!!”
“지금 그게 문제야?”
어이가 없어진 비상이 그렇게 딴죽을 거는 순간,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채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던 강산은, 이 바람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물론, 문 너머엔 항상 그렇듯 씩 웃고 있는 파랑이 있었다.
“야, 이 개자식아!!”
“아, 강산이 네가 바로 앞에 있을 줄 몰랐지. 많이 아팠어?”
“뻥까지 마!”
억울했는지 그렇게 외치는 강산은 둘째치고, 비상은 파랑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엉덩방아로 끝난 게 다행이네, 란 생각을 하며.
“청소 잘 하시네요.”
“강산이랑 나는 다르거든…아야!”
비상 못지않게 깔끔한 집안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파랑은 신나게 대답하다 강산한테 얻어맞았다. 강산은 그 말이 불만이었는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이렇게 화냈다.
“왜 날 끌어들여?!”
“근데 맞잖아. 그지?”
그 말과 함께, 파랑은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비상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묘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고기 내놔. 빨리!”
그러거나 말거나,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비상이라 한들, 이런 광경을 보면 기가 찰 따름이었다.
“형이 무슨 어린애야?”
“신발. 사람은 고기로 사는 거야!”
비상이 한마디했지만, 강산은 오히려 이런 말과 함께 더 투덜댔다. 물론, 이 형도 진심은 아닐 터였다. 고기는 정말 먹고 싶어하겠지만.
그 때, 그걸 가만히 보던 파랑이 대뜸 이런 말을 건넸다.
“아, 마침 먹다 남은 소불고기 있는데, 덮밥이라도 해줄까?”
“뭐가 있다고?!”
이 말엔 비상은 물론, 강산마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파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것도 고기에 환장한 사람이 찾아오는 날에.
“그러니까 덮밥. 규동이라고 일본식 음식이 있는데…”
“그걸 할 줄 안다고?!”
“아니, 그냥 내 맘대로 만든 거야. 어쩐지 될 거 같아서 해봤는데 맛있더라구. 어때?”
“당장 해 봐. 그건 먹고 가야겠다.”
그 말과 함께, 강산은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그건 한 번 먹고 갈 기세였다. 비상도 가만히 강산 옆에 주저앉았다. 저 형도 그렇겠지만, 비상도 고기가 나오면 거절하진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주저앉은 채 주위를 보던 비상은, 탁자 위에 의외인 물건이 놓여있는 걸 깨달았다. 누가 쓴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금빛 십자가였다.
“형은 교회 다니세요?”
“아, 부모님이 독실한 신자거든. 나는 그만 다녔지만.”
“니가?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냥 내가 판단해서 내가 정하고 싶었어.”
강산이 놀랍단 듯 묻자, 파랑은 그렇게 대답하며 요리를 이어갔다. 벌써부터 부엌에선 군침이 돌게 만드는 고기냄새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강산은, 이윽고 ‘아, 맞다!’란 말과 함께 이렇게 소리쳤다.
“야, 너 가출한 적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 맞다. 그런 말도 했지?”
여전히 요리를 하면서, 파랑이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별 거 아니라는 말투였다.
“그게 설마 교회 관련된 거냐?”
“어느 정도는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니네 집도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나 참.”
거기까지 듣고 나서,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볼 때, 강산은 파랑과 자기가 같은 환경에 있는 거라 여기는 듯했다.
“자, 다 됐어.”
그 때, 파랑이 이 말과 함께 정말 소고기덮밥을 들고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 그럴싸한 덮밥을 보고, 강산이 신기하단 듯 이렇게 외쳤다.
“야,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그냥 고기를 다시 데친 다음에, 달걀 반숙으로 풀어놓고, 참기름 좀 넣은 거야. 그럴싸하지?”
“그럼 사이비네.”
“아무튼 맛있어.”
강산이 그러거나 말거나, 파랑은 이미 펼쳐져있던 상에 수저를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비상도 ‘잘 먹겠습니다’란 말과 함께, 수저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먹은 파랑식 소고기덮밥은, 생각보다 꽤 맛있었다. 비상도 이제 원조 덮밥의 맛을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오래 전에 먹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맛이었다. 아마 소불고기이니만큼, 고기에 이미 양념이 되어있는 게 한몫한 듯했다. 강산도 이런 말과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릇 하나를 슥삭 비우고 있었다.
“이 자식은 희한한 데서 머리가 좋다니까.”
“희한한 데가 뭐야. 형도 참.”
“이게 어때서 그래? 칭찬이구만.”
하지만 생각해보면, 신기한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었을까. 정해진 요리만 만드는 비상한테선 도무지 떠올리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런데 형도 참 용케 그런 생각을 하셨네요.”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니까.”
비상의 말에, 파랑은 웃어보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비상은 파랑의 덮밥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어쩌면 고기뿐만 아니라, 양파나 당근같은 채소도 같이 들어가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 건더기라면 ‘덮밥’이라 말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강산이 너도 쉽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넌 날 뭘로 보는 거야?!”
파랑이 이렇게 말을 걸자, 강산은 곧장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 저 형은 아무리 봐도 이걸 어떻게 만들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그런 데는 먹는 거에 욕심많은 사람다웠다.
그렇게 우연히 눈길이 닿은 데에, 다른 것도 아닌 돼지머리가 있었다. 파랑은 텔레비전 옆에 돼지머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비상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저거 진짜 방에 두시네요.”
“안 그러면 강산이가 화내거든.”
“꼬박꼬박 절은 하냐?”
“그럼.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잘하고 있어.”
강산의 말에, 파랑은 그렇게 대답하며 킬킬댔다. 비상은 그걸 보자, 저 형의 바다같은 마음씨에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체 저 둘은 어떻게 친해진 걸까.
“그러고 보니 형들은 어떻게 친해졌어요?”
“오히려 비상이가 강산이하고 친해진 까닭이 궁금한데?”
비상의 말에, 파랑은 바로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되물었다. 강산은 어이가 없었는지,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그딴 걸 왜 궁금해하는 거야?”
“아, 저 형이 먼저 말을 걸어와서 반말했더니…”
“야, 잠깐. 뭘 그렇게 많이 줄였어?!”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파랑은 킬킬대며, 그런 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쩐지 강산이라면 대충 그럴 거 같다. 나는 어땠냐면…”
그렇게 파랑은, 자기가 어떻게 강산과 친해졌는지를 털어놓았다. 파랑이 첫날 모임이 끝난 뒤 혼자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산이 ‘거기 가는 사람. 얘기 좀 안 할래요?’라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음엔 파랑도 깜짝 놀랐지만, 이렇게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가볍게 말을 걸 수 있는 강산이 재밌어서 금세 친해졌다고 헸다. 그걸 듣던 강산은, ‘어쩐지 무지 옛날 얘기같네’라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딱 봐도 사람이 좋아보이는데, 좀 친해지면 어떠냐?”
이걸 보면, 이 형이 사람보는 눈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사람들이 다 강산과 정반대란 점은 조금 신기했지만.
그 때, 갑작스레 강산이 파랑을 보며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너도 고생 좀 했다며?”
“뭐, 학생시절엔 이것저것 있었지.”
그 말과 함께, 파랑은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긁어보였다. 파랑의 말에 따르면, 부모님과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도 꽤 반목한 듯했다. 전에 말한 대로 파랑을 억지로 교회에 보내려는 부모와, 여기에 반대하는 파랑이란 구도였다고 했다. 이 사람은 그런 고집과 거리가 먼 형이라 생각했기에, 비상은 이 말에 조금 놀랐다.
“집만 나간 게 아냐. 내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가 가고싶은 길을 걷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어.”
파랑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씩 웃어보였다. 물론 파랑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독립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 형은 스스로 살려는 의지가 굳었던 것이다.
“이 놈이 가만히 보면 기가 세단 말이야.”
그런 말을 하는 강산을 보며, 파랑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땐 부모님과 말싸움도 꽤 했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는 말이었다. 지금 파랑을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저 형한텐 좀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강산이처럼 험하게 반항한 건 아니고, 말싸움을 많이 했던 거야. 난 싸우는 건 잘 못하거든.”
“뭐라고, 이 자식아?!”
“집을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고등학생 때만 해도 네다섯 번은 나가지 않았을까? 그것 때문에 결석도 했으니까.”
강산이 화내거나 말거나, 파랑은 그런 말과 함께 눈길을 먼 곳으로 돌렸다. 아마 그 때 일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파랑이 웃음을 머금고있단 걸 알아채자,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그게 웃으면서 할 말이냐?!”
“겨울엔 안 나갔으니까 웃으면서 할 말이지 뭘.”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파랑을 보며, 비상은 정말 이 사람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모르는 이 사람의 모습은 또 얼마나 되는 걸까. 물론 강산 역시, 비상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파랑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성격이지만, 자기 손으로 삶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기 욕망을 강요하는 성향이라서, 이것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할 말을 할 땐 확실히 하는 성격이라서, 친구들이 놀랄 때도 많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받을 때가 많아서, 중학생이 되기 전엔 막말을 할 때도 있었단 이야기까지 한 뒤, 파랑은 옆에 있던 물컵을 손에 들었다. 아마 목이 말라온 듯했다.
“뭐, 그것도 다 옛날 일이야. 이제 10년쯤 전 일.”
“이 놈도 사는 게 전쟁이었네. 아주.”
“그러고 보니, 재밌는 거 하나 말해줄까?”
자기 말을 듣고 킬킬대는 강산을 보면서, 파랑은 갑자기 이런 말을 걸어왔다. 마치 갑자기 뭔가 재밌는 게 떠올라서, 꼭 한 번 눈앞에 있는 이들한테 말하고 싶다는 태도였다.
“내가 그 때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기차타고 부산으로 도망간 적 있다.”
“뭐라고?!”
파랑이 그런 말을 꺼내자마자, 강산은 곧장 이렇게 소리쳤다. 이걸 볼 때, 이 형이 이런 얘길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 듯했다. 만약 안 그랬다면 강산도 이미 알고있었을 테니까.
“절대 찾을 수 없는 데까지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큰맘먹고 기차를 탔거든. 밤중에 기차에 타고 있으니까 난 자유란 생각이 들더라. 혁명이라도 하는 거 같아서 잠도 안 왔다.”
“뭐, 그 땐 다 그렇지.”
거기까지 듣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피식 웃어보였다. 마치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부산까지 오니까, 마침 해가 떠오르는 거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바다가 있는 데까지 뛰어간 다음에 팔을 쫙 벌렸다. 초봄에.”
“그 때면 춥지 않냐?”
그렇게 딴죽을 걸면서도, 강산은 그 말을 재밌단 듯 듣고 있었다. 파랑은 ‘그런 건 잘 안 떠오르지만 말이야’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쩐지 거기 있으니까, 세상이 다 내 거같은 거 있지. 드디어 부모님 손에서 벗어났구나, 란 생각에 너무 기분이 좋았어. 해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침 하늘도 바다도 나랑 똑같은 파랑색이었거든.”
마치 그 때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파랑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여기까지 듣자, 비상은 이 형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웃고 지내니까 몰랐지만, 이 형은 이 형 나름대로 과감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비상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럼 파랑주의보네. 이 자식아.”
비상처럼 멍하니 그 말을 듣던 강산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듯 그런 말을 꺼냈다. 여기엔 비상은 물론, 파랑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동자가 좀 반짝이긴 했지만.
“강산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니가 맘 잘못먹으면 일이 커지니까 파랑주의보지 뭘. 뭐 그런 걸 묻냐.”
“그럼 그거, 칭찬이지?”
“그, 그럴 리가 있냐?!”
파랑이 그렇게 말하자, 강산은 그렇게 말하며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지만 칭찬을 못하는 저 형 성격으로 볼 때, 저게 ‘강산한테 있어서’ 칭찬인 건 틀림없었다. 그걸 굳이 쑥스러워하는 사람 앞에서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그 말과 함께, 저녁이 되자 비상은 파랑의 집을 나섰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어있었다. 어쩐지 저 집에 있던 시간이 몇 시간은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무심코 위를 보자, 파랑의 방에 걸쳐진 가림막이 위아래로 흔들대고 있었다. 그 들썩이는 모습을 보자, 비상은 어쩐지 자기를 바래다주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냥 창문을 열어서 인사해도 그만이지만, 저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그 형다웠다.
아무튼 저 형도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이 큰길로 나왔을 때였다.
“옥상까지 같이 갈래?”
갑자기 등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비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낯익은 연장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젠 비상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연장자, 별밤이었다.
“형은 파랑이 형 집으로 안 가세요?”
“뭐, 강산이가 전화해오긴 했는데, 생각이 바뀌어서. 일이 늦어지기도 했고.”
“그럼 그러죠 뭘.”
별밤의 말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둘 다 붉은 밤의 경기가 없었으므로, 비상이나 별밤이나 어깨에 힘이 꽤 풀린 모습이었다. 지금까진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옥상으로 가며, 비상은 어제 일에 관해 별밤에게 조금 털어놓았다. 물론 모든 속내를 털어놓은 건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었다, 란 건 형한테 말하고 싶었다. 다들 자기 갈길에 바빴으니, 들릴까봐 걱정할 것도 없었다.
“비슷한 말을 어디서 보긴 했다.”
비상의 말을 들은 뒤, 별밤은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디서요?”
“아마 인터넷 소설이었을 걸.”
“저처럼 자기 눈으로 본 상황인가요?”
“그건 아닌데, 그, 있잖냐. 공공장소에서 말하면 안 될…”
여기까지 말한 뒤, 별밤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만으로도, 저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이 말도 공공장소에서 하면 안 되지 않나요?”
“니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반칙인 거 같은데…아니, 나도 관심이 있는 데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아무튼 그런 거다.”
“대체 형 관심사는 어디까지 넓은 거예요?”
“글쎄다. 하늘부터 땅까지?”
비상의 말에, 별밤은 그렇게 대답하며 킬킬댔다. 그래도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있구나. 비상은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참 꼬박꼬박 구경가는구나.”
말을 돌리려는 듯, 별밤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사실, 그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니었다.
“남의 경기만 있으면 꼭 안 가도 되는데, 신기하게 오는 사람들이 꽤 된단 말이야.”
“특히 강산이 형이 그렇죠.”
“걘 모든 경길 다 볼 기세야. 진짜.”
사실 이미 알려진 대로, 꼭 ‘모든’ 경기를 볼 의무는 없었다. 심지어 자기 밤 경기조차 그랬다. 하지만 대부분, 매일 옥상에 나와서 경기를, 심지어 남의 밤 경기도 보러다니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런 ‘놀이’를 본 사람은 태어나서 한 명도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했다.
“그런데 파랑이 형도 사정이 많이 있었네요. 제가 말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이미 이 일을 아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리 별밤이라도, 강산과 어울리다 보면 파랑에 관한 이야기는 귓가로 몇 번 들었을 터였다.
“괜찮아. 비상아. 그건 사람이 절대 못할 일이니까.”
“그래요?”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던데. 자기는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한테 결례인 말을 안 할 방법은 없는 거 같다고. 우리가 알고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 내가 아직 그 정도구나, 라고 하나씩 배워가는 게 나을 거야.”
“그건 그렇네요.”
“우리가 엘리트 어쩌구라 놀리는 거 기분 안 나빴어?”
“아뇨. 그다지.”
“사람한텐 여러가지 사정이 있거든.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니 당연히 거기까지 짐작하지 못할 때가 많지. 하지만 우린 역사에서 배우고 있잖냐. 사람에 관한 이모저모를.”
그 말과 함께, 별밤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옥상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저 옥상 너머에선 다른 밤들이 바쁘게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쩐지 이 형은 내가 모르는 세상의 진리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옥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자기가 있어도 되는, 그 희한한 ‘놀이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