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 비상은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때문에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여섯 시. 보통 때라면 일어나기엔 아직 좀 이른 시간이었다.
설마 또 현이가 건 걸까.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비상은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핸드폰 너머로 높은 목소리가 이렇게 외쳤다. 아주 급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로.
“야 이 자식아. 큰일났어!”
그게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비상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목소리는 남의 밤 연소자가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번호는 어떻게 안 걸까. 따로 알려준 적도 없는데.
“이건 어떻게 안 거야?”
“지금 그딴 걸 물을 때가 아니라고!”
“그럼 설명하면 될 거 아냐.”
혼자서 흥분한 연소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흥분해봤자 비상이 해줄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자, 그렇게 시끄럽던 연소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오늘 다 종됐어. 이 자식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니랑 나랑 만났던 거 연장자 형들한테 들켰다고. 그 성질 더러운 형들한테!!”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 한들, 비상한텐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건 댁 탓 아닌가?”
“신발, 그게 문제야? 오해받았다고, 오해!!”
이제 연소자는 목구멍이 떠나가라 핸드폰 너머로 크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저 놈은 목도 안 아픈가. 비상은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려놓은 뒤, 연소자가 떠들어대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내가 니랑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고 형들이 오해했다고. 니네 밤 오늘 죽은 거야. 연장자 형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덮치려 작정을 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듣고 나자, 비상은 왜 이 연소자가 흥분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즉, 이미 이 사건은 금빛 밤의 손을 떠난 것이다. 이건 금빛 밤은 물론, 자기 팀인 붉은 밤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데는 남아있었다.
“오늘은 평일 아닌가?”
“신발, 대학생은 지금 놀고먹는 거 모르냐?”
그 말을 들은 뒤, 비상은 뭐가 문제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즉, 이 연장자란 사람들은 시간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네들, 이라기보다 비상과 연소자를 패러오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물론 비상도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어차피 난 연구소에 가있을 텐데, 상관없지 않나?”
비상은 그렇게 말하며, 금빛 밤의 주장인 해원을 떠올렸다. 물론 해원도 나이와 대보면 패기가 있는 친구였지만, 아무리 해원이라 한들 자기보다 나이가 다섯은 더 있는 연장자를 다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갈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될 수 있는 대로 안전한 길을 찾는 게 먼저였다.
“그럼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지. 그리곤 구석으로 끌고가서 냅다 패는 거야. 어차피 놀이도 아닌데 패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러냐?”
비상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힘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놀이’라 한들, 놀이하지 않는 곳, 즉 ‘바닥’에선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상도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조차 생각할 수 없어서였다.
생각해보면, 지금 위험에 빠진 건 비상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대학생인 잎새나 강산 역시 공격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 사는지 그 연장자들이 알 리 없지만, 저 정도로 이를 갈고 있다면 찾아다니지 말란 법도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비상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대는 걸 느꼈다.
“대체 그 사람들은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 거지?”
“병원에 안 실려갈 만큼 팰 거라더라. 참고로 나도 지금 큰일났다. 니들 때문에 배신자 낙인찍혀서.”
“그건 댁 탓 아닌가?”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연소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 금빛 밤 연장자들은, 자기를 비롯한 붉은 밤 구성원 몇 명을 ‘패널티를 안 받을 만큼’ 두들겨패려는 듯했다. 물론 무기를 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많은 아래에서 그게 먹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서, 비상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너 회사 쨀 수 있냐? 열한 시에 좀 사람 많은 데서 보자. 그 형들 움직이기 전에.”
“회사가 대학교인가? 마음대로 쨀 수 있게?”
“야, 너 유급휴가 안 되냐?”
비상이 어이없단 듯 대답하자, 연소자는 진짜 다급한 말투로 이렇게 물어왔다. 비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이런 말과 함께 전화를 끝맺었다.
“일단 시도는 해 보지. 그럼.”
전화를 끊은 뒤, 비상은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어쩐지 오늘은 아주 머리아픈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뒤, 아침 열한 시.
비상은 약속한 대로, 역 앞에서 연소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비상은 유급휴가를 써서, 이런 평일에 길가로 나오게 된 것이다. 참고로 강산한테 연락하자, 이 형은 ‘이런 젠장’이란 말과 함께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일단 어디에 있는지는 말했으니, 이리로 뛰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 비상은 저 멀리서 아주 눈에 익은 사람이 뛰어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강산도 아니었고, 그 연소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바로, 왜 여기로 뛰어오는지 알 수 없는 잎새 형이었다. 너무나 의외인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형이 여긴 웬일이야?”
“강산이가 나한테까지 전화했더라. 이거 좀 어떻게 하자고. 게다가 지금…”
“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잎새가 사정을 털어놓고 있을 때, 다른 쪽에서 강산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외쳐댔다. 게다가 나타난 건, 강산 한 명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대서 와봤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곰귀 후드티를 눌러쓴 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비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자에 달린 곰귀가, 마치 현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살짝 흔들렸다.
그 때였다.
“야 너…가 아니라 다 누구야?!”
저만치서 다른 밤 연소자가 머리카락을 흐뜨리며 달려오다가, 비상(및 그 일행)을 보고 기가 차단 표정을 지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쌌다. 정말로 누구 하나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산이 진짜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댁은 누구더라?”
“전에 본 사람도 까먹냐?!”
이게 정말 어이가 없었는지, 연소자는 큰길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이런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단 모습이었다. 옆에서 그걸 보던 비상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한 번 보고 만 사람을 기억하는 게 더 신기할 텐데.”
“야, 어따대고 처음 만난 사람한테 반말이야?!”
비상의 말을 듣고 나서 떠올랐는지, 강산은 곧바로 연소자한테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연소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강산을 노려보며 이렇게 맞붙었다.
“나이가 뭐 벼슬이냐?”
“이, 이 자식이 진짜…”
이렇게 일이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사실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비상은 숨을 고르곤, 연소자 쪽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그 연장자들은 어떻게 됐지?”
“사실 그게 문젠데…”
이제야 자기가 여기로 온 까닭을 깨달았는지, 연소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곤 이런 말을 꺼냈다.
“형들 중에 눈치깐 사람이 있는 거 같아. 지금은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이게 들키면…니들 길거리에서 맞는 게 좋냐, 아니면 으슥한 데서 무기로 반항하는 게 좋냐?”
“이 자식은 또 뭔 헛소리야?”
연소자가 말을 꺼내자, 강산은 어이없단 듯 이렇게 되물었다. 사실 비상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일단 자세한 걸 물어봐야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큰길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 바보들아. 저 형들이 그걸 기다리겠냐? 으슥한 데로 끌고가겠지. 아니면 밤까지 기다리거나.”
그 말을 들은 비상 일행은, 너나할 것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이대로 가다간, 그 연장자란 사람들과 맞서게 되는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힘으로 밀어붙이면 비상 일행이 진다는 건 안 봐도 뻔했지만, 아무리 무기를 쓸 수 있다 한들, 알아서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게 내키진 않았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였다.
“뭐, 뭐, 뭐야?!”
강산의 외침에, 다들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들,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달려오는 사람은 이번 사건과 정말로 아무 상관없는, 파란 밤 쪽 연소자 은솔이었던 것이다.
“넌 대체 왜 왔니?”
“현이한테 전화했는데 일로 온다 해서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오고 싶었어요.”
비상의 말에, 은솔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집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기말고사 막 끝나서 빠져도 몰라요.”
이 말을 듣고, 비상은 머리가 지끈대는 걸 느꼈다. 대체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게, ‘안녕’이라며 은솔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저 둘이 손을 맞잡는 걸 보며, 비상은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얼이 빠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강산조차, 저 광경을 보며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그런 시간이 지나가나 했더니, 문득 핸드폰을 보던 연소자가 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야, 들켰어. 이 자식들아. 암튼 빨리 정하자고. 어쩔 거야?”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연소자가 짜증을 내자,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이를 갈았다. 잎새도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솔직히 구석에서 힘으로 얻어터지는 거보다 사람 없는 데서 무기로 맞서는 게 낫지 않겠냐? 땅바닥에서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어디로?”
현이 묻자, 잠시동안 다들 가만히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듯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오직 상황을 잘 모르는 은솔만 ‘뭐야, 뭐야?’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러던 중, 뭔가 생각하던 강산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광교산으로 간다!”
“어디라고?”
“일단 일로 와!”
잎새가 되묻거나 말거나,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자기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거긴 반대편 정류장으로 가는 지하상가였다. 잠시 엉거주춤하던 비상 일행은, 이윽고 강산을 따라 지하상가 쪽으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다들 영문을 모르는 채였지만.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
지하상가를 바쁘게 달리며, 잎새가 강산 쪽으로 이렇게 외쳤다. 강산은 벌써 숨이 찼는지, 이런 말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나도 몰라. 젠장.”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레이스란 거냐?”
“이렇게 엉성한 레이스가 어딨어. 이 망할 놈아.”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당장 들키지 않았단 건 틀림없었다.
“어쩐지 무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 같다. 그지?”
“신발. 예능하고 현실하고 같냐?!”
아무것도 모르는 은솔이 혼자 신나서 현한테 이렇게 말하자, 일단 앞에서 뛰던 강산이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던 중에도, 비상 일행은 반대편 정류장 쪽에 거의 다다라있었다. 참고로, 무척 다행인 이야기였지만 금빛 밤 연장자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헤, 헥…그래서 어쩌게?”
겨우 숨을 가다듬은 뒤, 잎새는 대뜸 강산한테 그렇게 물었다.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산 속이면 아무도 없을 거 아냐. 아마.”
“설마 우리보고 거기 파묻히란 말은 아니지?”
“대신 무기를 쓸 수 있을 거 아냐. 쟤들한테 안 먹히겠어?”
강산이 투덜대는 말을 들으며, 비상은 생각을 정리했다. 거야 산 속이라면 그나마 사람도 드물 것이고, 저 쪽 연장자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뭘 탈 건데?”
“잠깐만…아, 저거다!!”
비상이 묻자, 강산은 잠시 주위를 보다가 뭔가 찾아낸 듯 눈을 반짝였다. 강산이 가리키는 데를 보니, 13번 버스가 이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저걸 타면 되는 듯했다.
“자, 다들 빨리 타자고. 알았지?”
강산의 말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빨리, 비상 일행은 버스 앞으로 달려가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들 재빨라서인지, 들어가는 데 긴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있던 강산이 타려는 순간, 저 쪽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들이냐?”
“이런 젠장!”
지하상가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를 갈며, 강산은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물론, 손님을 모두 태운 버스는 곧바로 문을 닫고는 다음 정류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버스를 쫓던 금빛 밤 연장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망할…’이라 중얼대고 있었다. 그걸 보니, 적어도 대여섯 명은 넘게 이리로 모인 것 같았다.
“죽다 살았네…”
그렇게 중얼대는 잎새를 시작으로, 비상 일행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에 탄 강산은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잎새와 남의 밤 연소자가 나란히 앉은 자리 옆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잎새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마 말하는 걸로 볼 때, 잎새가 전화를 건 사람은 별밤인 듯했다.
“혹시 될 수 있으면 지원 좀 해줘라. 우리가 지금 어떠냐 하면…”
한편, 강산은 손잡이를 잡고 선 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마치 오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한 모습이었다.
“의영이 형한테 말해보지 그래?”
“지금 일하는 형한테 무슨 소리냐. 너도 참.”
비상이 묻자,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강산은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 금빛 밤 연장자들과 맞붙을 생각인 듯했다.
“그럼 별밤이 형은?”
“걘 동갑이잖아. 형한테 그런 거까지 걱정하게 하면 어떡하냐?”
비상이 다시 묻자,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전화를 끊은 잎새 말에 따르면, 별밤은 ‘될 수 있는 대로’라 대답한 듯했다. 언제가 그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승산이 조금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러던 와중, 비상은 저 앞에 앉아있던 현이 아까보다 커져있단 걸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현의 모습이 지금 바뀐 것이다. 비상 바로 앞에 있는 은솔은 그걸 알아챈 뒤, ‘신기하다’며 뒤에서 앉은 채로 현을 껴안고 있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그걸 본 뒤, 비상은 뒤로 고개를 돌린 뒤 잎새와 나란히 앉은 연소자한테 그런 말을 던졌다. 연소자는 자기도 모르겠단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금빛 밤 연장자들이 노리는 건 붉은 밤 쪽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된 까닭을 만든 이 연소자이기도 했다.
“뭘 어떡해. 개겨야지.”
그런 말과 함께, 연소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놀라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연소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걸 보자, 서있던 강산은 열받는다는 듯, 연소자한테 눈을 부라렸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게 다 저 놈 때문이잖아. 이런 망할.”
이 말과 함께, 강산은 연소자 머리에 주먹을 문질문질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연소자는 강산을 노려봤지만, 그렇다고 저 형이 멈출 리는 없었다.
“니가 비상이한테 달려들지만 않았음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엉?”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알았겠어?!”
강산이 이렇게 윽박지르자, 연소자도 질 수 없단 듯 그렇게 소리질렀다. 저 둘도 자기들 나름대로 열받았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비상은 지금 당장 이마라도 짚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버스 안이니까 제발 조용히…”
“그럼 난 말려든 거네?”
한편, 저 너머에선 은솔이 현한테서 어떻게 된 건지를 듣고 있었다. 현도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단 듯,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그럼 맞는 건가?”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할 수 있으면.”
“진짜?!”
은솔의 진지한 물음에 현도 진지하게 대답하자, 은솔은 곧바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뒷모습을 보고 짐작한 것이지만, 아무튼 이걸 보는 비상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버스는 종점인 광교산 쪽으로 죽 달려나가고 있었다. 비상은 지금껏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강산은 운동삼아 학교에서 거기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종점까지 가는 거야?”
“그럼 어디까지 가겠냐?”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창밖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 금빛 밤 연장자들도 버스를 타고 비상 일행을 뒤쫓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저 버스가 어디까지 가는지는 봤을 테니까.
“근데 웃기긴 하다. 무슨 마지막 만찬도 아니고…”
“이젠 뭐 어쩔 거야. 어떻게든 살려고 버텨야지.”
잎새가 쓴웃음을 짓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눈길을 돌렸다. 사실 아까 그 ‘무리’를 눈으로 보면, 지금 이 구성원으로 맞설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긴 했다.
그러던 중, 버스 너머로 희한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가게 앞에 있는 세로로 된 현수막이었다. 여기서도 보일 만큼 크게, ‘망했다’라고 쓰여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떨이세일인 듯했다.
그 펄럭대는 현수막을 보며, 잎새는 자조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왜 재수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그럼 너 혼자서 그 덩치들하고 1대 10쯤으로 붙을 거냐?”
“시, 시꺼.”
잎새가 그렇게 찔러오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보던 비상은, 이게 웃어야 하는 상황인지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됐단 말인가.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러던 와중, 비상은 자기 몸이 줄어들고 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주위에선 같은 ‘놀이’ 구성원을 빼고 아무도 모르겠지만, 비상 입장에선 머리만 더 아파지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쓸만한 사람이 없는데, 자기까지 줄어들면 정말 버틸 수 있을지 어떨지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그 때, 누군가의 전화가 울렸다. 잎새의 핸드폰이었다.
“별밤인데?”
그 말과 함께, 잎새는 전화를 받았다. 앞에서 비상이 듣기로는, ‘지금 가고 있다’라 말하는 듯했다. 잎새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렇게 묻고 있었다.
“벌써 빠져나왔냐?”
‘하늘이 참 대단하더라’.
비상은 앞에서, 별밤의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뒤늦게 오겠지만, 그나마 한숨 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저 쪽의 덩치와 대보면 조금 모자란 건 사실이었다.
그 때, 전화를 끊은 잎새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듯 손뼉을 탁 쳤다.
“야, 근데 오늘 비온다고 안 그랬냐?”
“진짜냐?!”
“그래. 아침에 본 거 같은데.”
“뭐 이딴 운이 다 있어…”
잎새의 말을 듣고, 강산은 이렇게 투덜댔다. 잎새 옆 연소자도 같은 생각인지, 강산을 따라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산은 어이없단 듯 이렇게 쏘아붙였다.
“야, 다 니 탓이잖아!”
“지금 그럴 때야?”
연소자가 말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실 이제와서 누구 탓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을 만큼, 버스는 종점, 즉 광교산 근처에 다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가면 갈수록 구석이잖아?!”
여긴 처음 와보는지, 잎새는 곧바로 강산한테 따지기 시작했다. 사실, 비상조차 이리로 오는 건 처음이었다. 강산은 열받았는지, 이런 말을 하며 잎새를 윽박질렀다.
“야, 너 우리 학교 욕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오오.”
그걸 변명하려던 잎새는, 방금 창문 너머로 지나간 무지막지한 언덕길이 지나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비상의 눈으로 봐도, 그 언덕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아마 저 언덕길 위에, 강산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듯했다.
“야, 여기 고양이버스 어딨냐?”
“그게 이런 시간에 왜 있어!”
“그치만 니네 학교에 있다매. 저 언덕 때문에…”
“지금 그럴 때냐?!”
잎새와 강산이 이렇게 말씨름을 하는 사이, 버스는 점점 더 외진 데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젠 연소자도 무서워졌는지, 강산한테 이런 걸 묻고 있었다.
“야, 여기 산 속 맞아?”
“신발. 넌 존대부터 먼저 해라.”
“그럼 쟨 왜 니한테 말 까는데?”
그 말과 함께, 연소자는 엉뚱하게도 앞에 가만히 앉아있던 비상을 가리켰다. 비상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산은 이렇게 말하며 연소자를 노려봤다. 이걸 보면, 강산은 지금 꽤 화난 듯했다.
“내가 까라고 했다. 불만 있냐?”
“아, 그러셔?”
그런 강산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연소자는 얼른 강산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아마 이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자기도 큰일난다고 여긴 듯했다. 사실 버스 안에서 서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는 더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누가 봐도 외진 곳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시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 창밖에 펼쳐져있었다.
“여기 광교산 맞냐?”
“그럼 어디겠냐?”
잎새가 걱정스럽게 묻자, 강산이 열받은 듯 그렇게 잘라말했다. 비상은 그저 깍지를 낀 채,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에 앉은 은솔 및 현은 신기하단 표정으로 창밖에 펼쳐진 논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원에도 이렇게 외진 데가 있구나. 신기하다.”
“세상은 넓거든.”
이렇게 혼돈의 도가니인 상황이 다른 데에 있긴 할까.
비상은 정말, 속으로 이마를 몇 번이고 짚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뒤, 죽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버스는 이윽고 외진 곳에서 멈췄다. 아마 여기가 종점인 듯했다.
“완전 산이잖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잎새는 그렇게 외쳤다. 사실 그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수많은 돌맹이들 및 주위를 둘러싼 높은 나무들은 둘째치고, 저 구석엔 등산객용 화장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 돌덩이들은…어?”
발을 디디며 그렇게 중얼대던 잎새는, 갑자기 놀란 듯 하늘을 쳐다봤다. 비상 역시 하늘을 쳐다보다, 왜 잎새가 저런 모습을 보였는지 알아챘다.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까 잎새가 말한 대로, 틀리멊이 빗방울이었다.
이 때, 저 뒤에서 다른 버스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의 밤 연소자도 그 버스를 봤는지, ‘이젠 죽었다’며 이를 질끈 물고 있었다.
“야, 일단 준비해라.”
자기 품에서 쌍절곤을 꺼내며, 강산이 뒤에 있던 일행한테 말을 건넸다. 마치 뭔가 큰 다짐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비상도 일단, 가지고 온 물총을 가만히 쥐었다.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편, 은솔은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혀, 현아. 그 오빠는 어디 갔어?”
“일단 내 뒤에 숨어.”
현은 그 말과 함께, 은솔을 자기 뒤에 숨겼다. 다들 저 버스가 언제 멈출지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걸 멀리서 보면, 꽤 희한한 광경으로 보일 터였다.
바로 그 때, 버스가 멈추더니 장정들이 우루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비상은 남의 밤 연소자의 손이, 주먹을 쥔 채 떨리고 있단 걸 알아챘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세어봐야 알겠지만, 얼핏 봐도 열 명 남짓은 되는 것 같았다. 다들 힘 좀 쓰게 생긴 몸집과 인상을 갖고있단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비상은 금빛 밤에 특히 무섭게 생긴 이들이 많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덩치도 덩치지만, 하나같이 뭔가 한 건 저지를 듯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개중엔, 전에 시끄럽던 연장자 및 연소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걸 보던 비상은, 무심코 몸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다들 그렇게, 서로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였다.
“이 새끼가. 감히 배신을 해?”
연장자로 보이는 금빛 밤 팀원 중 한 명이, 비상 바로 옆에 있는 연소자를 보며 이렇게 외쳤다. 너무 열받아서 견딜 수 없단 말투였다.
“오, 오, 오해라니까?!”
물론, 연소자는 어떻게든 변명하려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거라면, 저 연장자들이 나무막대기까지 들고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연장자는 이런 말과 함께,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시끄러. 니들 다 죽었어!”
“쟤들이 단체로 패널티라도 받을 생각인가…”
그렇게 중얼대고 있긴 했지만, 강산은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이 형은 이럴 땐 지레 겁먹는 성격인 듯했다.
“우, 우리가 그냥 앉아서 당할 줄 알아?!”
강산은 마치 어린애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그렇게 외치곤, 자기 무기인 쌍절곤을 연장자들한테 보여줬다. 물론, 금빛 밤 연장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해보시든가.”
그 비웃음을 시작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쓴 싸움이 막을 열었다. 다들 자기 무기를 상대방한테 던지거나 쏘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물론, 비상도 가지고 있는 총을 연장자들 쪽으로 쏘아댔다. 무기가 잘 먹히는 걸 볼 때, 관계자만 있는 곳에선 무기가 먹히는 듯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가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금빛 밤 쪽은 이런 걸 짐작하지 못했는지, 하늘을 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연장자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건 비상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현은 자기 막대기를 칼처럼 쓰며, 바로 눈앞에 있는 연장자의 나무막대기에 맞서고 있었다. 뒤에 숨어있던 은솔은, 아마 자기 무기로 보이는 구슬을 던져가며 현을 돕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아무도 얻는 게 없는 진흙탕(에 가까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잎새는 자기 무기인 쌍끌이를 쓰며 어떻게든 상대를 막으려(아니면 살아남으려고) 발악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던져대는 돌팔매질을 어떻게든 막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강산은 쌍절곤으로 만만한 이쑤시개와 맞서싸우고 있었지만, 이러다간 정말 몸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비상 역시 물총을 쏘곤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몸집에서 밀리는 만큼, 여기저기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곁눈으로 보면, 현이 꽤 선방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뒤에 숨은 은솔의 지원사격도 한몫했겠지만.
이젠 비 때문에, 눈앞 풍경도 흐려져서 말도 아니었다. 비상이 보기엔, 이미 서로 이상한 무기를 손에 든 채 까닭도 없이 맞서는 개싸움이 된 지 오래였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힘으로 싸우는 게 덜 웃겼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금빛 밤 쪽 연장자는 자기네들한테 무기를 잘못 쓴 탓에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만약 남의 일이었다면 먼발치에서 쓴웃음이라도 지으며 구경했겠지만, 슬프게도 지금은 모두가 당사자였다.
그러던 와중, 저 멀리에서 별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별밤은 이 광경이 퍽이나 어이없었는지, 오자마자 대뜸 이렇게 외쳤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런 데 있냐? 일단 여긴 종점인데…”
“신발. 하늘이 봐주는 거 아냐 이거. 그러니까 너도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강산의 말을 듣고 나서, 별밤은 자기 무기, 즉 칼날을 가지고 근처 연장자를 공격했다. 상대도 별밤의 몸집은 무서웠는지, 조금 물러나더니 자기 무기로 보이는 부직포끈으로 반격했다. 하지만 저 두 무기 중 어느 게 더 세냐 묻는다면 다들 별밤의 칼날을 댈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별밤이 온 덕택에 상황은 한층 나아져있었다.
“무슨 3류 액션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진짜!!”
강산도 이젠 어이없어졌는지, 이런 말과 함께 쌍절곤을 냅다 휘두르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쌍끌이로 공격을 막던 잎새가, 이런 말과 함께 숨을 골랐다.
“독립영화라 하면 되지 뭘. 안 그러냐?”
“그거나 저거나 다 똑같은 거 아냐! 이런 거 주인공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냐, 지금?”
지치지도 않는지 그렇게 외쳐대는 강산의 말을 들으며,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영화에서 쓰는 필름 너머로 본다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서였다. 예전에 본 어떤 예능에선, 그런 식으로 연출했더니 마치 영화와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을 영화처럼 연출한다 한들, 비상의 머릿속에선 겨우 허접하게 웃기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도 남의 일이라면 조금 재밌게 볼 수 있겠지만.
아무리 영화같은 연출이라 한들, 포장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있구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뒤, 비상은 이 우스운 상황에 다시 집중하려 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갑자기 비가 내리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마치 짜고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들, 이젠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는 개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멈춰!”
“의영이 형?!”
강산의 말을 듣고, 비상은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바라봤다. 정말 그 쪽을 보니, 의영이 이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의영의 뒤편에서, 이 역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형, 어때요?!”
“대체 이건…”
저 목소리는, 금빛 밤 주장 해원, 그리고 파란 밤 주장 상록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게 뜻하는 건 하나였다. 아주 엉뚱한 상황이긴 하지만, ‘놀이’를 할 때를 빼고, 세 밤의 주장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비공식에 가까운 자리에서.
물론, 그런 말을 듣고 금빛 밤 연장자들이 멈췄을 거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터였다. 따라서, 개싸움은 저 뒤에서 누구 목소리가 들리거나 말거나 죽 이어졌다. 의영도 어이가 없었는지, 결국 이 말과 함께 자기 무기인 낫을 꺼냈다. 더 이상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여긴 듯했다.
“그만두라고 했지?!”
물론 다른 주장들 역시, 가만히 팔짱만 끼고 바라보진 않았다. 특히 해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패싸움 무리로 끼어들며 어떻게든 자기네 연장자들을 떼어놓으려 애썼다.
“그만 좀 하세요. 좀!!”
상록은 이 상황이 어이없었는지, 그저 어이없단 눈빛으로 이 사태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마 상록을 알아준 건, 현의 공격을 돕고 있던 은솔이었다. 은솔은 상록을 알아채자마자, ‘오빠!’라 외치며 상록 쪽으로 뛰어갔다. 현도 그걸 알아채곤, 은솔과 함께 상록이 있는 데로 같이 뛰어갔다.
이제, 상황은 정말 혼돈의 도가니로 접어들고 있었다. 각 밤 주장에, 연장자들의 대난투에,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해보려는 비상까지 더해져서, 이젠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이걸 보태는 듯, 하늘에선 미친 듯이 비가 내려붓고 있었다. 다들 비에 쫄딱 젖은 가운데, 이젠 자기가 어디에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기저기 ‘무기’로 공격해대고 있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그 속에 있는 비상조차 정신을 못 차릴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저 너머에서는 빡쳐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크게 울려퍼지는 강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대답하는 잎새의 목소리와 함께.
“신발! 현실에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넌 대체 뭘 바란 거냐?”
그리고 그 목소리조차, 결국 저 멀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상황은 엉망이었다. 이게 과연 수습될 수 있는 일일까, 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그래서, 이 수라장은 언제 끝나는 거지?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금빛 밤 연장자들을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누구한테 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물총을 어떻게든 쏴대며.
그렇게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자, 그럼 허심탄회하게 얘기나 한 번 해 보자. 어떻게 된 거냐?”
의영의 말과 함께, 강산이 데리고 온 고깃집에 모인 오늘의 사건 일원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물론, 각 밤 주장들도 함께였다. 오늘 이 일과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모여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고깃집은, 이 근처가 학교인 강산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된 곳이었다. 강산은 ‘아주 난 호구구만. 아주’라 투덜대면서도, ‘우리 패서 만날 가는 데다’란 말과 함께 자기가 자주 가는 고깃집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물론, 돌아오는 길은 버스와 함께였다. 걸어서 가면 30분은 넘게 걸리는 길을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였다. 때마침 시발점에서 나오는 버스인지라, 비상은 무슨 전세버스라도 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버스에서 내린 뒤 바로 근처에 있던 버스차고장을 보며, 잎새는 ‘오늘은 버스랑 지지리 자주 만나는 날이네. 거 참’이라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거짓말처럼 뚝 그친 비를 무시한 채, 고깃집 안 ‘놀이’하는 사람들 중 몇 명은 고개를 들어 자기 팀 사람들 얼굴을 여기저기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의영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빗속에서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해댔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참고로 이건 ‘놀이’도 뭣도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다들 비를 쫄딱 맞은 상태였다. 이 때문인지 남의 밤 연소자는 누군가의 겉옷을 걸친 채 연신 쿨럭쿨럭대고 있었다. 그나마 자기 밤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물론 은솔을 비롯한 여성진도 제각기 담요를 몸에 걸치고 있었으며,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엔 그럴 것까지도 없다 여긴 비상이었지만, 자기 옷이 달라붙어 그다지 안 좋은 꼴을 보이게 된 걸 깨닫고는 아무 말 없이 담요를 두르기로 했다. 남성진은 모두 담요 없이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다른 모습이 되어있는 현은 ‘이런 느낌이구나…’라 혼자 중얼대며 자기 몸에 달라붙은 셔츠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나 신기했던 듯했다.
상황을 다시 보면 볼수록, 이 구성은 참 묘하기 짝이 없었다. 금빛 밤 쪽엔 열 명을 넘기는 연장자들과 아까 그 연소자, 그리고 주장인 해원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해원은 기가 차다는 듯, ‘저기 반면교사도 있는데 왜 그러셨어요’라 침착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걸 보면, 나이는 어리지만 주장 자격은 충분히 있단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여기에 왜 말려들었는지 알 수 없는 파란 밤, 즉 상록과 은솔은 가만히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은솔이 ‘근데 비상이 오빠는 어디 갔지?’라 말하는 걸 빼면, 정말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히려 제 3자인 상록이 어떻게 이걸 알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속내가 복잡하단 건 언뜻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붉은 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의영은 별밤의 전화를 듣고 곧장 달려온 듯했다. 비상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현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아무튼 누구한테나 뻘쭘한 상황이란 건 틀림없었다.
“다들 배고프지 않아? 좀 먹지?”
결국 의영은 답을 당장 듣는 걸 포기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수저를 들었다. 사실, 이미 고기는 탁자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런 상황이라서 다들 입에 대지 않았을 뿐이었다.
의영의 말에, 다들 느릿하게나마 수저를 들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선 가장 연장자였으니, 그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날 고기가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상도 수저를 들고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비상 역시 비에 온몸이 젖어있으므로, 남의 외투를 두른 채였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은솔이 비상, 그리고 옆에 있는 현 사이로 끼어들었다. 비상이 놀랄 틈도 없이, 은솔은 현한테 파고들더니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근데 오늘 진짜 이상하다.”
“이거 하나 때문에 학교를 뺀 네가 더 대단한데.”
그렇게 대답하던 비상은, 자기가 무심코 은솔의 말에 끼어들었단 걸 깨달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은솔은 이상하단 듯 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은솔 입장에서 보면, 그 역시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비상을 빤히 보던 은솔은, 이윽고 비상 뒤로 돌더니 뒤에서 감싸안고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현은 마치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대체 뭐하는 거니?”
“내 나름대로 사람 판단하는 방법이니까 신경쓰지 마. 자자, 앞 좀 보고.”
“거 참…”
이런 대답까지 듣자, 비상은 여러 모로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라 한들, 이런 식으로 몸이 닿는 건 굉장히 민망한 일이라서였다. 물론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겠지만, 사실을 알고 있는 비상은 바늘방석에라도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자기가 지금 담요를 두르고 있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아, 사실을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난 상관없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현을 보며, 비상은 처음부터 물어볼 상대가 잘못됐단 걸 깨달았다. 이건 자기가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등 뒤에서 팔을 놓지 않는 은솔한테, 비상은 자기 핸드폰을 뒤로 보여줬다.
“엉? 이게 뭐였더라?”
“이게 누구 거였지?”
정말 모르겠단 듯 진지하게 묻는 은솔한테, 비상은 이렇게 되물었다. 이렇게 하면 아마도 알아줄 터였다. 은솔이 자기 생각보다 더 희한한 아이가 아니라면.
“어…맞다!!”
잠시 생각하던 은솔은, 이윽고 팔을 풀더니 무릎을 탁 쳤다. 이제야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그, 안 보이는 패널티가…”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구나.”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은솔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보였다. 아마 이 아이는, 핸드폰을 보기 전까지 진짜 비상을 몰라본 듯했다.
“근데 지금 알고 보니 진짜 같은 사람이긴 했네요.”
“그럼 뭐라 생각했니?”
어이없다는 생각에 그렇게 대답하다, 비상은 누군가의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너머에선 금빛 밤 쪽 연소자가 비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이 눈치챘단 걸 알았는지, 연소자는 곧장 고개를 돌려 다른 데를 바라봤다. 대체 왜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언니는 누구예요?”
그게 이상했는지, 은솔은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비상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져서, 그저 짧게 이렇게만 대답했다.
“금빛 밤 연소자.”
“아, 그렇구나. 처음 보는데…”
은솔이 저 쪽을 빤히 보며 그렇게 말하자, 남의 밤 연소자는 다 들린다는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자기 멋대로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연소자가 문제이긴 했지만.
그 때, 잠시 생각하던 의영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럼 오해부터 풀자고. 금빛 밤 쪽 연소자가 비상이한테 찾아간 거 때문에 그 쪽 연장자가 오해했다, 이건가?”
“말을 들어보니 대충 그런 거 같아요.”
해원이 한숨을 쉬며, 의영의 말에 대답했다. 이제 의영은 해원한테서 고개를 돌려, 저만치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연소자한테 눈길을 옮겼다.
“그러니까, 그 쪽은 화가 나서 비상이한테 간 거라고?”
“그럼 염탐하러 갔겠어요?”
“저 자식을 그냥 확…”
연소자가 한숨을 푹 쉬며 그렇게 대답하자, 강산이 열받는다는 듯 그렇게 중얼댔다. 그런 강산은 둘째치고, 의영은 또 잠시 생각에 잠기다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 하는데, 그 쪽 연장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이 말에,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금빛 밤 연장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여기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아까 비상 일행과 맞서던 연장자가 손을 들곤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그건 우리가 오해한 거 맞네. 근데 그 쪽도 헷갈리게 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갔냐? 쟤가 멋대로 간 거잖아.”
“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폐끼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강산이 짜증을 내자, 저 너머에 있던 상록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금빛 밤은 더 대답할 말도 없었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해원은 그런 형들을 보며, 이마를 짚으면서 천천히 입을 뗐다. 기나긴 한숨이 먼저 나오고 난 뒤였다.
“형들. 반면교사가 저기 있대도. 잘못하다간 연장자 단체로 패널티날 수 있어요. 그럼 우린 어떻게 되냐고.”
결국 그 말이 맞다 여겼는지, 아까 그 연장자가 다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일단 사과에 가까운 말을 꺼냈다.
“우리가 잘못 알았으니 사과는 해야지. 미안합니다.”
“저딴 게 사과냐?”
강산은 여전히 불만이 남은 듯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사건은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금빛 밤 쪽에서 사과는 했으니까. 진심은 물론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다들 정말로 고기에 다시 손을 뻗기 시작했다. 강산은 여전히 열받았는지, 고기를 먹으면서도 이렇게 투덜대고 있었다.
“저 놈, 갈 때 그냥 머리 좀 분질러야…”
“너도 패널티가 받고싶어 죽겠냐?”
“그 정도는 되잖아. 그 정도는.”
잎새의 말에 반박하는 강산을 보던 비상은, 문득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그 쪽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금빛 밤 연장자가 자기를 보고 있었다. 눈길은 곧바로 거둬졌지만, 비상은 묘하게 저게 신경쓰이는 걸 느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다들 가게를 나가려 할 때였다.
“이 자식이, 뭐하는 거야?!”
강산은 곧바로 그 연소자 곁으로 가더니, 주먹쥔 채 머리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연소자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강산을 있는 대로 노려보고 있었다.
“니가 오늘 한 짓을 봐라. 이건 엄청 가벼운 거야.”
“그래도 이 놈, 패널티도 받았는데 좀 살살해주지 그러냐. 강산아.”
“신발. 모습 하나 달라졌다고 봐주기가 있냐?”
잎새가 그렇게 놀려대자, 강산은 투덜대면서도 머리에서 주먹을 떼어놓았다. 연소자는 잠시 어이없단 듯 강산을 보다가, 이윽고 ‘칫’이란 소리와 함께 가게를 나갔다. 머리카락이 아직 젖은 걸로 볼 때, 아직 몸이 덜 마른 듯했다. 사실 이건 비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근데 오늘 좋은 건 하나도 없네요.”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은솔이 이런 말을 꺼냈다. 물론 그 말은, 여기에 있는 세 사람, 즉 비상과 현, 은솔이 여전히 비를 쫄딱 맞아서 나온 것이었다. 그나마 가게 안에서 좀 마르긴 했지만, 얼른 집에 가서 씻은 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건 틀림없었다.
“너희들도 왜 현실에서 예능이 안 되는지 알겠지?”
“현실은 개판이던데요.”
비상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말을 꺼내자, 은솔은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은솔을, 현은 신기하단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우린 그 개판에 있었던 거야?”
“그럼, 우린 오늘 평생 못 할 경험을 한 거야.”
현이 진지하게 묻자, 은솔이 당연하단 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걸 옆에서 보는 비상은, 무심코 머리를 짚으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이 이야기 자체가 기가 차서였다. 현실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늘 겪은 일이 희한하게 느껴지는 거란 점으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 겪고싶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그 난리 속에 있었으면서, 걱정은 안 됐니?”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현한테 이렇게 물어봤다. 지금 다시 돌아봐도 참 격한 상황이었으니, 혹시 당황하지 않았을까, 란 생각에서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
“안 했는데.”
“그렇지만 무서웠을지도 모르는데…”
“하늘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 법이거든.”
현의 대답에, 비상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더 빠지기도 전에, 비상은 차고에서 자기가 타야 할 버스가 나오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무리 여름이라 한들, 지금 비상은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과 은솔이 나란히 손을 흔드는 걸 보며, 비상은 빈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마치 며칠치 피로를 한 번에 몰아서 받은 듯한 무거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