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27. 엉뚱한 사람의 엉뚱한 의문

그렇게 해서, 비상은 현 및 남의 밤 연소자와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시계는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 왜 이런 꼴이…”
옆에서 투덜대는 연소자와 달리, 현은 마치 자기 집이라도 온 것처럼 이불을 가지러 비상의 방 쪽으로 들어갔다. 이젠 정말 몸에 익었구나. 그 무거운 이불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오는 현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망할…”
아직도 불만이 있는지, 연소자는 혼자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비상도 이쯤되면 저 연소자가 안쓰러워져서, 이런 말과 함께 현이 펴둔 이불을 가리켰다.
“그러지 말고 좀 눕지?”
“댁은 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
연소자는 마치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상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 놈은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비상은 그냥 넘겨버리기로 했다.
“여기 누워.”
이불을 다 편 뒤, 현은 자기 오른쪽을 가리키며 연소자한테 그렇게 말했다. 마치 친구한테 ‘일로 와’라고 하는 것처럼, 가볍기 이를데없는 말투였다.
물론, 연소자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이, 이 자식…이 아니라 아무튼 뭐라고?!”
“아무 것도 안 할 건데.”
이 말에, 연소자는 물론 비상조차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묘한 상황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비상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질즈음. 갑자기 연소자가 이렇게 소리쳤다.
“젠장!!”
그 말과 함께, 연소자는 현이 말한 대로 그 자리에 눕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자고가긴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여름에 이불을 저렇게 뒤집어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왜 저딴 말을 들어야…”
하지만 잘 생각은 안 한 채, 남의 밤 연소자는 자꾸 이렇게 중얼댔다. 보고있던 비상도 기가 차서, 현의 왼쪽에 자리를 잡으며 한마디 쏘아줬다.
“남의 집에서 시끄럽게 무슨 짓이야?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댁같은 사람은 모르겠지. 모습이 바뀌거나 말거나 상관없을 거 아냐!”
“어떻게 그걸 자신할 수 있지?”
이 말에 발끈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연소자도 여기엔 겁먹었는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대, 댁은 멀쩡하니까…”
“그 쪽보단 나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다 생각하는데.”
이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은 이 상황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지, 양옆에 있는 둘을 둘러보며 의아하단 듯 이렇게 물었다.
“왜 싸우는 거야?”
물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안 씻어?”
“여기서 왜 씻어!”
비상이 대답하기도 전에, 연소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현은 이상하단 표정으로, 연소자를 보며 대답했다.
“난 만날 여기서 씻는데.”
“설마 그 모습으로 그런단 말이야?!”
이제 연소자의 눈동자는 정말로 터져나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모습이든 그냥 씻는데.”
“미쳤어?!”
“뭐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연소자가 소리치자, 현은 더더욱 이상하단 표정으로 연소자를 쳐다봤다. 마치 1 더하기 1은 2란 말을 듣고 놀란 사람을 본 듯한 모습이었다.
“눈을 뜨고 씻을 수 있냐고, 이…이 꼬맹아.”
“씻으려면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연소자가 그렇게 말을 흐리자, 현은 당연하다는 듯 곧바로 대답헸다. 연소자는 이제, 눈앞에 있는 저 현이란 아이한테 자기 말이 안 통한다 여겼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천진난만한 현의 표정을 빤히 보던 연소자는, 갑자기 비상한테로 말을 돌렸다.
“젠장. 난 눈 감는데…대, 댁도 그래?!”
“뭐가?”
“근데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그지?”
이젠 현까지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비상은 무척 난처해졌다. 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비상한테 묻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와 달라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저 연소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자기 모습이니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 맞다. 그 말 맞는 거 같아.”
“시, 신발. 그딴 거 알 게 뭐야.”
연소자도 이 얘긴 그만두고 싶은지, 비상 일행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해서 이 문제는 어떻게든 넘긴 것 같았다. 대신 비상의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이제 정말 잠 좀 자지?”
이제 상황을 좀 마무리지어야겠단 생각에, 비상은 이부자리 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어딘지 마음이 꼬여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물론 오늘 옆에 현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저 너머에 있는 남의 밤 연소자까지 재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비상은 바로 옆에 있는 현이 신경쓰였지만, 이미 현은 곯아떨어져있었다. 저 너머에 있는 연소자는 ‘뭐 이런 현실이 있어…’라 혼자 중얼댔지만, 잠시 뒤 코고는 소리와 함께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저 연소자가 대충 어떤 놈인지 알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저 놈은 자기 생각이라곤 이만큼도 안 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비상은 잠기운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이런 상황이라 한들, 결국 잠은 오는 듯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비상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단 걸 깨달았다. 옆에서 아직 새근새근 자는 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바뀐 몸집 탓에 조금 심하게 불룩해진 이불을 보며, 비상은 그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남의 밤 연소자가 세상모른 채 잠들어있었다.
저 놈이 전에 뭐라 말했더라.
그걸 보면서, 비상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연소자가 한 말이 한두마디가 아니라서 당장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쩐지 뭔가 떠올라서였다. 물론 쉽게 떠오르진 않았지만.
아무튼 아침을 해야겠단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제 일어났는지 현이 한발 앞서서 부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비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자기가 아침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소자는 잠시 뒤척이더니, 이윽고 부스스한 머리로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곤 했지만, 아직 이불 속에 주저앉은 채였다. 연소자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연소자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오늘은 또 뭐지?”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상황파악을 이만큼도 못하는 연소자를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한편, 현은 찬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그런 둘을 호기심넘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소리지르기 전에 어제 일이나 생각하지 그래?”
“이런 젠장…”
이제야 기억이 돌아왔는지, 연소자는 그 말과 함께 혀를 찼다. 아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래서, 이제 일어났나?”
“시끄러!!”
연소자가 저렇게 악에 받쳐 소리지르는 걸 보고, 비상은 문득 강산을 떠올렸다. 물론 이걸 그 형한테 말했다간 비상을 죽이려 들겠지만.
“내가 왜 너같은 놈 집에서…”
“내가 댁보다 더 연상인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나이먹은 게 자랑이냐?!”
연소자는 목도 안 아픈지, 그 높은 목소리로 비상한테 죽 소리지르고 있었다. 난 절대 저렇겐 못 하겠던데.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한테 대해야 할 최저한의 예의란 건 있지 않던가?”
“그딴 거…쿨럭! 모, 목이…”
드디어 목에 한계가 왔는지, 연소자는 연신 쿨럭대기 시작했다. 비상이 불쌍해져서 물컵을 갖다주자, 연소자는 그걸 받으면서도 또 투덜댔다.
“이런 목 못해먹겠다고. 젠장.”
그런 둘을, 현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스크램블에그를 식탁에 두며, 비상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 아침도 이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단 한 명, 전혀 짐작치 못한 사람이 같이 있단 것만 빼면.
“맛있겠다.”
현은 항상 그렇듯, 이 말과 함께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현을 보던 비상은, 문득 연소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연소자는 마치, 자기가 있어선 안 될 사람이라도 되는 듯 무척 뻘쭘한 모습이었다.
“자기가 어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떠오르나 보지?”
“시끄러. 니가 무슨 상관이야.”
연소자는 그렇게 반박했지만,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저 놈도 생각하면 안됐지. 비상은 그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저 연소자한테 뭐라고 할 마음이 사라졌다. 물론 패널티를 받은 건 연소자 자기 문제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아침식사가 시작되었고, 셋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과 현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느릿느릿 수저를 움직이는 연소자는 그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왜 이런 모습으로 이런 데 있어야 하냐고…”
“어쨌든 온 건 그 쪽 아닌가?”
“이 망할 엘리트 자식…”
비상이 그렇게 잘라말하자, 연소자는 투덜대면서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이렇게 보면, 이 연소자가 처음 의영한테 덤빌 때 모습이 묘하게 떠오르기는 했다. 그 때만큼 박력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밥은 맛있었는지, 연소자는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물론 맛있단 말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그 숟가락질을 보면 밥을 맛있게 먹고 있긴 하단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그 말투도 짜증난다. 이 개자식아.”
그렇게 묻자, 연소자는 비상을 노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보다 훨씬 몸집이 작아서인지, 그조차 우습게 느껴졌다. 맨 처음 봤을 땐 그럭저럭 몸집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비상의 눈앞에 있는 연소자는 그 때보다 몸집이 반은 줄어든 것 같았다. 연소자 자신도 아직 적응이 안 됐는지,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목 뒤로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가 보지?”
“그걸 말이라고 해?!”
저 목소리로 볼 때, 이 연소자는 비상의 집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 자체가 불만인 듯했다. 그래도 밥을 먹는 걸 보면, 지금 당장 뛰쳐나갈 만큼 참기 힘든 건 아닌 것 같았다.
“젠장.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내가 언제 이게 즐겁다 말했나?”
비상이 반박하자, 연소자는 그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아마 말로는 저 빌어먹을 엘리트 놈을 이길 수 없다 여긴 듯했다. 아니면 더 할 말이 없었거나.
하지만 잠시 뒤, 연소자는 기운을 되찾았는지 또 불만을 중얼중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습 하나 바뀐 거 가지고 삶이 뒤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느니, 친구들과도 마음놓고 얘기할 수 없다느니, 그야말로 끝없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열받는 까닭을 하나하나 늘어놓던 연소자는, 이윽고 이런 말과 함께 물을 마셨다.
“젠장. 귀찮게 화장을 하라니.”
“안 하면 되는데.”
“넌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이 인간아.”
“앞으로도 안 할 건데.”
“뭐?!”
고등학생이란 말을 넘긴 채 현이 이렇게 대답하자, 연소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런 대답은 상상도 못 했다는 모습이었다.
“내 친구들도 그러겠단 애들 꽤 있어.”
“아, 그러셔…”
연소자는 그 말 뒤로, 정말 더 이상 입을 떼지 않았다. 연소자가 입을 다물자, 자연스럽게 부엌도 조용해졌다. 평소대로 조용한 아침이 돌아온 가운데, 비상은 아침을 다 먹고 나서 그릇을 치웠다.
“잠깐 들어가도 돼?”
역시 아침을 끝마친 현이, 비상의 방을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비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현은 바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비상 역시, 밖에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렇게 보니까 좀 다른 느낌이다.”
현은 비상의 방을 빙 둘러보며, 신기하단 듯 그렇게 중얼댔다. 사실 지금까진 자러 들어온 게 대부분이었을 테니, 방을 꼼꼼히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네 눈에 재밌어보이는 건 없을 거야. 아마.”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새삼스레 자기 방을 휘 둘러봤다. 혼자 사는 자취방치곤 큰 책꽂이에, 여러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물론 일인 연구 관련 자료도 여럿 있었지만, 비상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저 쪽 왼쪽 중간에 꽂힌 도스 가이드북은 비상이 좋아서 아직껏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젠 20년 전 문화유산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밖에도 비상의 책꽂이엔 여러가지 책이나 잡지들이 꽂혀있었다. 90년대 후반에 나온, 이젠 닳아버린 컴퓨터 잡지나(얼마나 옛날 물건이냐면, 안에 PC통신 관련 정보가 여럿 있을 정도였다), 전에 자기가 깜박하고 현의 앞에서 말했던 모 공상과학소설도 자리잡고 있었다. 현은 그걸 가만히 보더니, 비상한테 이렇게 물었다.
“이거 사전이야?”
“아니.”
“신기하다. 근데 두껍네.”
현의 감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전에 산 2016년 트렌드 연구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비상 자신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에 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이런 책이나 영상도 자주 보곤 했던 것이다.
현은 비상의 눈길을 알아채곤, 그 책을 빼선 혼자 읽기 시작했다.
“그게 재밌어보이니?”
“이젠 프린터로 과자도 만들 수 있구나.”
현은 자기가 펼친 대목을 보며,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단 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 현이니만큼, 거기에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지. 요즘 세상이니까.”
“그럼 나도 뭔가 채비를 해야 되나?”
“별 거 안 해도 돼. 이런 거 갖고.”
라고 말하긴 했지만, 비상은 이렇게 잘라말해도 될까, 란 생각을 문득 했다. 그만큼 요즘, 세상이 바뀌는 건 빨랐던 것이다. 현이 말한 대로, 지금부터 채비를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엘리트 냄새나는 방…이건 무슨 냄새야?!”
그 때, 뒤에서 따라들어온 걸로 보이는 연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자기도 할 일이 없어서, 일단 이 방에 들러본 것 같았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 이런 젠장!!”
비상의 말에, 연소자는 곧바로 짜증을 내더니 방에서 나갔다. 이렇게 보면 참 바쁜 친구였다. 특히 그 성질머리가.

그렇게 일을 끝낸 뒤, 비상은 항상 가던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에 다다르자, 항상 그랬듯 강산이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형은 정말로, 이럴 때 늦게 오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유, 이제 왔냐?”
“왜 형은 만날 일찍 오는 거야?”
“좋아서 빨리 오지, 싫어서 빨리 오겠냐?”
강산은 아주 신난 듯, 그렇게 대답하며 하늘을 봤다. 아무튼 이 형은 참 별 걸 다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비상은 그런 형이 싫지 않았지만.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할 때도, 강산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자기 팀, 즉 붉은 밤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 팀은 참 사람들이 좋은 거 같아. 만난 지 한 달 남짓인데 다들 무지 친해졌잖아. 동지애도 끓어오르고.”
“뭐, 서로 믿기 어려운 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라포르가 일어나는 거겠지.”
“이 망할 놈아,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가 생각해도 참 정없는 목소리로 비상이 대답하자, 강산은 지금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비상을 쳐다봤다. 하지만 전혀 놀라지 않은 채, 비상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비현실적인 걸 현실로 다같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런 소릴 하려던 거야. 왜 만날 그런 식으로 화를 내?”
“신발. 어려운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아니나다를까, 강산은 이 말과 함께 비상한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이젠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기에, 비상은 멱살을 잡힌 채로 어떻게든 대답하려 했다.
“나도 아는 사람한테 들은 말…”
“니들 벌써 왔냐?”
그 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소자 무리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물론 이들이 옥상에 와서 본 건, 알 수 없는 까닭으로 화내고 있는 강산과, 그 강산한테 멱살을 잡힌 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비상일 터였다.
“야, 윤비상 저 자식 글러먹었어. 우리가 친해진 게 무슨 어려운 말 때문이라잖아.”
“암튼 어떻게 된 거야?”
잎새가 묻자, 드디어 멱살이 풀린 비상은 숨을 가다듬었다. 멱살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숨쉬기 어려운 것만은 아직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냥 형이 느끼는 감정을 심리학에 따라 말해준 것뿐이야. 저 형이 저렇게 화낼 줄은 몰랐지만.”
“넌 참 꿈도 낭만도 없구나. 비상아.”
“거야 그냥 해본 말이죠.”
그렇게 말하다, 비상은 오늘이 평소보다 조금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오늘은 연장자 몇 명 빼곤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즉, 이 자리에서 연소자라곤 비상 한 명뿐이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그냥 연장자들끼리 만나기로 했어. 비상이 너한텐 안 말했던가?”
비상이 묻자, 의영은 그렇게 대답했다. 강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왜 안 말한 거야?”
“내가 말했지. 넌 여깄어도 된다고.”
강산이 그렇게 투덜대는 걸 들으며, 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표정을 보니, 다른 연장자들도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참고로 오늘 모인 건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라는 듯했다.
그 때였다.
“응?”
비상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자기 몸을 둘러싸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 달리 바깥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건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비상은 곧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챘다. 자기가 지금, ‘다른 모습’으로 바뀌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혜은 앞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비상은 순간 움칫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 때보단 오히려 지금이 나았다. 일단 남성진만 있었을 뿐더러(의지 누나는 조금 늦게 온단 말을 아까 우연히 들었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두 번째이니, 놀랄 일도 뭣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비상뿐인지, 주위에 있던 연장자들은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나마 멀쩡했던 건, 혀를 차며 자기를 뚫어져라 보는 강산뿐이었다. 이 형이야 이미 ‘다른 모습’을 본 바 있으니, 지금 와서 놀랄 일도 뭣도 없었다.
그렇게 대충 ‘일’이 끝나자, 비상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다들 강산을 빼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들 놀란 거야?”
사실, 이럴 땐 존대를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비상은 여깄는 이들 가운데 존대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모 잎새 형이었지만. 비상이 지금 반말을 한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장자 일행은 강산을 빼고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사실, 현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도 이렇게 놀란 사람은 없었다.
“그, 그러면, 그건 없는 거냐?!”
잠시 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겠단 표정으로 잎새가 그렇게 물어왔다. 저 형답지 않게, 참 당황한 게 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이었다.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겠지.”
‘그것’을 짐작한 뒤, 비상은 담담히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느낌만으로도 그건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일단 이 상황을 가라앉혀야겠다 여겨서였다.
그걸 듣던 강산은, 갑자기 뭔가 무척 중요한 게 떠올랐단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자기가 지금껏 이걸 몰랐지, 란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강산은 비상한테 다짜고짜 이렇게 소리질렀다.
“윤비상. 니, 니가 고자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형은.”
비상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강산을 봤지만, 강산은 전혀 상관없단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지금 니 모습을 봐라. 그게 그거잖아!”
“형은 바보야? 왜 생각을 그렇게밖에 못 해?”
더더욱 어이가 없어진 비상이 그렇게 되묻자, 이제 옆에 있던 연장자들은 난간에 기댄 채 쓰러져서 웃고 있었다. 본의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강산 덕택에 분위기가 나아진 건 사실이었다.
“비상아. 그래도 너 분위기는 그대로다.”
이렇게 웃으면서 상황이 정리되자, 별밤이 드디어 비상한테 말을 걸었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되물었다.
“분위기요?”
“그, 아무리 사람 겉이 달라졌다 한들 ‘아, 같은 사람이구나’란 게 있잖아. 지금 니가 딱 그래.”
한편, 강산은 왜 이게 웃음거리가 됐는지 모르겠단 듯,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다른 연소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야, 내가 왜 바보야?!”
“세상에 그런 말을 그 맥락으로 들으면 화내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게 누구…”
비상이 한숨까지 내쉬며 이렇게 말하자, 강산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윽고 뭔가 짚이는 게 있단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자기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알아챈 듯했다.
“그건 니 말이 맞네. 젠장.”
하지만, 강산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를 ‘지금 여기에 있는, 윤비상이란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그 때, 잠시 생각하던 의영이 비상한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솔직히 비상이 너도 지금 힘들지 않니?”
“저 형한테 저런 말을 듣는 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의영이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고서야, 비상은 이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의영은 지금, 비상의 ‘남한테 말하기 어려운’ 데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전혀 지나친 게 아니었다.
“예.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일단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비상은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일단 지금은 남자들뿐인데도,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가장 찔리고 싶지 않은 데를 제대로 찔린 느낌이었다.
“그래, 니도 야한 동영상 하나나 두 개쯤은 보겠지. 이 자식아.”
“그건 형이 자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까먹을 뻔했네. 강산이네 집 갔을 때, 우리가 찾은 걸 말하자면…”
“야, 배잎새 이 자식아. 입 안 다물어?!”
잎새가 입을 열자, 강산은 곧바로 이렇게 윽박질렀다. 이걸 볼 때, 강산은 남자든 여자든 그런 걸 들키는 게 무척 민망한 듯했다.
하지만 사실, 강산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비상도 사람, 즉 남성이므로,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세상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다 들었지만, 비상은 틀림없이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산한테 그런 말을 듣자, 비상은 묘하게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자기는 ‘거세’된 거나 다름없었다. 자기자신을 이루고 있는 건, 결코 자기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잊고 있었지만, 비상을 이루고 있는 건 몸과 마음,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이었던 것이다. 비상은 결코 의식만으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었다. 하물며 ‘욕망’이 없는 존재라곤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비상은 잠시, 자기 학생시절, 즉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이미 형들에게 말한 대로, 비상은 남중과 남고를 나왔다. 물론 대학은 공학이었지만, 그 때 비상은 이미 남자들끼리만 지내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외동아들이었으니, 이성과 만날 일이 드문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아예 안 만난 것도 아니지만.
그런 데서 지내고 있었으니, 주위에서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무척 흔했다. 비상도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아무튼 이 놈들은’이란 생각을 하며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비상이 그런 말에 아주 신경을 안 쓰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비상은, 어느 정도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위 친구들처럼 저걸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비상은, 그런 걸 항상 모른 척하곤 했다. 의식할 것까지도 없다 여겨서였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바로 ‘그것’을 무척 신경쓰고 있었다. 청소년기 뒤, 비상도 물론 이성과 인연이 있었지만, 그렇게 잦았던 건 아니었다. 이미 모 형이 말한 대로 ‘그렇고 그런’ 영상을 본 적도 있으며(저 형만큼 자주 보진 않았겠지만), 그렇고 그런 것에 눈길이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만약 자기한테 그런 ‘욕망’이 없냐고 묻는다면, 비상은 이미 고개를 저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자기도 아침마다 ‘그런 일’을 겪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고, ‘그런 욕망’이 갑자기 들기도 했고, 때로는 강하게 의식하기도 했다. 그저 비상이, 다른 이들보단 조금 얌전한 편이라 스스로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상은 이쯤되자, 자기가 그 ‘무엇’과 마주봐야 한다는 걸 느꼈다. 지금껏 체면 문제나 ‘자기와 안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이젠 그럴 때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렇게 하겠단 말은 아니었지만.
“너란 놈도 그런 생각은 하는구나.”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상할 것도 없잖냐. 강산아.”
강산의 말에, 옆에서 잎새가 이렇게 끼어들었다. 이걸 보면, 잎새는 나름대로 비상을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야 그렇지. 근데 비상이 너는 워낙 우등생 느낌이니까…”
“다들 뭐하는 거야?”
갑자기 뒤에서 어떤 ‘연장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산은 하던 말을 멈췄다. 비상도 그 까닭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오면 난처해지는 사람이, 이 옥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연장자 중에서도 최연장자, 의지 누나였다.
“아, 혹시?”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가운데, 의지는 의영 쪽을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방금 있던 일 탓에 엉뚱한 걸 의식하게 된 비상은, 지금 이 상황이 조금 민망하게 느껴졌다. 의영은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의지한테 알아듣기 쉽게 말해줬다.
“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의지는 그 말을 듣자, 뭔가 다짐한 듯 비상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같은 모습이었다. 비상은 이 누나와 오래 얘기한 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 누나가 대체 왜 자기한테 다가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의지는 가까이 다가온 뒤, 비상을 가만히 감싸안았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것처럼.
“많이 무섭지? 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비상은 자기가 이렇게 안긴 게, 현 뒤로 두번째란 걸 깨달았다. 의지의 몸이 너무나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둘째치고, 비상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건, 현과 달리 의지가 비상한테 있어서 ‘정말’ 연상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비상은 이렇게 껴안기고 있는 느낌 자체가 기분좋았다. 이 역시, 어쩌면 평소엔 안 하는 일이라서일지도 몰랐다. 자기가 누군가한테 어리광부리는 일은, 초등학교 저학년 뒤로 전혀 없었으니까.
“비상이는 딱딱한 느낌이 좀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여린 데도 있는 거 같다. 그지?”
“저 누나는 진짜 성모같을 때가 있다니까. 누나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아냐?”
의지가 다정하게 비상한테 말을 걸자, 그걸 보던 강산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들려왔다. 그걸 귓등으로 넘긴 채, 비상은 가만히 입을 뗐다.
“뭐, 저도 사람이니까요.”
“그치만 그런 말도 참 비상이답다. 이럴 때도 의젓한 게.”
“고맙습니다.”
비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였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이걸 본다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비상에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비상은 한참을 의지 누나에게 ‘껴안겨져’ 있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온 비상은 자기가 이불을 안 갠 채 나갔단 걸 깨달았다.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죽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비상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사실 연장자들이 ‘바래다줄까?’라 물었지만, 비상은 ‘버스만 타면 금방이니까요’라 거절한 참이었다.
여전히 허전한 아랫도리를 생각하며, 비상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었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어쩌면 하늘은, 그 때 그걸 비상한테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게 대체 왜인지는 비상도 잘 모르겠지만.
잠시 가만히 있다가, 비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전과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비상은 뭔가 큰 걸 마음먹었던 것이다. 다른 이가 보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비상한테는 꽤 무거운 일이었다.
비상은 어제 현이 한 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비상은, 그 아이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죽 하는 것만은 절대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한 번 숨을 가다듬은 뒤, 아주 천천히 눈을 뜨고 자기를 쳐다봤다.
드디어 눈을 아주 뜬 뒤, 비상은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뱅뱅 맴돈 탓이었다. 이미 여성에 관한 지식은 그럭저럭 있는 비상이었지만, 그러니 새삼스럽지도 않아야 할 비상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놀라우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게, 현실이란 건 틀림없는 일이었다.
비상은 마치, 자기가 무척 징그러운 걸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을 받은 이가 세상에 한 명도 없었을까.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비상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눈앞에 놓인 현실이 훨씬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걸, 이 위나 아래같은 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이들이 그렇게 많단 말인가. 비상은 지금,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현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론 자기와 다른 걸 봤으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그런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걸 느꼈다. 자긴 자기 나름대로 현을 생각하고 있다 느꼈지만, 이렇게 보면 비상이 훨씬 더 겁쟁이였다. 어쩌면 그 애, 현이 비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비상은 자기 정체성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원래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 땐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지만, 이렇게 없어지고 나면 어쩐지 중요한 것 하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있을 땐 몰랐지만. 비상의 ‘그것’은 밑에서 자기 의식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한 번 쉰 뒤, 비상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몸을 씻기 시작했다. 여러 모로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일단 그건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까 전에 떠올린 ‘거세’란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지만, 비상은 그 역시 모른 척했다.
어쩌면 자기가 숨기고 있는 건, 우등생에 가까운 삶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그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