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26. 당신의 몇 년 전은 어떻습니까

그 다음 날, 비상은 항상 모이던 옥상에 먼저 다다랐다. 아직 자기 빼고 아무도 없긴 했지만, 오늘은 강산의 말에 따르면 재밌는 걸 하는 날이었다.
-오늘 경기 안 하는 거 알지? 대신 또 희한한 거 한다.
강산이 아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비상은 대체 오늘 뭘 할지에 관해 가만히 생각했다. 저번엔 하늘을 날았으니, 이번엔 하늘나라라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물론 그냥 해보는 생각이었지만.
“어유. 먼저 와있었냐?”
그 때, 드디어 강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 전신거울을 든 채였다. 용케도 그걸 들고 올라왔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거울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이건 또 뭐야?”
“뭐긴 뭐야. 오늘 할 거다.”
그 말과 함께, 강산은 거울을 난간에 비스듬이 세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틀림없이 1인용이었던 전신거울이, 두 명쯤은 가볍게 비출 수 있을 만큼 커졌던 것이다. 커졌다기보다 ‘늘어났다’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오늘 할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오늘 할 일을 설명할게.”
잠시 뒤, 팀원들이 옥상에 대충 모이자 의영이 앞으로 나섰다. 의영은 옆에 있는 거울을 보며, 대체 오늘 뭘 할지에 관해 팀원들한테 이야기했다.
의영의 말에 따르면, 이 거울 앞에 서면 자기가 살아온 몇 년 전(혹은 어릴 적) 모습이 동영상처럼 흘러간다고 했다. 물론, 당사자뿐만 아니라, 붉은 밤 팀원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가운데, 의영은 ‘물론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돼. 억지로 시키는 건 아니니까’라 팀원들을 달랬다.
“나도 형한테 이 말 들었을 때, ‘사람을 몇 명 죽이려는 거야?!’라고 무진장 어이없어했지.”
의영의 말을 들으며, 강산이 이렇게 쓴웃음지었다. 이 형치곤 드문 표정이었다.
“이걸 하늘이 준 까닭은, 우리가 만난 게 한 달 전이니까, 서로를 잘 모른다는 뜻에서 마련된 거라 하더라.”
소란이 좀 잦아들자, 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의영도 이 거울을 그다지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유. 형이랑 만난 지 1년은 된 거 같은데?”
“그래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잖냐. 강산아.”
강산이 놀리듯 묻자, 의영이 이렇게 대답하며 다시 거울을 가리켰다. 아까 하던 설명을 마저 하려는 듯했다.
“정말로 보여주기 싫은 일은 절대 안 나온다 하니 다들 마음놔도 돼. 그냥 머릿속을 스치는 옛날 일 중, ‘이건 보여줄 만하다’ 싶은 게 나올 거다. 왜 보여주고 싶은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물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알았지?”
“그럼 형은?”
“나도 너희들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니…마지막이라도 좋으면 그 때 해보자. 잎새야.”
의영은 그렇게 대답한 뒤, 아직 ‘보통’ 거울인 그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비상은 문득, 승지가 저 먼발치에서 살짝 움칫하고 있단 걸 알아챘다.
“하늘은 안 날지만 그것보다 지금이 더 소름돋네. 어유.”
잎새는 그 말과 함께, 거울을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마치 공상과학기술이라도 본 듯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그 거울을 보며, 잎새는 강산한테 이런 말을 걸었다.
“이거 그거같지 않냐? ‘당신의 몇 년 전은 어떻습니까’같은 거. 그지, 강산아?”
“무슨 드라마극장 제목같은데. 잎새 너 본 적 있냐?”
“그것도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아직도 그런 거 할까?”
“야, 우리가 모르는 데서 하고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분들 서운하게.”
“강산이 너도 아직 누굴 생각해줄 마음이 있구나. 다행이네.”
“뭐라고, 이 자식아?!”
잎새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산은 곧장 잎새의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었다. 이걸 볼 때, 오늘도 붉은 밤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그럼 누구부터 먼저 할까? 혹시 먼저 해보고싶은 사람이 있으면…”
“제가 먼저 하죠.”
의영이 조심스레 묻자, 비상은 아무 생각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주위에서 ‘오오’란 말이 나오는 가운데, 의영도 놀랐는지 비상한테 이렇게 되물었다.
“먼저 하고싶은 까닭이라도 있니?”
“몇 년 전 일을 보여주지 못할 것도 아니고, 이런 건 빨리 하는 게 좋다 생각하거든요.”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주위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역시 아우라가 있다니까’란 식으로 반쯤 감탄하고, 또 반쯤 놀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게 힘든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 곁으로 다가가자, 강산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렇게 중얼댔다.
“근데 너는 사람사는 냄새가 안 난다고. 진짜.”
“그럼 난 어디 사람이야?”
더 이상 투덜대지 않는 강산은 둘째치고, 비상은 드디어 그 거울 앞에 섰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 거울에 비치는 건 여기에 있는 윤비상 그 자체였다. 뒤로는 밤하늘 및 여러 불빛들이 비치고, 주위엔 이걸 조심스레 바라보는 붉은 밤 팀원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특이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겼는지, 흥이 깨지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별 거 아니네’라 말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뭐, 뭐야. 이거?!”
강산이 비명을 지르자, 비상은 다시 거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거울 너머에선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거울이 ‘출렁대더니’, 마치 물가라도 되는 듯 일렁이면서 뭔가 보여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가에 뭔가가 비치는 것처럼, 흐릿하게나마 거울 속 모습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에 비친 것처럼 흐릿하던 그 ‘풍경’은, 점차 또렷해지더니, 이윽고 4k 텔레비전이라도 보는 것처럼 깔끔해졌다.
그걸 본 비상은, 이게 언제적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자기가 고등학생일 때 모습이었다. 사실, 이것도 ‘몇 년 전’ 일이기는 했다.
“오, 이거 비상이 고딩 때냐?!”
연장자들, 특히 강산이 이렇게 흥분하는 가운데, 드디어 거울 속 모습이 ‘아주’ 또렷해졌다. 마치 이 거울을 넘으면,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 비상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복을 입은 비상 및 교실에 넘쳐나는 남학생들을 보고, 강산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야, 너 남고였냐?”
“그렇지. 중학교 때도 그랬는데 뭘.”
“어유. 너도 참 징하다.”
“어디가?”
비상이 그렇게 맞받아치는 가운데, 여기저기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인상은 그대로네’란 말도 들려왔다. 그건 비상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 때, 가만히 멈춰있던 ‘영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현실 너머를 비추는 것처럼, 너무나 현실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누가 봐도 여름인 게 틀림없는 환한 햇살 속에서, 고등학생 시절 비상이 뭔가 마시며 교실 벽에 기대고 있었다. 벽이라곤 하지만 바로 뒤는 창문이라서, 누구나 활짝 열고 안에 있는 사람을 건드릴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햇살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거울 너머는 대낮이었다. 비상의 기억대로라면, 아마 점심을 다 먹은 뒤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을 때일 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비상이 기대던 창문이 확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비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킬킬대며 이런 말을 걸었다.
“너도 그런 걸 마시냐?”
“이게 뭐가 나쁜데?”
그 말에, 거울 너머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보면, 비상은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너같은 엘리트면 무지 비싼 거 먹을 줄 알았다. 이 자식아.”
“무슨 헛소리야. 이 놈도 참.”
그 말과 함께 남학생이 사라지자, 비상은 다시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다짜고짜 비상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끌어트리기 시작했다.
“야, 다 먹었냐? 밖에 안 나갈래?”
“뭐, 그러지.”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하고 나서, 음료수를 자기 자리에 두고 교실을 나섰다. 다들 거울의 힘에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가운데, 강산이 갑자기 이런 걸 물어왔다.
“니 정도 애가 보통 학교에 다녔냐?”
“그렇게 평이 나쁜 학교도 아니고, 집에서 가까운 편이라 골랐지.”
“의왼데. 이 놈쯤이면 더 좋은 데도 다녔을 법한데…”
강산이 그렇게 중얼대자, 비상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나온 저 고등학교, 즉 비상의 모교는, 오히려 그 동네에서는 그럭저럭 알아주는 곳이라서였다. 죽 남중남고였던 건 부모님의 바람도 있었지만, 비상 자신이 ‘편해서’ 그렇게 하길 바랐던 것도 있었다. 강산한테 이렇게 말한들 절대 안 믿을 것같긴 했지만.
“근데, 니네 부모님 얘긴 왜 안 나오냐?”
이젠 ‘그냥’ 거울이 된 아까 그 거울을 빤히 보며, 강산이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기에, 비상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건 왜?”
“니네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잖아. 이 자식아.”
“형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비상이 어이없단 듯 이렇게 말하자, 강산은 곧장 발끈했다. 물론, 주위에 있던 연장자들은 배를 잡고 나뒹굴며 웃기 시작했다.
“그럼 상견례같은 질문을 하지 마. 아무튼.”
“뭐가 상견례야. 엉?!”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사람이 비상을 제치고 거울 앞에 섰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현이었다. 자기가 맨 먼저 나와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비상도 여기엔 조금 놀랐다.
“재밌겠다.”
여전히 곰귀 후드티를 눌러쓴 채, 현은 거울 앞에서 그렇게 중얼댔다. 잠시 뒤, 비상 때 그랬던 것처럼 거울이 일그러지더니, 뭔가 보여주기 시작했다. 비상도 전, 아니 바로 어제 다녀온 바 있는 현네 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쯤일 텐데도, 현의 방은 비상이 어제 보고 온 그 곳과 다를 게 없었다.
현은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표정으로, 방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볼 때, 이 때가 여름인 건 틀림없었다. 넌 덥지도 않니. 몇 년 전 일, 그것도 거울 속 일이란 걸 알면서도, 비상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걸 보라고 띄운 건 아니지?”
“맞는데.”
강산이 어이없단 듯 묻자, 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갑자기 옆에서 잎새가 끼어들었다.
“대체 왜?!”
“그냥 이렇게 지내니까.”
그 전위적인 영상 및 현의 대답에 다들 할 말을 잃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모 연장자를 거울 앞으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아주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다들 ‘현이 쟨 원래 저런 성격이구나’라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모 강산이 형이라 불리는 사람이 다른 연장자들한테 떠밀려 거울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강산은 열받는 듯 ‘이 자식들 다 죽었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눈앞엔 거울이 마련된 지 오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거울은 곧바로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뭔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둠이 깔린 큰길이었다. 아마 몇 년 전으로 보이는 그 곳에,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강산 및 한 남자가 있었다. 인상은 지금과 거의 그대로였지만.
그러고 보니, 강산 옆에 있는 남자는 어쩐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야, 저 사람 니네 형 아니냐?!”
잎새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저 사람이 전에 만난 강산의 형, 강철이란 걸 알아챘다. 아마 둘이서 같이 집에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거울 너머 강산은 뭔가에 크게 화났는지, 이런 말과 함께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자복이 없는 게 그렇게 놀릴 일이야?!”
거울에서 이런 말이 터지자마자, 강산은 곧바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런 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산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울 속 세상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니 복이지. 누구랑 사귀는 게 얼마나 쉬운데.”
“그럼 형이 한 번 해 봐. 해 보라고!!”
“그럼 그럴까?”
거울 속 강산이 악받친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자, 강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치 공기를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옆에 지나가고 있던 여성 한 명을 정중하게 불렀다.
“저, 죄송한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실례지만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강철이 그렇게 말하자, 여성은 잠시 강철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마 자기가 알아서 번호를 등록해주겠다는 뜻인 듯했다.
“자, 어떠냐?”
그 여성이 저만치 사라지자, 강철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냈다. 강산은 억울해죽겠단 표정으로, 이런 말과 함께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신발!!”
그리고 그대로, 강산의 영상은 끝났다. 비상이 정신을 차리자, 주위에 있는 팀원들이 다들 짠하단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참 안됐다니까.”
“시꺼!!”
잎새가 농담하듯 말을 걸자, 강산은 곧바로 이렇게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자기 무의식이 이런 생각을 끌고 온 듯했다.
하지만 잎새는 여전히 강산의 형이 궁금했는지, 이런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래서, 니네 형은 어떻게 된 거냐?”
“몇 달 뒤에 결혼한다. 이 망할 놈들아.”
“아, 거울 속 저 분하고?”
“그럼 누구겠냐?!”
강산이 열받거나 말거나, 여기저기서 ‘진짜?’란 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강산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니네 형이 잘나긴 하네. 너보단.”
“누가 그걸 몰라?!”
잎새가 아직도 강산을 물고 늘어지자, 강산은 이렇게 소리치곤 구석으로 도망가버렸다. 이걸 볼 때, 거울 속 풍경은 강산한테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저 특이한 형을 보여주고 싶다는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나도 한 번 해보겠다는 겁없는 연소자들이 거울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물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건 그대로였다. 그걸 멀찍이 구경하던 연장자들 중, 별밤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재밌겠는데.”
“야, 니도 할 거냐? 저런 걸 왜 해?!”
“네가 아픈 꼴 좀 봤다고 이럼 안 되지. 강산아.”
“뭐라고?!”
강산이 화내거나 말거나, 별밤은 당당히 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거울은 일그러지더니 별밤의 몇 년, 아니 십 년쯤 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략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별밤이(이 때도 몸집은 그럭저럭 있었다), 벽이나 대문 위를 걸어다니며 혼자 놀고있었던 것이다.
“너도 그랬냐. 저런 건 누구나 하는 거지.”
“그 땐 무서운 게 없었거든.”
이 뒤로, 분위기도 갑자기 크게 좋아졌다. 특히 연소자들은 자기들끼리 거울을 비춰보며, ‘넌 그럴 줄 알았어’라 킬킬대고 있었다. 비상은 바로 옆에서, 대한이 거울 앞에 선 채 연소자들한테 자랑하는 걸 구경했다. 자기가 미성년자이던 시절, 3대 1로 맞짱을 떠서 이긴 적이 있었던 일을 무척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무모한 패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옆에 비상이 있었지만, 기척을 숨겨서인지 어떤지 알아보는 연소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할까?”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이제 의영이 그런 말과 함께 거울 앞에 나섰다. 그 태도만 보면 평소 의영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비상의 눈으로 볼 때, 어쩐지 지금 의영은 무척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의영이 거울 앞에 서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거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들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의영이 거울한테 이렇게 소리쳤다.
“자, 잠깐. 그만! 그건 안 되는데…”
다들 놀란 눈빛으로 거울을 보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또렷해지던 거울이,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상한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거울 속에선, 마치 망가지기라도 한 텔레비전처럼 지지직 소리가 쉼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이상은 절대 안 보여주겠다는 듯이.
지지직. 지지직.
“형, 괜찮아?!”
다들 거울을 보고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몇몇 연장자들이 상황을 깨닫고 의영한테 달려갔다. 의영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 당연히 괜찮지. 암…”
“이게 뭐가 괜찮아. 이 사람아!”
강산이 화내거나 말거나, 의영은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의영은, 이 거울에 뭐가 비칠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한편, 먼발치에서 이를 보는 승지의 표정은 조금 불안해보였다. 승지의 눈길 너머엔,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거울, 그리고 망연자실한 의영이 있었다.
“미안하다.”
결국 의영은 이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더 이상 거울 앞에 있을 수 없단 걸 깨달은 것이다. 강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항상 하던 대로 이렇게 의영을 위로했다.
“괜찮아. 싫음 안 하면 되지.”
“맞아요. 형도 이제 얼굴 좀 펴요.”
별밤도 같이 위로했지만, 여전히 의영, 그리고 주위 팀원들은 뻘쭘한 분위기였다. 그걸 눈치챘는지, 갑자기 잎새가 강산을 보며 이런 말을 툭 꺼냈다.
“그래도 다행이네. 강산이가 여자랑 인연이 없단 건 알았으니까.”
“뭐 인마?!”
강산이 덤벼들자, 이제야 분위기가 풀린 듯 여기저기서 낄낄대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해서 붉은 밤 특유의 분위기가 돌아온 가운데, 오늘의 모임도 무사히 끝났다.
그렇게 다들 옥상을 나서자, 비상도 강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강산은 아직 의영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았는지,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의영이 형도 이것저것 있는 거 같지?”
“그렇겠지.”
“형도 우리한테 좀 말해주면 좋겠는데, 자꾸 센 척한단 말이야.”
“센 척이라고?”
“그래. 자기가 남자들 중 가장 연장자라고 약한 데 안 보이려고 하잖냐. 의영이 형.”
그 말과 함께, 강산은 한숨을 쉬었다. 연장자들은 의영과 따로 만날 일도 많을 테니, 느끼는 것도 이것저것 있는 듯했다. 아마 다른 연장자들 역시, 의영에 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보자, 이 자식아.”
“형은 말 좀 곱게 써. 만날 그게 뭐야?”
“야, 내 말이 더럽단 말이야?!”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건물 앞에서 강산과 헤어졌다. 오늘은 참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이젠 비상 역시 자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이 항상 걷던 길을 가던 때였다.
“뭐, 뭐야?”
비상은 갑자기, 자기를 덮치려드는 누군가를 보고 그렇게 중얼댔다. 너무나 순식간이라서, 상황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비상을 덮쳐온 상대방은 힘이 달렸는지, 간신히 비상의 한쪽 팔을 세게 잡은 뒤 근처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실, 조금만 힘을 쓴다면 비상이 쉽게 벗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긴 머리카락 너머의 누군가를 본 뒤, 비상은 상황을 금세 알아챘다.
그 사람은 놀랍다면 놀랍게도, 전에 의영을 도발해 안 받아도 될 패널티를 받은 바 있는 금빛 밤 연소자였다. 물론, 비상이 이 사람의 이름을 알 리 없었다. 물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비상을 아주 잘 아는 듯, 여전히 자길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댁이 윤비상이지?”
그 눈빛이 얼마나 강했는지, 비상은 이 놈이 날 죽이려 하나, 란 생각을 문득 했다. 그것보단 얼굴이 너무 가까운 게 부담스러웠지만. 비상은 낯선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데서 마주보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이건 좀 놓고 얘기하지?”
“이런 젠장…”
자기도 힘이 달렸는지, 결국 남의 밤 연소자는 그 말과 함께 비상의 팔을 풀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 워낙 큰길이었기 때문에, 둘한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이 옆은 큰 편의점이었으니, 여기 앉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내가 왜 이 지경이…”
연소자는 자기 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댔다. 물론, 비상은 거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비상이 지금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인가?”
이 말을 듣자, 연소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이없어서 견딜 수 없단 듯한 표정이었다. 연소자는 마치 물만난 고기라도 되는 듯, 비상의 양어깨를 움켜쥐고 이런 말을 쏟아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치미떼는 거야? 댁이 패널티인 거 다 알고 있어. 그, 안 보이는 거!”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저번에 니가 누구 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 이 자식아!”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잠시 주위의 눈길이 이리로 모였지만, 다행히도 다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비상은 이제야, 어제 느낀 그 눈빛이 누구 건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상이, 이 성질머리 더러운 남의 밤 연소자를 어떻게 할까 속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뭐, 뭐야?!”
옆에서 놀라는 연소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상의 세상이 한층 더 커져있었다. 저 막나가는 연소자의 말이 드디어 증명될 때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뭐, 뭐야. 넌 왜 나이까지 바뀌는 거야?!”
비상이 반쯤 포기한 모습으로 한숨을 쉬자, 옆에 있던 연소자는 갑자기 이렇게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비상이 더 알고 싶은 일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제 비상은, 잠시 커졌던 옷이 딱 맞는다는 걸 느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남의 밤 연소자한테,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내, 내가 요즘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댁이 알기나 해?!”
그 말과 함께, 남의 밤 연소자는 자기가 요즘 겪는 괴로움을 비상한테 마구 털어놓기 시작했다. 댁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라도 있지, 자긴 죽 이런 모습이라서 힘들기 짝이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 다른 이들의 기억도 바뀌어있는 덕택에, ‘자기와 세상 사이의 괴리’를 매일같이 느껴야 하는 게 열받기 짝이 없다고 했다. 물론, 비상이 여기에 뭐라 답할 말은 없었다. 이 다짜고짜 자기 사정을 털어놓는 연소자의 말을 들으며, 그저 헛웃음을 띄우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의 밤 연소자는 이게 아주 불만인 듯했다.
“진지하게 들으라고, 이 자식아! 사람 21년 인생이 날아갔는데!!”
“내가 댁보다 나이를 먹은 건 알고 하는 짓인가?”
“그래, 니 자식 참 밥맛이다. 전부터 죽 생각했어. 이 엘리트 자식…”
“뭐하는 거야?”
그렇게 자기 혼자 열받은 남의 밤 연소자(와 그 연소자한테 멱살을 잡힌 비상)한테, 누가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가 낮은 20대 남성 것이란 걸 깨닫자, 비상은 이 사람이 대체 누군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고?!”
이 말에 발끈한 연소자가 고개를 들자, 그 연소자한테 멱살을 잡힌 비상도 덩달아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쳐다봤다. 거기엔, 아주 신기하단 표정으로 둘을 빤히 쳐다보는 현이 있었다. 현이 왜 지금 이런 모습인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거였다.
“네가 볼 땐 뭘로 보이니?”
“싸움?”
비상이 묻자, 현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연소자는 잘 만났다는 듯, 이를 부드득 갈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아?!”
“날 둘러싸고 싸우거나 뭐 그런…”
이 말에, 비상은 물론 연소자조차 할 말을 잃었다. 비상은 쓴웃음을 짓는 가운데, 연소자는 열받아서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거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 눈엔 그렇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황은 그것과 아주 반대였다.
“오해받기 싫으면, 일단 남의 멱살은 풀고 얘기하지?”
“신발. 이 자식이 진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남의 밤 연소자는 드디어 비상의 멱살을 풀었다. 현은 이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듯,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근데 이 사람, 전에 그 사람 아냐?”
“그렇다면 어쩔 건데. 이 패널티야?”
“아니, 왜 그러나 궁금해서. 비상이랑 싸웠어?”
“얜 말투가 왜 이래? 어…”
현한테 마구 화내던 남의 밤 연소자는, 이제야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 연소자는, 현의 나이가 ‘보이는’ 것과 다르단 걸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이게 빠른 건지 늦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드디어 현이 입을 뗐다. 물론 비상과 남의 밤 연소자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현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비상 일행한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어디로?!”
“비상이네로.”
연소자가 열받은 듯 묻자, 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꺼냈다. 다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비상은 머리라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겪은 적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방법이 현이 말한 ‘자기 집으로 가는’ 거란 건 틀림없다 여겨서였다.
“그래서, 댁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그 연소자를 쳐다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자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