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강산이네 곳간 털러 안 갈래?”
7월이 막 시작될 즈음, 비상은 별밤한테서 갑작스레 그런 전화를 받았다. 아마 오늘, 이 형은 불쌍한 강산을 또 털러가는 듯했다.
“전에 턴 거면 되지 않아요?”
“괜찮아. 이번엔 우리도 선물을 두둑하게 챙길 거니까.”
비상이 걱정아닌 걱정을 하자, 별밤은 시원하게 그런 대답을 했다. 참고로, 별밤의 말에 따르면 현 역시 오기로 한 듯했다. 그것도 걸자마자 5초 안에.
“그럼 저도 뭔가…”
“잎새가 말했지. 연소자는 그냥 가만히 우리 주는 것만 챙기면 된다고.”
그 말을 듣자, 비상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자기가 여기서 더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편했다.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상은 7월 첫 휴일을 또 강산의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번엔 전처럼 자비없이 곳간을 털진 않을 것 같긴 했지만.
“이야, 비상이 아냐?”
그렇게 비상이 강산의 자취방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돌아보니, 별밤이 손에 뭔가 두둑하게 쥔 채 손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아까 그 말이 진짜였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조심스레 물어봤다.
“이건 다 뭐예요?”
“자취생 집에 갖고가면 환영받는 게 있잖냐. 휴지. 라면…뭐 그런 거지. 식용유는 잎새가 가져온다 했고.”
“그거 근거있는 말이에요?”
“너도 이런 거 사다주면 좋잖아. 그지?”
별밤의 말에, 비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면은 둘째치더라도, 휴지 대목에서 뭐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별밤 말에 따르면, 현은 이미 강산의 집에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비상 일행도 발걸음을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
그렇게 강산의 자취방 앞에 와서 초인종을 누르자, 강산은 다짜고짜 그런 말부터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마 저번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있는 듯했다.
“이거 너무한데. 선물도 들고 왔구만…”
“그, 그건 놓고 가. 이 자식아.”
강산이 별밤의 꾸러미를 소중히 집안으로 가져가는 가운데, 비상 일행은 강산의 자취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안을 보니, 이미 잎새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별밤의 말에 따르면, 파랑은 오늘 사정상 오지 못한다는 듯했다. 먼저 왔다던 현 역시, 바뀐 모습으로 안쪽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물론 모자를 눌러쓴 채.
그런데, 현 옆쪽엔 굉장히 의외인 인물이 있었다. 사실, 비상은 연장자들이 주로 있는 모임, 그것도 강산의 자취방에서 이 친구를 만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다지 이런 데서 적극적인 인물은 아니리라 여겨서였다.
하지만, 그 인물, 군청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뒤, ‘오셨군요’라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실에 놀라서, 비상은 별밤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연소자가 두 명이나 더 있네요. 대단한데.”
“아, 오고 싶다 하더라고. 많아서 나쁠 것도 없잖아. 그지?”
그런 말을 들으며, 비상은 현과 군청 가운데에 자리잡았다. 사실 현이 있는 건 이제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 아이라면 그러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여기가 궁금했니?”
“그냥 가고 싶었어.”
군청은 이렇게 현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처음인지, 묘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먹었는지, 조심스레 이런 말을 건넸다.
“그, 고생이 많겠네요.”
“고생?”
“아니, 그런 상황이라면…”
군청은 그렇게 말하다가, 이윽고 ‘아니에요’란 말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비상 역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기에, 이번엔 군청과 이야기를 해보려 마음먹었다.
“오늘은 연장자들하고 이야기라도 하고싶었나 보지?”
“아무래도 얘기한 적이 별로 없어서…이번 기회에 오려 생각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군청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누굴 닮아서 참 진지한 놈이구나. 그나마 자기는 융통성이 있단 걸 생각하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와중, 잎새는 아주 신나서 강산한테 이런 말을 걸고 있었다.
“야, 강산아. 전에 라면먹은 거 가만히 생각하니까 부족한 게 있더라. 그게 바로 치즈야. 오늘 넣는 거 어떠냐?”
“이 자식이. 계란에 파면 충분히 호화스러운데 뭘 더 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치즈를 사온 거 아니냐. 이렇게.”
잎새가 사온 치즈를 보자, 강산은 혀를 크게 찼다. 그리고는 ‘설거지는 니가 하는 거지?’라 투덜대며, 그 치즈봉지를 잎새한테서 뺏어왔다.
그 때, 이번엔 누군가와 전화를 끝마친 별밤이 이런 말을 꺼냈다.
“승지도 온다는데?”
“진짜? 왜?!”
“현이가 있다고 했더니…”
“모습이 바뀌었단 얘긴 했냐?”
“그래도 오겠단다. 잎새 너도 걱정이 팔자라니까.”
그 말을 옆에서 들으며, 비상은 가면 갈수록 오늘이 신기해지는 걸 느꼈다. 어쩐지 이렇게 모이는 건, 전은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자, 먹어라. 이 자식들아.”
잠시 뒤, 강산은 투덜대며 라면이 담긴 냄비를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자기가 두 번씩이나 이런 짓을 하고 있단 게 무척 불만인 듯했다.
“이야, 맛있겠는데? 역시 치즈가 있으면 느낌이 달라요. 그럼 어디 한 번…”
배짱좋게 잎새가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별밤은 벌써 말도 없이 자기 몫을 덜어먹고 있었다. 이걸 보면, 다들 점심을 안 먹고 온 듯했다. 그건 비상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뒤, 다들 조용히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별밤은 언제 다 먹었는지, 이젠 찬밥을 자기 그릇에 말아넣고 있었다. 현 역시 강산의 라면을 무척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보다 더 맛있는 라면을 먹은 적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신기하다.”
“뭐가?”
“내가 많이 먹는 게.”
비상이 묻자, 현이 그렇게 대답한 뒤 라면을 한 젓가락 더 떴다. 별밤은 그걸 알겠단 듯, 킬킬대며 이렇게 입을 뗐다.
“아, 아무래도 그런 모습이면 대개 많이 먹겠지. 나도 그렇고. 강산이도 그렇고.”
“내 얘긴 갑자기 왜 나와?!”
“뭐, 강산이 쟨 둘째치자고. 근데 설마 살찌고 그런 건 아니지?”
“하나도 안 붙었던데.”
잎새의 말에 현이 이렇게 대답하자, 강산이 신난 듯 남은 라면을 긁기 시작했다. 아마 현한테 좀 더 덜어줄 생각인 듯했다.
“그래, 이럴 때 많이 먹어야지.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다. 알았지?”
“밥심 좋지. 근데 이건 밀가루 아닌가?”
이 말이 끝나자마자, 별밤은 강산한테 가루가 될 만큼 얻어맞았다. 옆에서 킬킬대는 잎새를 보며, 현은 ‘오오’라며 아무렇지 않게 감탄하고 있었다.
“강산아, 이거 리필 안 되냐?”
그러던 중 강산의 라면에 감탄했는지, 잎새는 그런 말과 함께 자기 그릇을 내놓았다. 평소 잎새와 다른,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뭐?!”
“농담 아니다. 이거 진짜 꿀이야. 맛있어. 내가 지금 얼마나 진지한데.”
“그런다고 라면 안 끓여줘. 이 자식아.”
“내가 라면 하나때문에 이러는 줄 아냐? 진짜 맛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강산이 투덜대는 걸 보자, 별밤은 마치 개그라도 보는 것처럼 낄낄댔다. 아마 별밤은, 이렇게 강산이 당하는 게 즐거운 듯했다.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이거. 그지, 비상아?”
“네. 대략 저번 겨울쯤에…”
“벌써 그렇게 됐냐?!”
강산은 놀라면서도, 결국 잎새의 그릇에 라면을 새로 떠줬다. 이걸 보면, 강산도 잎새가 아주 밉진 않은 듯했다.
“현이 너 힘든 거 없냐?”
그렇게 상황이 진정될 무렵, 강산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현은 그게 의외였는지, 강산을 이상하단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응?”
“솔직히 지금 우리끼리만 있는데 말 좀 해봐라. 갑자기 그래서 당황은 했을 거 아냐. 비상이가 도와줬다곤 하지만.”
“그래, 그건 우리도 걱정된다 야.”
강산이 드물게도 진지하게 그런 말을 꺼내자, 잎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라면 한 그릇만 더 줘.”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암.”
“그거 말고는?”
“여기서 자고가도 될 거 같은데.”
잎새의 말에 현이 이렇게 대답하자, 강산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아마 저번 그 일을 떠올린 듯했다.
“아, 강산이가 원래 모습이면…”
“미쳤냐?!”
별밤의 말에, 강산은 그렇게 화를 내며 남은 라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마 지금, 강산은 현의 모습을 생각지 않고 있었던 듯했다.
“비상이 넌 이과라 했던가?”
잠시 뒤, 별밤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비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별밤은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꾸민 것처럼 눈빛이 반짝대기 시작했다.
“잠깐. 군청이도 이과라 들었는데.”
“그래요?”
참고로, 둘을 뺀 나머지는 모두 문과였다고 했다. 물론 그 까닭을 물을 것까진 없겠지만.
“그럼 이런 거 한 번 하자. 군청이가 진짜로 이과를 나왔는지 어떤지 알아보는 거야. 이과감별사 어떠냐?”
“그딴 걸 왜 알아봐?”
“야야, 비상아. 생각해봐라. 진짜 이과 안 나왔음 어떡해?”
잎새의 말에, 비상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얘길 꺼낸 별밤마저, ‘그런 건 몰라도 될 것 같은데…’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럼 형이 한 번 해 봐. 난 모르겠으니까.”
비상이 책임을 떠넘기자, 잎새는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상을 탁 치며 이런 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야. 이거 어떠냐? 파이 소숫점 댈 수 있는 데까지 대보는 거. 이렇게 말하면 뭔지 알지?”
“우리가 무슨 컴퓨터야?”
비상은 어이없어서 그렇게 대답했지만, 역시나 군청은 진지하게 혼자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비상과 달리, 이 친구는 정말 원주율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음. 3.1415926…이 뒤가 헷갈리네요. 뭐였더라…”
“그래서, 맞아, 형?”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니가 말해야지!”
비상이 그렇게 묻자, 잎새는 얼른 책임을 떠넘겼다. 물론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기가 나왔다고 하면 나오는 거지, 이 형들도 참.”
“우리가 문과라서 생각하는 데 한계가 있는 거야. 안 그래…아야!”
별밤은 킬킬대며 옆에서 끼어들다가, 결국 잎새한테 옆구리를 맞고 말았다. 별밤이 잎새한테 찔린 옆구리를 잡는 사이, 갑자기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야. 승지가 지금 왔네.”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함께, 승지가 ‘안녕하세요’라 고개를 숙이며 나타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사복이었다. 승지는 이런 데에 오는 게 처음인지, 상당히 조심스런 자세로 현 근처에 앉았다.
“제가 너무 늦었어요?”
“늦기는. 강산이가 라면 하나 더 끓여줄 거야. 그지?”
“이 자식들은 병주고 약주고…”
잎새의 말에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라면을 또 끓이기 시작했다. 한편, 승지는 이제 현의 바로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 역시 아무렇지 않게, 승지를 등 뒤에서 껴안은 채 고개를 가까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현이 껴안고 있는 건, 틀림없이 승지의 가슴 바로 아래쪽이었다. 하지만 둘 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가.
다른 연장자 및 연소자가 그런 표정으로 둘을 보는 걸 느끼며, 비상은 속으로 둘을 걱정했다. 하지만 승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굳이 막을 것까진 없을지도 몰랐다.
“니들이 사온 거 다 동났다. 이 망할 놈들아.”
다시 끓인 라면냄비를 받침 위에 놓으며, 강산은 이렇게 투덜댔다. 이 말에 잎새는 아주 의외란 표정으로, 열받은 게 눈에 보이는 강산을 쳐다봤다.
“그럼 승지가 먹는 게 싫었단 거야, 강산아?”
“누, 누가 그렇대?!”
둘이 그런 말을 하는 가운데, 승지는 자기 그릇에 라면을 던 뒤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산을 보며, 놀랍다는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오빠도 라면 잘 끓이시네요.”
“그, 그런가?”
“그런데 승지는 라면 잘 안 먹니?”
“아뇨. 아주 안 먹는 건…”
거기까지 말하다가, 승지는 말하는 걸 그만두었다. 아마 의영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아. 그럼 승지도 한 번 알아볼까?”
마치 이야기를 돌리려는 듯, 잎새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그 말로 볼 때, 저 형은 또 파이 소숫점을 승지한테 물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야?”
“몰랐냐? 승지도 이과라던데.”
그 말에, 비상은 승지를 다시 바라봤다. 아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볼 때,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껏 비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에 들었는데, 공부 잘 한대. 그러니까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의영이 형도…”
거기까지 말하던 잎새는, 자기가 한 말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승지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잠시동안, 비상은 이 방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졌단 걸 느꼈다.
“그런데 뭐 시키려고 그러신 거예요?”
“아, 파이 소숫점 대기. 별 거 아냐.”
승지가 드디어 입을 떼자, 강산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대답했다. 승지는 의심스럽단 표정으로, 그 말을 처음 꺼낸 잎새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걸로 감별이 돼요?”
“뭐. 모 배잎새 군한테는…쿨럭!”
옆에서 농담삼아 그렇게 말하던 별밤이, 또 옆구리를 찔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 두 번이나 이런 식으로 맞았는데도(강산까지 하면 세 번이었다), 별밤은 옆구리를 잡을지언정 반격하려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프단 게 빤히 보이는데도, 별밤은 옆구리를 잡은 채 킬킬대기만 했던 것이다.
“근데 형들은 왜 문과를 고른 거야?”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못하니까 안 갔지.”
비상이 이렇게 묻자, 잎새가 투덜대며 그렇게 대답했다. 옆에 있던 강산도, ‘수학 잘하면 문과 갔겠냐?’라며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
한편, 별밤은 저 둘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수학이나 과학같은 사고랑은 좀 안 맞는 거 같아서.”
“무슨 근거라도 있냐?”
“수식을 푸는 건 상상으로 치자면 서술트릭이나 반전같은 거지. 흔히 말하는 서술트릭이나 반전같은 건, 결국 한 가지 반응만 바라게 된단 말이야. ‘이런 반응도 있을 수 있구나’가 아니라, ‘이런 반응만 나와야 한다’가 된다고. 그러니까 난 수학에 약했다니까.”
별밤이 강산의 말에 이렇게 길게 대답하자, 한동안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강산은 그 대답이 불만이었는지,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대체 왜 자기가 수알못인 걸 이런 식으로 자랑하는 거야?”
“너도 못하면서 뭘 그래.”
“시꺼!!”
그렇게 강산이 또 자폭한 가운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언제 봐도 이런 식이구나. 참고로 비상은 자기 적성에 따라 이과를 골랐다. 깊이 생각해서 고른 건 아니었지만.
“근데 신기하지 않냐?”
이번 잎새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 놀이에 무슨 큰 게 걸려있는 것도 아닌데, 군청이처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단 게 말이지.”
“제가요?”
“그래, 넌 만날 진지하잖냐.”
잎새가 그렇게 말하자, 별밤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아마 잎새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뭐, 그건 맞네. 무슨 어디 갇혀서 싸우다 지면 죽는 것도 아닌데.”
“지, 진짜 그런 게 있단 말이야?!”
“강산이 넌 온라인게임 안 해봤냐? PC방 다닐 거 아냐.”
“요즘엔 스마트폰만 만지작대니까…신발, 괜히 무섭네. 이별밤 이 자식을 그냥 확.”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별밤의 말이 진짜 무서웠던 듯했다. 이렇게 보면 강산도 참 겁쟁이였다.
“근데 우린 그런 거 없잖아. 이기면 뭘 주는지도 모르고. 근데 다들 진지하게 하는 게 어떻게 보면 신기하단 말이지. 물론 전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잎새가 그렇게 말을 정리하자, 잠시 동안 침묵이 일었다. 그러다, 이번엔 강산이 입을 떼어놓았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이는 패널티도 걸려있는 거 아냐.”
“응?”
“솔직히 현이 너도 당황스러울 때 많지? 그런 거 감수하고 놀이할 만큼 재밌어?”
“뭐가 오든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강산의 물음에, 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어릴 적부터 ‘하늘’을 알고 있던 현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그걸 아는 건 비상뿐이었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천사의 말에 동의하기에 이렇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사는 놀이를 하기 전, 이미 패널티에 관해 귀띔한 바 있었다. 그게 어떤 패널티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지,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비상은 퍼뜩 의영 및 승지를 떠올렸지만, 여기서 그 말을 꺼내는 건 적절치 않다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들끼리만 있는데도 그런 얘기 안 나오네요.”
“뭐가?”
갑자기 승지가 그런 말을 꺼내는 바람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다. 승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오빠들을 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축구 얘기나, 군대 얘기나, 그런 게 나올 거 같았는데…”
“그런 얘길 니들 앞에서 하면 무슨 재미가 있냐?”
“강산이 얜 축구 얘기하면 졸아. 진짜로.”
“근데 배잎새 니가 뭔 상관이야?!”
둘이 또 투닥투닥 싸우는 걸 보며, 별밤이 이야기를 정리하려 나섰다. 역시 이럴 때, 별밤은 무척 믿음직한 존재였다.
“뭐, 그런 건 둘째치고, 겪은 적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여기서 그런 얘길 할 것도 없겠지?”
“애초에 같은 델 다녀왔단 보장도 없고 말이지.”
“어, 비상이 넌 어디 나왔어?”
“공군인데요.”
“그러고 보니 강산이 넌 해병 아니었던가?”
“뭐야,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가 됐어?!”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이야기가 정말 승지 말대로, ‘여자한테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근데 니들은 몰라도 돼. 그런 것도 결국엔 그거거든. 회사생활이랑 비슷한 거야. 누가 더 힘들었나 자랑하는 거.”
“야, 이별밤. 그런 거 막 말해도 되냐?!”
“대체로 그렇단 말이지.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겠지만.”
별밤은 그렇게 말한 뒤, 현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러가지 생각이 겹친 듯한 눈빛이었다.
“뭐, 적어도 현이 네가 겪을 것까진 없겠지?”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넌 안 가도 돼. 그런 데 니가 왜 가냐. 솔직히 현이 너같은 애는 안 갔으면 좋겠다.”
“사실 이것도 말이 많긴 하지만…”
강산이 얼른 현의 말을 끊자, 별밤이 그렇게 덧붙였다. 특히 강산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조금 흥분한 모습으로 다시 입을 뗐다.
“현이 니가 그 고생을 왜 하냐. 넌 그냥 가만히 있음 돼.”
“그럼,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랬으면 가야한다는 말이야?”
“어?”
이 말엔 강산도 놀랐는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현이 이렇게 대답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이었다.
“어, 그, 그건…”
“솔직히 말하자, 강산아. 만약에 현이가 진짜 이대로 자랐으면 니가 같은 말을 했냐?”
“그, 그건 어려운 얘긴데…”
잎새가 이렇게 치고 들어오자, 강산은 또 말끝을 흐렸다. 누가 봐도 무척 궁지에 빠진 모습이었다. 아마 이 형은,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던 것 같았다.
결국, 별밤이 이런 말과 함께 상황을 정리했다.
“거봐라. 사람은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게 된다니까. 아무리 속이 같아도 겉으로 판단하는 거 아냐. 사람이.”
“현이 너, 설마 가고싶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대체 어떤 덴지는 궁금해졌어.”
비상의 물음에, 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별밤은 쓴웃음을 짓고는, 또다시 이런 말과 함께 상황을 정리하려들었다.
“뭐, 그것도 다 사람 나름이지. 좋은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식으로 정리하면 어떨까?”
“넌 진행해도 되겠다. 이 자식아.”
“안 그래도 요즘 섭외가 막 들어온다. 진짜로.”
강산이 그렇게 투덜대자, 별밤은 이렇게 말하며 킬킬댔다. 아마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이렇게 끝나가는 듯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별밤이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볼일이 있는 듯했다. 별밤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더니, 마치 못 믿을 걸 봤단 듯 이렇게 외쳤다.
“오, 의외로 깨끗한데?”
“그게 불만이냐?”
“이거 무슨 다른 데에 쓰는 것처럼 깨끗한데. 혹시 여기에 머리 쑤셔넣으면 이세계로 이어지는 거 아니냐?”
“이놈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럼, 이게 알고보니 요술램프라서 막 하늘도 날 수 있는 거 아냐?”
“이 자식이, 무슨 약을 했는데 이딴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까지 나오자, 이제 잎새는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별밤 눈에, 강산네 집 화장실은 그만큼 의외였던 듯했다.
“요즘 비슷한 걸 떠올릴 일이 있었거든. 그걸 보니까 전에 본 다른 것도 떠오르더라. 그냥 그런 거야.”
“그딴 데 당장 끊어. 이 망할 놈아.”
강산이 그렇게 투덜대는 가운데, 여전히 현 앞에 앉아있던 승지가 이상하단 듯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거기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현이 있었다. 현은 항상 그렇듯 곰귀달린 후드티를 눌러쓴 채, 승지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묘하게 참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었다.
“야, 현아. 그거 재밌는데?”
“편해.”
그 말과 함께, 현은 승지의 등에 몸을 기댔다. 아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나, 나 몸 찬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지는 현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걸 보면, 둘은 퍽 친해진 게 틀림없었다. 이미 둘이서 얘기한 적도 있었으니까.
“근데 좀 신기한 거 같아요.”
“뭐가?”
“남자들은 이렇게 말 많이 안 할 줄 알았거든요.”
강산이 되묻자, 승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 진심어린 말투로 볼 때, 승지는 정말 그렇게 여겼던 듯했다.
“우리도 말할 땐 무지 말해. 특히 누구 물먹이고 싶을 땐.”
“배잎새 이 자식아. 오늘 여기서 죽을래?!”
“뭐, 이런 애들이니까 막 떠들고 그러는 거지. 잡담 싫어하는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걸.”
“그렇구나.”
강산이 또 잎새를 덮치는 가운데, 별밤은 킬킬대며 저 둘 대신 그렇게 대답했다. 저 지치지도 않는 둘을 가만히 보며, 비상은 문득 의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게 하나 더 있는데.”
이번엔 현이 무척 궁금하단 듯 입을 떼어놓았다. 아까부터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단 표정이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어른들만 하는 얘기 할 줄 알았어.”
“풉!”
이 말에, 군청을 뺀 나머지 남성진들이 모두 뿜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 역시, 사레가 들른 바람에 가만히 켁켁대고 있었다. 이런 말이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니, 니들이 있는데 그딴 얘길 하겠냐?!”
“그래도 친구들끼리는 하잖아.”
“니, 니들 있을 땐 안 해. 수습하기도 힘들고.”
강산은 정말 당황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이걸 보면, 이 형도 이런 건 은근히 민망해하는 성격인 듯했다.
“어유. 이 친구가 가장 부끄럼타는 거 같은데. 안 그래?”
“시꺼!!”
잎새가 촐랑대며 그렇게 말하자, 강산은 또 잎새를 때리려들기 시작했다. 또 상황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이번엔 승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엉?”
“그, 남자분들은 컴퓨터에 이것저것…”
이 말을 듣자마자, 강산은 곧바로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방에 숨긴 듯한 모습이었다.
“만지지 마. 절대 만지지 마!”
“어유, 쟤 침대맡이나 한 번 뒤져볼까?”
“요즘 현물갖고있는 사람이 어딨냐?! 이 디지털 시대에…”
잎새가 놀리자, 강산은 얼른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지만 강산이 지금 당황하고 있단 건, 여기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럼 컴퓨터네. 같이 구경갈 사람?”
“잎새야. 같이 가자. 노다지네 이거. 아마 틀림없이…”
“이 망할 자식들아! 그래, 나 죽고 너 죽자!!”
별밤의 잎새의 뒤를 따르자, 강산은 마치 맛이라도 간 것처럼 이렇게 소리쳤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형들도 참 격하다니까. 참.”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근처에 있던 안주용 과자에 손을 댔다. 승지 및 현은 무척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대는 듯했다.
한편, 군청은 이런 상황에서도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너도 참 재미없는 놈이구나.”
“원래 이런 성격이라서요.”
니가 무슨 나라도 되니.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 난리를 가만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