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 비상은 꿈을 꿨다. 이번엔 천사가 나오는 게 아니라, 누가 제기를 차고있는 꿈이었다. 특이한 데가 있다면, 그 누군가가 차던 제기가 갑자기 분리되었다는 거였다.
옛날에 비슷한 걸 텔레비전에서 본 거 같은데.
일단 일어나긴 했지만, 비상조차 왜 이런 꿈을 꿨는지 알 수 없었다. 살다보니 참 별 꿈을 다 꾸게 되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연구소로 가기 위한 채비를 서둘렀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천사를 본 꿈 자체가 희한하긴 했지만.
이번에 꾼 꿈은, 그것과는 또 다른 방면으로 ‘희한한’ 꿈이었다.
“어, 비상이 아냐?”
그렇게 일이 끝나고 옥상으로 가던 중, 비상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별밤이었다. 아마 비상처럼, 이제야 일이 끝난 듯했다.
“형도 지금 끝나셨어요?”
“뭐, 그렇지.”
그렇게 둘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큰길을 같이 걸었다. 별밤과 알고 지낸 건 이제 꽤 오래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둘이 같이 옥상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연구원이라 했지. 컴퓨터를 주로 다루는 거니?”
“그렇죠.”
“어릴 적부터 컴퓨터 만지는 걸 좋아했어?”
“아버지가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를 사주셔서요.”
“아, 윈도 95?”
별밤이 잠시 생각한 뒤 그렇게 묻자, 비상은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런 질문은 여러 번 들었지만, 대답한 뒤 나오는 반응은 참으로 한결같았다.
“아뇨. 윈도 3.1이요.”
“정말이니?!”
역시나, 란 생각에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자기가 희한한 환경에서 자랐단 말이겠지만, 그래도 반응이 한결같은 건 어쩐지 우스워서였다.
“너희 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다. 도스도 아니고…그것도 니 나잇대에.”
“어릴 땐 그래서 컴퓨터 화면은 다 그래픽인 줄 알았어요.”
그 때 일을 떠올리며,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이 뒤에 도스도 만졌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렇게 옥상에 다다르자, 강산이 돗자리를 편 채 팔다리를 펴고 곤히 잠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그렇게 웃겼는지, 별밤은 옆으로 가더니 강산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야, 이 덩치야. 일어나. 밤이다.”
“뭐가 어쩌구저째?!”
참으로 귀가 밝은 강산이 이 말과 함께 벌떡 일어나자, 별밤은 뭐 재밌는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마치 남의 대문 벨을 몰래 누르고 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한 번 이러고 싶었거든. 무지 재밌는데?”
“이딴 걸 왜 하고싶어해, 이 자식아!”
강산이 열받거나 말거나, 별밤은 여전히 킬킬대고 있었다. 사실 둘 다 덩치인 건 틀림없었지만, 비상 역시 별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물론 자기가 하진 않겠지만.
“오늘 자는 걸 보면, 보나마나인가 보다?”
“보나마나라기보단, 결과가 너무 뻔해서 안 봐도 비디오인 거지. 웃길 테니까 난 볼 거지만. 야식 먹을 거냐?”
“어딨는데?”
그 말과 함께 강산이 일어나자, 별밤도 잘됐다는 듯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산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더니, 구석에 있던 짐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그 때, 소리도 없이 잎새가 나타나 비상 일행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마 난리를 치는 두 사람(과 비상)이 재밌는 듯했다.
“나라가 비탄에 빠졌는데 엎어져서 놀고 있다니. 이 놈들도 참…”
“어차피 우리나라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으이그 이 놈아. 나비효과란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냐?”
그 말과 함께, 잎새는 짐푸는 걸 옆에서 도왔다. 이걸 볼 때, 잎새도 야식이 뭔지 알고있는 것 같았다.
“신발. 남의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더 중요하지 뭐…”
그 말과 함께, 드디어 꾸러미를 다 푼 강산은 안에 있던 걸 밖으로 빼놓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건 드물게도 우유병에 든 흰 우유와, 동그랗게 생긴 흰 빵이었다. 비상의 짐작으로는, 아마 크림빵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형들이 사오는 거예요?”
상자 안에서 우수수 쏟아져나오는 야식들을 보며, 비상은 이렇게 말을 걸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상은 ‘놀이’에서 주어지는 야식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말 까랬지. 이 자식아.”
“나 참. 이런 것도 사오는 거냐고.”
잎새가 열받은 채 자기 목을 조르자, 비상은 결국 말을 바꿨다. 잎새는 자기 팔을 푼 뒤, 아주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투덜댔다.
“얜 진짜 목 조르는 보람이 없네. 재미가 없어. 아무튼 말하자면…”
“말하자면?”
“그것도 있고, 하늘에서 주는 것도 있고. 그런 거야.”
“하늘?”
“그래. 그 하늘.”
잎새는 묘한 표정으로,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비상은 바로 옆에 있는 우유와 빵을 가만히 집어들었다.
먼저 집어든 유리병엔, 지극히 모범적인 글씨체로 ‘하늘우유’라 적혀있었다.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에 가져다대니, 생각보다 꽤 괜찮은 맛이 났다. 비상은 우유를 그다지 자주 마시지 않았지만, 이건 어쩐지 무척 담백한 느낌이었다.
“우유 못 먹는 애들도 이건 잘 먹더라. 신기하게.”
별밤이 옆에서 거들자, 비상은 ‘알 거 같네요’라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말하면 좋을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태초부터 조상들이 먹었을 듯한 깔끔한 맛이었다. 이런 우유라면,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우유를 마시고 나서, 비상은 이제 바로 옆에 있는 빵봉투를 집어들었다. 포장지에 적힌 크림빵이란 말과 걸맞게, 희고 동그란 모양새였다. 포장지를 뜯은 뒤 한 입 베어무니,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담백하면서도 적절히 단 맛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특히 빵 반죽이 꽤 잘 되어있어서, 이 역시 태초에 조상들이 먹었을 법한 맛이었다. 물론 크림은 없었겠지만.
“하늘에서 이런 걸 잘도 만드네요.”
“우리도 그게 알고 싶다, 야.”
비상의 말에, 잎새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제 형들은 자기들이 사온 걸로 보이는 과자 및 음료수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연장자들이 마련한 것들이었다.
“형들은 이걸 사려고 돈 모으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얼마나 너희 연소자들을 사랑하는데.”
잎새는 그 말과 함께, 킬킬대며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잎새의 말에 따르면, 의영이 연장자들을 모아놓곤, ‘경제력이 있는 우리가 돈 좀 모아서 재밌게 놀아보자’라 말했다고 했다. 물론 다른 연소자들도 돈을 내지만(강산은 아직 대학생이므로 조금 낸다는 말도 곁들였다), 의영과 의지는 특히 많이 내는 듯했다.
“저도 일하는 사람인데 같이 하자 말하지 그랬어요.”
“이 자식이. 말 안 까?! 참다참다하니까 아까부터 자꾸…”
비상이 입을 떼자마자, 잎새는 이 말과 함께 비상을 때리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존대를 한 것치곤 희한하기 이를데없는 반응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말 안 깐다고 사람 패려드는 건 형밖에 없을 거 같은데.”
“시끄러. 난 그게 더 좋아.”
아무튼 잎새의 말에 따르면, 연소자들은 일을 하든 안 하든 닥치고 연장자들이 해주는 거나 받아먹으면 된다는 듯했다. 대체 어떤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편하리라 생각해서였다.
“잎새가 그러니까 비상이 니가 바다보다 넓은 마음으로 알아줘라. 알았지?”
“그럼 내 속이 좁다는 거야?!”
별밤이 거들듯 말하자, 잎새는 다시 화를 버럭 내기 시작했다. 한편, 강산은 이제 자기 일도 다 끝났다 여겼는지, 다시 돗자리에서 뒹굴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참 혼돈의 도가니인 모습이었다.
“어, 형들 계셨어요?”
그러던 와중, 뒤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처음 듣는 목소리에,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자식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서있었다. 강산과는 느낌이 무척 달랐지만, 어쩐지 엉뚱한 데서 사고 한 번 칠 듯한 인상이었다. 언뜻 봐도 자세히 봐도 풋내기였지만, 나쁜 놈이 아니란 건 비상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얘가 도진이다. 오늘 싸울 놈.”
비상이 이 친구와 처음 만났단 걸 알아챘는지, 잎새가 옆에서 대신 소개했다. 그 유명한 도진이란 놈이 얜가.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악수를 하려 손을 내밀었다.
“윤비상이라고 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 형이 그 전설의…”
“대체 뭐가 전설이야?”
“그, 허리펴기 힘들다는…”
그 말과 함께, 도진은 자기 등뼈를 가만히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이걸 보니, 지금 도진은 진짜 등뼈, 즉 허리가 아픈 듯했다.
“무슨 이런 소문이…”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비상은 도진과 악수를 나눴다. 해원만은 못하지만, 고등학생치곤 꽤 패기가 있는 악수였다. 자길 보면 허리가 아픈 듯했지만.
“그러고 보니, 전에 연장자 형들하고 얘기할 떈 안 계시던데요.”
“당연하지. 난 연소자니까.”
“진짜요?!”
“그럼, 이게 거짓말이겠니?”
도진이 눈까지 동그래지며 놀라자, 비상은 헛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젠 처음 보는 반응도 아니었다.
“올해로 스물여섯이니 연장자는 아니지. 안 그래?”
“아, 그럼 세림이 형이랑 동갑인데. 내가 왜 몰랐지?”
그 말을 듣자, 도진은 의아하단 듯 그렇게 중얼댔다. 아마 비상과 세림의 사이를 잘 모르는 듯했다. 물론 이걸 아는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지만, 비상은 그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이 뒤로, 붉은 밤 팀원들이 삼삼오오 옥상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어제 일을 잊기라도 했는지, 긴장이 확 풀린 모습이었다. 심지어 도진을 건드리며 ‘너한텐 기대 안 하니까 그냥 웃기고 와’라며 킬킬대는 연소자도 있었다. ‘암요. 형님…이 아니라 저도 이기고 싶은데요?!’라 도진은 말했지만, ‘그럼 잘 하든가’란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연소자에 관해 잘 모르는 비상의 눈엔, 그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 드디어 의영이 옥상에 나타났다. 의영만은 어제 일이 있어서인지, 그다지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형, 괜찮아?”
“너무 걱정마라. 그냥 기분이 좀 가라앉은 것뿐이니까.”
강산이 묻자, 의영은 그 말과 함께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마 어제 일로 혼자 고민이 많았던 듯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승지도 보이지 않았다. 의지의 말에 따르면 좀 늦는 듯했지만, 그래도 비상은 저 둘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둘이 같은 집에서 지낸다는 건 전에 들은 바 있어서였다.
“채비는 잘 했니?”
이렇게 사람들이 대충 다 보이자, 의영은 도진을 보며 이렇게 말을 걸었다. 도진은 좀 멋쩍은 듯 머리를 손으로 긁으며, 조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무척 어설퍼보이는 모습이었다.
“아, 암요. 형님.”
“야, 니가 그런 말하면 개판이란 뜻이잖아.”
“아니, 전 만날 당하는 역할이에요?!”
강산의 말에, 도진은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이번 생은 포기해. 이 자식아’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다들 이러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비상은 경기가 잘 보이는 난간에 등을 걸쳤다.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여전히 입고 있는 현도, 언제 왔는지 비상 옆에 가만히 자리잡고 있었다.
“현이 넌 저 애를 아니?”
저 너머를 가만히 보며, 비상은 현한테 말을 걸었다. 오늘 파란 밤과 싸운단 건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도진에 관해선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끔 봤어.”
그 말을 들으면, 현도 도진과 얘기한 적은 없는 듯했다. 한편, 이제야 나타난 승지는 도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지, ‘진짜 할 거야? 진짜?!’라며 놀라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경기가 시작될 때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
그 말이 들리자마자, 붉은 밤 남성진, 특히 연소자들이 벌떼처럼 난간 앞쪽으로 달라붙어선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 얼마나 웃기나 보자’란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면, 저게 정말 재밌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그건 지금껏 붉은 밤에서 본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누구나 ‘지는’ 걸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오히려 뒤에서 그걸 보는 비상이 더 어이없어질 지경이었다.
“넌 그냥 웃기고 와. 알았냐?”
그렇게 들뜬 연소자 무리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도진 쪽으로 그렇게 외쳐댔다. 비상은 그 목소리가 세림 것이란 걸 금방 알아챘다. ‘그 일’ 뒤로, 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상대인 파란 밤 선수는 연소자 남성이었는데, 무섭게도 큰 야구방망이를 무기로 쓰고 있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선한 느낌이었지만, 무기는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도진 역시 호주머니에서 자기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그건 크기가 늘어났다 줄었다하는 대걸레였다. 아마 아까까진 죽 ‘접은’ 채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듯했다. 물론 대걸레라곤 했지만, 실제 물건처럼 ‘냄새’가 나는 건 아니라고 옆에 있던 강산이 덧붙였다. 오히려 자기 손보다 더 깨끗한 거 같더란 말과 함께.
“형은 언제 이리로 온 거야?”
“연소자들이 하도 난리쳐서 그렇지. 쟤들이 무슨 죄수냐. 암튼 그러니까 막 써도 되는 무기야, 저건.”
크기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그 대걸레를 보며, 비상은 도진이 저걸 잘 다룰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갑자기 어제 금빛 밤을 떠올렸다. 어제 있던 그 말대로라면, 틀림없이 금빛 밤에도 패널티가 갔을 터였다. 오늘은 금빛 밤 대 파란 밤의 경기도 있었기에, 비상은 그네들이 항상 모이던 옥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뜻 보기에, 그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어보였다. 하지만 옥상을 찬찬히 보던 비상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저 쪽 옥상 구석에, 어제 의영한테 도발한 연소자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심지어 나이도 대략 비슷하게 보이는 여성이 아주 불만에 찬 표정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 모습은, 둘이 남매라도 되는 것처럼 꼭 닮아있었다. 어제 처음 본 다른 팀 연소자를 그만큼 기억하고 있었단 사실에도 비상은 스스로 놀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패널티가,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만약 그렇다면 자기가 받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설마 더 큰 차이라도 있는 건가. 비상은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자기가 이렇게 혼자 생각한다 한들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경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진의 자세는 엉거주춤하기 이를 데없었다. 얼마나 자세가 엉거주춤한지, ‘나 좀 잡아줍셔’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강산은 그걸 보자마자, 마치 경기가 끝난 것처럼 미친 듯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저건 이미 웃기려는 몸짓이야. 자세 봐. 폼이 그렇잖아.”
“오늘은 그런 날이야?”
“현이 너도 가만히 봐라. 저게 니 동갑내기가 싸우는 모습이다.”
그 때, 상대방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진도 거기에 맞서 자기 무기인 대걸레를 휘둘렀지만, 갑자기 일이 터졌다. 손에 땀이 배어서인지 어떤지, 쥐고 있던 대걸레가 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간 것이다.
물론 도진은 땀에 젖은 손으로 얼른 자기 무기를 다시 집어들었지만, 그 틈을 파란 밤이 놓칠 리 없었다.
“으악!”
당연한 일이지만, 도진이 무기를 잡으려 굽힌 허리를 파란 밤 쪽에서 야구방망이로 시원하게 쳤기 때문에(어디선가 ‘풀스윙이네’란 말이 나왔다), 주위에서는 온갖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 시점에서 앞에 있는 연소자들은 웃겨죽겠다는 듯 난간을 부여잡은 채 낄낄대고 있었다. 심지어 ‘안 엎어지길 잘 했다’란 말도 나올 지경이었다.
“저 놈은 그냥 개그맨을 하는 게 빨라. 아무튼.”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도진은 등뼈를 부여잡으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큰 몸짓으로 대걸레를 빙빙 휘두르며, 상대방을 겁주려 했다. 그런데 이 때, 또 예기치못한 일이 터졌다. 대체 뭘 어떻게 휘둘렀는지, 대걸레 윗부분, 즉 ‘걸레’가 옥상 바닥에 툭 떨어진 것이다. 물론, 도진이 일부러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다들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는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1초, 2초, 3초…
“크하하하하하하!!”
잠시 멍하니 있던 연소자들은, 갑자기 난간에 쓰러진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장관인 웃음소리였다. 이번엔 붉은 밤은 물론, 다른 밤에서도 폭소가 터져나왔다. 참으로 붉은 밤의 품격이 높아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이게 무슨 제기분리도 아니고 뭐냐?!”
강산이 소리지르거나 말거나, 도진은 어떻게든 그 분리된 걸레를 다시 붙이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왜 일어났는지 모를 일이 터졌다. 도진의 발걸음이 갑자기 꼬이더니, 그 자리에서 ‘자기가 쥐던 대걸레자루’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젠 연소자는 물론, 연장자조차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고 있었다. 심지어 옆에 있던 강산은 눈물조차 흘리고 있었다.
“저 놈 다리는 그냥 걷는 데만 쓰는 거네. 놀 때 쓰는 게 아니라…”
“그게 다리야?”
“다리는 다리지. 보행용이지만. 크하하…”
“강산아. 그만 좀 웃어라. 니가 더 웃겨. 나 지금 다리에 힘 풀린 거 안 보이냐?”
이미 쓰러져서 웃고 있던 별밤은, 온힘을 다해 난간을 잡고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웃음기가 덜 빠져나갔는지, 여전히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거랑 아주 비슷한 광경을 얼마 전에 본 거 같은데…진짜 얼마 전에…푸하하…”
별밤의 그 말에, 비상은 자기가 꾼 꿈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자기 꿈에서도 누가 차던 제기가 갑자기 분리되었다. 이 둘이 어떤 관계까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상은 이게 우연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상대방인 파란 밤 연소자도 낄낄대며 웃다가, 이제야 상황을 알아챘는지 도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도진의 다리 틈에, 자기 야구방망이를 꽉 쑤셔넣었다.
“아, 아아아, 으아악! 사람 살려!! 나 죽어, 진짜로!!!”
이젠 다들 승패고 뭐고 상관없단 듯, 배가 터져라 웃고 있었다. 비상도 이 장면이 그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강산은 정신이 좀 남아있었는지, 도진 쪽으로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신발. 현실이 뭐, 리얼 버라이어티냐?!”
하지만 강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한참 늦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붉은 밤의 주장이자 어제 일로 마음이 복잡할 의영 역시, 난간에 엎어진 채 낄낄대고 있었다. 이제 이 분위기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게 현실이면 상상은 필요도 없겠네. 현실이 더 웃긴데…”
“야, 이별밤. 이건 초현실 아니냐?!”
아까처럼 별밤이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자, 잎새가 딴죽을 걸었다. 하지만 잎새 역시 웃고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잎새는, 아예 콧물까지 흘리며 죽을 만큼 킬킬대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재밌단 말이잖아. 쟬 보면. 아 진짜…”
이젠 붉은 밤에서 웃는 이보다 안 웃는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이렇게 말하는 강산조차, 한동안 몸을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결과를 생각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조차 예능처럼 느껴져, 비상 역시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만!”
웃다가 지쳐서 저 쪽에서도 판단이 늦었는지, 이제야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이젠 다들 너무 웃겨서 탈수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덕택에 구석에 있던 에너지드링크는 순식간에 동나고 말았다. ‘이야, 오늘 제대로 웃긴 거 하나 봤다’란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인 도진 역시 페트병째로 에너지드링크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물론 이건 웃겨죽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진짜로 지쳐서 그런 거겠지만.
“그래, 너도 저기서 웃기느라 힘들었겠지. 이 자식아.”
“쿠, 쿨럭!!”
강산이 저 너머에 있는 도진 쪽으로 그렇게 외치자, 도진은 사레라도 든 듯 연신 기침을 해댔다. 아마 강산의 말이 자기 정곡을 단단히 찌른 듯했다.
“가, 강산이 형, 지금 그런 말하면 안 되죠!”
“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
강산이 이렇게 맞받아치자, 도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서인지 그대로 자리를 떴다. 이 대화조차 웃겼는지, 주위에서 다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도진을 우습게 본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였다.
어쨌든 경기가 끝난 지 어느 정도 지났는데도, 다들 여전히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붉은 밤이 오늘 이긴 것 같았다. 비상도 어이가 없어서, 그걸 가만히 보다가 입을 뗐다.
“우린 참 해학의 민족인 거 같은데. 이걸 보면.”
“이럴 때도 잘난 말만 쓰고, 저 놈을 그냥 확.”
“내가 잘못 말했어?”
강산이 열받는다는 듯 주먹을 내밀자, 비상은 그 말과 함께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정말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다들 붉은 밤이 진 것보다, 아까 ‘그걸’ 본 게 훨씬 중요하단 눈치였다. 그게 진 경기인데도.
“‘근데 그건 왜 떨어진 거냐?”
아무튼 드디어 상황이 정리되려 하자, 강산은 도진한테 그렇게 물었다. 당사자인 도진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몰라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예능신이네. 예능신이 강림한 거네. 무조건 그거다. 크하하.”
“야, 이강산. 이게 예능이냐? 현실이지. 푸하하하…”
옆에 있던 잎새는 그 말과 함께, 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걸 계기로, 또 주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별밤 역시 난간에 겨우 팔을 괸 채, 자리에 서선 이런 말을 꺼냈다.
“역시 현실이 더 버라이어티하다. 그지?”
“우리 현실도 보통이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을까?”
그 말과 함께, 의영은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이것만 보면, 어제 일은 마치 없던 게 된 것 같았다. 승지는 이제 도진이 갖고 있던 무기, 즉 대걸레를 점검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무기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한편, 이런 상황에서 배를 잡고 웃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현은, 그저 ‘오오’란 말과 함께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비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 아이는 참 신기한 데가 있었다. 이렇게 서로 알고 지냈는데도.
그렇게 다들, 영문을 모를 축제분위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저, 저 사람 뭐야?!”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길 보자, 의영이 누군가한테 멱살을 잡혀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상대방은 비상이 아까 본, 금빛 밤 쪽 여성이었다. 의영도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바로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여성을 더 화나게 만든 듯했다.
“다 댁 때문이야!”
이 어두운 밤에, 여성의 높은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덕택에 붉은 밤은 물론, 다른 밤도 이 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강산이 막아야겠다 여겼는지 움직이려 하자, 별밤이 강산의 팔을 꽉 붙잡았다. 어쩐지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야, 왜 막아?!”
“일단 들어보자. 그 다음 얘기해도 늦지 않지. 안 그래?”
별밤의 말이 맞다 느꼈는지, 강산은 그 뒤로 잠자코 있었다. 한편, 의영은 이제야 모든 걸 알았다는 듯,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여성을 바라봤다.
“그게 패널티인가?”
그 표정으로 볼 때, 의영은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여성을 바라보는 눈빛으로도, 지금 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이 망할 미친 개야!”
그렇게 외친 뒤, 여성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빠른 말투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일어나서 이런 모습이 됐는데, 그런 건 둘째치고 어이없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같은 처지인 비상 및 현과 달리, 언제까지고 저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심지어 주위사람은 물론, 부모님조차 자기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인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듯했다.
이 말을 듣자, 붉은 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이 ‘놀이’를 하는 이들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있다는 거였다. 이걸 다행이라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이걸로 끝인 줄 알아? 나도 사귀는 얘가 있단 말이야. 오늘 만나러 갔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기나 해?! 날 그냥 친구로 봤단 말이야. 그것도 조금 친한 동성친구. 그 때 내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아냐고!”
“알 리가 없지. 그건 다 니 잘못이잖아. 안 그런가?”
“이 자식이, 내, 내가 오늘 얼마나 굴욕을 겪었는지 알아? 다 댁 때문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여성, 아니 어제 그 연소자는 의영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쳐댔다. 하지만 아까처럼, 의영은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놀이가 끝나면 정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지금은 받아들여라. 이 자식아.”
“뭐라고?!”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댁 아니었던가? 우리도 댁 덕택에 지게 됐으니, 그 쪽도 패널티를 받아들여야지.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의영이 이렇게 말하자, 연소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금빛 밤 쪽으로 휙 날아갔다. 멀리서, 연소자가 금빛 밤 주장인 해원을 붙잡고 ‘저게 무슨 소리야?!’라 목소리를 높이는 게 보였다. 얼마나 목소리가 크던지, 붉은 밤 쪽에서도 다 들릴 정도였다. 해원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의영이 형 말대로야.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인마’라며 연소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작작 하라고 그랬잖아. 그런 짓하면 니만 당한다고. 아무튼 너도 참…”
“이런 젠장!!”
그 말과 함께, 금빛 밤 연소자는 다시 구석으로 사라졌다. 잠시동안, 다들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하니 서있었다. 비상 역시, 뭐에 씌인 듯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영이 형 말이 맞긴 하구나.”
한참 뒤, 드디어 강산이 먼저 입을 떼어놓았다. 다른 이들도 그 말이 맞다 여기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아무리 상대가 도발한다 한들 먼저 때리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무기로 공격해야 돼. 알았지?”
“그런 식으로 맞지 않도록 먼저 도발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저 자식 보면…”
그 말을 듣자, 여기저기서 뿜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분위기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잎새는 그제야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튼 오늘은 참 드라마틱하다, 참.”
“그러게요. 누구 때문에…”
대한은 그 말에 맞장구치며, 저 너머에 있는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은 또 이 이야기로 접어들었단 걸 깨달았는지, 곧장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그만 좀 괴롭히세요. 좀! 저도 사람인데…”
하지만 물론, 그 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이야기는 오늘 도진의 예능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도진이 어쩔 줄 모르는 걸 보며, 멀찍이 있던 잎새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야, 김도진. 연장자놈들 참 더럽다 생각하고 있지?”
“제 체력은 이미 지층을 뚫고 들어가고 있어요…”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겠지. 니 놈은.”
저 형이 자기한테 반말하는 연소자를 그냥 내버려두다니. 좀 희한한 일인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비상이었지만, 지금 꼭 그걸 물어볼 것까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비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도진이 울상짓거나 말거나, 오늘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이렇게 끝났다. 즐거운 일도 갑작스런 일도 있었지만, 붉은 밤의 6월은 이렇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