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22. ‘미친 개’의 재림

다음 날, 약속한 옥상으로 가려던 비상은 우연히 현과 맞닥뜨렸다. 공교롭게도, 지금 비상과 현은 둘 다 ‘다른 모습’인 상태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현의 등 뒤로 큰 슈퍼가 보이는 걸 알아챈 뒤, 비상은 이렇게 말을 걸었다. 가만히 보면, 현의 양손엔 묵직한 짐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방금 장을 보고 나온 듯했다.
“이런 모습일 때 많이 사두려고.”
현의 말로 볼 때, 아마 오늘처럼 힘을 쓸 수 있는 날엔 사야할 물건들을 자기 힘으로 들 수 있으니까 이런 모습으로 장을 보러왔다는 말인 듯했다. 실제로 지금 현의 양손에 들린 봉투는, 도무지 10대 후반 여자애가 들 수 없어보일 만큼 무거워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현이 들고 있는 짐은 도무지 ‘한 사람’이 다 들고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팔목에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이런 모습이라 한들 현한텐 이 짐이 무거운 듯했다.
그래서, 비상은 입을 뗐다.
“하나 들어줄까?”
“괜찮아. 이런 모습이니까 혼자 다 들 수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역시 혼자서는 그걸 다 들고가기 힘든 게 틀림없었다. 비상도 저만한 짐을 혼자 다 들고가려면 굉장히 힘들 테니까.
“힘들면 내가 하나 들게. 괜찮아. 자.”
“지금 나라면 괜찮을 거래도.”
비상은 어쩐지, 왜 현이 고집을 부리는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자기보다 키가 큰 현은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들 수 있단 건 중요한 게 아냐. 힘들면 같이 나눠야지. 지금 네가 나보다 힘은 더 있을지 몰라도, 지금 힘들어하는 건 맞잖아.”
“…괜찮아?”
“그 정도라면 들 수 있어. 팔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말과 함께, 비상은 현의 오른쪽에 있는 짐을 가만히 들었다. 현은 뭔가 깨닫기라도 했는지, ‘그렇구나…’라 중얼대며 자기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면 보통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긴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현의 뒤를 가만히 따라갔다. 이 아이는 평소에 어떤 식으로 장을 볼까, 란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어유. 우리 엘리트님 오셨네.”
그 일 뒤 옥상으로 가자, 당연하단 듯 강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비상은 여기에 오는 도중 원래대로 돌아간 참이었다. 이걸 보면, 하늘은 모든 걸 알고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야. 이 형은.”
“야. 너도 수학문제 같은 거 풀면 쾌감느끼고 그러냐?”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 말과 함께 비상이 곁으로 다가가자, 강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상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비상이 못할 말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젠장. 이과 망했으면…”
“웬 뜬금없는 소리야. 어차피 형은 문과일 거 아냐.”
“내가 수학 못하는 게 불만이냐?!”
“아무튼 형은 건강해보이니 됐네.”
그 말과 함께, 비상은 강산처럼 난간에 등을 기댔다. 아까 ‘다른 모습’으로 좀 무거운 짐을 들어서인지, 원래대로 돌아온 지금도 몸이 뻐근했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야, 왜 힘이 없어보여?”
강산이 이상하단 듯 묻자, 비상은 방금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사실 비상이 지금 가장 놀라고 있는 건 저 형이 문과란 걸 맞춘 거였지만(짐작해서 찍은 것일 뿐이므로), 강산은 이제 그런 건 다 잊어버렸단 표정이었다.
“그래. 세상은 공평해야지. 암.”
“표정이 아주 좋아보이는데?”
“뭐, 너랑 내가 같은 존재란 걸 알겠는데 기분나쁠 리가 있겠냐?”
그런 말과 함께, 강산은 비상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솔직히 니도 힘들 땐 있겠지.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그런 건 있을 거 아냐. 괜히 혼자 고민하고.”
“오히려 그런 걱정할 일도 없을 테니 잘난 놈이라 생각하는 거 아냐?”
“내가 미쳤냐?!”
비상의 말에, 강산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정말 의외라 여기는 듯했다.
“아무리 니같은 엘리트라도 니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 그런 게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어유. 내가 아는 형이랑 다른데.”
“나 그런 거 갖고 열등감갖는 사람 아니다. 잘난 놈 끌어내려서 어떻하게. 같이 불행해지자고? ‘나는 불행합니다’ 자랑이나 떠들어대는 것보단 다같이 즐겁게 사는 게 낫지 않겠냐?”
“정말 의왼데. 미안하지만.”
“시끄러. 난 그런 마음이야.”
그 말과 함께, 강산은 비상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무척 민망한 말이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저 형도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강산한테도 열등감은 있을 터였다. 그건 전에 강산의 형, 강철을 만났을 때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형은,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자길 놀려대긴 하지만, 그래도 비상을 다른 누구보다 진지하게 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주위를 보니, 의영이 복잡한 표정으로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치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겠지만, 비상의 눈에, 지금 의영은 ‘경기에 나가는’ 것치곤 너무 진지하게 보였다.
“오늘 누구랑 하는 거야?”
“금빛 밤.”
강산의 대답은 평소와 달리 무척 짧았다. 이걸 볼 때, 강산 역시 비상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비상이 그렇게 여기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러던 와중에도, 붉은 밤 멤버들은 한둘씩 옥상에 모이고 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의 눈에, 조금 특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여전히 ‘다른 모습’인 현이, 승지와 저 쪽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떨어져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둘 다 진지하단 건 틀림없었다.
그 둘을 보던 비상은, 의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승지가 현한테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뒤, 승지는 현의 어깨(라기보다, 지금은 ‘몸’)에 몸을 기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결국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둘이 친해졌단 것 하나는 틀림없었다.
그렇게 슬슬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 되자, 다들 여기저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상도, 이제 저만치 있는 강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소자들 무리를 지나갈 때쯤 전에 만난 주세림이란 사람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비상은 모른 척했다. 세림 역시, 전과 달리 비상한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금빛 밤 중 누구야?”
다가가서 묻자, 강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도, 평소와 달리 매우 좋지 않았다.
“어린 연소잔데, 소문이 좋은 애가 아니라서…형도 괜찮을까 몰라.”
“소문이 좋지 않다니, 질이 나쁘단 말이야?”
“어린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는 말을 듣는다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버릇이 없어. 사람 대할 때 있어야 할 예의가 없다고.”
그렇게 투덜대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형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다지 좋은 상대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의영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처럼 저 너머만 바라볼 뿐이었다. 일단 오늘도 야식이 들어왔지만, 집어드는 사람은 놀랄만큼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비상은 자기 옆에 아직 ‘바뀐 모습’인 현이 서있단 걸 깨달았다. 왜 이제 깨달았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비상은 가만히 이렇게 물었다.
“아까 승지랑 얘기했니?”
현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비상은 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관해선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승지랑 친해졌구나.”
“아마 그런 거 같아.”
현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그걸 보면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의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도움이 됐다면 좋겠는데.”
“시작!”
현이 그렇게 다시 입을 떼자마자, 그런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오늘의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의영은 자기 무기인 낫을 든 채, 너머에 있는 금빛 밤 연소자와 마주보고 있었다. 상대방 연소자의 무기는, 여기선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의영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소자 역시, 재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의영이 그 쪽으로 낫을 던지고 나서야, 비상은 상대방의 무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은 그럭저럭 굵기가 있는 철봉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낫도 섬뜩한 무기이긴 하지만, 철봉의 임팩트와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상은 이제야, 아까 강산이 말한 ‘어린 놈이 날뛴다’는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무기를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옆에 있던 강산이 입을 떼어놓았다.
“의영이 형이랑 한잔할 때 들었는데.”
그 말은, 지금껏 비상이 봐왔던 ‘회사원’ 의영과 달리, 첫 날 만났던 바로 그 ‘의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강산은 의영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했기에, 따로 연락해서 술도 마시곤 했다고 했다. 물론, 강산이라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역시 친해지고 싶은 사람하고는 술을 마셔야지. 안 그러냐?”
“참 형같네.”
“그거 칭찬이냐?!”
물론, 그러던 도중에도 경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상대방은 의영의 낫을 철봉으로 막아내고서, 의영 쪽으로 철봉을 ‘발사’했다. 물론, 의영은 이걸 재빠르게 피했다. 전엔 몰랐지만, 이렇게 보면 의영은 30대에 막 접어든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다. 언뜻 보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도.
그러던 중에도, 강산의 말은 이어졌다.
“의영이 형이 지금은 얌전해보이는데, 학생시절엔 그렇지도 않았나 봐. 뭐,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못 믿을 것도 아니지만.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땐, 완전히 늑대 한 마리나 마찬가지였다더라. 자기가 하고싶어서 그랬던 건 아닌데, 싸움도 좀 많이 했대. 원래 자기가 욱하는 성격이라고. 남한테 무시당하면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고.”
이제 둘은, 어떤 옥상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의영이 낫을 내던지면, 남자가 철봉으로 받아치는 식이었다. 워낙 둘이 공격을 주고받는 게 빨라서, 천사가 준 힘이 있는데도 눈으로 쫓기 벅찰 정도였다. 저 멀리선 ‘어지러워서 못 보겠다. 진짜’란 말도 나오고 있었다.
그 때, 강산이 말을 바꿨다.
“아니, 늑대라 말하긴 좀 그렇고.”
둘의 눈은 온통 경기에 쏠려있었다. 지금 둘한테 중요한 건 의영의 경기였다. 비상은 물론, 강산 역시 그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형 말대로 하자면 대충 이랬단다. ‘미친 개’라고.”
그 때, 비상은 둘의 경기가 조금 달라졌단 걸 깨달았다. ‘그’ 의영이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전세가 역전되어 있었다. 물론, 의영을 몰아넣는 건 철봉을 휘두르는 금빛 밤의 연소자였다.
하지만 의영은 그렇게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침착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의영은 순식간에 몰려있던 구석에서 낫을 휘두르며, 상대인 금빛 밤 연소자를 밀어붙였다. 아까 구석에 몰려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감한 모습이었다. 붉은 밤 여기저기서도 큰 탄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남자 역시 여기서 반격당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암튼 우리 형이라니까.”
그런 말과 함께, 강산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형이 저렇게 보이긴 하지만, 한 번 빡돌면 장난 아니었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 자기가 말하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겠지. 원래 누가 도발하면 못 참는 성격이었나 봐. 뭐, 예를 들면 지금처럼…”
아니나다를까, 눈앞에선 꽤 살벌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의영이 상대를 바닥까지 몰아붙여서, 낫으로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엔 금빛 밤도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비상은 저 너머에서 승지가, 의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단 걸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승지는 형하고 언제부터 같이 지낸 거야?”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었는데, 20대 중반부터라 하더라고. 그 때부터 승지는 친구들하고 밖에 있을 때가 많아서 말할 기회는 없었대. 형도 일하느라 바쁘고. 그러다보니 서먹해진 거지 뭐.”
강산의 답을 들은 뒤, 비상은 승지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지금 승지는 어떤 마음으로 ‘오빠’의 경기를 보고 있을까. 비상은 그게 자꾸 신경쓰였다. 어쩐지 강산 역시, 그런 눈빛으로 승지를 보고있는 것 같았다.
“형은 의영이 형하고 얼마나 얘기한 거야?”
“술을 마시는데 못할 얘기가 뭐 있냐. 이야기 많이 들었다. 지금 니한테 말하기 어려운 것도.”
그렇게 말한 뒤, 강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형도 나만큼 술을 좋아하는 거 같더라.”
“그래?”
“내가 술 한 잔 하자고 하니까, ‘너도 참 대담하다’라면서 킬킬대더라고. ‘너도 술 없인 못 사는 성격이지?’란 말도 들었다. 당연히 그렇다 말했지.”
그러던 도중에도, 경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의영은 이제, 상대를 바닥에 눕힌 채 낫으로 갈기려 하고 있었다. 물론 밑등 쪽이긴 하지만, 그래도 과감한 공격인 건 틀림없었다.
그 때, 연소자가 피식 웃었다. 마치 ‘지금’을 기다린 것처럼.
“역시 댁도 우리랑 똑같은 수준이네. 점잖은 척하지만 원래 좀 맛갔단 말 들었지? 눈빛만 봐도 알겠다, 야.”
이 말에, 두 밤 다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특히 붉은 밤에선 ‘우리 도발하냐?’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들 영문을 모르는 가운데, 비상은 의영의 눈빛이 아까와 달라졌단 걸 알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누운 연소자는 무서운 것 하나 없단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댁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생각했다. 틀림없이 저 사람은 뭔가 숨기고 있다고. 그거야 뭘 숨겼는지는 안 봐도 뻔하지. 미친 개 아니겠어. 그지?”
이 말에, 의영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저 남자는 아직, 의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만약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나올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열받지? 화나지? 근데 말로 못 하겠지? 내가 댁에 관해서 많이 아는 건 아냐. 그치만 이건 말할 수 있겠네. 자기 본성 드러내기 무서워하는 겁쟁이. 얌전한 척 빼는 미친 놈…”
거기까지 말하다,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의영이 ‘맨손으로’ 자기 얼굴에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잠시동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들리던 밤의 소리도, 지금은 아득하다 못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내가 미친 개인데 니가 보태준 거 있냐?”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이제 상대방의 몸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이미 분위기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데까지 흘러가있었다. 애초에 눈빛부터 ‘평소’ 의영과는 크게 달랐다. 저건 누가 봐도, 정말 머리끝까지 화났단 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비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정말로 ‘미친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이의 눈엔, 그야말로 이중인격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평소의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의영의 표정과는 달라도 너무 크게 달랐으니까.
이젠 ‘놀이’고 뭐고, 경기는 아예 ‘싸움질’로 바뀌어있었다. 일단 말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떻게 말려야 할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의영은 이제 아무 것도 안 보이는지, 아예 발로 상대방을 차고 있었다. 당연히 누워있는 상대방은 반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신나게 웃고 있었다.
“거봐라. 미친 개네. 크하하.”
“이 자식이, 아직도 입만 살아선…”
이제 둘 중 누가 미쳤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상황은 복잡해져있었다. 뭔가 해야 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때,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승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승지는 손을 떨면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숨이 막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승지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비상의 머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정말로 승지는 거기에 관해 알고 있었을까. 자기 오빠가 자기만할 때, 어떤 식으로 지내고 있었는지를.
그러거나 말거나, 의영의 일방적 공격, 아니 폭행은 이어지고 있었다. 의영은 지금, 정말로 ‘빡돈’ 것이 틀림없었다. 강산의 말을 빌리자면, ‘맛이 가도 단단히 간’ 모습이었다.
“일어나. 넌 그럴 만한 깡도 없냐? 남을 이렇게 미친 개로 만들고, 자기 혼자 즐겁다 이거지?”
이제 의영은, 그런 말과 함께 상대방의 뺨을 갈겨댔다. 상대는 이제야 슬슬 무서워졌는지, 이런 말과 함께 발을 빼려들었다.
“그만 하자고. 니가 미친 개란 건 알았으니까…”
“일어나, 이 자식아. 일어나라고!!”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상대방의 배를 다시 발로 찼다. 이젠 정말 말릴 수 없는 분위기였다. 비록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었지만.
그 때, 비상은 상록이 저 쪽으로 ‘뛰어가는’ 걸 봤다. 아마 자기라도 이 상황을 막아야겠다 마음먹은 듯했다. 상록은 옥상에 내려앉자마자, 둘을 거칠게 떼어놓았다. 힘에 좀 부친 것같긴 했지만, 상록은 간신히 둘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일단 진정 좀 하시죠.”
“하지만…”
“그만!!”
그걸 보던 해원이, 이제야 떠올렸단 듯 그렇게 외쳤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 말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훨씬 전에 나와야 했던 말이, 이제야 터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진정되자(의영은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지만), 붉은 밤 팀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 쪽으로 뛰어갔다. 물론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의영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형, 괜찮아?”
의영을 둘러싼 채, 연소자든 연장자든 누구나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댔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까 그 순간은 격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
“이 손 놔. 저 자식을 어떻게든 해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의영은 자기도 힘이 부쳤는지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멀리서 봐도 참으로 허탈해보였다. 금빛 밤 쪽에서도 상대방 쪽으로 날아간 뒤, ‘넌 왜 헛소리를 해서 매를 버냐’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제대로 두들겨맞았는지, 상당히 비틀대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튼 형도, 나이를 생각해야지. 참.”
“그건 알겠는데, 머리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강산이 항상 그렇듯 농담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자, 의영은 그 말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누가 봐도, 방금 한 짓을 후회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뭐, 아직 젊단 말 아니겠어? 그건 잘 됐네. 그건 그렇고…”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주위에 있던 팀원들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같은 말로 의영을 위로하고 있었다. 지금 붉은 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이 놀이에서 ‘물리적으로’ 상대방을 때린 게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근데 이중인격은 맞네. 아깐 진짜 미친 개더라.”
그 때, 금빛 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목소리를 볼 때,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연소자가 틀림없었다. 해원은 이걸 알아채곤, 재빨리 ‘더 이상 붉은 밤한테 싸움걸면 가만 안 둔다’라 선수를 쳤다. 이 말을 듣자, 연소자의 말도 잦아들었다.
이 말로 의영이 다시 화가 났는지 주먹을 불끈 쥐는 바람에, 다들 ‘진정해. 형’이라며 의영을 말리려들었다. 아까는 농담이라도 꺼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의영을 위로하는 무리 중 승지가 보이지 않았다. 비상이 저너머를 보자, 거기엔 가만히 이 쪽을 보는 승지가 있었다. 승지는 마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기 ‘오빠’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무척 보고싶지 않은 것을 어쩌다 보기라도 한 듯이.
그걸 보자, 비상은 자기 마음이 더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상록은 해원과 함께 구석에서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마 지금처럼 ‘예외’에 가까운 상황에선 어쩌면 좋을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형은 어떻게 될 거 같아?”
“뭐, 아마도…”
비상의 물음에, 강산은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다. 어쩐지, 그 말투로 보면 붉은 밤이 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잠시 뒤, 상록이 두 팀 쪽으로 날아왔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인지, 여러 모로 복잡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럴 땐 어쩌면 좋을지, 방금 금빛 밤 주장과 이야기했습니다만…”
상록은 그렇게 입을 떼어놓았다. 지금, 모든 팀, 심지어 파란 밤조차도 상록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놀이’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격을 하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봐줄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경기는, 일단 붉은 밤이 진 걸로 하겠습니다.”
잠시 동안, 누구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건 붉은 밤이 ‘진 걸로’ 판정받아서가 아니었다. 상록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단 걸,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붉은 밤 쪽에서 물리적 공격을 한 건, 금빛 밤 쪽 도발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금빛 밤 쪽엔 패널티를 하나 주려 합니다. 어떤 패널티인지는 내일 알게 될 겁니다. 이상입니다.”
상록의 말이 끝나자,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이번 판정 때문이었다. 금빛 밤이든 붉은 밤이든, 이 판정에 관해선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미안하다.”
의영은 자기 탓이라 여겼는지, 이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듣자, 다들 의영의 주위를 둘러싸며 ‘괜찮아’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 표정에서 ‘저 형 때문에 졌다’는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패널티인지 봐야겠는데 이건. 대체 얼마나 심하기에 우리만 져야되는 거야?”
강산이 어이없단 듯 그렇게 말하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판정은 붉은 밤 이전에 금빛 밤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금빛 밤이 더 유리하지 않냐?”
“아냐. 아마 우리랑 동등할 거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의영은 그렇게 말을 딱 잘랐다. 마치 짚이는 게 있다는 눈치였다. 다들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불만을 가지는 걸 그만뒀다.
이러던 와중, 금빛 밤의 주장인 해원이 붉은 밤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리고는 정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의영한테 고개를 숙였다.
“저희 쪽 연소자가 잠깐 미쳐서요. 죄송합니다.”
“아냐. 거기까지 네가 관리할 순 없지.”
“앞으로 제가 단단히 일러둘게요. 뭐, 내일 후회하겠지만…”
“너한테 사과받을 건 없다. 오늘은 나도 잘못했고.”
해원의 사과에, 의영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되나 다들 걱정하던 경기였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래도 내일은 도진이 아니냐?”
한편, 뒤쪽에선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 올리는 덴 좋겠네. 또 지겠지만.”
그런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비상은 승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지는 이제 아예 자기 몸을 난간에 맡긴 것 같았다. 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상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이러려던 건 아닌데.”
비상의 바로 옆에서, 의영이 그렇게 중얼대는 게 들렸다. 비상은 어쩐지, 지금 의영이 승지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승지 나이일 때, 미친 개였던 건 맞아. 괜히 열받아서 자주 싸우곤 했거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거기까지 말하다가, 의영은 자기 옆에 있던 사람이 비상이란 걸 비로소 알아챈 듯했다. 의영은 멋쩍은 표정으로 눈길을 잠시 돌린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승지와 같은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승지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승지도 이걸로만 형을 판단하진 않을 거예요.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상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늘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한없이 깊은 그 밤하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