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비상은 늦게나마 간신히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큰비를 뚫고 집에 왔는데도, 신기하게 옷은 거의 젖지 않았다. 물론 놀이가 끝나 돌아가는 길부터는 조금씩 젖기 시작했지만, 아까 그렇게 ‘하늘을’ 돌아다녔단 생각을 하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무나 몸이 피곤해져서, 비상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안경은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안경집을 찾던 비상은, 누가 자기한테 전화를 걸었단 걸 깨달았다. 얼른 확인해 보니, 그건 파랑이 형이었다.
“몸은 괜찮아?”
“자고 나면 괜찮겠죠. 뭘.”
파랑은 비상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그런 말과 함께 걱정해줬다. 아마 전부터 그게 궁금해서 견디지 못했던 듯했다.
“내일이 쉬는 날이라서 다행이다.”
그 말에, 비상은 내일이 일요일이란 걸 떠올렸다. 그나마 쉴 수 있겠는데. 비상도 오늘만은 아무 생각없이 푹 쉬고 싶었다.
“나도 비상이 경기 보고 있었는데, 그런 걸 보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말하려 했어. 내 생일에 그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
“그 경기가요?”
사실, 비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자기는 그다지 대단한 경기라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파랑이 이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럼, 가로등 가르는 대목에서 감탄 안 한 사람이 없었는 걸. 그럼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파랑은 전화를 끊었다. 비상은 안경집에 안경을 넣은 뒤, 잠시 동안 침대 위에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형과 내일 만날 일이 있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파랑이 자길 걱정하고 있었단 걸 알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쩐지 지금은 아까보다 덜 피곤한 것 같았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든 뒤, 비상은 가만히 눈을 떴다. 다행히도 방 불은 끄고 잔 것 같았다. 시계가 아홉 시 반을 가리키는 걸 보고, 비상은 오늘이 일요일이란 게 다시금 고맙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느리게 아침을 마무리지은 뒤, 비상은 오늘 붉은 밤 팀에 뭐가 있나 보려고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일단 경기는 있지만, 중요도가 낮게 나온 걸로 볼 때 무조건 가진 않아도 되는 듯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비상은 바깥 공기도 마실 겸 아침 늦게 집을 나섰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비상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저 앞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오는 걸 알아챘다. 대체 여기까진 왜 온 거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강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 좀 봐라. 나 득템했다. 으하하.”
참으로 자기답지 않은 함박웃음을 띄우며, 마치 로또 1등이라도 맞은 것처럼 강산은 뭔가를 비상 앞에 내놓았다. 가만히 보니, 그건 그냥 평범한 신라면 한 줄이었다.
“무슨 소리야?”
“30주년 기념이라고 하나 더 주더라고. 하나밖에 없어서 얼른 샀지. 어떠냐?”
그러고 보니, 그 신라면은 5봉이 아니라 6봉이었다. 즉, 30주년 기념으로 하나 더 끼워주는 걸 어떻게 구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저런 것도 있었던가. 비상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강산의 말대로 그리 자주 보이는 물건은 아니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줄줄 늘어놓는 강산의 말을 듣고있을 때였다.
“그럼 강산이 니네 집에서 라면파티해도 되는 거냐? 너, 그래도 라면은 괜찮게 끓이잖아.”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상의 바로 등뒤에서 잎새가 나타나더니 그런 말을 건네왔다. 비상도 비상이지만, 강산은 정말 짐작치 못한 듯, 마치 한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꺼, 니 건 없어. 인마.”
마치 로또 1등 상금을 다 뺏긴 듯한 표정으로, 강산은 그 말과 함께 휙 돌아섰다. 하지만 잎새가 이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잎새는 강산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래도 하나는 좀 끓여줘라, 응?’이라 졸라대고 있었다.
아무튼 저 형들도 참.
이 평화로운 일요일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비상도 잎새한테 반쯤 끌려온 채 강산의 자취방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맨션 3층에 자리잡은 자취방은, 생각보다 훨씬 이 형다운 곳이었다. 일단 가자마자 나는 여러 냄새나, 널부러진 옷이 특히 그랬다. 아무튼 자리는 있었기에, 비상은 어떻게든 빈자리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별밤이한테도 전화했다. 좋은 건 같이 즐겨야지.”
“넌 우리 집 비상식량을 싹 없앨 작정이냐?!”
잎새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강산은 잎새의 어꺠를 세게 흔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 파랑이 형이 있었다면 이런 걸 눈앞에 두고도 사람좋게 웃고 있었겠지.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 둘을 바라보았다. 물론 자기도 전혀 막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야, 푸짐한데?”
“시꺼!”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별밤은, 아주 신난단 말투로 일단 그런 말을 쏟아냈다. 거기에 강산이 화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자기 일용할 양식이 저런 놈들 때문에 없어지는 게 열받는 듯했다.
“이봐 친구. 우리가 돈모아서 한묶음 더 사줄 테니까 이번엔 그냥 끓여주는 게…”
“시꺼!! 이별밤 이 자식이 진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둘의 말대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젠장, 젠장…’이라 중얼대면서도, 계란은 물론 파까지 빼와선 라면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아무튼 라면은 맛있게 끓여주고 싶은 듯했다.
아무튼 라면이 다 끓여지자, 강산은 상을 편 뒤 커다란 냄비를 가운데에 뒀다. 누가 봐도 맛있어보이는 모습에, 다른 형들도 침을 꿀꺽 삼키고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걸로 부족하지 않냐?”
“내가 다섯 봉만 넣었겠냐? 배잎새 이 자식도 진짜…”
강산의 짜증내는 말투로 볼 때, 아마 오늘 산 건 물론 이미 있는 라면도 다 부어넣은 듯했다. 언뜻 봐도, 조금 냄새를 맡아보기만 해도, 틀림없이 군침이 도는 모습이었다. 이 형도 자취한 지 꽤 지났으니, 라면처럼 자주 해먹는 건 어느정도 할 수 있게 된 듯했다.
이렇게 해서, 라면을 중심으로 네 남자가 상에 둘러앉게 되었다. 물론 비상은 가장 안전한 잎새와 별밤 사이에 앉았다. 괜히 맞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형들 사이에 앉는 게 아직 망설여지긴 했지만(비상한텐 데면데면한 느낌이었고), 그래도 맞는 것보단 훨씬 나은 자리였다.
“넌 대학 4년 다니면서 라면끓이는 스킬만 늘었냐?”
“시꺼. 좋아하는 거 맛있게 먹겠다는데 뭔 상관이야.”
잎새가 라면을 한 젓가락 들며 이렇게 놀리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다. 모처럼 자기가 시간을 내서 끓여줬는데, 고맙단 말 하나 제대로 못 듣는 게 억울한 듯했다.
“그래서 뱃살…아, 으아악! 그만, 그만!!”
결국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잎새는 강산한테 목이 조인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강산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이 놈은 날 화내려고 온 거야, 내 라면 얻어먹으려 온 거야?!”
“아, 알았어. 항복. 항복!! 나 죽어!!!”
“저런 게 세상에서 가장 재밌다니까. 그지, 비상아?”
“뭐, 그렇죠.”
그런 둘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별밤과 비상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젠 저런 걸 보는 것도 일상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난 강산이처럼 계란 제때넣는 건 절대 못하겠더라. 자, 그럼 나도 한 입…”
강산한테 당하는 잎새를 보느라 젓가락을 안 들고 있던 별밤은, 그 말과 함께 라면을 맛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자취생 기준으로 보면 건더기도 많고, 버섯까지 들어가있는 것처럼 호화로운 라면이었다. 게다가 꽤 맛있기까지 했다. 비상은 라면을 그다지 먹지 않지만, 이 정도면 맛있는 축에 들어가는 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슬아슬하게 반숙으로 들어간 계란노른자가 정말 맛있었다.
심지어 강산은, 잠깐 일어서더니 볶음김치를 들고 돌아왔다. 라면에 김치야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자취생이 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어디서 얻었냐?”
“요즘 편의점이 지지리 좋아졌더라.”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이젠 김치도 다 뺏기는구만’이라며 투덜댔다. 이걸 볼 때, 강산은 김치를 아예 쟁여놓고 먹는 듯했다. 저 형의 식성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김치와 같이 라면을 먹던 비상은(이 역시 맛있었다), 문득 별밤에게 물을 게 있었단 걸 깨달았다. 전에 현과 얘기한 뒤, 죽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형, 현이한테 뭘 가르친 거예요?”
“아, 그 게임 말인가?”
별밤은 그 말로 짐작했는지, 혼자 킬킬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형은 현과 꽤 오랫동안 얘기한 듯했다.
“현이가 관심은 있던데, 바벨탑이 버티고 있으니…”
“형은 그런 게임을 얼마나 하는 거예요?”
“하고싶은 만큼만.”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별밤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비상한테 이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비상이 너, 이런 시추에이션 어떠냐?”
“뭔데요?”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별밤은 신나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이야기가 무척 하고싶었던 듯했다.
“남녀가 말이야, 소년소녀든 20대든 상관은 없는데, 서로 손을 잡고 이 동네가 다 보이는 데까지 뛰어가는 거야.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말이지. 아마 수원이라면 산쯤 되려나? 거기 계단 장난 아니던데.”
“거의 직각이던데요.”
비상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비상 역시 남문을 지나다니다 그 계단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누굴 찾기 위해서든,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서든, 그렇게 뛰어다니는 건 참 좋지 않나. 그런 말이다. 비상이 너도 한 번 생각해 봐.”
“형은 제 다리를 분지를 생각이세요?”
“거기 계단이 그렇게 무섭니?”
“일단 단수가 열개 스무개 수준이 아니던데요.”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친구와 우연히 그 계단을 지나치던 걸 떠올렸다. 하도 으리으리한 나머지, 친구가 ‘우리동네도 미쳤나 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것이다. 적어도 노약자나 임산부한텐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경사진 계단이었다. 물론 그 계단이 아니라 한들 산엔 오를 수 있지만.
그렇게 라면도 바닥날 즈음, 갑자기 잎새가 이런 말을 꺼냈다.
“강산아. 찬밥 없냐?”
“이놈이 무슨 헛소리야?!”
“상식으로 생각해 봐라. 라면국물에 찬밥도 안 말고 먹자고? 그게 팔팔한 20대한테 할 말이냐?”
잎새가 이렇게 맞대응하자, 강산도 어이가 없어진 듯했다. 결국 강산은 이 말을 남긴 채, 찬밥을 가지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뼛속까지 빼가라. 다 빼가…”
그 뒤, 강산은 부엌을 뒤지며 찬밥을 슥슥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이걸 보면, 지금 비상 일행이 강산의 곳간을 다 털어먹고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강산도 어이가 없었는지, 이런 말을 중얼대며 밥통을 긁고 있었다.
“대체 내가 왜 평화로운 일요일에 니들을 만나서 곳간째 털려야 되냐. 이런 망할.”
“발광해, 형.”
“뭐가 어쩌구저째?!”
비상이 무심코 그렇게 말하자, 강산은 곧바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상 바로 옆에 있던 별밤 및 잎새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비상의 어깨에 기대서 웃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날 뭘로 보는 거야, 엉?!”
“솔직히 형이 진정할 거 같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는 중에도, 두 형은 이제 바닥에 엎어진 채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심지어 잎새는 눈물까지 훔치고 있었다. 강산은 그런 모습이 더 열받은 듯했다.
“니들도 그만 웃어. 진짜!”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강산은 찬밥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웃었던 게 미안했는지, 잎새는 겨우 눈물을 거두고 찬밥을 국물에 말아먹으며 강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농담이 아니라, 라면 두 봉지는 사줄게. 진짜.”
“사람 비참해지는 말 좀 그만해라. 이 자식아.”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점심은 무사히 끝났다. 이 사람들하고 있으면 뭐든 일이 일어난다니까. 자기가 그 원인 중 하나를 만들었단 생각에, 비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강산의 집에서 빈대붙을 생각으로 가득찬 형들을 보다, 비상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받아보니, 고등학생 시절 친구였다. 마침 이 근처에 있는데, 잠깐 얼굴 좀 보고싶다는 말이었다.
“친구가 부르니까 가볼게요.”
전화를 끝맺은 다음,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만나고 싶단 연락이 왔는데, 자기가 안 갈 까닭도 없어서였다.
“니놈 친구는 또 얼마나 아우라가 있는 거냐?”
“이 형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니가 오늘 그걸 말할 자격이 있냐? 아 진짜, 저 자식…”
그렇게 투덜대곤 있지만, 비상은 강산이 화내고있지 않단 걸 잘 알 수 있었다. 다른 형들도 이 말을 듣자, 웃으면서 비상을 보내줬다.
“우리보다 낫네. 친구랑 만난다니 얼마나 건전하냐.”
“배잎새 개자식. 빈대붙는단 자각은 있냐?!”
그런 말을 뒤로 하고, 비상은 강산의 맨션을 나왔다. 저 형들이 오늘 어떻게 지낼지도 궁금했지만, 비상은 비상 나름대로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와 만나기로 한 분식점으로 뱔걸음을 옮기다, 비상은 눈에 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현이 여전히 곰귀 후드티를 눌러쓴 채, 자기 눈앞을 지나치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정말 날씨도 더워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현한테 말을 걸었다.
“산책하니?”
“응. 그냥.”
“난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안 돼?”
현이 이런 말을 꺼내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해서, 비상은 순간 움칫했다. 자기 친구가 궁금하단 말일까. 물론 현도 전에 자기 친구를 소개한 바 있지만.
“궁금하니?”
“나도 친구 보여줬잖아. 그냥 궁금해서.”
현이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현이 따라오는 건 상관없지만, 친구한테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핸디캡이 알아서 적용될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껏 하늘은 죽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이 말에, 현은 호기심넘치는 눈빛으로 비상을 쳐다봤다. 그렇게 자기 친구가 알고 싶었나. 비상은 그런 현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분식집으로 가던 중, 비상은 옆에 있는 현의 존재감이 커진 걸 느꼈다. 아무튼 하늘은 타이밍을 너무 잘 안다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자기 키만큼 몸이 커진 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은 짐작대로 검은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지금 모습에 맞는’ 옷을 입고 있었다.
“괜찮겠니?”
“응.”
기분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현이 아까보다 더 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기 친구가 그렇게 궁금했나. 평소보다 호기심이 넘치는 현의 표정을 보며, 비상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비상이 너 지금 왔냐?”
분식집에 들어가자, 비상의 친구는 그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평범하면서도 사람좋게 생긴 친구였다. 비상과 달리 아직 대학생이었는데, 여기서 떨어진 곳에서 학교에 다니다 방학을 맞아 이리로 온 듯했다. 비상도 이 친구를 보는 게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만난 게 기뻤다.
“아, 옆에 있는 사람은?”
“친구.”
옆에 있는 현을 알아챘는지 친구가 그렇게 묻자, 비상은 짧게 대답했다. 일단 중학교 때부터 마음을 터놓고 지낸 몇 안 되는 친구였기에, 이 정도 말이면 충분하게 느껴졌다. 비상은 현과 함께, 친구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다.
“그건 그렇고, 잘 지냈냐?”
“그야 당연하지.”
“너 성격도 참 여전하다. 빈틈이 없어, 빈틈이.”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겠어?”
그렇게 얘길 주고받다, 친구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비상도 이 친구가 뭘 떠올렸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야, 비상아. 그거 한 번 해볼까?”
“그러지 뭘.”
이 말에, 현은 눈을 반짝이며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단 모습이었다.
비상과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먼저 오른손을 쫙 펴고 양쪽으로 몇 번 맞부딪쳤다. 그렇게 한 다음엔 비상이 주먹을 쥐고, 친구가 손을 편 채 몇 번 더 양쪽으로 맞부딪쳤다. 그 다음엔 친구가 주먹, 비상이 손을 편 채 위아래로 맞부딪쳐서 마무리지었다. 별 건 아니지만, 둘한테는 약속이자 사인 비슷한 행위였다.
“이야, 윤비상 너, 안 잊었구나?”
“이걸 왜 잊어. 나 참.”
그런 둘을, 현은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한 표정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자긴 생각도 못했단 표정이었다.
“이, 이게 재밌어요?”
친구도 그 눈빛을 알아챘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이런 게 관심거리가 되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투였다.
“그거, 만날 때마다 하는 거예요?”
“뭐, 얘랑 오랜만에 만나면 그러곤 하는 거죠.”
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그게 재밌게 느껴지는 듯했다. 혼자 주먹을 만들고 손을 펴고는, 자기 나름대로 따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이런 건 혼자 해도 재밌진 않겠지만.
“나랑 같이 해볼래?”
비상이 묻자, 현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가만히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현은 처음인데도 퍽 괜찮게 ‘사인’을 해냈다. 이젠 친구가 희한하단 표정으로 그런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분도 네 친구야?”
“그렇지.”
“아무튼 너도 별나다니까.”
“그런 나랑 친하게 지내는 너도 만만친 않을 거다.”
그 말을 듣고 웃는 비상의 친구를, 현은 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쩌면 현은 지금 ‘이렇게’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상이 너도 바뀐 거 같다. 이 나이에 나도 모르는 친구를 사귀고.”
“내가 바뀌었다고?”
“아니, 넌 그대로지. 근데 좀 앞으로 나아간 데가 있단 말이지. 그런 말이야.”
친구는 그렇게 킬킬대며, 군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현은 그런 대화조차 신기한지, 만두엔 손도 안 대고 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건 멀리서 보면 전혀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지금 이 분식점에 앉아있는 건, 누가 봐도 그저 평범한 20대 남성 세 명일 뿐이니까.
“그런데, 남자끼린 이런 걸 하는 거야?”
친구와 헤어진 뒤, 현은 곧장 그런 걸 물어왔다. 지금 이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비상은 전혀 웃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그냥 하는 거지.”
“남자끼리는 그런 관계구나.”
현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런 걸 보는 게 처음인 듯했다. 현이 남자경험이 별로 없다고 했던 말을, 비상은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 뒤, 둘은 꼭 갈 필요가 없단 말을 들었지만, 항상 모이던 옥상에 다다랐다. 사실 오늘도 붉은 밤은 경기가 한 번 있었지만, 이미 상대가 전력을 보인 바 있었고(무척 약했다. 아니, 약하다기보다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옥상에 있는 사람도 평소보단 많지 않았다. 현도 ‘그냥 왔다가면 되나?’란 말과 함께 옥상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비상은 의영과 상록이 옥상 구석에서 뭔가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깨달았다. 둘 다 주장이라서인지, 비상은 왜 저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오늘 경기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다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 때, 비상을 눈치챈 의영이 이렇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꼭 여기 안 있어도 돼. 여기 남은 애들로 다 될 거 같다.”
“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면, 오늘은 연장자도 무척 드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경기를 보고 싶어서 좀이 날 거 같은 잎새가 있긴 했지만, 그 강산이 형조차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굳이 여기 없어도 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비상이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이번엔 우리 집 갈래?”
현의 말에, 비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모습인 현한테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묘했지만, 사실 가지 않을 까닭도 없었다. 지난 일 뒤로, 비상도 현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현은 비상을 꽤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거절할 까닭도 없었으니까.
현의 말에 따르면, 자기 집은 터미널 근처 골목인 듯했다. 그리로 갈 일이 많지 않았기에, 비상은 그저 현을 따라 낯선 길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골목길이란 걸 알 수 있는 집들을 보며, 비상은 현이 대충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 살아.”
그렇게 죽 걷다, 현은 어떤 골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골목의 현의 집이 있는 듯했다. 물론 그 골목도, ‘내가 골목길이다’라고 광고하는 듯한 집들이 죽 늘어서있었다.
그 때, 비상은 갑자기 세상이 한층 더 커진 느낌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라, 현의 존재감도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물론 까닭은 뻔했다. 현 쪽으로 고개를 ‘든’ 비상은,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
“이젠 익숙해진 거 같다. 그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현을 보며,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비상은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현의 집에 갈 땐 이런 모습이 더 낫겠지만.
그렇게 골목을 지나 어떤 대문을 넘자,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자애가 현 일행을 빤히 쳐다봤다. 아마 2층으로 올라가려다 현이 대문을 들어서는 걸 본 듯했다.
“얘, 저번에 그 애 아냐?”
“응.”
“그런 모습인데 믿는 걸 보면 진짜 대단하다.”
뭔가 오해를 좀 크게하고 있긴 했지만, 여자애는 그렇게 말하며 비상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 말과 함께,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아, 오늘은 걔랑 같이있을 거지?”
“응.”
“밥 꼬박꼬박 잘 먹어야 돼. 알았지?”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애는 그제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걸 보면, 현이 친구들한테 걱정받는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위에 사니?”
“거긴 다른 친구 집이거든.”
여자애가 2층으로 사라진 뒤 비상이 묻자, 현이 그렇게 대답하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거기가 현의 집인 듯했다. 어쩌면 이 동네에 있는 현같은 아이들은, 서로 알고지내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현의 집에 들어선 비상은, 일단 그 집이 반지하란 데에 놀라고, 현이 아무렇지 않다는 데 또 놀랐다. 어두워서인지 어떤지 상당히 썰렁해보이는 집이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거실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모 강산이 형네 집과 달리 앉을 곳은 넉넉했다.
“라면땅 해줄까?”
“응?”
갑자기 현이 그렇게 물어오는 바람에, 비상은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지금 현의 목소리는 낮아서, 이런 반지하에선 깊게 울려퍼지기 때문이었다.
“맛있거든. 친구들하고 자주 해먹어.”
“그래. 부탁할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점심도 저녁도 밀가루투성인데. 그렇다고 죽진 않겠지만, 이란 생각과 함께.
현이 부엌으로 걸어가는 걸 보며, 비상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은 뭘 봐도 커보이니 제대로 보고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방에 놓인 물건이 그다지 많지 않단 건 틀림없었다. 현이 불을 켜면서 ‘거실은 별로 안 쓰거든’이라 말한 걸로 볼 때, 아마 현의 보금자리는 사실상 자기 방인 듯했다. 부엌에선 뭔가 부수는 소리(라면일 터였다)와 튀기는 소리(역시 라면일 터였다)가 들려오고 있었다. 만약을 생각해서, 비상은 구석에 있는 상을 가져다 폈다.
잠시 뒤, 현이 부엌에서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잠시 상을 보더니, 비상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내 방에서 먹을까?”
“내가 들어가도 되니?”
“여기보단 내 방이 더 편할 거 같아서.”
그 말과 함께, 현은 상째로 라면땅을 옮겼다. 원래 모습이면 모를까, 지금은 별 문제없으리란 생각에 비상도 현의 뒤를 따라갔다. 자기가 여자방에 들어가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이런 모습인 지금은 그저 우스운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게 상을 자기 방 가운데에 둔 뒤, 현은 불을 켰다. 이제 저녁이라서인지, 이렇게 불을 켜자 비로소 안이 훤히 보였다. 비상이 현의 방을 보고 처음 느낀 건, 어쩐지 정돈되지 않은 듯한 방이란 것이었다. 일단 책상도 있고 책장도 있었지만,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온갖 책이며 잡동사니가 몇 개쯤 쌓여있었다. 그 어지러운 모습을 보면, 강산이 형과는 또 다른 뜻으로 ‘혼자 사는’ 티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방이었다.
“청소는 하니?”
“일주일에 한 번은.”
그 말과 함께, 현은 바닥에 요와 이불을 깔기 시작했다. 아마 비상이 가면 그대로 잠들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현한테 맞는 잠자리는 아니었다. 원래 모습이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팔다리가 비집어나올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불 옆에 놓인 상에 앉아, 비상은 현이 만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라면땅을 입에 가져갔다. 갈색 설탕이 좀 많이 들어간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꽤 맛있었다. 이걸 볼 때, 현은 이런 요리는 자주 하는 듯했다.
“라면만 남았을 땐 자주 해먹어.”
아니나다를까, 현한테 그런 말을 듣고 비상은 자기 생각이 맞았단 걸 확인했다. 라면땅을 자주 먹는다면, 평소에 뭘 먹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엔 어떻게 밥을 먹니?”
“라면도 먹고, 편의점 음식도 먹고, 다른 애들 나눠준 것도 먹고…”
여기까지 듣자, 비상은 현의 식생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지만, 그래도 좀 더 좋은 걸 먹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라면땅을 먹다 말고, 갑자기 현이 입을 뗐다.
“어제 괜찮았어?”
“그래, 꼴사나웠지?”
비상은 그렇게 대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도 어제 경기는 자기 눈으로 봤을 터였다. 지금까진 죽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아니, 괜찮던데.”
하지만 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뭔가 떠올랐단 듯, 갑자기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근데 무기 한 번 더 강화할 수 있잖아.”
“그래. 그건 해야겠다.”
그 점도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자기가 ‘그’ 혜은과 싸웠던 것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상을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전에 이 놀이에 관해 말할 때, 이상하단 생각 든 적 없어?”
현의 그 말에, 비상은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다들 말도 안 된다 생각한 이 놀이를, 현은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이다. 어쩌면 오늘, 그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니?”
“지금 다 말하긴 힘들어, 하지만…”
현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였다. 어떤 걸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정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걸, 현은 훨씬 더 전부터 할 수 있었단 이야기였다. 게다가 자기뿐만 아니라, 그런 힘을 ‘아무렇지 않게’ 지닌 아이들이 여러 명 있었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뛰어다니는 동안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비상과 같은 ‘놀이의 참가자’가 그러한 것처럼.
그런 걸 가족이나 다른 애들 앞에서 말할 수도 없으니, 그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고 현은 말했다. 아마 여기까지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모로 고민했던 듯했다.
“놀이에 관해선 나도 잘 모르지만, 하늘이란 존재가 있단 건 알아. 또 다른 건…지금은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현은 그 말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이런 걸 누군가한테 말하는 게 처음이었는지, 현은 말을 끝낸 뒤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은 원래 ‘공중을 뛰는 게 당연한’ 거였니?”
비상의 물음에, 현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물론 몇몇 애들만 그럴 수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하늘이란 존재가 인격이고 뭐고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도 덧붙였다.
비상은 그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현은 비상과 같은 곳에 사는데도, 이렇게나 다른 ‘현실’을 봐온 것이다. 틀림없이 같은 걸 봐왔을 텐데도.
현이 라면땅을 치운 뒤 방의 불을 끄자, 이제 방에 남아있는 빛이라곤 하늘에 뜬 달빛뿐이었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은 현대로 뭔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며, 비상도 자기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때, 현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워낙 아무 말도 없는 방이라서인지, 지금은 그 낮은 목소리조차 어쩐지 크게 들렸다.
“비상이랑 내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 같은데 왜 다르게 느끼는 걸까?”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걸 입에 담았다.
“어쩌면 퀄리아라 하는 거하고 비슷할지도 모르겠는데.”
“아, 사람에 따라 같은 색을 봐도 다르게 느낀다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이든 네가 살아온 세상이든 틀림없이 같지만, 보고 있던 눈길이 달랐던 거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필터로 세상을 봤다고나 할까. 내 생각이지만.”
비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다, 문득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말한 자기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이 퀄리아란 말은 현 또래가 쉽게 들을 말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둘 다 이걸 알고 있는 까닭은 왜일까. 물론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그건 그렇고, 너도 어려운 말을 아는구나.”
“그러게. 원래 둘 다 알려면 꼬꼬면이나 바나나맛 초코파이나 누텔라쯤은 되어야 하는데.”
현도 이상하단 듯 그렇게 대답했지만, 비상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이런 걸 물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비상은 그걸 입에 담았다.
“누텔라가 뭐니?”
“먹어볼래? 빵도 있는데.”
“아니, 괜찮아. 그냥 궁금해서였거든.”
비상은 얼른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먹은 라면땅과 그 전 일로 볼 때, 그 누텔라란 것도 틀림없이 단 것이라 짐작해서였다. 현은 둘째치더라도, 비상은 단 걸 그리 자주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근데 신기하다.”
“이번엔 뭐니?”
현의 말에, 비상은 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달리, 이번 현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이건 정말 궁금하다는 태도였다.
“남자랑 여자는 친구끼리 대하는 법도 다른 거 같아서.”
“아까 그게 그렇게 신경쓰였니?”
“난 친구들하고 있을 땐 그냥 껴안기거든.”
현의 말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현이 이런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말이 맞다 여겨서였다. 비상은 지금, 마치 다른 나라의 문화와 교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문화와.
“달이 환하다. 밖에 나갈까?”
현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자, 비상은 그 뒤를 따랐다. 아직 말하지 못한 여러 생각들을 마음속에 묻으면서.
그렇게 밖에 나온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2층으로 가는 계단에 앉아 하늘에 뜬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정말로 밝고 환했다. 어쩌면 보름달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내가 보는 달하고 비상이가 보는 달도 다를까?”
“글쎄.”
비상은 그 물음에, 그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받아온 느낌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분명 같은 세상에 사는데, 둘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만약 세상의 진리가 있다면, 그건 뭘까? 거기에 답이란 게 있긴 할까?”
“42.”
“응?”
현이 중얼대듯 그렇게 묻자, 비상은 무심코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물론 비상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일이었다. 현도 신기했는지,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아, 그냥 내가 읽는 책에서 나온 건데 별 거 아냐. 거기선 컴퓨터가 계산했단 말이었거든.”
“그것도 참 신기하다.”
현의 답을 들으면서, 비상은 자기가 대체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가만히 생각했다. 아마 무의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던 듯했다. 물론 왜인지는 비상 자신도 모르지만.
“친구들하고 이렇게 나와서 달도 보고 그러니?”
“응. 어디까지 쫓아갈 수 있나 시험해본 적도 있어. 하늘을 죽 뛰어서.”
“그것도 재밌었겠구나.”
“그래도 잡진 못했어. 아깝지?”
“아니, 그래도 재밌겠는 걸.”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은 다시 달을 봤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또렷하게 보이는 달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여름날 여기에 앉아서 보는 달은, 다른 때와 다른 맛이 있었다.
그렇게 달을 보며, 비상은 혼자 생각했다.
이 아이와 자기가 사는 세상은, 왜 이렇게 같으면서도 달랐던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