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9. ‘놀이’의 모순

그 뒤, 비상은 현한테 업힌 채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업혀본 게 얼마만이었더라.
사실 이렇게 된 건, 현이 자길 감싸안다가 갑자기 ‘그거 한 번 해볼래’란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기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이런 모습이 민망한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현은 그런 비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었다. 무거운 티 하나 안 내고선.
그 때, 비상의 주머니에서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대충 누가 전화한 건지 감을 잡은 비상은, 여전히 현한테 업힌 채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뺐다.
“너 어딨냐?”
아니나다를까, 전화한 사람은 역시 강산이었다. 이렇게 전화가 걸리자마자 다짜고짜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비상이 알기로 이 세상에서 한 명밖에 없었다.
“오늘은 곧장 집에 가기로 했어. 형한테 얘긴 들었지?”
“그래. 넌 차라리 안 오는 게 낫겠다.”
비상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걸 알았는지, 강산은 그렇게 대답했다. 비상은 어쩐지 그게 신경쓰여, 어떻게 된 일인지 강산한테 물었다.
“무슨 소리야?”
“판정으로 군청이가 졌으니까 그렇지. 의영이 형이 지금 열심히 위로하는 중이다. 너도 너무 어깨 무거워하지 마라. 암튼 내일 보자.”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알아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걸 때나 끊을 때나 참 한결같은 형이구나, 그런 생각에 빠질 틈새도 없이, 이번엔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강산이 형. 군청이가 졌다는데.”
“그럼 진 거네.”
“그래, 우리도 지게 됐구나.”
비상은 묘한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할 때 자기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은 게 너무나 어색했던 것이다. 지금 현과 자기 입장을 바꾼다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진 적 조금 있었잖아.”
현의 말을 들으며,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어쨌든, 중요한 건 내일 경기였다. 이제 파란 밤 및 금빛 밤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비상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이기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집에 가는 게 먼저지만.
그렇게 집에 다다르자, 비상은 드디어 현의 등에서 내려왔다. 비상이 불을 켜는 동안, 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비상네 집 냉장고를 열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
“배고파하는 거 같아서.”
현의 대답은 고마웠지만, 지금 비상에겐 그다지 기운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넘겨야겠는데. 그런 생각으로, 비상은 현한테 다시 말을 건넸다.
“괜찮아. 오늘은 곧바로…”
하지만 비상은, 현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내들었단 걸 깨달았다. 아마 비상이 뭐라 말하든, 현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을 듯했다.
프라이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어쩐지 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비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모처럼 해주겠단 걸 막고싶지 않았으니까.

현은 부엌에 들어간 뒤, 프라이팬을 데우고 달걀을 깨뜨려넣었다. 그다지 요리를 안 하기 때문인지, 비상의 눈엔 현이 달걀을 깨는 게 무척 어설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잠시 뒤, 여전히 어설프게 부침을 뒤집었다. 아마 평소엔, ‘자기 입에만 들어가면 됐지’란 식으로 요리한 듯했다.
“원래 달걀프라이 안 먹니?”
“가끔 먹는데 모양엔 신경쓴 적 없어.”
역시나, 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일단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쩐지 여기 앉아있으니, 요리에 한참인 현의 뒷모습이 꽤 든든하게 느껴졌다. 물론 실제 요리와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맛없으면 미안.”
그 말과 함께, 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릇을 내놓았다. 언뜻 봐도 초보자 중 초보자 수준이었지만, 비상은 그런 현이 고맙게 느껴졌다. 초보자 중 초보자라면, 이런 쉬운 요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게 틀림없어서였다.
“크기가 작구나.”
“난 그렇게밖에 못 해서.”
어쨌든 비상은, 현이 만든 달걀프라이를 입에 가져갔다. 못 먹을 맛은 결코 아니었지만, 소금간이 안 되어서인지 비상한테는 밋밋하게 느껴졌다.
“현아. 프라이를 할 땐 소금을 좀 뿌리면 좋아.”
“아. 응.”
현은 전혀 몰랐단 표정으로, 같이 프라이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 처음으로 그걸 깨달은 듯했다.
그렇게 달걀프라이를 다 먹은 비상은(달걀껍질이 조금 들어가있는 건 둘째치고), 이제 씻고 자는 일만 남아있단 걸 느꼈다. 그 생각이 들자, 비상은 거실에서 밖을 보던 현한테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잘래?”
“전처럼 거실바닥에서 같이 자면 안 돼?”
현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비상은 차마 오늘은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입장이 바뀐 지금 그렇게 하는 것도 묘하지만, 아무튼 현이라면 괜찮을 터였다.
결국,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비상한텐 그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뒤, 비상과 현은 거실에 깔린 요에 누운 채, 이불을 덮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붙어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한 사람분의 자리를 가운데에 비운 채였다.
전과 달리, 비상은 현과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게 강산이 없어서인지, 정말로 사이가 떨어져있어서인지, 아니면 오늘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 갑자기 등 너머로 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지금 꼭 이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금 얘기해도 돼?”
“그럼.”
현은 그 말에 마음을 놓았는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사실 처음 이런 모습이 됐을 때, 난 아무 생각도 없었어.”
현의 말에, 비상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은 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상이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모습이 바뀌었고,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나 봐. 자기 모습이 아니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일일 줄 몰랐어.”
“그렇구나.”
그 낮은 목소리에, 비상은 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떼어놓지 않았다. 밖에서 들리는 차 지나가는 소리만이, 거실의 빈칸을 메울 뿐이었다.
“그 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난 내 모습이 지금 무슨 뜻인지 알았어. 지금까진 별 생각 안 했는데, 그 땐 지금 이런 모습이란 게 정말 괴로웠어. 나도 그 사람하고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아서. 난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자, 비상은 현이 말하는 ‘그 사람’이 의영이란 걸 알아챘다. 제아무리 비상을 막 부르는 현이라 한들, 차마 의영을 막 부르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영이 형이 싫니?”
“아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어. 그 때 괴로웠던 건 사실이지만.”
현이 그렇게 대답한 다음, 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둘에게 편해서일지도 몰랐다. 비상도, 현도, 억지로 말을 꺼내야한다 여기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 때, 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훨씬 더 진지한 목소리였다.
“하늘이 우리한테 패널티를 준 건 대체 왜일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비상은 그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비상 역시 그 까닭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천사가 놀이를 하려는 까닭은 안다 치더라도, 그 ‘패널티’에 관해선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어쩐지 다 알 거 같았는데.”
그 말과 함께, 현은 비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이리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비상은 잠시 움찔했지만, 그게 현이란 건 누구보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건 많거든.”
“어른인데?”
현의 말에, 비상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되묻는 현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서였다. 우스운 질문이 아닌데도, 비상은 그 질문이 어쩐지 무척 우습게 느껴졌다.
그런 비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난 있잖아, 이번에 처음으로 이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어.”
비상은 그저, 그 말을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로 있을 수 없단 게 무슨 뜻인지, 지금은 알 거 같아.”
그리고 잠시, 둘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조차 일종의 소통처럼 느껴질 만큼, 비상은 마음이 편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런 둘의 사이를 가만히 메꾸고 있었다.
“어쩌면 패널티를 주는 것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흐음.”
그 말 뒤, 둘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몇 분이 지나도 목소리가 안 들려와, 비상은 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현이 곤히 잠든 모습이 보였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현이 이렇게 빨리 잠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상은 괜히 머쓱해지면서, 자기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일은 중요한 일이 둘이나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비상이 책임을 져야 할 ‘놀이’이기도 했다.

다음 날, 눈을 뜬 비상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옆을 보니, 역시 원래대로 돌아간 현이 이불 속에 돌돌 말려있었다. 비상은 그게 어쩐지 우스워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젠 더울 텐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가만히 일어나 아침을 마련했다. 오늘은 달걀말이였다. 그러고 보니, 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달걀요리는 거의 다 먹은 셈이 됐다. 비상도 지금껏 잊고 있었지만.
“만날 다른 요리네.”
현도 잠에서 깼는지, 비상이 요리하는 걸 뒤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 말투로 볼 때, 현은 비상이 무척 신기한 듯했다.
“별 거 아냐. 만들기도 쉽고.”
“그래도 신기한데.”
그런 식으로, 둘은 또다시 마주보며 아침을 먹었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둘에겐 그게 편했다. 어쩐지 아무 말하지 않아도, 현과는 마움을 나누고 있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현을 배웅한 뒤, 비상도 연구소로 갈 채비를 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지, 될 수 있는 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런 생각으로 평소처럼 일을 하다, 비상은 자기가 중요한 거 하나를 죽 잊어버리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오늘은 파랑이 형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자기가’ 경기에 나가는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상은 그 뒤로 혜은과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여러 모로 마음이 무겁지만, 경기는 해야 했다. 그게 혜은이 부탁한 것이자, 비상이 하고자 했던 것이니까.
연습을 못한 게 아쉬운데.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일하는 중에 그걸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일이 끝난 뒤 생각하기로 하고, 비상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일이 끝나자, 비상은 바로 근처 건물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볍게 연습이라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계단을 올라가던 비상한테, 갑자기 어제 들은 그 말이 떠올랐다. ‘어제 군청이가 졌다’고 했던 강산의 말이었다.
지금 세 밤은 고루 이긴 상태던가.
초반에 붉은 밤이 조금 앞서긴 했지만, 파란 밤과 금빛 밤도 상당히 따라잡았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비상이 진다 한들 좋을 건 없었다. 비상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이기고 싶었지만, 자꾸만 혜은이 마음에 밟혔다.
그렇게 연습을 마친 뒤, 비상은 항상 모이던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한 손엔 파랑의 선물이 들려있었다. 아무리 오늘 경기가 있는 비상이라 한들, 이런 걸 잊어버릴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옥상에 다다르자마자, 비상은 도무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아무리 드립 경연대회가 예고되어 있었던 파랑의 생일이라 한들, 비상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풍경이었다.
거기에 있는 건, 틀림없이 ‘교복’을 입은 강산이었던 것이다.
“내가 미쳤나…”
“뭐라고, 이 자식아?!”
그런 말과 함께 계단을 다시 내려가려던 비상을, 어떻게 들었는지 귀가 참 밝은 강산이 잡아끌었다. 그 목소리로 볼 때, 강산은 지금 무척 열받은 게 틀림없었다.
“이게 뭐가 이상해!”
자길 옥상으로 끌어오자마자, 강산은 곧바로 이렇게 캐물었다. 그 몸집으로 고등학교 교복이 용케 맞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가만히 되물었다.
“형한테 교복이 어울릴 거 같아? 대체 그걸 왜 입고 왔어?”
“신발. 파랑이 생일이잖아!”
“…겨우 그것 때문이야?”
“현이랑 니가 그렇게 고생하는데, 나도 희생 좀 하잔 뜻에서 입었다. 5년 넘은 교복이 참 용케도 맞아요…”
이 말과 함께, 아까부터 화내던 강산은 먼산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해보자는 생각에서 입긴 했는데, 뒷생각은 전혀 안 했다는 표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저렇게 다녔으면 은근히 무서웠겠는데. 하복 덕분에 다 드러나는 팔뚝을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참고로 같이 온 별밤에 따르면, 강산은 버스로 여기까지 오면서 대략 50명은 되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눈에 받았다는 듯했다. 비상 역시, 그런 풍경을 아주 손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수원에도 도시전설이란 게 생기겠네. 앞으로가 기대된다, 야.”
“그거 괴담 아니에요?”
“이 자식들이. 난 큰맘먹고 부끄러우면 지는 거다! 란 생각에 이러고 왔는데…”
강산이 투덜대는 사이, 옥상 너머에선 떄이른 루돌프 사슴코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신난 목소리로 볼 때, 그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진짜, 이 여름에 옥상에서 캐롤을 들을 수 있게 되는 듯했다.
아무튼, 옥상을 둘러보면 다들 파랑의 생일채비로 한창이었다. 강산은 ‘다 알고 받는 생일축하가 재밌긴 할까?’라 말하면서도, 폭죽 채비를 돕는 것처럼 준비를 온힘을 쏟아 도와주고 있었다. 그걸 보던 비상은, 문득 옥상 구성에 군청과 의영이 형이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붉은 밤은 지고 말았던 것이다. 원래 긴장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조금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야, 지금 어디냐?”
아직 채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비상의 등뒤에서 강산이 그렇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아마 파랑한테 전화를 걸고 있는 듯했다. 비상도 아무 생각없이 그걸 듣고 있다가, 갑자기 강산이 소리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여기 바로 아래라고?!”
이 말에, 생일 채비에 열심이던 모든 붉은 밤 팀원들이 모조리 강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듯한, 그리고 무척 벙찐 표정이었다.
“뭐 이런 생일준비가 다 있어?!”
물론 아직 전혀 채비가 끝나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수습은 해야 했다. 다들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옥상 문이 활짝 열렸다.
거기에 있던 건, 아무렇지 않게 씩 웃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파랑이었다.
파랑이 아무렇지 않게 옥상에 나타나자, 준비에 바쁘던 이들은 하나같이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강산 역시 당황했는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 5분 일찍 오라고 했는데 너무 빠른 거 아냐?!”
하지만 그 말이 제때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먼 곳에서 ‘루돌프 사슴코는~’이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저 잎새 형이란 사람은, 정말 여름에 캐롤을 부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엉거주춤, 생일노래와 캐롤이 뒤섞이는 희한한 광경이 이 곳 옥상에서 벌어졌다. 파랑은 이 상황이 웃긴지, 배를 잡은 채 가까스로 서서 킬킬대고 있었다. 사실, 타이밍조차 안 맞는 상황이니 파랑이 웃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른 템포로 생일노래를 부르며, 비상은 웃음을 어떻게든 참느라 바빴다.
“내, 내가 1분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마침내 노래가 각기 다른 타이밍에 끝나자(가장 긴 건 생일노래를 늘려부르던 강산이었다), 파랑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킬킬댔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이었다.
“1분이 무슨 소용이야. 이 자식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재미없을 거 같아서…그 옷차림은 또 뭐구?”
파랑은 강산을 보자, 이젠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게 쪽팔림을 무릅쓰고 저런 옷을 입고 온 친구한테 고마워서가 아니란 건, 비상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고마운 마음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식아. 난 친구를 위해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교복을 입은 강산이 여전히 어깨를 편 채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잎새가 강산의 어꺠에 기댄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물론 당사자가 된 파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생일선물 다 받았네. 그지?”
“야, 너 돼지머리 받아야지, 이 자식아!”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팀원들도 자기가 갖고온 선물을 조공이라도 하는 것처럼 파랑의 앞에 두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먼저 놓인 건 강산이 사온 날것 돼지머리였다. 그 돼지머리의 인상이 얼마나 강한지, 다른 선물들은 고작 돼지머리의 장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정을 들어보면, 강산이 일부러 다른 팀원들을 골탕먹이려고 시간을 5분 일찍 댔는데, 파랑은 아예 그 시간 5분 전에 오는 길을 골랐던 듯했다. 즉, 파랑은 다른 팀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0분 일찍 여기로 온 셈이었다. 단지 ‘붉은 밤 일행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근데 이렇게 놀랄 줄은…크하하하.”
그렇게 웃으면서도, 파랑은 자기한테 온 선물 하나하나를 고맙게 받았다. 선물이 전해질 때마다 파랑의 표정이 활짝 피는 걸 보면, 파랑은 정말 이 순간이 기뻤던 듯했다. 비록 자기가 모든 예정을 비틀어놓긴 했지만.
“그 돼지머리는 엄청 소중한 거니까 꼬박꼬박 절해. 알았어?”
“그거야 강산이 선물인데 해야지.”
강산이 무척 당당하게 그런 말을 꺼내자, 파랑 역시 킬킬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면, 역시 대인배는 다르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좋은 분위기를 자기가 이어갈 수 있을까, 란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 때, 저 쪽에서 누가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보니, 그 사람은 다름아닌 혜은이었다. 아마 경기 직전이라서 자기와 인사하러 온 듯했다.
“빨리 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게, 오늘 밤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그렇게 등 뒤에서 파랑이 변명처럼 말하는 걸 들으며, 비상은 혜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혜은은 전과 달리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는데, 언뜻 봐도 그다지 좋아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디 아픈 데 있으세요?”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혜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걸 보며, 비상은 혜은이 자기와 억지로 싸우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비상과 싸우긴 싫지만, 이 역시 ‘놀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혜은은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도 이길 거예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혜은은 금빛 밤이 있는 옥상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 사라지는 혜은을 보며, 비상은 가만히 마음을 다잡았다. 비상 역시 혜은과 이렇게 ‘맞붙고’ 싶진 않았지만, ‘놀이’엔 진심으로 대할 생각이었기 떄문이었다.
이제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 비상도 무기인 총을 손에 든 채 신호가 들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선 잎새가 아래, 즉 큰길을 내려다보며 무척 신나하고 있었다. 아마 저 너머에 펼쳐진 불빛이 마음에 든 듯했다.
“이야, 이렇게 있으니까 뭐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나는 거 같은데?”
“비상아. 니가 져도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있으니 걱정 마라.”
“야, 민망해! 그 말 이런 분위기에서 하니까 뭐라도 된 거 같잖아!”
별밤이 옆에서 한술 더 뜨자, 잎새는 팔을 휘휘 저으며 민망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비밀결사인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때, 비상한테 ‘준비하라’는 신호가 들어왔다. 비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출발하기로 한 건물 쪽으로 휙 뛰어갔다. 건물에 다다르자마자, 비상은 바로 너머에 있던 혜은과 눈이 맞았다. 어쩐지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사실, 어떻게 보면 그렇다 할 수 있었지만).
“시작!”
그 때, 그런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비상은 무심코, 오른손에 들린 자기 물총을 꽉 쥐었다. 잠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눈앞의 혜은을 보고 있던 비상은, 자기가 중요한 것 하나를 모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비상은 아직도, 혜은의 무기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혜은의 손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이제 ‘놀이’를 할 시간이니, 혜은도 자기 무기를 빼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혜은은 전혀 그럴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시간이 지난 뒤, 혜은은 품속에서 살며시 자기의 ‘무기’를 꺼냈다. 그걸 알아챈 비상은, 순간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혜은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비상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혜은의 무기는, 비상과 같은 물총이었다.
왜 혜은이 저걸 골랐는지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비상 역시 이렇게 당황스러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사실 같은 무기를 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걸 자기 눈으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틀림없이 무기를 고를 때 같은 물건이 두 개 있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자기가 그 대상이 될 줄은 전혀 짐작치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어쨌든, 그건 그거였고, 이건 이거였다.
비상이 뒷걸음질치자, 혜은은 이 쪽으로 뛰어오며 곧바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총알처럼 바뀌어 자기한테 날아오는 걸 보고, 비상은 혜은이 어떻게 강화시켰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잠시 강산을 떠올리던 비상은, 이윽고 뒤쪽 건물로 날아가 ‘총알’을 피했다. 그리고 어디쯤에 반사시킬 만한 벽이 없을까, 란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 때, 비상은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것도 한 줄기가 아니라, 수십, 아니 수천 개의 물줄기가 비상 일행한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파랑이 형이 그렇게 말했지.
정말 그 말대로 비가 오는 걸 잠시 보다가, 비상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침 근처에 괜찮은 벽이 있었기에, 비상은 혜은이 맞도록 그 쪽으로 총을 쐈다. 혜은은 반사된 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비상 앞에 내려앉아 다시 총을 쐈다. 총알이 빗물에 뒤섞이는 걸 느끼며, 비상은 뒤에 있는 더 높은 건물로 훌쩍 뛰었다.
건물 위로 올라온 뒤, 아직 어떻게 할지도 비상이 정하지 못한 사이 혜은이 따라오는 게 보였다. 이미 아까보다 비는 거세져 있었다. 아마 오늘은 제대로 큰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마 ‘놀이’에서 비가 내린 것도,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놀이’를 하는 이들은 만약 비가 내린다 한들 젖지도 않고 감기에 걸리지도 않는다는 말을, 비상은 언젠가 천사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경에 물방울이 안 떨어진다 한들, 앞이 흐릿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상은 혜은과 달리 안경을 썼기 때문에, 이런 비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천사도 젖지 않는다곤 말했지만, ‘비가 거세게 내린다면 안경에서 물방울이 묻었다 떨어지는 일은 있을 거다’란 말도 같이 했던 것이다.
일단 비상은 혜은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런 일’을 겪은 혜은과 이런 식으로 맞서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건 그저 ‘놀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비상은 이런 식으로 혜은과 맞서고 싶진 않았다. 참 비상답지 않은 고민이긴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상은 혜은이 자기가 쏜 물을 피한 뒤, 자기 쪽으로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비상은, 혜은의 팔이 약하게나마 떨리고 있단 걸 알아챘다. 아무리 ‘봐주지 않았으면 해요’라 말한들, 혜은 역시 속으로는 이러고 싶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이 놀이를 하는 사람에게, 비는 ‘추운’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비상 역시, 이 상태로 놀이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혜은의 말대로, 비상은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였지만, 비상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혜은 역시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었다.
그 총알을 피한 뒤, 비상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처음엔 등골이 서늘했던 그 떨어지는 느낌도, 지금은 오히려 짜릿하게 느껴졌다. 비상이 떨어지는 곳이 ‘옥상’이 아니란 걸 알아챘는지, 주위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의영이 형도 한 번 했을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목적지인 ‘그 곳’을 똑바로 쳐다봤다.
멀리서만 보이던 큰길이 나타나자, 비상은 ‘그 곳’에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바로 아래에선 빗물에 번진 수많은 불빛들이, 큰길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비상은 지금, 도로 위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틀림없는 ‘가로등 위’에.
아마 평소라면, 이런 짓을 했을 떄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옥상, 아니 땅에 발을 디딘 것만큼이나 압도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잠시동안 아래를 보던 비상은, 위에서 혜은이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따라내려오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혜은이 다가오기 전, 비상은 마음을 다잡은 뒤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물론, 그 앞쪽에 있는 건 다른 가로등이었다. 비상은 될 수 있는 대로, 이 가로등을 한없이 건너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을 내디딘 뒤부터, 비상은 끊김없이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를 넘나들었다. 비가 거세진 탓에 앞이 흐리긴 했지만, 어쩐지 비상은 가로등이 어디쯤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아무리 물총이라 한들, 물이 ‘뻗어나갈 수 있는’ 거리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총알처럼 생긴 물이라 한들,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는 데서는 다른 물줄기처럼 터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거리를 조금 늘리는 강화를 한다면 이야기도 달라지지만.
하지만, 혜은은 그런 강화를 자기 무기에 한 것 같진 않았다.
비상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 가로등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나아갔다기보다, ‘뛰어갔다’. 뒤에서 혜은이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마 체력차 때문에 바짝 좇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자길 따라오며 총을 쏘곤 있었지만, 비상 뒤쪽에 있는 나뭇잎같은 곳에 맞아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비상은 그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이미 처음 있던 곳과 동떨어진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지금 비상이 해야 할 일은 ‘달리는’ 것뿐이었다. 가로등 사이를 달리며, 잔뜩 번진 빛 사이를 달리며, 저 총알한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어지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비상은 등에 뭔가 부딪치는 걸 느꼈다. 그 무게로 볼 때, 그건 혜은의 총알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혜은이, 비상한테 총을 맞춘 것이다.
이 때문에 잠시 균형을 잃은 비상은, 바닥으로 내려앉기 전에 얼른 근처 건물로 훌쩍 뛰어올랐다. 물론 옆에 있는 벽에 총을 쏴, 혜은한테 반사되도록 한 뒤였다. 갑자기 높은 곳으로 확 올라가니, 모든 것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 비상은,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흐릿한 빛들에 둘러싸이면서도, 비상은 무사히 근처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혜은도 아까 그 물줄기를 맞았는지, 조금 비틀대면서 옥상에 내려앉았다. 아까보다 훨씬 거세진 장맛비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거센 바람. 어디선가 들리는 천둥소리. 아래에 깔린 수많은 ‘흐린’ 불빛.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비상의 마음을 자꾸만 어지럽게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정했지만, 이런 까닭으로 비상은 선뜻 발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혜은도 같은 마음일 것 같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비상은 멀리서 들리는 온갖 소리에서 신경을 떼려 노력했다.
그렇게 비틀대며, 비상은 뒤에 있는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뒤를 돌자, 자기 쪽으로 총을 조준하는 혜은의 모습이 보였다. 비상 역시 이걸 보자마자, 얼른 근처 벽 쪽으로 총을 쐈다. 하지만 혜은 역시, 그 순간 거의 엎어진 채로 비상의 발 쪽에 총을 쐈다.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비상은 오른발 아킬레스건 쪽에 뭔가 쓰린 느낌이 든단 걸 알아챘다. 총알이 그만 그 쪽에 맞고 만 것이다. 얼른 움직이려 했으나, 비상은 오른쪽 발에 힘이 빠져나간 걸 느꼈다. 하지만 혜은 역시 반사된 물에 맞았는지, 몸을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 걸 문득 깨달은 비상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젠 너무나 비가 심하게 내리다 보니, 옷은 안 젖었지만 안경에 물방울이 생겼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젠 오히려, 이 빗속에서 공중을 뛴다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었다. 당연히 뒤에 따라오고 있을 혜은을 신경쓸 겨를은 전혀 없었다. 몸은 물론, 마음조차도.
아까 맞은 오른발이 자꾸만 쑤셔와서, 결국 비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떤 옥상에 내려앉은 뒤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으니, 혜은이 반대쪽에 내려앉는 게 보였다. 혜은도 이 빗속이 힘들었는지, 자기처럼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마 총을 쏠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그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비 때문에 옷이 젖은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이 젖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안경조차 젖지 않았지만, 비상은 이 거친 비가 자기 몸을 마구 때리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사람의 몸이 이렇게 피곤해진단 말인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비상은 자기 몸이 아주 지쳤단 걸 느꼈다.
비상은 지금, 이런 식으로 둘이 총을 겨눠야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대체 왜 대진표가 이렇게 짜여졌는지 생각해봤자, 지금 와선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가장 좋은 건,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둘이 이전에 나눈 약속이었으니까.
고작 ‘놀이’ 하나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비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마음이었다. 문득, 전에 천사가 한 말이 비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인지, 어떤 말인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가 자기한테 뭔가 ‘이 상황에 관한’ 언급을 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상과 혜은은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거의 동시에 총을 쏜 게 느껴지자, 비상은 얼른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맞았는지, 비상의 몸은 힘없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혜은도 허벅지 쪽에 물줄기를 맞았는지,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들자, 비상은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비상의 경기는 결국 판정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쩌면 비상 역시 짐작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윤비상,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위에서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산이 자기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은 시작했던 곳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듯했다. 땅바닥에 내려앉은 강산이 숨을 고르는 걸 보며, 비상은 그렇게 짐작했다.
“좀 일이 있었거든.”
“니한테 그런 모습이 어울리냐? 비맞고 난간에 주저앉아있는데 아우라는 왜 또 있어. 암튼 일어나.”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자기 손을 비상 쪽으로 내밀었다. 아마 혜은과 자기 사이에 뭔가 있단 걸 느낀 듯했다. 비상을 일으켜세우면서, 혜은 쪽으로 자꾸 눈길을 줬던 것이다.
비상은 강산의 손을 잡고, 간신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는 여전히 무척 거세게 내리고 있었지만, 옷은 신기하리만치 전혀 젖지 않았다. 대신 몸이 무척 피곤했지만.
“니가 판정으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 나 참.”
“저번 판정 땐 어땠어?”
자기가 생각해도 힘이 조금 빠진 목소리로, 비상은 가만히 물었다. 전에 강산이 판정으로 나갔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걸 왜 지금 물어. 그 사람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 내 걱정도 해주고.”
그 뒤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뒤에 들은 말로는, 의영이 이번 판정에 나간 듯했다.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은 드물게도 마음이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눈앞엔 혜은이 있지만(금빛 밤 쪽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지금 비상은 혜은을 볼 기운조차 없었다. 혜은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비가 대야로 퍼붓듯 내리는 가운데, 비상은 난간에 몸을 걸친 채 겨우 서있었다. 아직도 혜은의 총알이 맞은 데가 조금씩 쓰리는 게 느껴졌다. 고작 물이 이 정도로 강한 존재였단 말인가. 오늘 물에 한없이 시달리며, 그 물을 다루는 총이 무기인 비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과 나왔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 강산이 곧장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상은 도무지 그리로 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옆에 있는 강산한테 이런 부탁을 했다.
“형이 대신 들어 줘. 난 지금 힘드니까.”
“이 놈, 안 어울리게 약한 모습 보이고…”
그 말과 함께 멀어지는 강산을, 비상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방금 강산한테 한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약하다기보다, 정말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뛴다 한들, 아무리 놀이를 하고 있는 비상일지라도 어떻게 될지 자신할 수 없었다.
금빛 밤 쪽 일행도 모두 뛰어갔는지, 옥상엔 다시 비상과 혜은 둘만 남았다. 아마 혜은 역시 저기까지 뛰어갈 힘이 없는 듯했다. 잠시동안 둘은, 서로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비상도 너무나 지쳐서, 저기까지 들릴 만큼 목소리를 높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비상은, 뭐라도 좋으니 혜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만큼 둘한테는, 남한테 쉽게 말하지 못할 여러 사정이 있었으니까.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저야말로요.”
혜은이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눈길을 아래로 떨궜다.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할 말이 있고없고를 떠나서, 둘 다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 때, 혜은이 가만히 이런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가 워낙 거세게 내려서, 이젠 혜은의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대답은 해야 했다.
“전에 한 말을 지킨 게 고맙단 말씀이신가요?”
“네. 안 봐주셔서 고마워요.”
“아뇨. 저도 약속은 지키려 했거든요.”
그 뒤, 둘은 또 말이 없었다. 지금 둘을 둘러싸고 있는 건 단 하나, 거센 빗소리뿐이었다. 이젠 아래쪽에 펼쳐져있을 불빛조차 비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비상은 지치고, 피곤했으며, 무엇보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때 일을 다시 입에 담아도 될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비상은, 혜은 쪽으로 남정네 한무리가 ‘날아오고’ 있는 걸 알아챘다. 게다가 그 무리들은, 만약 들린다면 온동네가 난리일 듯한 환호성을 마구 질러대고 있었다. 그 무리들은 혜은을 둘러싸곤, 타올을 씌워준 채 ‘수고했어’같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표정이나 신난 말투로 볼 때, 판정으로 누가 이겼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너 졌다, 인마.”
아니나다를까, 비상 앞에 확 내려앉은 강산은 대뜸 그런 말부터 꺼냈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판정에서는 혜은이 더 적극적이며 효과적인 공격을 했다 판단한 듯했다. 같이 있던 의영은 상록이 결과를 말한 뒤, ‘둘 다 잘하긴 했는데, 굳이 뽑자면…’이란 말을 팀원들한테 건넸다 했다.
“그렇게 됐구나.”
“너도 대단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반응이 나오냐.”
강산은 질렸단 표정으로 비상을 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 듯한 태도였다. 강산이야 경기를 죽 보면서, 비상을 걱정했으리란 게 눈에 보였다.
“이렇게 추운데 옷이 멀쩡하다니, 나 참…”
여전히 퍼붓는 비를 쳐다보며, 강산이 그렇게 투덜댔다. 하지만 비상의 귀엔, 더 이상 강산이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비상이 느낄 수 있는 건, ‘젖지 않는데도 차가운’ 비 특유의 느낌과, 오늘 있었던 일과, 흐릿하게 보이던 혜은의 모습뿐이었다. 마치 자기 마음을 비한테 내주기라도 한 착각을 받으며, 비상은 가만히 자기 몸을 때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비를 안 맞는다 한들, ‘따가운’ 느낌은 그대로구나.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리붓는 차가운 장맛비가, 어쩐지 비상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