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6. 제각기 생각하는 것

그렇게 얼마나 껴안고 있었을까.
비상과 현은, 이제 건물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시간도 늦었으니,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모습은 여전히 바뀐 그대로였다. 비상 일행이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다음 날이 찾아와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구나.”
1층에 다다른 뒤, 바깥을 보며 비상이 말했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나라라 한들, 이렇게 깊은 밤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가 있으면 괜찮겠지?”
현은 진지하게 바깥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아무래도 비상이 겁먹었다 여기는 듯했다. 거기에 비상은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현이 자길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은 건물을 나와, 비상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두운 길을 걸었다. 가로등을 빼곤 불빛도 찾기 힘든 깊은 밤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찾기 힘들어, 비상은 속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여성이 비상 일행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성은 걷다 말고, 현을 보더니 몸을 움찔했다. 현도 그걸 알아챘는지, 여성이 자기 곁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가자 조용히 비상한테 물었다.
“내가 무섭나?”
“아무래도 이런 밤중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면 무섭겠지.”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지금 자기 마음을 살폈다. 이런 모습이 되고서야, 비상은 밤중에 길을 걷는 여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런 모습으로 혼자 어둠 속을 걷는 데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지금 곁에 현이 있어서 망정이지, 정말 혼자였다면 비상이라 한들 겁을 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 겪는 거네.”
“그렇지.”
“왜인진 알겠지만, 이런 걸로 오해받는 것도 안된 거 같아.”
“뭐, 아무래도 세상이 흉흉하니까 여성은 조심할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물론, 비상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나마 인상이 낫다 일컬어지는 자신조차도, 밤에 길을 걸으면 그런 일을 겪는 게 흔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현은 그게 무척 신경쓰였는지, 진지하게 그런 걸 물어왔다. 비상 자신은 ‘여성이 그런 마음을 갖는 것도 어쩔 수 없지’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현의 말에 사실 깜짝 놀랐다.
“여성들이 호신술을 배워 남성만큼 강해지거나, 아니면 그런 일 자체가 자주 안 일어나는 세상이 되든가….어렵구나.”
“언젠간 그렇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구나.”
정말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상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어느덧 둘은 비상의 집에 다다라있었다.
그렇게 집에 다다르자,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도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거실 불을 켜는 비상을 바라보며 입을 떼어놓았다.
“아까 안고 나서 생각했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거 같아. 그런데 남자는 울면 안 되지?”
“그럴 리가 있니. 내가 포경수술했을 땐 얼마나 울었는데.”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옛일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 비상도 아프면 울 때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런 일을 겪은 뒤엔 더더욱.
“그게 뭐야? 고래잡는 거?”
“그, 글쎄.”
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되묻자, 비상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어릴 때 일이라 한들, 그 때 일을 떠올리는 건 좀 민망해서였다.
“생리통만큼 아파?”
“그, 그건 어떨까…”
자기도 모르는 걸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기에, 비상은 그렇게 어물쩡 넘어갔다. 사실, 비상은 그 생리통이 얼마나 아픈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겪을 일이 없으니까 나는 평생 모르겠다.”
그 말 뒤로,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길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비상이 바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옛일을 현한테 털어놓은 게 여전히 민망해서, 비상은 여전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 현은 비상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려 했지만, 잘 안 되는 듯했다.
“지금은 잘 안 흐르네.”
그런 말을 하며 소파에 주저앉던 현은, 뭔가 떠올렸는지 ‘아’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딱 쳤다. 그리고는 비상을 부르더니,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걸 입에 담기 시작했다.
“내가 귀 파줄까?”
“응?”
현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비상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눈빛이 그대로라 한들, 자기 나이뻘인 성인남성한테 이런 얘길 듣자 비상은 어쩐지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게 현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하고 싶니?”
그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비상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는 현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비상은 모든 걸 포기한 채, 현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무릎에 뉘면 되지?”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지금 자기보다 더 든든해보이는 현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일단 눕긴 했지만, 이 상황이 어쩐지 민망해서 비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한테 귀를 파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사실, 비상은 이런 일이 다시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한테 이런 거 해주는 건 처음이다.”
그런 말과 함께, 현은 비상의 귓구멍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그런 것 같았다). 그 느낌이 하도 간질거려서, 비상은 누운 채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해본 적이 없니?”
“아니, 친구한테는 해준 적 있어.”
“그 친구는 뭐라고 했니?”
“넌 호기심이 너무 많다고.”
이 말에, 비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대로 현한테 귀를 내줘도 좋을지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어쨌든, 귀 파이는 걸 가지고 큰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게다가 비상은 이미 현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현은 비상의 마음을 모르는지 어떤지, 귀이개를 손에 들고는 비상의 귀에 가져대다기 시작했다.
귀이개가 귓구멍에 닿는 느낌이 묘하게 간질거려, 비상은 온몸이 민감해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은 그런 비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귓구멍을 뒤적이면서 연신 ‘오오’라 감탄하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나.
남의 귀지를 보는 걸 가지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신기해서,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와 함께, 비상은 다시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어쩐지 어제 일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민망한 것 같단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한테 귀를 파인다는 게 이렇게 묘한 거였던가.
자기 귀지가 남한테 보인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단 걸 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현은 신나게 귀지를 파고 있었다. 물론 험하게 파진 않았지만, 귓구멍에 뭔가 느낌이 와닿을 때마다 비상은 몸이 간질거릴 지경이었다. 현이 그런 비상의 마음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좀 아깝지?”
“응?”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던 비상은, 현이 갑자기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마음을 숨긴 채, 현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원래 모습으로 해주는 걸 더 좋아할 거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현은 비상의 귀를 다시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상은 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상이야 이런 걸 해준다 하면 물론 여성이 더 좋기 때문에, 지금 모습보단 원래 모습으로 해주는 걸 더 좋아했을 거다, 란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 그런 말을 꺼내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하며 귀지를 슥슥 파나갔다.
“그치만 지금 난 이 모습이니까 그냥 할게.”
“아. 그래.”
그 말투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비상은 현이 자길 생각해줬단 걸 알 수 있었다. 비상은 거기까지 생각해준 현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도 없기에, 비상은 그대로 눈을 감고 귓쪽에서 느껴지는 그 ‘묘한’ 느낌에 온신경을 기울였다.
그렇게 한쪽 귀가 다 파졌을 무렵이었다.
“어?”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지금 누워있는 몸의 균형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둘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괜찮아?”
어느덧 원래대로 돌아온 현이, 비상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괜찮을 리는 없었다. 지금 비상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 무릎에 고개를 뉜 채, 소파 밖으로 빠져나온 다리를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글쎄, 네가 볼 떈 어떠니?”
“안 괜찮아 보여.”
“그렇지? 자세를 좀 바꾸자. 다른 쪽 귀도 팔 생각이니?”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은 아까와 반대쪽으로 가만히 누웠다. 물론 현의 무릎에 고개를 뉜 채였다. 그저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인데, 묘하게도 비상의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두근거렸다.
“이제 그럴 수 있겠다.”
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꺼냈지만, 비상은 그것 때문에 더더욱 가슴이 쿵쾅댔다. 차라리 이럴 바엔 아까가 더 편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하면 안 될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은 받지 않았을 테니까.
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모습으로 비상의 나머지 귀를 마저 파기 시작했다. 귀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자, 비상은 아까처럼 몸을 살짝 움츠렸다. 원래 모습으로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지금 정말 못할 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는 별 생각없던 현의 숨소리조차, 지금은 비상의 몸을 한층 더 민감하게 만들었다.
아직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무슨 느낌을 받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자기 온몸이 민감해졌단 걸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편했다. 허벅지 너머로 느껴지는 현의 따스한 느낌이 기분좋았다. 귀가 파일 때 그 특유의 느낌도 어쩐지 좋았다. 현이 지금 자기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상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현이 귀이개로 귀를 파고, 비상이 그걸 받아들이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비상은 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모든 시간이 자기들을 떼어놓고 도망간 것 같았다. 끝없는 동중정, 즉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 잔잔함이 거기엔 있었다.
그리고, 비상의 시간도 천천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비상은 자기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가고 있단 걸 느꼈다. 그만큼 지금 자기는 너무나 편했던 것이다.
물론 비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바로 근처에서 느껴지는 현의 냄새가, 비상한테 ‘자면 안 된다’라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비상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 위에 있었다. 이젠 어찌할 도리조차 없었다.
결국, 비상은 귀가 파이는 채로 곤히 잠들고 말았다.
바로 근처에서 귀를 파는 현의 숨소리가, 그런 와중에도 비상의 귀를 간지럽게 했다.

다음 날, 비상은 창에서 새어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소파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었다. 왜 여기서 잤더라, 란 생각을 하다가, 비상은 아까 전, 아니 간밤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현이는 어디로 갔지?
서둘러 현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비상은, 엉뚱한 곳에서 눈에 익은 모습을 찾아냈다. ‘원래’ 모습인 현은, 원래 비상이 자던 침대 위에 엎어져서 곤히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방에서 저렇게 잠들기도 어려울 텐데(요에서 냄새도 날 테고), 비상은 이 애가 참 배짱이 좋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대로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잘 잤니?”
그 말과 함께, 비상은 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현도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비비며 엎어져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걸 보니, 정말 현은 푹 잔 것 같았다.
“어제 무릎 저렸어.”
“미안, 좀 무거웠지?”
“귀 다 팠는데도 아무 말 없어서 보니까 자고 있던데.”
현의 대답을 듣자, 비상은 묘하게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자기는 정말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현보다 먼저 잠든 것이다. 틀림없이 현한테 비상은 좀 묵직할 텐데.
“그래서?”
“깨우는 것도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빠져나왔어. 잘 데가 없어서 여기 왔고.”
“괜찮았니?”
“응. 편했어. 냄새가 좀 났지만.”
이 말에, 비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 냄새가 누구 냄새인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걸 보면, 현은 정말 이성과 만난 일이 드문 것 같았다.
하지만, 비상은 지금 자기 마음을 현한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 잘 됐구나. 씻고 아침 먹을래?”
결국 비상은 그 말을 끝으로, 자기 방에서 걸어나왔다. 현이 마음편히 채비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기 민망한 마음을 숨길 수 있도록.

“그럼 안녕.”
현이 집에서 나간 뒤, 비상은 출근하기 위해 뒤이어 집을 나섰다. 하지만 연구소로 가던 도중, 비상은 자꾸만 누군가한테 ‘상담’을 하고 싶어졌다. 어제 현한테 한 것처럼 패널티 관련이 아니라, 천사한테 들은 얘기에 관한 거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비상은 붉은 밤 팀원들이 무슨 생각으로 ‘놀이’에 임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지만, 비상은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사한테 ‘그런 말’을 들은 지금은 달랐다.
맨 처음 비상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물론 강산이 형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이 고민에 어울리는 상담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 형이라면 틀림없이,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지 말고 놀기나 해’라며 킬킬댈 게 눈에 또렷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연장자를 떠올리던 비상은, 문득 자기가 별밤이 형의 연락처를 갖고 있단 걸 떠올렸다. 아마 전에 ‘그러고 보니 없었던가?’란 말과 함께 주고받았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별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 잠시 시간 되시나요?”
“얼마든지. 일 좀 끝나면.”
그렇게 해서, 둘은 일이 끝난 뒤 근처 건물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왜 옥상이었냐면, ‘평소에 못 갈 데 좀 가보자’라 별밤이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남한테 들려서 좋을 이야기도 아니니, 비상이 그걸 거절할 까닭은 없었다.
잠시 뒤, 비상은 별밤과 함께 근처 옥상에 있었다. 비상은 한 번도 오지 못한 곳이었다. 높은 건물들이 여럿 있었기에 어제처럼 탁 트인 풍경은 아니었지만, 보통 때와 다른 각도로 보는 세상은 그 나름대로 신기했다.
“그래서, 할 말은 뭐니?”
별밤이 가볍게 묻자, 비상은 잠시 망설이다 어제 천사와 했던 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와 함께,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안 보이는 패널티’를 지녔단 것도 같이 털어놓았다. 이 형이 믿든 믿지 않든,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싶어서였다.
“비상이 네 말이 그렇다면 그대로겠지.”
별밤은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 말과 함께 먼 곳을 쳐다봤다. 이제 저녁이 다 되어서인지, 멀찍이선 여기저기 불빛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별밤은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한동안 그 불빛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별밤은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마치 자기 생각도 같이 정리하려는 듯, 담담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투로.
“전에 말했지만, 나한텐 고소공포증이 있어. 이 나이에도 바닥이 유리로 된 덴 절대 못 가. 그런데 이 놀이는 하고 싶더라구. 왜인지 알아?”
“그거야 저는 모르죠.”
“크하하. 솔직해서 좋네.”
비상이 생각하던 걸 그대로 말하자,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그러더니, 이번엔 뭔가 헬리콥터 비슷한 게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걸 가만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순 없지. 그래서 이야기가 생겨난 거야. 대충 이런 얘기였는데, 여기서 이야기는 결국 ‘상상’이라 말할 수도 있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래서 이걸 하는 게 아닐까?”
비상은 그런 말을 하는 별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쩐지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시간을 둔 뒤, 비상은 궁금했던 걸 입에 담았다.
“그거 누가 말한 거예요?”
“치맛속에 별의별 게 다 있는 누님한테서.”
이것도 또 상상 이야기인가.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비상은 이렇게 희한한 걸 많이도 아는 별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형은 삶을 즐기는 방법을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다.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별밤은 죽 말을 이었다.
“난 재밌는 거라면 뭐든 좋아. 그래서 외국어를 배웠어. 거기 재밌는 게 많아서. 재밌는 걸 좇는 삶도 좋지 않냐?”
“형도 참 대단하세요.”
“뭘, 이런 건 질리지도 않아.”
그런 삶을 산 적이 많지 않기에, 비상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별밤은 킬킬대며 난간에 팔을 괴었다. 역시 연장자 형들은 자기보다 여러 모로 삶의 선배였다. 살아온 경험은 물론, 이렇게 ‘사는 방법’에서도.
“나도 회사원이긴 하지만, 부업으로 번역도 하거든.”
“네?”
“그냥 좋아서. 가소설이라고, 다른 소설보다 좀 전위적인 걸 우리말로 옮기고 있어.”
“참 형답네요.”
“그렇지?”
어느덧 밤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밤이 짧은 여름이라 한들, 밤의 존재감마저 흐릿하진 않았다.
“옮기면서 본명을 쓰는데, 아무도 본명인 줄 모르더라고. 심지어 트위터도 하는데 아무도 본명인 걸 안 알아주더라. 붉은 밤엔 동지가 많아서 편하다.”
“아, 그러시겠네요.”
비상 역시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비상이 아니라도, 그런 경험을 한 이는 여럿 있을 터였다. 특이한 이름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이왕하는 거 증거도 보여줄까?”
그 말과 함께, 별밤은 자기 핸드폰으로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아마 자기가 옮겼다는 그 책인 듯했다. 맨 처음 비상의 인상에 강하게 남은 건, 또렷한 붉은빛이었다. 책 구석엔 그럭저럭 큰 글씨체로 ‘이별밤 옮김’이라 적혀있었다.
“진짜 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너도 참 강산이만큼 말을 막 한다니까.”
별밤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킬킬댔다. 비상도 좀 실례가 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저걸 보면 기분이 참 묘했다.
“그건 그렇고, 딱 요즘 애들이 읽을 만한 표지네요.”
“너도 편견이 참 없구나.”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별밤은 그렇게 대답하며 씩 웃어보였다. 물론 비상은 생각한 걸 그대로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저 형한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책이 무슨 내용이냐면 말이야.”
그러던 중, 별밤이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여전히 눈길은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에 있었다. 거기에 누가 있는지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라 말하기가 참 어려운데, 대충 이런 거야. 옆동네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대장금같은 이야긴데, 그게 비극이 되고 마는 거지. 나도 읽으면서 참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 말 들으니 읽고 싶어지는데요.”
“여자들이 얽힌 비극에 관심있으면 도움될 거다. 그 사람 지은이의 말에 장난을 좀 쳤는데, 알고 보니 웃기더라고…어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별밤은 손목시계를 보다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비상도 시계를 보니, 이제 조금 있으면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어차피 걸어가도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아서, 결국 둘은 경기하는 건물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물론 다리로 뛰는 게 아니었다. 마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여기서 저기로 곧바로 ‘뛰는’ 것이었다.
먼저 비상이 조심스레 옥상 난간을 박친 다음,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뛰었다. 별밤 역시 비상을 따라왔다.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별밤은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날 고소공포증이라 지금 누가 믿겠냐? 나 참.”
어쨌든 둘은 그렇게 건물들을 ‘뛰어다닌’ 끝에, 사람들이 여럿 모인 건물 옥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자기보다 높은 건물로 ‘뛰어가는’ 데엔 좀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래도 비상 일행은 무사히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너희들도 그렇게 오냐?”
비상 일행이 옥상에 내려앉자, 의영이 이걸 보고는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마치 전에도 이런 풍경을 여럿 봐온 듯한 모습이었다.
“저희말고 또 누가 있어요?”
“아까 강산이가 신나게 뛰어왔고, 그리고 대한이였던가? 걔는 만날 뛰어오던데.”
비상이 묻자, 의영은 그 말과 함께 킬킬댔다. 강산이 형이라면 뭐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뛰어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른 한 명은 비상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한이?”
“몸집있고 안경쓴 애 있어. 연소자 중에서.”
별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상은 전에 한 번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단 걸 떠올렸다. 나중에 만나면 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돌아보자, 지금 만나면 조금 민망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바로 혜은이었다.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주고받는 건 어려웠던 것이다.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아마 혜은도 그렇게 여길 터였다.
그 때, 혜은이 조금 당황한 것처럼 입을 뗐다.
“자, 잘 돌아가셨어요?”
“네.”
“다행이다…”
비상의 말에, 혜은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가 걱정됐던가.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걱정해줄 건 없는데.
“그럼 나중에 뵐게요.”
그 말과 함께, 혜은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비상은, 그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대체 왜지, 라 생각하던 순간, 저 쪽에서 몸집 큰 남자 둘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 명이 강산이 형이란 건 알아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비상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언뜻 보기에 20대 전반쯤이었는데, 검은테 안경을 썼으며 강산이 형만큼 몸집이 좋았다. 강산과 별밤이 몸집은 크지만 살이 붙은 건 아니었던 것과 대볼 때, 지금 다가오는 남자는 어느 정도 살집도 있는 것 같았다. 뚱뚱하다 말할 것까진 없었지만, 덕택에 강산이나 별밤과 달리 좀 더 ‘커다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사람 좋아보이고 유쾌한 성격이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강산과 별밤처럼, 저 남자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부류란 걸 뜻했다.
이윽고 비상 가까이 오자, 강산은 그 남자의 허리를 자기 굵은 팔로 두른 뒤, 킬킬대며 남자를 소개했다. 이걸 보면, 둘은 전부터 죽 인연이 있었던 듯했다.
“비상이 넌 모르지? 얘가 신대한이다. 전에 말한 다리 중 한 명.”
“다리라뇨.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저.”
“뻥까네. 이럴 때 술이 있어야 하는데.”
몸집이 있는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겸손한 말투로 대한이 대답하자, 강산은 그 큰 등을 연달아 치며 다시 한 번 킬킬댔다. 비상도 지금까지 들었던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윤비상입니다.”
그 말과 함께, 둘은 손을 맞잡았다. 과연 몸집만큼 손힘도 세다고 해야 할까, 비상의 손을 잡는 팔뚝에 실린 힘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강산과 별밤도 마찬가지지만, 이 친구도 잘못하면 사람 몇 명 쓰러뜨리고도 남겠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어쨌든 악수 뒤, 대한은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마치 지금까지 인사드리지 못한 게 무척 미안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작 인사드려야 했는데. 제가 그 신대한입니다. 아무쪼록 잘…”
“제가 그, 란 말은 뭐냐?”
“아니, 형이 제 말을 하셨다기에…”
“그래도 건방진 거 아냐?”
강산이 저렇게 대한을 놀리긴 했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비상은 잘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저 신대한이란 친구는 연소자 사이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듯했다. 그 쪽에서 리더십을 꽤 잘 보이는 걸로 소문났다고 강산은 다시 킬킬댔다. 어쩌면 그래서, 전에 강산이 대한을 ‘다리’라 일컬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거 말고 어디 보자. 더 할 말이…”
“됐습니다. 형님. 이제 그만 하죠.”
강산은 말을 이으려다. 대한한테 입이 막힌 채 혼자 버둥대고 있었다. 뭐 숨길 일이라도 있나. 비상이 그런 생각과 함께 그걸 지켜보는 사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강산은 둘을 번갈아보며 이런 걸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안경이네. 시력 안 좋냐?”
“예. 좀 많이…”
“어디 한 번 써 보자. 좀 줘봐.”
그렇게 대한한테 안경을 건네받은 강산은, 곧바로 쓴 뒤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강산은 갑자기 뱅뱅 돌며 옥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어지러워서 견딜 수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한도 상황이 심각하단 걸 알았는지, 저만치 사라져가는 강산을 보며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혀, 형. 괜찮으세요?!”
“신발. 내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가 시력이 지지리 좋단 거였는데…이런 걸 어떻게 쓰냐?!”
“형, 저 스페어 없어요!!”
“스페어가 뭐야, 이 자식아!”
대한이 더 다급해진 말투로 그렇게 외치자, 강산도 질세라 그것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입장이 뒤바뀐 태도였다.
“예비가 없다구요. 안경 비싸요. 형…”
결국 대한은 그 말과 함께 울상을 짓고 있었다. 물론 안경과 인연이 없는 강산은 모르겠지만, 같이 안경을 쓰는 비상은 그걸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예비가 없단 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비상이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예비가 없는데?!”
“저 가난한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형도 참.”
“너도 참 고생이다. 옛다. 죽는 줄 알았네.”
그 말과 함께, 강산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안경을 주인한테 돌려줬다. 대한은 안경이 그렇게 걱정됐는지, 어디 깨진 데는 없나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안경은 무사한 듯했다.
“나도 한 번 써볼게.”
그게 그렇게 신기했던지, 바로 옆에 있던 현(원래 모습)이 비상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마 자기 안경을 써보고 싶은 듯했다. 비상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이런 말과 함께 자기 안경을 벗었다.
“저 형처럼 막 다루진 마.”
“응.”
“야, 잠깐. 니들 뭐라고 했냐?!”
그러거나 말거나, 비상은 현한테 안경을 건넸다. 이렇게 안경을 벗고 있으면, 주위가 온통 안개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대한보다 자기 시력이 더 좋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대본들 아무 쓸데도 없단 걸 비상은 잘 알고 있었다.
현은 바로 안경을 쓰더니, 이윽고 어지러워졌는지 아까 강산처럼 여기저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강산이 그러고 있을 땐 그 덩치로 참 잘하는 짓이다, 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이건 결코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애정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현이 그러고 있으니 희한하게도 어쩐지 재밌게 느껴졌다. 물론 강산도 재밌긴 했지만, 몸집이 다른 것만으로도 이렇게 느낌이 다르리라곤 비상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강산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여전히 빙글대는 현을 보며 이렇게 물어왔다.
“왜 같은 동작을 하는데 현이가 더 나아보이냐?”
“인덕이지.”
“내가 인성 개판이란 말이야, 엉?”
강산이 그 말과 함께 비상의 멱살을 잡는 사이에도, 현은 여전히 비상의 안경을 쓴 채 빙글빙글 돌았다. 강산과 달리, 그 어지러운 느낌조차 신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저러는 것도 안 되겠다 비상이 생각할 즈음, 같은 생각이었는지, 강산이 이런 말과 함께 몇 번이고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던 현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야야, 현아. 너 그러다가 팽이되겠다. 그만 해라.”
드디어 현이 멈추자, 강산은 현한테서 비상의 안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궁금하단 표정으로, 그 안경을 이번엔 자기가 쓰기 시작했다.
“누구 시력이 더 나쁜가 보자. 어디어디…”
그렇게 말하더니, 강산은 아까처럼 또 빙글빙글 돌다가 옥상 난간에 가까스로 몸을 기댔다. 그리곤 아주 짜증난다는 말투로, 이렇게 외치며 투덜댔다.
“신발. 이런 쓸데없는 짓을 내가 왜 했지?”
“형이 바보라서 그렇지.”
“야, 윤비상. 너 진짜 맞고 싶지?!”
비상은 헛웃음과 함께, 어렴풋이 보이는 쪽으로 다가가 강산한테 안경을 건네받았다. 다행히도 맞진 않았다. 얼른 다시 쓰자, 그제야 세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역시 비상한테 안경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도 붉은 밤은 경기가 없어서인지, 아주 느긋한 분위기였다. 비상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앞으로 있을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에서 비상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의영이었다. 의영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한 채, 난간 가까이 다가와 비상한테 말을 걸었다.
“비상아, 네 경기 말인데.”
“네?”
의영의 말에 따르면, 비상의 경기가 조만간 시작하는 듯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비상도 ‘놀이’를 하는 사람이니 언젠가 경기에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좀 갑작스레 느껴지긴 했지만.
“상대는 금빛 밤이야. 너도 알겠지만…”
“그 상대가 누구죠?”
비상의 말에, 의영은 아주 의외인 사람을 입에 담았다. 그걸 듣고서야, 비상은 왜 아까 혜은의 태도가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경기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은이었던 것이다.
비상은 숨이 막히는 걸 느꼈지만, 물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아마 혜은은 이걸 알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일부러 온 것도, 그것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 다른 팀의 경기가 끝난 뒤, 비상은 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현과 있으면 마음이 참 편했다. 어쩌면 ‘같은 처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상이 현한테 그 일을 털어놓자, 현은 ‘호오’란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현의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비상에겐 참으로 편하게 느껴졌다.
“별의별 우연이 다 있지?”
“그러게.”
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엉뚱한 말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보면 참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비상이는 뭐든 잘 할 거 같아.”
“뭐, 그런 말은 많이 듣는 편이지. 나야 잘 모르겠지만.”
비상이 그런 말을 들어온 건, 정말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기는 다른 이한테 그렇게 보이는 듯하니까.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게 신기해.”
현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못하는 게 많은 듯했다. 자기는 집안일은 물론, 신발끈도 잘 못 묶고, 심지어 때도 잘 못 민다는 게 현의 말이었다. 그래서 현의 눈엔 비상이 마냥 신기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게 신기하니?”
“응.”
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이런 말을 덧붙이며, 멀리 있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모습이 달라지면 잘할 줄 알았는데 그대로더라구. 아깝다.”
“…내가 나중에 요리라도 가르쳐줄까?”
“난 진짜 아무 것도 못 하는데.”
현이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바람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았다. 현이 집안일을 얼마나 못하는지는 비상도 몰랐지만, 아무튼 하나하나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아. 라면빼고 할 수 있는 요리가 얼마나 되니?”
“계란프라이 정도.”
그 말을 들은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떼며 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할 수 있는 요리가 그 정도라면, 일단 쉬운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게 좋을 터였다.
“언제 집에 가서 쉽게 할 수 있는 걸 알려줄게. 너도 고생이 많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은 것에 비상은 놀랐지만, 여전히 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눈을 감고 비상한테 머리카락을 맡긴 뒤, 신기하단 듯 입을 뗐다.
“신기하다. 이러니까 마음이 편해.”
난 이 애한테 도움이 되고있는 걸까.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에서 현과 헤어졌다.

집에 돌아온 비상은, 아까 옥상에서 별밤한테 받은 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별밤이 사진으로 보여준, ‘자기가 옮긴’ 작품이었다. 웬일로 실물도 가지고 있었기에, 비상이 빌려오게 된 것이다.
침대에서 가만히 책을 읽기 시작한 비상은, 점차 그 내용에 빠져들게 되었다. 별밤이 말한 대로,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려진 독특한 작품이었다. 물론 비상은 외국 문화나 민속적인 데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주석이 잘 달려있어서 내용을 따라가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걸 용케 우리말로 옮겼구나.
언뜻 봐도 어려워보이는 고유명사를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은이의 말까지 다 읽고 나자, 묘하게 여운이 남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비상은, 지은이의 말 뒤에 아직 남은 페이지가 있단 걸 알아챘다. 옮긴이의 말을 아직 읽지 않았던 것이다. 이 형은 이런 데 뭐라고 쓰는 걸까. 호기심을 어쩔 수 없었던 비상은, 얼른 그 페이지를 넘겼다.
언뜻 보고 느낀 건, 이 형도 참 평범한 글을 쓴다는 거였다. 생각보다는 참 평범한 옮긴이의 말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글귀를 따라가다가, 비상은 명치를 뭔가로 두들겨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기 눈이 닿은 대목에,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의 말에 좀 장난이 있었는데, 그건 참 우리말로 옮기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힌트를 여기 공개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 정자왕입니다! 에헴.
이 형은 대체 불특정다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닌 본명을 걸고 이런 걸 잘도 쓴 별밤을 생각하니, 비상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게 전국 서점에 널려있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자, 비상은 자기가 더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자기 일도 아닌데.
그렇게 책을 옆에 둔 채, 비상은 잠자리에 들려 했다. 하지만 아까 일도 있어서인지,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혜은과 싸우게 됐다는 게, 비상의 마음을 자꾸만 어지럽히고 있었다. 하지만 대진표가 그렇게 짜인 이상,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봐주거나 그럴 수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놀이라 한들, 혜은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걸 진지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비상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 때, 마치 텔레파시라도 되는 것처럼 메시지가 왔다. 게다가 상대방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은이었다. 어쩌면 혜은도 그 일로 잠을 설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말 들으셨어요?
-네.
혜은의 메시지에,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잠시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 물론 이번에도 혜은이었다.
-저, 봐주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럼요.
마치 자기 마음을 읽힌 것 같단 생각과 함께,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며칠 뒤 일이라곤 해도, 자기와 ‘희한한’ 인연이 있던 이와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되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것도 온힘을 다해서.
-이런 우스운 일에 진심으로 대하는 게 부끄러우신가요?
전에 천사가 했던 말이, 다시 비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대로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 이런 말이었을 터였다. 비상은 그 뒤로, 의식하든 안 하든 그 말을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 자꾸만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이의 눈으로 보면, 자기가 이런 걸로 고민하는 건 틀림없이 우스운 일일 거라고. 그런 우스운 짓을 하는데, 왜 패널티까지 각오하고 그걸 하고 있냐고.
하지만 비상은,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는 자기가 지금 ‘하고 싶다’고 믿는 일을 할 생각이라고. 비록 그것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 그런 결론이 나는구나. 나란 놈도 참.
비상은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이면 이 마음도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를 속으로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