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5.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마주본다는 것

다음 날, 비상은 눈을 떴다. 하지만 잠기운에서 깨어나자마자, 비상은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자기가 놓인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지금 비상은, 혜은한테 껴안긴 채 잠에서 깼던 거였다.
사실, 혜은이 ‘먼저 껴안았다’고 짐작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몸을 뒤척이다, 비상 자신이 알아서 혜은 쪽으로 굴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원래 모습이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비상은 지금 자기 얼굴에 닿는 말랑말랑한 게 뭔지 똑똑히 알고있었던 것이다.
즉, 지금 비상은 혜은의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힌 채, 꼭 껴안아져있는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자기보단 혜은의 팔이 더 세므로, 비상은 이걸 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함부로 풀 수도 없었다. 잘못해서 혜은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일이 더 꼬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모습이었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얼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촉에 몸 전체가 간질대는 걸 느끼며, 비상은 여전히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었다. 얼른 안 일어나면 혜은이 깰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응?”
그 때, 혜은이 잠에서 깼는지 몸을 살짝 뒤척였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혜은은 비상을 자기 가슴팍에 껴안은 채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우, 우앗, 죄송해요!”
그 말과 함께, 혜은은 비상을 껴안던 팔을 재빨리 풀었다. 이제야 몸이 자유로워진 비상은, 일단 혜은한테서 조금 떨어진 뒤 침대에서 일어나앉았다. 아직도 그 감촉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잊기로 했다.
이제 이런 데 두근댈 나이도 아닐 텐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비상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자꾸만 그 기억 및 감촉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죄,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혜은은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걸 볼 때, 혜은은 그 전까지 자기가 비상을 껴안은 채 잤단 걸 전혀 몰랐던 듯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다 해야 할 거 같은데요.”
“왜…아!”
비상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혜은은, 이제야 ‘그 까닭’을 알았는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민망한지 잠시 눈길을 돌리고서, 다시 한 번 비상한테 고개를 숙였다.
“그, 그, 전 괜찮아요. 제 잘못이고…”
“어쩌면 제가 먼저 그리로 갔을지 모르니, 제가 더 죄송하죠.”
그 말 뒤,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말하자면,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상은 지금, 남녀관계 이상으로 묘한 분위기가 침실을 둘러싸고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혜은이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방금 일 때문에, 판단력이 좀 영향을 받은 듯했다.
“저, 이, 이렇게 된 거 같이 씻을까요?”
“문제가 되지 않나요?”
“지, 지, 지금이라면…제가 등이라도 닦아드릴게요. 그러니까…”
혜은의 말을 듣고, 비상은 자기 모습이 아직 ‘바뀐 그대로’란 걸 깨달았다. 실제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익숙하지 않은 호텔 잠옷 및 더 익숙하지 않은 가슴팍의 ‘그것’이 보였다. 그러니, 혜은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어차피 뒤돌아보고 있으면, 앞이나 혜은의 알몸은 절대 못 볼 터였다.
결국, 비상은 이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역시 판단력이 흐려진 거 같단 생각과 함께.
“그렇다면 못 할 까닭은 없네요.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그렇게 해서, 둘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비상이 먼저 들어가 옷을 벗은 뒤 등을 보인 채 앉은 뒤, 혜은이 들어온 것이었다. 비상이 그렇게 ‘동성끼리도 잘 안 보이는’ 등을 보이자, 혜은은 조심스레 미지근한 물을 부은 뒤 등을 정성껏 닦기 시작했다. 마치 평소부터 죽 그렇게 해온 것처럼.
“원래 살결이 이렇게 고우세요?”
“아마 보통 성인남성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둘 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적어도 비상은 그랬다). 비상은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가만히 껴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편했다.
“저, 괜찮으세요?”
“네.”
비상은 가볍게 대답하며, 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혜은의 손길을 의식했다. 물론, 혜은은 욕실에 있으므로 아무 것도 안 걸친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릎까지 꿇은 채 맨살로 자기 등을 닦아줄 리가 없었다.
“뭐라도 걸치신 건가요?”
“아, 까, 깜박하고…”
“경계심이 너무 약하신 거 같은데요. 저도 일단 성인남성인데요.”
“지, 지금은 괜찮아요. 아하하…”
혜은의 말을 등 뒤에서 들으며,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이 분도 주위에서 푼수란 말 많이 듣겠는데, 란 생각과 함께. 물론 본인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비상도 그게 나쁘다 여기지 않았지만.
“그, 그런데, 정말 모습이 바뀌셨네요. 이 정도일 줄은…”
“그렇죠.”
혜은이 조심스레 묻자, 비상은 가만히 대답했다. 아무리 자기가 이렇게 혜은한테서 등을 돌리고 있다 한들, 그 ‘앞쪽’이 안 보일 리는 없었다. 혜은은 자기와 달리, 전혀 눈을 감고 있지 않을 테니까.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다지. 전 괜찮아요.”
참고로, 문제의 그 ‘안 보이는 패널티’에 관해선 씻기 전 비상이 이미 혜은한테 설명했다. 혜은은 도무지 그게 이해되지 않는지, 듣는 동안 죽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비상도 어느정도 혜은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비상이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을 때, 갑자기 그 ‘사태’는 일어났다.
“…어?”
자기도 모르게, 비상은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자기 모습이, 틀림없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눈을 감고있다 한들, 그 특유의 느낌을 비상이 모를 리 없었다.
대체 왜 하고많은 순간 중 지금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지는 비상이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얼른 나가세요.”
비상이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외쳤지만, 혜은은 좀처럼 기척을 지우지 않았다. 아마, 이 상황이 너무나 말도 안 돼서 몸이 굳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거의 원래대로 돌아갔단 걸 깨달은 비상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20년간 죽 봐온 자기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이젠 시간도 더 남아있지 않았다.
“얼른요!”
“아, 네!”
혜은도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후다닥 욕실을 나섰다. 비상은 잠시 거기에 앉아있다, 다시 자기 몸을 샅샅이 훑었다. 아무리 봐도 이 모습은, 20년간 살아온 그 모습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다른 모습’일 때는 항상 눈을 감고 씻으니 완전히 돌아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비상은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씻기 전 비상과 혜은 사이에 있었던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씻은 뒤에도 자기 등에 남아있는 그 특유의 ‘누가 씻어준 느낌’도.

“아, 아까는 죄송해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옷을 입은 뒤 욕실에서 나오자, 혜은 역시 옷을 입은 채 비상한테 고개를 숙였다. 그 말투로 볼 때, 혜은은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 여기는 듯했다.
“다 알면서 이렇게 하겠다 한 제 잘못이죠.”
서로 고개를 숙인 뒤, 둘은 또 말이 없었다. 어제보다 훨씬 더 깊고 민망한 침묵이 침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커튼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아침햇살만이, 그런 둘을 옅게 비출 뿐이었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비상은 다시 고개를 숙여, 혜은에게 인사했다. 혜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네?”
“안 보이는 패널티를 이해해주신 거 말이에요.”
“아, 아니예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오늘 실례했어요.”
그 말과 함께, 혜은은 허겁지겁 침실을 나왔다. 비상이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단 말투였다. 비상도 따라나가, 여러 일이 있었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끝마쳤다. 틀림없이 왔다간 사람이 다른데도, 호텔에선 신기하리만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텔 앞에서 조금 걸은 뒤, 둘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딱히 까닭은 없었지만, 주고받아서 나쁠 까닭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랑 오늘, 고맙고 죄송했어요.”
혜은은 자꾸만 미안하단 듯, 고개를 자꾸만 숙였다. 아무래도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죠.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비상은 그 말을 끝으로, 혜은한테 등을 돌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라도 꾼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밤도 아니고 다른 밤, 그것도 자기와 나잇대조차 비슷한 사람과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안단 말인가. 어쩌면 하늘은 비상 일행을 구경하고 있다가, 이 모든 일을 ‘일부러’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런 생각에 깊게 빠진 나머지, 비상은 바로 옆에 강산이 지나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물론 강산은 이를 알고 있기에, 그 센 팔힘으로 비상의 어깨를 확 흔들었다.
“야. 윤비상. 형한테 인사 하나 없냐?”
“누군가 했네. 지금 정신이 없다보니…”
“뭔 일났는데? 그것보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결국 비상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에 걸쳐 있었던 일을 ‘몇가지만 빼고’ 강산한테 말했다. 이 형도 자기 ‘안 보이는 패널티’는 알고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법한 데만 빼면 설명하는 건 쉬웠다.
“그렇게 들키는 거냐?!”
비상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강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비상도 이 형과 같은 생각이었다.
“가면 갈수록 웃기네. 하늘이란 작자는 왜 이런 놀이를 하라는 거야.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그러던 중, 갑자기 강산한테 메시지가 온 듯 핸드폰이 울렸다. 강산은 핸드폰을 꺼내보더니, ‘별밤이 이 자식’이라며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형이 뭐라고 하던데?”
“바로 근처에 있단다. 우리가 안 갈 수 없겠지?”
그렇게 해서, 비상은 강산과 함께 별밤이 있다는 카페 쪽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은 참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구나, 란 생각과 함께.

카페에 다다르자, 별밤은 물론 다른 연장자 몇 명이 비상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정장차림인 별밤과 캐주얼한 사복을 입은 잎새, 그리고 역시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파랑이었다.
“야, 얘들 있단 말은 안 했잖아?”
“있어서 나쁠 게 뭐 있냐?”
“뭐, 그건 그렇지.”
짐작치 못한 상황에 어이없어하던 강산은, 별밤의 말을 듣자 곧바로 포기한 다음 근처 빈자리에 앉았다. 비상 역시 강산을 따라, 그 옆에 가만히 앉았다.
“어, 비상이 표정이 안 좋은데?”
“파랑아. 오늘은 좀 봐줘라. 사람 살다보면 이것저것 있잖냐.”
용케 비상의 표정을 알아챈 파랑이 그렇게 묻자, 강산이 바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럴 때는 이 형이 참 고마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누가 하는 거지?”
“우리 밤은 없어. 그냥 놀고먹으면 돼.”
비상이 묻자, 별밤이 가볍게 대답했다. 오늘은 둘 다 파란 밤 대 금빛 밤인 듯했다. 그 말대로라면, 붉은 밤이 할 일은 고작해야 혹시 있을 판정뿐이었다.
“어유. 오랜만에 쉬고 좋네.”
“원래 남이 하는 거 구경하는 게 가장 재밌잖아. 불구경, 싸움구경…”
강산이 그렇게 말하자, 잎새가 그 말과 함께 킬킬댔다. 강산도 그 말에 동감하는지, ‘그거야 그렇지’라며 잎새를 따라 킬킬댔다. 그런 식으로 얘기가 오가다, 갑자기 강산이 이야기를 다른 데로 바꿨다.
“근데 우리 밤도 대단하지 않냐? 평균 이하들치곤 잘 하는 거 같다. 진짜.”
“야, 강산아. 누구 맘대로 사람을 평균 이하라 말하는 거야?”
“그럼 뭐, 자랑할 거라도 있냐?”
자기 말에 별밤이 킬킬대자, 강산은 열받은 듯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별밤은 무척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여깄는 놈들 중 금강산 수학여행 다녀온 놈 있어?”
그 말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 까닭은 뻔했다.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쉽게 하기 어려운 체험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언제 다녀온 거야?”
“우리 학년주임이 좀 기가 세서 말이야. 억지로 가라 하더라고. 그 땐 아직 갈 수 있었거든.”
강산이 열받는 듯 묻자, 별밤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걸로 볼 때, 별밤은 정말로 이게 자랑거리인 듯했다.
“별밤아. 안 잡혀갔어?”
“당연하지. 직접 가서 보면 참 여러생각 들더라. 산에도 올라가봤고. 근데 걸작인 건 그게 아니라…”
잎새가 놀리듯 묻자, 별밤은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별밤의 수학여행은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다이나믹하게 느껴졌다.
별밤 말에 따르면, 돌아오는 길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버스가 막혀, 결국 3박4일 수학여행이 하루 더 늘었다고 했다. 금강산에 수학여행 날짜가 하루 더 늘다니. 참 하기도 힘들 듯한 경험이었다.
“‘그 때 학년주임 표정이 참 걸작이었지. 다들 집에 올 때쯤 되니까, ‘집에 오는 게 이렇게 감동적일 줄 몰랐다’란 말이 사방에서 나오더라. 크하하하.”
“아무튼 쟨 겪는 일도 이상해요. 진짜.”
강산은 그 말이 그렇게 웃겼는지, 탁자에 엎어진 채 큭큭대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둘도 참 죽이 잘 맞는 콤비였다.
이렇게 된 이상, 연장자들은 갑자기 ‘자기가 겪은 희한한 일’을 하나둘씩 자랑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뜬금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전에 한 이야기가 ‘자랑할 게 있긴 있냐?’였으니 무척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는 했다.
“아, 맞다. 고등학교 때 가출해서 이틀동안 안 들어간 적 있는데, 이건 어때?”
“파랑이 니가?!”
파랑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꺼내자, 강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강산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연장자 형들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 그 때 부모님하고 마음이 좀 안 맞아서.”
“그럼 그동안 어디서 지냈는데?”
“뭐, 그 시절이면 PC방이지. 지금이라면 찜질방쯤?”
강산의 물음에, 파랑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보였다. 지금 웃고있긴 하지만, 당시라면 그다지 웃을 일이 못 되는 이야기인 듯했다.
“너 게임 안 하잖아. 거기서 뭘 한 거야?”
“그래서 이틀 내내 우리나라에 있는 사이트는 다 돌아다녔어. 희한한 사람 왔다고 주인아저씨가 서비스로 컵라면 끓여주시더라. 아하하.”
“저 놈도 참…”
강산의 질문에, 파랑은 다시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그걸 보면서 비상은, 전에 은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때 한 ‘붉은 밤은 이상한 팀’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전혀 틀리지 않은 말일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오늘 우리 팀 경기하는데, 구경하러 올 거죠?
메시지가 와서 확인해보니, 자기가 생각하던 그 은솔이 이런 말을 보내왔다. 다들 ‘자기가 얼마나 희한한 인간인가’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와중, 비상은 미안하지만 잠시 은솔의 메시지에 대답하기로 했다.
-갈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강산이 오빠는 있어요?
-우리가 이름을 댔던가?
-들으면 알죠. 그리고 나중에 상록 오빠한테 물어봤는데, 붉은 밤에 엄청 시끄럽고 호탕한 사람이 있대요.
은솔의 메시지를 보며, 비상은 마음속으로 국지적 유명인이 된 강산을 축하했다. 물론 전혀 진심이 아니었지만.
-걱정 마. 같이 갈 거야.
-그럼 그 때 뵈요~.
“윤비상, 너 뭐하냐?”
비상이 은솔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눈치챈 강산이, 그걸 어깨너머로 보며 이렇게 물어왔다. 물론 숨길 일은 전혀 아니었기에, 비상은 지금껏 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 기집애는 참…”
“잘됐네. 각 밤에서 유명인사 되고.”
“뭐가 어쩌구저째?!”
강산이 머리를 부여잡는 걸 보고 비상이 이렇게 말하자, 강산은 곧바로 비상의 멱살을 잡으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근처에 있던 연장자 형, 즉 별밤 및 잎새가 강산의 대폭주를 막아냈다.
“야야, 솔직히 강산이 니가 유명해지는 건 시간문제 아니었냐?”
“이별밤 이 자식. 몸집 좀 있다고 사람을 무슨…”
그 개꼴을 보고 있던 비상은, 갑자기 천사를 떠올렸다. 맨 처음 천사를 만났던 그 옥상이었다. 이제 다른 곳에서 경기를 하니 거기에 갈 일도 없어졌지만, 어쩐지 지금 가면 천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 반이었다.
“어디 좀 다녀올게.”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일어났다. 별밤과 주먹다짐을 하던 강산은, 놀랐단 듯 비상을 쳐다봤다.
“어딜 가는데?”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비상은 그 말을 끝으로, 다른 형들한테 인사한 다음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거리로 나오자마자,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가는 곳은 천사를 만난 그 옥상이었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스스로도 신기해지는 비상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 곳에 가보고 싶었다. 만약 자기 생각이 그저 기분 탓이라 할지라도.

오랜만에 남의 회사 옥상에 다다른 비상은,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잠시 눈을 깜박인 뒤 앞을 보자, 거기엔 틀림없이 천사가 있었다. 오늘 날씨가 조금 흐린데도, 천사는 여전히 뭐라 말할 수 없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보통 이가 아니라 광고하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제가 올 줄 알고 있었나요?”
비상이 묻자, 천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면, 역시 이 천사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도 아닌 존재이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럼, 제가 물을 게 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비상 씨가 알아채지 못한 것조차 알고 있죠.”
비상의 말에, 천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대답은 비상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슨 소리죠?”
“혹시, 이 놀이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진 게 아닌가요?”
천사의 대답에, 비상은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천사가 자기 속을 꿰뚫어본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기가 이렇게 동요하는 건 많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그런 비상을 본체만체한 채,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재밌죠. 별 게 아닌 우스운 일이라 한들, 진심으로 대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놀이’란 말씀이신가요?”
“글쎄, 어떨까요?”
그 말에, 비상은 잠시 생각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이 ‘놀이’란 것이, 얼마나 수상쩍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이 놀이가 우스워서, 진지하게 대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 여기시나요?”
“왜 하늘이 이렇게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은데요.”
비상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이 놀이가 수상쩍다거나 진지하게 대하는 게 우습다 여기는 이는 한두 명이 아닐 터였다. 비록 ‘너무나 현실을 넘어선’ 상황이라 아무도 입에 담고 있지 않긴 하지만.
“그건 비상 씨, 그리고 다른 분들이 스스로 생각해야 할 문제인 거 같네요.”
잠시 생각하던 천사는, 이윽고 이런 답을 내놓았다. 비상이 망설이고 있을 때, 천사는 이어서 자기가 할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강한 말투로.
“비상 씨는, 이 놀이를 ‘진지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 여기시나요?”
비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오’라 대답하는 건 쉬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 말에 동의하는 자기자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놀이를 하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긴 했지만.
“아마 제 말의 뜻도, 스스로 생각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이만.”
천사는 그 말과 함께, 여기서 사라지려는 듯 좀 더 강한 빛을 냈다. 하지만 비상한테는 아직, 천사한테 물어야 할 게 조금 남아있었다.
“그럼, 천사가 이 놀이를 하려던 까닭은 뭐죠?”
“아까와 비슷한 질문이네요. 한 마디만 더 하자면, 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알 수 없는 존재랍니다. 그럼 정말로 이만.”
천사는 그 말을 남긴 채, 정말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비상은 거기에 가만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까 천사가 말한 ‘이 놀이가 우스워서, 진지하게 대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 여기시나요?’란 말이, 자꾸만 비상을 잡곤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다른 이의 눈으로 보면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그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런 ‘유치한’ 놀이를 진심으로 하고 있다니, 오히려 그런 말을 안 듣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비상은 ‘무조건’ 그렇다 여겨지진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이 놀이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사는 대체 자기한테 뭘 말하려 한 걸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며, 비상은 오늘 모이기로 한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보니, 벌써 해가 천천히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비상은 오늘의 목적지인 건물 앞에 다다랐다. 전에 들은 대로, 오늘은 붉은 밤의 경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 붉은 밤이 할 일은, 고작해야 구경 뿐이었다. 만약 경기가 판정으로 넘어가면 그나마 일이 있겠지만, 그럴지 어떨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디 갔다왔냐?”
그렇게 비상이 옥상으로 올라가자, 곧바로 강산이 말을 걸어왔다. 그 말투로 볼 때, 강산은 비상이 정말 어디에 갔는지 궁금해한 거 같았다.
“그냥 일이 있어서.”
“오빠들, 안녕히 지내셨어요?”
“야, 너 뭐야?!”
그렇게 비상이 대답한 뒤, 갑자기 둘 사이에서 은솔이 모습을 쑥 드러냈다. 참으로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강산은 정말로 기겁을 하고 있었다.
“너, 너는 무슨 귀신이냐?!”
“에이. 이런 건 칭찬해야죠. 그죠?”
강산이 뭐에라도 씌인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은솔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강산이 실제로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은솔이 눈을 반짝이며, 이런 말과 함께 강산의 두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그, 강산 오빠. 제가 사실은 그 말 들은 다음 초록창에 코딱지라 찾아봤는데요. 진짜 예쁘던데요. 그거 칭찬한 거 맞죠?”
“무, 무슨 헛소리야! 그냥 한 말이지!”
강산은 얼굴까지 빨개진 채, 어이없다는 말투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연하, 그것도 고등학생한테 양손이 잡혀도 당황하는 건가, 비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긴 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자꾸만 재밌게 느껴졌다.
“에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죠? 오빠 사랑해요!”
“아니라고! 이 기집애야!!”
그러거나 말거나, 은솔은 강산의 볼에 자기 손을 갖다대며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이강산이 어쩔 줄 모르는 게 너무나 우스워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야, 윤비상. 너 빨리 이거 안 말려?”
이걸 알아챘는지,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울상을 짓고 있었다. 자기랑 띠동갑만큼 어린 애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강산이 묘하게 우스워서, 비상은 간신히 웃던 걸 참느라 목이 간질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저 너머에서 금빛 밤 대 파란 밤의 경기가 이뤄지고 있었다. 상황도 어느새 정리되어, 강산은 근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오늘은 편하네. 우리 팀도 아니니까.”
“저희는 큰일인데요. 오빠.”
“니네 팀을 알 게 뭐야.”
“뭐, 저희도 붉은 밤같은 이상한 팀 몰라요. 치.”
“뭐라고 이 자식아?!”
“띠동갑만큼 떨어진 애한테 뭐하는 짓이야. 형도 참.”
강산이 진심으로 은솔한테 화내자, 비상도 일단 강산의 양팔을 잡아 그걸 뜯어말렸다. 물론 강산이라 한들 진심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시간은 다시 느릿느릿 흘러갔다. 강산은 난간에 두 팔을 괸 채, 그 경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잎새가 있단 걸 깨닫자,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아까 했던 자기자랑, 또 해도 되냐?”
“왜?”
“비상이 가니까 얘기가 다른 데로 샜잖아. 난 평균 이하냐?!”
“그럼 하든가. 안 말릴 거니까.”
“이 자식. 관심 없구만…”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산은 바로 그 자기자랑을 시작했다. 물론 강산이 원래 이런 사람이란 건, 잎새는 물론 그 옆에 있던 비상조차 잘 알고 있었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대학교 새내기 시절 같은 과 얘들과 난타를 보러간 적이 있다고 했다. 비상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서 한다고 했던가?”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 땐 그랬지.”
그렇게 대답하며, 강산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보러 갔는데, 공연(특히 특유의 냄새)도 장관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자기가 무대에 불려갔다는 사실인 듯했다. 아무튼 이 형도 참. 비상은 물론, 잎새도 그 말을 들으며 킬킬대고 있었다.
“뭘 했는데?”
“나도 이젠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뭘 좀 빼달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죽어라 빼려는데 안 빠져서, 결국 그 사람이 알아서 나오던데?”
“니가 못 뽑는 걸 보면 그 분도 맷집 대단한가 보다. 참.”
“야, 이별밤. 죽을래?!”
잎새의 질문에 강산이 대답하자, 어느새 옆에 와있던 별밤이 둘의 말에 끼어들었다. 물론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아주 열받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강산 입장에선 자랑하고 싶은 일인 듯했다.
“뭐, 형도 말했으니 이제 이 얘기도 끝…”
“무슨 헛소리야, 비상이 너도 해야지.”
“내가 뭘 자랑해야 돼?”
비상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하자, 강산이 그런 말과 함께 비상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비상 입장에선,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신발. 우리 중에서 가장 잘난 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형 눈엔 내가 잘나게 보여?”
“그, 등을 못 펴게 만드는 그거 말하는 거 아냐?”
강산이 열받아하는 걸 옆에서 구경하던 별밤이, 킬킬대며 이런 말을 던졌다. 물론 비상은 여전히 잘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아무튼 뭐라도 입에 안 담으면 이 형이 또 난리치리란 건 안 봐도 뻔했다.
결국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떠오른 걸 아무렇게나 입에 담았다. 자기치곤 드문 일이었다.
“뭐, 한자로 이름쓰기 어려운 거?”
“아, 그러고 보니 니 이름 위 상으로 쓰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강산이 묻자,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가끔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야 짓는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쓰는 거야?”
그게 궁금했는지, 옆에 잎새가 그렇게 물었다. 별밤은 다 안다는 듯, ‘너도 고생했다’라며 킬킬대고 있었다. 아마 별밤은 한자를 잘 아는 듯했다.
결국 비상은 핸드폰으로 飛翔이라 써서 형들한테 보여줬다. 종이도 뭣도 없으니, 보일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서였다. 물론 자기 이름을 한자로 잘 쓸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비상아, 너 학교에서 자기 이름 한자로 쓸 때 부모님 때리고 싶지 않았냐?”
“우리나라에서 쓸 일도 별로 없는데 뭘.”
강산의 말에, 비상은 가볍게 대답했다. 참고로 자기 이름은 아버지 및 할아버지의 합작인 듯했다. 기대받는 장남이었기에, 세상 위로 날아오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 사실 장남이고 뭐고, 비상은 결국 외동아들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게 경기를 구경하다, 비상 일행한테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결국 이번 경기가 판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거 또 복잡하게 됐구만. 잠깐 다녀온다.”
그 말과 함께, 잎새와 별밤이 자리를 떴다. 판정을 그리 많이 본 적이 없는 비상은, 아직 옆에 있는 강산한테 이렇게 물었다.
“그럼 의영이 형이 발표하는 건가?”
“그렇겠지.”
“그 형도 여러 사람 앞에선 좀 빼는 거 같던데.”
“그 형도 참 신기한 사람이야.”
비상은 이 때, 강산이 묘한 표정을 짓고있단 걸 깨달았다. 어쩌면 강산은 연장자로서 의영에 관해 들은 게 조금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뒤, 의영이 종이를 가지고 각 밤들이 모은 옥상에 다다랐다. 드디어 판정이 끝나 결과를 내놓는 듯했다. 전에 나왔던 판정과 대보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른 결과 발표였다. 사람이 워낙 많이 몰리는 바람에, 비상은 뒤에서 간신히 의영이 형의 모습(오늘도 흰 티였다)을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자기 팀은 아니지만, 그냥 의영이 형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의영은 약간 멋쩍어하면서도, 진지한 말투로 판정 결과를 말하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탓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간신히 ‘양쪽 팀 다 최선을 다했고’나 ‘이 대목은 저희도 높게 산 공격입니다’같은 말이 들렸다. 그렇게 경기 내용이 이어지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파란 밤 승리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강산 오빠.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얼른!”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갑자기 은솔이 비상 및 강산 쪽으로 달려오더니 이런 말과 함께 머리를 갖다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비상 및 강산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 니가 했냐?”
“그래도 우리 팀 이겼잖아요!”
강산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은솔은 아주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은솔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비상은 강산 대신 은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해 줄게. 고생했다.”
“솔직히 이 오빠가 저 오빠보다 나은 거 같아요. 진짜로.”
“머리 쓰다듬는 거 하나 가지고 째째하게 삐지냐. 넌?!”
강산이 그렇게 화내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풀렸다. 이젠 다들 집에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놀이는 집에까지 무사히 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그 때, 비상은 현이 자기 옆에 와있단 걸 깨달았다. 원래 모습인 현의 표정을 보자, 비상은 지금껏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젯밤 일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현은 그런 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 밥먹고 싶은데.”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현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있던 일. 그리고 될 수 있다면 다른 일도.

그렇게 비상과 현은, 둘이서 비상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며, 비상은 속으로 ‘현한테는 숨기면 안 된다’라 생각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둘은 서로가 ‘패널티’를 지닌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적어도 붉은 밤에서는.
물론, 현과 이러기로 약속한 건 아니었다. 만약 현이 자기한테 뭘 숨긴다 한들, 비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비상은, 이 비밀을 현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자기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비상이 왼쪽, 현이 오른쪽이었다. 항상 그렇듯,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시간도 밤 열한 시. 딱히 까닭은 없지만 불도 껐기에, 창밖으로는 옅게나마 달빛이 가만히 들어와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소파에 가만히 기대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편하다는 게, 현과 있을 때 가장 좋은 점이었다.
그 때, 비상은 왼쪽 어깨에 무게가 실리는 걸 느꼈다. 현이 조심스럽게, 비상 어깨 쪽으로 몸을 기대온 것이다. 물론 무척 가볍긴 했지만,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니?”
비상이 가만히 묻자, 현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비상은, 어젯밤 및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현한테 털어놓았다. 강산이 형한텐 좀 숨긴 데도 있었지만, 같은 처지인 현한테는 숨길 것도 뭣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비상이 말을 끝맺자, 또 침묵이 가만히 이 거실을 흘러갔다. 하지만 현과 있을 땐 항상 마음이 편했기에, 그 점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이렇게 겪은 일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해졌지만(현도 이런 일은 처음 들었을 터였다), 한편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되기도 했다. 비상은 지금껏, 누구한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그 때였다.
“…현아?”
현이 갑자기, 아까보다 비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비상의 오른팔을 가만히 잡았다. 하지만 그 다음 현이 하는 행동을 보고, 비상은 심장이 멎는 걸 느꼈다. 물론 자기도 우습다곤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현은 비상 눈앞으로 가만히 다가와, 이마를 자기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기 이마를 비상의 이마에 가만히 가져다댄 채, 마치 주문이라도 읊는 것처럼 나직하게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겁내지 마라. 난 너희들 곁에 있다. 흔들리지 마라. 내가 너희들의 신이니까. 나는 너희에게 힘을 주고, 너희를 도우며, 내 이 승리의 오른손으로 너희를 지키리라.”
현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비상은 마치 시간이 멎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목소리는 평소 현답게 너무나 잠잠했지만, 비상의 귀엔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려왔다. 중얼거리는 듯하면서도 뭔가 전하려는 그 느낌이, 바로 눈앞에서 비상을 덮쳐오고 있었다. 원래부터 속을 알기 어려운 아이이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비상은 현이 전보다 훨씬 더 ‘신비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아마 이건 틀림없이 성경 구절 중 하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상은 현의 목소리에서, 현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현이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마치 일종의 마법처럼 느껴졌다. 자기 등 뒤로 흘러와 현의 표정을 비추는 옅은 달빛이, 그런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현의 따스함, 현의 고동소리, 그리고 숨소리도, 비상의 마음을 자꾸만 헤집어놓고 있었다.
달빛 너머 현의 표정은 흐릿해서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현이 비상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영원과도 같은 5분이 흘러간 뒤, 비상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자기한테서 눈을 떼어놓지 않는 현한테 그렇게 물었다.
“혹시 가톨릭이거나 개신교니?”
“아니. 그냥 이 말이 좋아서. 성경 본 적도 없어.”
현은 담담히 그렇게 대답하며, 할 말을 이어나갔다. 현은 딱히 종교가 없고, 자기 친한 친구가 그 말을 해줘서 알게 된 듯했다. 자기도 좋아하는 말이라서 외고 있었단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비상은 자기 마음이 가라앉았단 걸 깨달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모든 건 현 덕분이었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비상은 가만히 현을 보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고맙다. 현아.”
그리고 그 때,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현의 몸집이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왜 하고많은 떄 중 이 때일까. 비상은 놀라기 전에 그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어젯밤, 그리고 아침 일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대관절, 비상이 하늘의 뜻같은 걸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달빛에 비친 현의 그림자가, 마치 괴물로 바뀌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상은, 자기 모습 역시 바뀌고 있단 걸 느꼈다. 어쩌면 현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진’ 것처럼 느껴진 건, 반대로 자기가 줄어들고 있기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습이 바뀌자, 둘은 아까보다 더 어색하게 소파에 걸터앉아있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나, 라 비상이 생각할 때, 갑자기 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같이 가줬으면 하는 데가 있어.”
“어디니?”
“옥상.”
자기 야구모자를 눌러쓰는 현한테 비상이 묻자, 현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런 시간에 현이 자기 스스로 나간다는 건, 틀림없이 자기한테 뭔가 하려는 말이 있단 뜻이었다.
비상은 그 말에 따라, 현과 같이 집을 나왔다. 이 늦은 밤에. 모습이야 어쩄든 남녀 둘이서.

현은 비상보다 앞서 걸어가더니, 이윽고 어떤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물론, 이 뒤 현이 어디로 갈지는 안 물어도 뻔했다. 현은 지금, 여기 옥상에 올라가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습이 바뀐 채 밤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어둠도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현의 몸집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야…”
드디어 계단을 올라 옥상에 다다르자, 사방에 있는 눈부신 빛, 빛, 빛들이 비상 일행을 감쌌다. 고작 7층쯤 되는 건물 옥상일 뿐인데, 정말로 사방을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이 주위가 개발제한구역에 걸려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바로 근처에 공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높은 건물이 지어질 수 없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덕택에 지금, 비상 일행은 이 낮은 곳에서 누구보다도 먼 곳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비상은 새삼스레, 자기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야경을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 사방이 빛으로 둘러싸이는 느낌은 비상도 처음이었다. 놀이를 하는 옥상이라 한들, 높은 건물이 많아서 이렇게 ‘사방에서’ 둘러싸이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현은 거기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근처 난간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마치 옛날부터 죽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위험하지 않니?”
“어차피 뛰어다닐 수 있잖아.”
현의 대답을 들으며, 비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이현이라는 아이는 굳이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대지 않아도 수수께끼인 데가 많았다. 물론, 이것도 그 중 하나였다.
어쨌든 현은 물탱크를 등진 채, 난간에 걸터앉아 가만히 멀리 보이는 빛을 쳐다봤다. 그 빛은 근처 산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고, 저 쪽에 있는 큰길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비상도 바로 옆에서 난간에 등을 기댄 채, 현의 말을 기다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 침묵은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가 세상하고 가장 가까운 데일지도 몰라.”
잠시 가만히 있다가, 현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투가 아까 들은 주문(처럼 들리는 성경 구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비상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자기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나는,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
현은 여전히 담담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비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들려주는 것처럼, 여전히 눈길을 저 먼 곳에 둔 채.
“나는 세상에서 홀로 떨어진 존재라고. 아무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비상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쩐지 현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였다. 현은 언뜻 봐도, 수수께끼인 데가 많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라면,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른 환경에 있다’고 여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남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크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조금만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현은 여전히 중얼거리는 듯 가만히 말하고 있었지만, 비상은 아까처럼 말 하나하나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 현의 목소리는 성인남성의 그것, 즉 낮은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비상은 아까 현이 주문처럼 읊어준 그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자기한테 들려주는 것처럼. 혹은 비상한테 들려주는 것처럼.
“별밤이한테 이야기를 들었어. 자기가 한 게임 중에서, 세상에 자기를 알리고 싶어하는 여자애가 있었다고. 자기란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고 전하고 싶었던, 나만큼 상황이 특수한 여자애가 있었다고. 만약 그런 걸 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나는 해보고 싶어.”
그 말에, 비상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이 뭘 말하려 하는지, 비상은 알 것 같았다. 이현이란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란 건 틀림없었으니까. 저런 생각을 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상은 갑자기 신경쓰이는 대목이 있었다. 정말로 별 건 아니었지만.
“너, 별밤이 형을 막 부르는구나.”
“원래 그래.”
현의 말에, 비상은 이 모습과 안 어울릴지도 모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별밤이라면, 현이 그렇게 불러도 허허 웃고 넘어갈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기 이름도 ‘비상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 생각에 비상은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별밤이 형도 참 별 게임을 다 하는구나.”
“그래도 나는 공감했어.”
현은 그 말과 함께, 멀리 있는 불빛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길게 자기 얘기를 하는 현을, 비상은 오늘 처음 봤다.
“나한테 세상이란 건, 저 멀리에 있는 불빛만큼이나 멀었어.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이 놀이를 하면서,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이게 신기해?”
“아니, 나도 비슷한 느낌인 걸.”
“다행이다.”
그 말과 함께, 현은 다시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눈동자엔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 걸까. 비상은 평생 가도 풀지 못할 것 같은 수수께끼를 보는 것처럼, 그 눈길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 사실 무서운 마음도 있어.”
여전히 불빛 및 가끔 하늘 위로 떠오르는 헬리콥터의 불빛을 보며, 현이 그렇게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얘기하고 있으면, 저 높은 곳에도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인 것도, 사실은 많이 무서웠어. 갑자기 어른처럼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기가 골라야 할 거 같아서. 물론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막상 이렇게 되니까 그게 너무 가까이 온 거 같아서.”
현은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비상 역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자기가 채비가 되었는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일단 서류상으로 ‘어른’이란 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해야 했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 길은 혼자 자기 나름대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어른이 되었다 한들, 현한텐 그 사실이 크게 다가왔을 터였다. 비상도 현만한 나이일 때,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 무서운 건 아니지?”
비상이 묻자, 잠시 시간을 둔 뒤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상을 돌아보며, 가만히 이렇게 물었다.
“아까, 아침에 그런 일 있었다고 했지.”
“그렇지.”
“무서웠겠다.”
비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은 나지막하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도 그 심정을 알 거 같다는 말투였다.
“우습지? 너보다 나이도 더 먹은 사람이 그런다는 게.”
비상이 자기를 비웃듯 그렇게 말하자, 현이 잠깐 생각하더니 드디어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은 채 비상을 꼭 껴안았다. 그거야 지금 현의 몸집이라면 비상쯤은 쉽게 감싸안을 수 있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비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쁜 마음도, 무섭단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비상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라서.”
현은 비상을 그 굵은 팔로 껴안은 채, 귓가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굵은 팔뚝도, 자기보다 더 큰 몸집도, 비상한테는 모든 게 신선했고, 또 믿음직스러웠다. 아마 현은 자기가 어제 겪은 일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이런 식으로 도와주는 것이리라 비상은 짐작했다. 그런 마음만으로도 비상은 무척 고마웠고, 이렇게 누군가한테 세게 감싸안아지는 느낌도 신선했다.
하지만, 현은 여기서 얘기를 끝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현은 그 억센 팔을 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말에 대답해 줘.”
비상을 껴안은 채, 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는 너무나 진지해서, 비상은 그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이렇게 푹 안겨있으면 무척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그게 너무나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뭘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현은 언젠가 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그리고 비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 말을 죽 이어나갔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자기 얘기하는 게 어려워. 아마 알고 있겠지만.”
비상은 현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아마 친한 친구라도 아닌 이상, 자기 생각을 누군가한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그건 비상도 짐작한 바였다.
“그러니까, 그게 어려워. 이런 모습이 된 다음에, 죽 생각했어. 누군가한테 묻고 싶었는데, 물을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어.”
이제 비상은, 현의 고동소리조차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모습이 바뀌었다 한들, 물론 이 고동소리는 ‘같은 사람’이 지닌 것이 틀림없었다.
현은 이제, 비상의 머리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머리까지 껴안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워보였지만, 현은 불평 하나 입에 담지 않았다. 사실, 자기가 먼저 한 일이니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이런 모습이니까, 이렇게 해줄 수 있는 거지?”
현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다시 한 번 현이 이성과 만날 일이 드물었단 걸 떠올렸다. 그리고, 아마 지금 현이 하고 있는 생각도 알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어서.”
그 말과 함께, 현은 비상을 조금 더 세게 껴안았다. 하지만 답답하기는커녕, 비상한테는 오히려 그게 더 편하게 느껴졌다.
“너야말로 힘들지 않니?”
“사실은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어.”
현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중얼거리듯이,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람이 서로 마주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나보다 어른인데?”
이 말에, 비상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껏 살면서 그런 걸,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습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어. 사람이 서로 마주보단 건 어떤 뜻일까? 우리가 모습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가 맺는 그, 관계가 바뀌는 걸까?”
현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야구모자의 챙이 비상한테 살짝 닿았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비상은, 지금 자기가 ‘이현’이라고 하는, 나이고 성별이고를 다 떠난 ‘사람’과 마주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상황에서, 비상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둘은 지금 자기들을 정의하던 모든 걸 벗어던지고, 존재 대 존재로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누굴 대할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비상은, 이 ‘압도하리만치 강한’ 일대일 관계가 신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윤비상으로서 26년을 살아온 동안, 이런 감정은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모르는 거밖에 없어. 이 모습도, 내 앞에 있는 사람도, 모두 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거밖에 없어. 다행이다. 이렇게 할 수 있어서.”
그렇게 길게 말한 뒤, 현은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비상은, 지금 현이 살짝 웃고있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껴안겨있으니 알 길은 없지만.
“아까 집에서 해 준 말로도 이미 고마웠어. 이렇게까지 해줘서 고맙다.”
“그건 언제나 할 수 있고, 도움이 됐음 다행이지만, 지금 이건 이 모습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현은 몇 분이 넘게 비상을 껴안으면서도, 좀처럼 그 팔을 풀려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지금 자세가 불편할 텐데, 그런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자기네들은 말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물론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이 모습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죽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구나. 난 지금 그게 기뻐.”
현의 말을 들으며, 비상은 여전히 감싸안아져 있었다. 사실, 비상한텐 더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현의 품속에 안겨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누군가의 품 속에 안겨있으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현한테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도(물론, 어쩌면 현 자신이 원래부터 지녔던 냄새가 섞여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자기보단 훨씬 믿음직하게 느껴지는 몸집도, 틀림없이 ‘바뀐 모습’의 영향인 억센 팔도, 원래 모습인 현과 다르긴 하지만, 비상한테는 그 모든 것이 ‘현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그 점이 비상은 고마웠고, 또한 묘한 말이지만, ‘동질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 아이는, 지금 비상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비상은 여전히, 이 이현이란 여자애를 잘 알지 못했다. 아마 현 역시, 윤비상이란 사람을 잘 알진 못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둘의 마음은 틀림없이 이어져있었다. 그건 그저 동질감이 아니라, 아마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였다.
어쩌면 이런 게,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마음 속에서 뭘 주고받았는지같은 건 이런 상황에서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상황, 즉 ‘주고받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인 것이다.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은 5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런 식으로 감싸안았고, 감싸안아져 있었다. 언제 원래대로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이 수많은 ‘사람들의 불빛’을 곁에 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