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비상은 핸드폰 벨소리로 눈을 떴다. 오늘은 틀림없이 경기도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대체 누가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온 건지 비상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침부터 전화해오는 사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보자마자, 비상은 곧바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현이라면 당연히, 어떤 시간이든 너무 늦지 않은 이상 자기한테 전화를 걸 터였다. 뭔가 전화할 일이 있다면.
“별 건 아닌데, 꿈에 나와서.”
낮은 목소리로, 현은 그렇게 말했다. 아마 비상이 현의 꿈에 나왔다는 말인 듯했다. 현의 말투가 다른 때보다 조심스러운 걸 보면, 비상이 생각햇던 것보다 좀 더 진지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뭔가 나쁜 꿈이었니?”
“아니.”
현의 말을 듣다가, 비상은 어쩐지 상황을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현은 틀림없이 ‘바뀐 모습’일 터였다. 이 낮은 목소리로, 비상은 그걸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상이 내릴 수 있는 답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무슨 꿈이었니?”
현의 말에 따르면, 꿈에서 원래 모습인 비상이 나타나더니(물론 자기도 원래 모습이었다 했다), 그냥 자길 꼭 껴안아줬다고 했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입에 담지 않았지만, 비상은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느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의 말투가 무척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그런 일이 있어서 걱정했구나?”
“응.”
현이 가만히 대답하는 걸 듣자, 비상은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이미 한 번 있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비상은 그 대처법을 입에 담았다.
“화장실에 다녀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난 상관없으니까. 알았지?”
“응. 고마워.”
현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기가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비상은 현도 참 큰일을 겪는다고 느꼈다. 물론, 그건 자기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현은 자기보다 몇 살은 더 어린 것이다.
하늘은 대체 왜 이런 핸디캡을 만들어놓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번엔 강산한테서 연락이 왔다.
-같은 팀 애들끼리 재밌는 거 하려는데, 항상 오던 시간에 와라.
그러고 보니 비상도, 오늘 뭘 하는지 들은 적이 없었다. 항상 오던 시간에 모이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놀이도 뭣도 안 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대체 뭘 마련한 거지.
아무튼 비상은, 일이 끝난 뒤 옥상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서 손해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일을 마치고 옥상으로 가니, 강산이 구석에서 뭔가 만지작대는 게 보였다.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뒤로 다가가, 여전히 작업에 빠져있는 강산한테 물었다.
“뭐 해?”
“까, 깜짝아!”
비상이 기척을 숨겼기 때문인지, 강산은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자기가 이렇게 가까이 올 동안, 눈치 하나 제대로 못 챘단 걸 믿기 어렵단 표정이었다.
“너는 무슨 사람이 그러냐. 아우라가 있다가 없다가, 기척을 숨겼다가 말았다가…”
“무슨 헛소리야. 형이 눈치채지 못한 게 잘못이지.”
“이 자식이 또…”
강산은 투덜대면서도, 뭘 만지작대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비상도 관심이 생겼기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강산의 등 뒤로 이렇게 물었다.
“아무튼, 지금 뭘하는 거야?”
“저기 천장에 영화 띄우려 그런다. 이 자식아.”
“프로젝터라도 쓰는 거야?”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강산은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킬킬댔다. 마치 엄청 재밌는 걸 자기만 알고 있는데, 그걸 떠들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내 말을 어떻게 들었냐. ‘하늘’에 영화를 띄운다고.”
“그게 말이 돼?”
“물총으로 놀이하는 놈이 이제와서 무슨 헛소리냐? 암튼 기다려 봐. 곧 끝난다.”
물론, 비상은 여전히 강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강산 말대로, 이런 ‘이상한 놀이’를 하고있는 자기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 비상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늘 재밌는 거 한다며?”
언제 왔는지, 비상의 등 뒤에서 별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산도 킬킬대며,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기 할 일을 했다.
“무조건 기대해라.”
그 말과 함께, 드디어 강산이 등을 돌아 비상 일행을 바라봤다. 지금껏 본 강산의 표정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기분좋아보이는 모습이었다. 이걸 보면, 오늘 정말 뭐가 있는 것같긴 했다.
“하늘이 이런 걸 해도 된다고 허락했대. 의영이 형한테 그 말 듣고 나도 안 믿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일단 봐라. 그럼 알 테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강산 뒤에서, 별밤은 하품을 크게 했다. 마치 밤이라도 샌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제 밤샜냐?”
“뭐, 그렇지.”
여전히 작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강산이 묻자, 별밤은 그렇게 대답하며 하품을 한 번 더 했다. 이걸 보면, 이 형은 어제 밤을 샌 게 틀림없었다.
“어제 인생을 좀 낚고 있었거든. 정신 차려보니 아침이더라.”
“이 자식은 또 웬 개소리야?”
“어디 미궁이 있는데, 거기 낚시터에서 인생 좀 낚고 있었다. 어젠 운이 지지리 없어서 붕어빵이나 바람빠진 타이어밖에 안 나오더라. 뭐, 그저께 낚은 건 망가진 프라이팬에 흑역사에…”
“넌 대체 무슨 게임을 하는 거야. 이 자식아?”
“난 재밌어보이는 건 다 하는 사람이거든.”
강산이 면박을 주거나 말거나,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저 형들이 저러는 걸 한두번 본 것도 아니었기에, 비상은 이제 더 이상 둘이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둘이 이러는 동안에도, 그 ‘영화’를 볼 채비는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형,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제야 옥상에 다다른 연소자 몇 명이, 강산을 알아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강산이 비상한테 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영화볼 거다’라 대답하자,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채비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여기 다 됐어. 형.”
강산이 그렇게 외치자, 오늘도 흰 티를 입은 의영이 다가왔다. 그리고 강산이 해놓은 채비를 보더니, 이 옥상을 휘 둘러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럼 다들 누울까?”
“…뭐라구요?”
비상이 놀라거나 말거나, 의영은 가지고 온 온갖 돗자리를 옥상에 죽 펴기 시작했다. 다들 영문을 몰라했지만, 강산만은 모든 걸 알고 있어서인지 뭔가 숨기는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킬킬거렸다.
대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알록달록한 돗자리가 옥상을 꾸미는 걸 보며,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들 편하게 누우면 돼. 머리 위에서 영화가 나올 테니까.”
그렇게 옥상 바닥이 돗자리로 메워지자, 의영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평소와 달리, 마치 어릴 적 로봇이라도 갖고놀던 것처럼 무척 설레는 모습이었다.
“하늘에서 이런 걸 하게 해줬단 말이야?”
“그렇대도. 아무튼 이 하늘이란 작자가 참 웃겨요.”
비상이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누우면서 이렇게 묻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킬킬 웃었다. 대체 언제 온 건지, 원래 모습인 현 역시 비상 옆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제 자기를 경계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여기는 것 같았다.
이렇게 모든 팀원들이 돗자리에 눕자, 이윽고 ‘시작한다’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새까만 하늘에 갑자기 뭔가 ‘비치는’ 게 보였다. 마치 커다란 프로젝터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은 거기에 틀림없이 ‘영화’를 또렷하게 비춰주기 시작했다.
“야한 건 아니지?”
“배잎새. 넌 의지 누나한테 맞고 싶냐?”
둘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비상은 가만히 하늘을 봤다. 시작하는 대목으로 볼 때, 꽤 규모가 큰 영화인 듯했다. 마치 영화관에라도 온 것처럼, 입체음향이 누워있는데도 비상의 귀로 생생하게 들어왔다.
“팝콘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보다. 강산아.”
“누워서 먹다가 체할 걸.”
별밤과 강산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비상은 가만히 하늘, 아니 ‘영화’를 봤다. 그러고 보니 느낀 것은, 지금 누워있는 붉은 밤 팀이 연장자와 연소자로 깨끗하게 갈려있다는 거였다. 사실 서로 벽을 만든 것도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렇게 모여있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였다.
하지만 비상은 일단 연소자 쪽인데도, 저 쪽이 아니라 연장자들이 있는 ‘이쪽’에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선 다들 자기를 연장자로 알거나, 그렇게 대해주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건 이거였다. 비상을 빼고 이런 식으로 지내는 같은 팀 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도, 영화는 하늘에서 아무렇지 않게 ‘틀어지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십 분은 넘게 지났지만, 비상은 여전히 저 하늘에 ‘띄워진’ 영화가 이렇게 또렷하게 보인단 걸 믿을 수 없었다. 누워서 하늘에 ‘비치는’ 영화를 보다니,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이런 신기한 일이 ‘놀이를 하지 않는’ 이들에겐 전혀 안 보인다는 것도, 비상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옛날 보이스카웃 할 때 떠오르는데 그래.”
영화를 보던 강산이, 갑자기 그 말과 함께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대각선 위에서 누워있던 잎새가, 곧바로 이렇게 딴죽을 걸어왔다.
“니가? 안 믿기는데?”
“그럼 니가 RCY였던 건 믿기냐?”
“뭐, 그건 그렇네. 아무튼 그게 왜?”
잎새의 말에, 강산은 아까보다 더 킬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체음향 역시 영화관처럼 생생하게 들려왔기에, 다른 이들한테 방해가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 때 강당에서 축구 봤거든. 외국 경기였는데, 끝난 다음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거야. 자기네 팀이 이기고 진 거 때문에. 아무튼 못말려요.”
“그거 진짜 장관이었겠다. 나라면 몇 명은 두들겨팼겠는데?”
“잎새 너도 참. 그건 그렇고 강산이 넌 축구같은 거 안 보냐?”
“뭐, 그렇게 좋아하는 팀은 없거든요.”
강산의 대답을 들으며, 비상은 의외란 생각을 했다. 사실, 잎새가 말한 ‘누굴 두들겨패는’ 일은 잎새보다는 강산한테 더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다들 제멋대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누워있어서인지 어떤지, 어디선가 코고는 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왔다. 영화를 보며 잡담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현은 영화가 재밌었는지, 여전히 안 잔 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들, 전자후자란 이론 아냐?”
그러던 중, 갑자기 별밤이 그런 말을 꺼냈다. 강산은 한참 영화에 빠졌다가 기분을 잡쳐서인지, 좀 짜증내는 목소리로 이렇게 투덜댔다.
“영화보다 말고 무슨 개소리야. 이 놈은.”
“강산이를 봐라. 완벽한 후자 아니냐. 쟤는 솔직히 남이 뭘 해주는 걸 덥석 받아먹는 게 맞지, 뭐 챙겨주고 그런 건 절대 안 맞는 애야.”
“이 자식이 누굴 무능아로 아냐?!”
강산이 투덜대거나 말거나 아까보다 별밤이 목소리를 높이자, 강산은 누운 채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별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거기서 화내는 게 니가 후자란 증거야. 인마.”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본 줄 아냐?!”
“솔직히 말하자. 강산아. 너, 니네 형이 이것저것 다 챙겨주지 않았냐?”
거기까지 듣자, 강산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다. 아마 짚이는 게 꽤 있는 듯했다.
“그래, 난 형보다 지지리 못난 놈이다…”
그 말을 끝으로, 강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희한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영화는 ‘하늘 위에서’ 잘만 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덧 크레딧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드디어 영화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크레딧이 끝난 뒤 하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뒤에도, 다들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하늘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
“보고도 안 믿긴다. 진짜로.”
강산은 돗자리에 앉은 채, 멍한 표정으로 이제 평범해진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뭐에라도 홀린 듯한 눈빛이었다.
그 때, 의영이 강산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다른 연장자들도 의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장자들끼리 밥이라도 안 먹을래? 마침 시간도 되는데.”
“형이 사는데 내가 왜 안 가?”
강산이 이렇게 말하자, 주위에 있던 연장자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사람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기운이 넘쳐서, 뭘 먹지 않으면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잎새가 비상 쪽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너도 갈 거지?”
“내가 무슨 연장자도 아니고.”
“시꺼. 니가 간다고 뭐라하는 놈 없다. 있기만 해 봐. 그냥 확…”
잎새가 그렇게 말하자, 의영도 고개를 돌리곤 비상 쪽을 쳐다봤다. 의영 역시, 비상이 자기들과 같이 가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비상이도 같이 가자. 이것저것 할 말도 있고.”
결국 이 말에, 비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그걸 듣던 현은, ‘고기 맛있겠다’고 중얼대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럴 땐 참 솔직한 아이였다.
“자. 오늘 의영이 형 지갑 한 번 털어보자!”
드디어 고깃집에 다다르자, 강산이 아주 신났단 듯 그렇게 소리쳤다.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지, ‘옳소!’나 ‘털자!’라 외치며 킬킬대고 있었다.
“니들이 안 낸다고…”
“나도 보탤게. 의영이한테만 맡길 순 없잖아.”
“고마워, 누나.”
여기에 어이없어하던 의영은, 의지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표정을 폈다. 사실 원래부터 의영은 연장자들한테 고기를 살 생각이었던 듯했다. 강산처럼 좀 심하게 나오는 걸 짐작하지 못해서 그렇지.
“너희들 참 고맙다.”
그렇게 고기와 술을 마시다가, 의영이 다른 이들한테 그렇게 말했다. 그 표정은 웃고 있긴 했지만, 비상의 눈으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보였다. 그건 진심이 아니라기보다는, 그저 웃는 게 서투른 것처럼 느껴졌다.
“의영이 잘 못 웃나 보다.”
“원래 그런 성격이야. 누나.”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장자들은 실컷 먹고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웃고 있었지만, 비상은 그 와중 상당히 복잡한 느낌이었다. 이 사람들 중, 흔히 말하는 ‘연소자’는 자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겨우 한 살 차이고, 자잘한 데에 신경 안 쓰는 비상이었지만, 이 ‘붉은 밤’이란 팀에서 자기가 어떻게 비치는지는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참 희한한 기술도 갖고있나 봐. 앞으로도 가끔 이런 걸 보여주겠다던데.”
의영이 그 말을 꺼내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강산은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당사자도 아닌 의영한테 다짜고짜 따지고들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그 하늘이란 작자는 뭐야?”
“그건 나도 궁금하다. 야.”
“뭐, 지금 우리가 뛰고있는 것만 해도 현실이 무너진 거지. 난 고소공포증인데.”
고개를 젓는 의영 옆에서 별밤이 이런 말을 꺼내자, 다들 깜짝 놀랐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데 멀쩡하냐?!”
“지금은 괜찮다. 나도 신기할 지경이야. 강산아. 진짜로.”
그러고 보니, 처음 천사를 만났을 때 누가 고소공포증 이야기를 꺼냈을 터였다. 그게 이 형이었단 말인가. 본인이 자기 입으로 말했는데도, 비상은 그 말을 얼른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밥을 먹다, 비상은 잠시 밖으로 나왔다. 한숨돌리기 위해서였다. 아무 생각없이 골목으로 나온 비상은, 누가 자길 보고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비상은, 언젠가 그 모습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틀림없이 붉은 밤에서.
“넌 연장자라 이거냐?”
그 남자는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비상한테 그런 말을 건넸다. 이렇게 밝은 데서 보면, 역시나 붉은 밤 소속이 틀림없었다. 비상만큼 키와 몸집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라 인상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기한테만 신경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구죠?”
“주세림이라 하는 사람인데.”
남자, 주세림은 그렇게 자기를 소개했다. 들어보니 이 세림이란 사람도 비상과 같은 나이, 즉 연소자인 듯했다. 그런데도 비상과 인연이 없었던 건, 비상이 주로 연장자 형들과 어울려다녔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지?”
비상이 그렇게 묻자, 세림은 비상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곤 마치 떠보는 듯한 말투로, 대뜸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댁은 자기를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연장자 형들하고 다니는 걸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이 주세림이란 사람이 하려는 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자기가 연소자 ‘주제에’ 연장자하고만 어울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네가 연소자들하고 제대로 어울리려 한 적이 있긴 있냐?”
그 말을 듣고 보니, 세림은 자기와 달리 연소자, 즉 대학생쯤 되는 애들과 자주 어울렸던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비상과 정반대였던 것이다. 아마 성격도 그럴 터였다.
“그거야 미안한 말이지만, 무조건 연소자끼리 모여야 한다는 법은 어딨지?”
“난 그저 자기 처지를 이해하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세림은 골목 너머로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비상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세림의 용건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비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형들과 주로 어울리는 게 그렇게 보기 싫었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서 참 미안한데 그래.”
비상이 골목 너머로 그렇게 묻자, 세림은 그 말과 함께 아주 사라져버렸다. 사실, 비상은 세림이란 사람 자체엔 그다지 나쁜 마음이 없었다.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여겨서였다.
하지만, 비상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연소자’인 자기가, ‘연장자’ 자리에 있다는 현실을.
“누구랑 얘기했냐?”
비상이 다시 가게로 돌아오자, 곧장 강산이 이렇게 물었다. 아마 아까부터 죽 비상을 기다려왔던 것 같았다.
“주세림이란 사람하고.”
“아, 걔도 너랑 동갑이지?”
강산은 세림을 아는 듯, 곧장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댔다.
“근데 솔직히, 연소자랑 연장자랑 나눌 것도 없지 않냐? 연소자 얘들이 연장자들 괜히 무서워해. 나 참.”
“내가 여깄는 건 어떻게 보여?”
“그거 말 참 잘했다.”
강산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비상 쪽으로 다가왔다. 비상이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할 때, 강산은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는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니가 다리인 거야. 연장자랑 연소자 사이에 있는 다리같은 거라니까. 그러니까 걔 말은 신경쓰지 마라.”
“다리라고?”
“그래. 엄청 튼튼한 다리지. 너 말곤 대한이 정도나 할 수 있을 걸?”
그 대한이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서 그걸 듣고 있었는지, 의영은 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가만히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냐?”
“뭐가?”
“이 상황 자체가.”
그 말과 함께, 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으로.
“이 ‘놀이’란 게 참 웃기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런 놀이에 분해하는 사람도 있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나도 그렇긴 하지만, 신기하지?”
“뭐 어때. 재밌으면 뭐든 하는 거지.”
강산은 그렇게 넘겼지만, 비상은 어쩐지 그 말이 신경쓰였다. 자꾸만 의영이 형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비상 자신도, 거기에 관해 뭐라 또렷하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형, 저한테 할 말이 있다하지 않으셨어요?”
“아, 그건 강산이가 이미 말한 거 같은데?”
의영은 그 말과 함께, 비상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다들 자기를 연소자지만, ‘여기에 있어도 되는’ 존재로 받아들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게 느껴지자, 비상은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아무튼 이렇게 연장자 회식이 끝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내일 다시 보자’란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강산도 오늘은 혼자 집에 돌아간다고 했기에, 비상 역시 혼자 돌아가기로 했다. 딱히 어울릴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려던 중, 비상은 익숙한 얼굴을 알아챘다. 저 사람은 전에, 비상과 얘기를 나눈 금빛 밤 쪽 여성이 틀림없었다.
“오늘 모임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금빛 밤도 모임이 있었나요?”
비상이 묻자, 여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면, 회식을 갖는 건 어느 밤이나 다 똑같은 것 같았다.
“그런데 즐겁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다들 입이 험해서…”
“아, 거긴 좀 그렇겠네요.”
자기 머릿속 금빛 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여성이라면, 그런 분위기를 버티는 게 쉽진 않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자기소개도 제대로 안 했네요. 저도 참…”
그 말과 함께, 여성은 자기를 소개했다. 여성은 이혜은이라고 하는데, 비상과 동갑이며, 전에 말한 대로 비상이 일하는 연구소 근처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비상도 자기를 소개하며,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사실 비상이 너무 늦긴 했지만.
“진작 이름을 여쭐 걸 그랬네요. 그렇게 가까웠다니.”
“아, 아녜요. 제가 먼저 말을 못해서…”
여성, 즉 혜은은 그게 민망했는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이걸 보면, 이 혜은이란 사람도 부끄럼을 꽤 타는 성격인 듯했다.
그리고 그 때, 아무런 조짐도 없이 ‘그 일’은 일어났다.
“…어?”
비상은 순간, 자기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혜은 앞에서, 자기가 ‘핸디캡을 받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비상은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엔 물론 혜은이 있었지만, 그걸 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이, 이게 무슨…?”
혜은은 믿기지 않는 거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상은 일단,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상은 숨을 가다듬은 다음, 가만히 입을 열었다. ‘지금’ 자기한테 어울릴 높은 목소리로.
“안 보이는 핸드캡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잠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가로등 아래에 있는 둘만이 사람도 드문 길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무척 이상한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당사자, 비상과 혜은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물론 이건 비상의 생각이었지만, 아마 혜은도 자기와 같은 마음일 터였다.
“…저, 어디서 쉴까요?”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가다, 혜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투로 볼 때, 이제야 마음이 정리된 듯했다. 사실, 비상도 이젠 마음이 그나마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집이라도 가자는 건가요?”
왜 혜은이 이런 말을 했는지 알면서도, 비상은 가만히 물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일은 일도 없었다. 어디를 가든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저희 집은 좀 멀어서…어…근처에 호텔이나 모텔같은 데가…”
혜은은 비상한테서 고개를 조금 돌린 채,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혜은이 당황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상 역시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으니까.
자기가 낯선 여성과 그런 곳에, 그것도 ‘이런 상황’에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비현실에 멍한 느낌이 들면서도, 비상은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상황 설명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안 보이는 핸드캡’이라 하고 넘어가기엔 누가 봐도 이상하고, 이제 날짜가 넘어가는 이 시간에 길거리에서 사정을 길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그럴까요?”
그래서, 비상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들킨 이상, 여기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렇게 해서, 둘은 그나마 번듯한 모 호텔에 어떻게든 잠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마 호텔 입장에서도 무척 희한한 조합이었겠지만(성인여성 한 명에, 어딘지도 모르는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한 명, 으로 보였을 것이므로), 별 탈없이 비상 일행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방에 다다르자, 둘은 여전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적어도 비상은 그랬다).
비상은 안경집을 가방에 넣은 뒤(물론, 이 모습이 된 뒤 벗은 것이었다), 가만히 2인용 침대 한쪽에 앉았다. 씻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비집어들어올 틈새조차 없었다.
일단 치마 특유의 펄럭이는 느낌이 낯설어서 앉은 것까진 좋았지만, 비상은 어떤 눈빛으로 혜은을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남녀관계를 가지러 온 것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남녀’조차 아닌데도.
“저, 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서…”
“이성과 같이 있는 게요?”
비상이 그렇게 묻자, 혜은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애같은 모습이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지금은 이성도 아니네요. 제가 잊어버리고 있긴 했지만.”
그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비상이 담담하게 말하자, 혜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동안, 또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흘렀다. 비상은 물론, 혜은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한 지 15분은 지났을까, 드디어 혜은이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언뜻 들어도, 무척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사실은 저, 예전부터 비상 씨를 자꾸 보고 있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어서…”
“그랬군요.”
사실, 비상한테 그건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비슷한 얘길 죽 들어왔던 것이다. 비상 자신한테는 자랑할 것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 같이 있는 게 신기하네요.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죠?”
“그렇네요.”
혜은의 말에,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만큼 희한한 상황도 없을 터였다. 지금껏 전혀 관계가 없던 남녀가, 갑자기 침대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특수한 상황에서. 물론, ‘절대’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우습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그것도 다른 팀 사람이, 이렇게 긴장하는 거.”
역시 침대에 앉아 비상의 정반대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혜은이, 다시 그런 말을 꺼냈다. 그 말과 함께, 혜은은 몸을 일으켜 이불 속으로 가만히 들어갔다. 마치 모든 걸 잊으려는 것처럼.
“저한텐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그 말과 함께, 비상 역시 천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는 없어서였다. 이렇게 나란히 누우니, 아까보다 훨씬 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모습이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그리고 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혜은이나 비상이나, 이런 상황은 물론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모호하게나마 이미 알고 지내는 사람이었다(혜은한테는).
혜은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가만히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비상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더 낫겠다 생각했다. 괜히 더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또 10분이 넘게 흘러가자, 비상은 일단 자기도 입을 열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다른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금 혜은이 너무나 긴장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비상이 담담히 그렇게 말하자, 혜은은 깜짝 놀라 비상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비상은 신경쓰지 않고, 하던 말을 이었다.
“혜은 씨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일단 한숨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혜은은 그 말에, 잠시 ‘지금’ 비상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런 말고 함께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보면, 혜은은 여전히 당황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그게 낫겠네요. 먼저 씻을게요.”
혜은이 욕실로 들어가자, 침실엔 비상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저 너머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비상의 마음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을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비상은 자기 머릿속에서 생각이 날뛰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혜은이 씻고 나오자, 이제는 비상이 욕실로 들어갔다. 항상 그렇듯 눈을 감은 채, 비상은 간단하게 샤워를 끝마쳤다. 욕실에서 침실로 나오자, 혜은이 걱정스럽단 눈빛으로 비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만약 괜찮으시다면 같이 씻는 것도…아, 죄, 죄송해요!”
비상한테 말을 걸던 혜은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무척 실례되는 말을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비상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지금 혜은이 저렇게 말하는 건, 둘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물론 비상은 거절하겠지만.
“저, 지금 상황이 좀 민망하긴 하지만,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과 함께, 오른쪽에 누워있던 혜은은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자는 게 낫겠다 생각한 듯했다. 비상도 바로 누운 채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상의 머릿속엔,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들이 맴돌고 있었다. 만약 자기가 눈을 떴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부터, 대체 이 상황은 뭐지? 까지. 그 생각들을 껴안은 채, 비상은 잠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지금 입고 있는 게 잠옷인가.
평소에 잠옷을 입지 않는 비상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낯설었다. 옆에서 들리는 혜은의 숨소리도, 자기가 입은 잠옷의 느낌도, 온통 낯선 것 투성이였다. 특히 가슴팍에 닿는 천의 느낌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지금 틀림없이 자기와 안 맞는 옷을 입고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잠은 결국 찾아왔다.
비상은 거기에 뭐라 저항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