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비상은 눈을 떴다. 옆을 보자, 원래대로 돌아간 현이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있었다. 문득 비상은, 어제 본 현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떠오르자, 비상은 바로 자기 옆에서 여자애가 푹 잠들어있단 게 더더욱 믿기 어려웠다. 지금껏 비상은 이성과 밤을 같이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강산은 그런 건 모른단 듯 단잠에 푹 빠져있었다. 저 형이라면 그러리라 비상도 짐작한 터였다. 저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원래대로 돌아간 현은, 자는 중에도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떠올리면, 어제 그 사람과 현은 틀림없이 같은 핏줄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라기보다, 같은 사람이 맞지만). 자기가 이런 아이와 바로 옆에서 자고 있었단 생각을 하자, 비상은 괜히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어제 듣던 숨소리와 오늘 들리고 있는 숨소리를 대보면, 어쩐지 민망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비상은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났다. 물론 강산을 깨우는 건 포기했고(딱 봐도 아주 뻗어있었다), 현이 깨기 전에 아침이나 만들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오믈렛을 만들 생각으로, 비상은 달걀 몇 개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슬슬 아침이 다 되어갈 즈음, 뒤에서 현이 일어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맛있겠다.”
“잘 잤니?”
“응.”
비상은 요리를 하면서, 현과 아침인사를 나눴다. 드디어 오믈렛이 다 되자, 현은 알아서 바로 옆에 누워있던 강산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비몽사몽인 채 눈을 뜬 강산은, 자길 꺠운 현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곤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혀, 현이 니가 여기 웬일이야?!”
“이 형은 자기가 어제 한 말도 까먹나…”
“아, 아니. 원래대로 돌아올거란 걸 미처 생각지 못해서…”
그 말과 함께, 강산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진짜로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한단 모습이었다. 이 형도 여자면역은 그다지 없는 거 같은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비상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놀랍게도 전화한 사람은 파랑이 형이었다.
“강산이 거기 간 거 같은데, 나도 가도 될까?”
“오세요. 마침 아침 먹으려 하니까요.”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오믈렛을 하나 더 만들었다. 앞으로 올 사람을 위해서였다. 강산은 그런 비상을 보더니, 고개를 또 저으며 식탁에 앉았다.
“너도 참 대단하다.”
“번거로운 것도 아닌데 뭘.”
“그러니까 대단하다고.”
강산이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대던 사이, 드디어 파랑이 형이 비상의 집으로 들어왔다. 파랑은 오자마자 부엌으로 오더니, 오믈렛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감탄했단 듯, 눈을 반짝이며 비상을 바라봤다.
“우아. 맛있겠는데?”
“앉으세요. 얼른 안 먹으면 식으니까요.”
“비상이 요리 잘하나 보다. 정말로.”
“그래. 파랑이 너만큼은 하는 거 같다. 내가 볼 땐.”
이 말을 듣자, 비상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처음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형도 요리하세요?”
“내가 먹을만큼은 하고 살아.”
그런 말과 함께, 파랑은 씩 웃어보였다. 물론 구석에서 죽상을 하고 있는 강산은 물을 것도 없었다. 자기 자취기술을 입에 꺼내기도 싫다는 게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있던 것이다.
“비상이도 요리 잘하네. 맛있다.”
드디어 아침을 먹기 시작하자, 파랑은 그렇게 감탄했다. 강산은 그게 좀 불만이었는지, 엉뚱한 데서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너도 그만큼 하잖아. 뭘 이런 거 갖고.”
“요리솜씨에 좋고 나쁘고가 어딨어. 맛있음 된 거야.”
이 말에 조용해진 강산은, 눈앞에 있는 오믈렛을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현은 항상 그렇듯,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파랑이 뜬금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나 다음 주가 생일인데.”
그 말에, 다들 굳은 채 파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뭐?!’라과 외치기라도 할 강산마저, 그 말에 얼음이라도 된 듯 딱 굳어있었다.
“너도 큰일이다. 파랑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산은 항상 그렇듯 갑자기 파랑한테 겁을 주기 시작했다.
“저번에 잎새 생일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나도 숨겨야 하나?”
“일단 여름에 캐롤 들을 각오는 해라. 파랑아.”
파랑이 킬킬대며 말하자, 강산은 킬킬대는 걸 넘어서 식탁을 잡은 채 끌끌대며 웃고 있었다. 아마 저번에 있었던 그 드립대회, 라기보다 생일파티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잎새 걔가 그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비상이 묻자, 강산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 말은 맞았지만, 비상은 앞일을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그 난리가 또 벌어진단 말인가.
그 때, 현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벌써 이런 일도 두 번째였다.
“나 오늘 나가는 날인데.”
맨 처음엔 아무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잠시 지나서야 그게 ‘놀이’에 관한 거란 걸 모두 알아챘다. 비상도 현한테 그 얘기를 직접 들었을 터였다.
“상대가 누구더라?”
“파란 밤이래.”
비상의 말에, 절묘하게도 파랑이 대신 대답했다. 강산은 여기에 관심이 생겼는지, 갑자기 자리를 당겨앉기 시작했다.
“너라면 누가 나오는지도 알겠다. 야.”
“패널티 받은 여자분이라던데.”
기억을 더듬듯 파랑이 대답하자, 잠시 동안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빨리 전에 들은 그 ‘당사자’와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무기 강화해야 하는데.”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비상도 그럴 생각이었다. 강산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둘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할 건데. 같이 강화하지 뭘. 어때?”
물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비상 일행은 일이 끝나면 그 가게 앞에 모여 무기를 강화하기로 했다.
저녁에 일이 끝나자마자, 비상은 그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가게 앞에선 이미 강산 및 파랑이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일하는 놈들은 만날 늦는다니까.”
짐작대로 강산은 그런 말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다. 파랑이 그런 강산을 달래는 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우리같은 대학생은 시간이 무지 많잖아.”
“야, 내가 노는 줄 아냐?!”
“나 참. 사람이 왔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세 명은 가게로 들어갔다. 말을 들어보니, 아직 현은 오지 않은 듯했다.
“강화하러 오신 거죠?”
가게로 들어가자, 전에 본 그 여자애가 그 말과 함께 비상 일행을 맞았다. 여전히 가게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다른 밤들도 드나들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 때, 비상 일행 뒤에서 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아침과 달리, ‘바뀐 모습’이었다.
“언제 바뀐 거니?”
“집에서.”
어쩄든 이렇게 모인 네 사람은, 각자 카탈로그를 들고 무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강화를 시킬지 정하기 위해서였다.
비상은 처음에 생각한 대로, 물줄기가 막다른 데에 다다르면 반사되는 강화를 골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이들도 대충 마음을 잡은 듯했다. 한 사람은 빼고.
“야, 너 처음 강화 총알로 했냐?”
“갑자기 그건 왜?”
등 뒤에서 강산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리자, 비상은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면 강산한테는 자기 강화가 뭔지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신발. 너도 역시 사내자식이구나. 바로 그거야. 그런 걸 해야 된다고.”
“왜 내가 고른 강화를 가지고 형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돼?”
“야, 칭찬을 하면 곱게 좀 들어라. 곱게 좀.”
“내가 사내자식인 거랑 이걸 고른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아무튼 참.”
여기까지 듣자, 비상은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사람은 참 단순하기 짝이 없다니까. 하지만 비상은 그런 강산이 싫지 않았다. 이 사람을 그렇게 못미더워했다면, 지금껏 이렇게 같이 다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파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야깃거리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형은 뭘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맨 처음 했던 건 암모니아 발사였던가? 그거 레벨업판.”
비상이 그렇게 묻자, 파랑은 아주 재밌어죽겠단 표정으로 자기 강화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뽁뽁이엔 구멍이 여러 개 있잖아. 그 구멍에서 모두 암모니아가 튀어나가는 거야. 물론 나한텐 안 오고. 좋지?”
그 말과 함께, 파랑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비상도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형도 참 재밌는 사람이네요.”
“저 자식이 가장 웃긴다니까. 저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해요.”
“재밌는 걸 싫어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강산이 비상의 말을 받자, 파랑은 그런 말과 함께 씩 웃었다. 이걸 보면, 원래 이 사람은 천성이 이러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강화 이야기를 입에 안 담은 사람이 한 명 남아있었다. 한쪽에서 자기 무기인 마술봉을 손으로 쥐고 있는 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뭘 강화했니?”
그 말에, 현은 가만히 마술봉에 딸린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마술봉 끝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현이 다시 스위치를 올리자, 그 칼날이 가게의 벽 쪽으로 곧장 날아갔다. 신기하게도 거기에 박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둥둥 뜨긴 했지만.
“거 참 위험한 걸로 했구만.”
“괜찮아. 나도 들었는데, 저런 걸로 크게 안 다친대.”
“자기가 안 당한다고…”
강산이 기겁하듯 말하자, 파랑이 옆에서 그렇게 거들었다. 강산도 쓴웃음을 짓긴 했지만, 어쨌든 현의 강화를 막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네 명이 모두 강화를 끝마친 것이다(강산은 결국 다음으로 미뤘지만).
“오늘 현이 네가 나간다고?”
가게를 나오며 강산이 묻자,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뭔가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뭐라도 해줘야하는 거 아니냐?”
“괜찮아.”
“야, 그래도 강화한 무기는 써봐야지.”
“그건 그렇다.”
그렇게 해서 비상 일행은 뜬금없이 아무 건물 옥상에나 쳐들어가, 자기네가 강화한 무기를 시험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시험하면 안 될 까닭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상은 이제, 잠긴 옥상으로 들어가는 건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의 옥상에 쳐들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였다.
하지만 언제 봐도, ‘잠긴’ 문이 알아서 열리는 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강산은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어유. 여긴 왜 이렇게 살풍경해?”
“꽃이라도 심을까?”
“파랑이 넌 옥상에서 원예하냐?”
“근데 괜찮을 거 같은데.”
“남의 집 옥상을 어떡할 생각이야?”
엉뚱한 말에 현까지 끼어들자, 비상은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자기들이 텅 빈 옥상을 어떻게 하려고 여기 올라온 게 아니란 건 틀림없었으니까.
어쩄든 옥상에 다다랐으니, 다들 한 명씩 강화한 무기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먼저 비상 차례였다. 비상은 전에 했던 것처럼, 반대쪽 벽으로 총을 쐈다. 그러자 곧바로 총알처럼 바뀐 물줄기가 연속으로 나아가더니, 벽에 들이받자마자 곧바로 반사되어 다른 쪽으로 나아갔다. 위쪽으로 반사된 ‘총알’은, 이윽고 더 위로 올라가더니 다른 옥상 쪽으로 뚝 떨어져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비상도 만족할 만한 효과였다.
“이거 대단한데?”
강산은 뭐에라도 홀린 듯한 말투로, 혼자 그렇게 중얼댔다. 이 사람은 그렇게 자기 강화가 좋은가. 비상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내 차례지?”
그 말과 함께, 파랑이 비상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망이를 세게 쥐어, 벽 쪽으로 쏠 채비를 했다.
“근데 이거 피해가면 어떡하지?”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강산이 열받거나 말거나, 파랑은 다짐한 듯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세게 줬다. 그러자 뽁뽁이 쪽에서 노란 물이 벽 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튀어나가더니, 이윽고 벽에 부딪쳤다. 물론, 벽에 다다른 암모니아는 자잘하게 부서져 아래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 벽은 무슨 죄냐. 어유 냄새…”
“아래에 사람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강산아. 그지?”
“그게 문제냐?!”
또 투닥대는(주로 강산이) 둘을 보며, 비상은 저 암모니아가 놀이와 상관없는 일반인한테 닿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쓸데없이 인상에 남는 암모니아 곡선과 함께.
강산은 이번에 강화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남는 건 현이었다. 현은 가만히 봉을 손에 쥔 뒤, 스위치를 당겼다. 그러자, 날카로운 칼날이 곧바로 날아가 벽에 꽂혔다. 전에 가게에서 해봤을 땐 공중에 둥둥 떠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저 벽에 제대로 박혀있는 게 틀림없었다.
“누구 죽이는 줄 알았다. 이거 좀 무서운데?”
“비상아. 저거 정통으로 맞으면 괜찮을까?”
“천사가 괜찮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아마.”
여전히 벽에 꽂힌 칼날을 보며, 비상은 그렇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천사가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무기 확인도 끝냈으니, 넷은 경기가 열리는 건물로 걸어가기로 했다. 강산은 현이 자꾸 신경쓰이는지, 성격과 안 맞게 자꾸만 걱정해주고 있었다.
“현이 너, 진짜 괜찮냐?”
현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은 자기와 함께 시범경기를 한 번 해 본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는 대충 알고있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모습으로 경기에 나가는 건가…”
현을 보면서, 강산은 그렇게 중얼댔다. 사실, 그건 비상도 같은 마음이었다. 물론 전력으로만 생각하면 지금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현의 마음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말만 자꾸 나오는 게 싫었는지, 강산이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시작했다.
“니들, 노란 택시 하루에 세 번 보면 재수좋단 말 들어봤냐?”
“‘비슷한 건 들은 거 같은데.”
갑자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강산한테, 비상은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사실 이 형이 이러는 것도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형,”
“아냐! 나 초딩 때 그런 말 들었다고!”
“난 지금 처음 들었는데.”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강산은 무척 열받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랑은 그런 둘도 모른 채, 아주 즐겁단 표정으로 자기 얘길 시작했다.
“그치만 진짜 그러면 재밌을 거 같다. 그러니까 재수좋아지는 게 아닐까?”
“그렇대도. 그건 그렇고, 어릴 때 소독차 따라가면 뭐 있단 말은 안 들어봤냐?”
“그걸 쫓아다니는 얘들은 많이 봤지만 그 말은 처음인데.”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파랑은 갑자기 자기 얘길 또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만 같았다.
파랑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소독차가 가는 길을 거의 끝까지 쫓아간 적이 있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라면 모를까, 무려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라며 파랑은 킬킬댔다.
“이 놈은 그 때부터 조짐이 보인 거야. 중딩까지 돼선 쫓아다니고.”
“재밌잖아. 그지?”
“아니, 내가 언제 부럽댔냐?!”
“요즘 소독차 안 보이던데.”
어쩌다 보니 옛날 미신(?)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세 사람을, 현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현은 여기에 관해 잘 모르는 듯했다. 다른 일행들과 나이차가 띠동갑 수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금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얘기를 하다, 비상은 어떤 남자와 스쳐지나갔다. 틀림없이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비상은 그 남자한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금빛 밤의 그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방금 본 그 모습은, 고등학생은커녕 비상보다도 나이가 있어보이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 사람이 금빛 밤에서 패널티를 받은 그 사람이 아닐까?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걸 증명할 도리는 없었다. 결국 비상은 그 남자와 스쳐지나간 채, 오늘 경기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비상 일행은, 오늘 경기가 열리는 건물 앞에 다다랐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저녁시간이라서인지 큰길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도 못 본다니. 나 참.”
“형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
“누가 뭐래냐. 그냥 신기하다고!”
비상이 묻자, 강산은 이 말과 함께 투덜댔다. 하지만 강산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비상 자신도,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며, 자기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 왔구나.”
어쨌든 옥상에 다다르자, 의영이 넷을 반갑게 맞았다. 물론 오늘도, 의영이 입고있는 건 단순한 무늬가 있는 흰색 셔츠였다.
“형은 볼 때마다 정말 저런 것만 입는데.”
“그걸 다 기억하냐?”
“전에는 나무 그려진 흰 티였고, 또 전엔 아무 것도 안 그려진 흰 티였고…”
“형은 참 희한한 것만 잘 기억한다니까.”
비상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강산은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흰 옷’에 집착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긴 했다.
“흰 티가 좋아서 입으시는 거예요?”
“그냥 입기 편해서.”
파랑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묻자, 의영은 조금 민망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이걸 볼 때,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이 파랑 혼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흰 색 옷만 보면 이제 형만 떠오를 거 같다.”
“너도 참.”
그렇게 농담하는 둘을, 멀리에서 난간에 기대고 있던 승지가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비상이 자길 보는 걸 알았는지, 승지는 얼른 자기들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형하고 승지는 정말 어떤 사이일까. 비상은 그런 묘한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서로 싸우기로 한 사람들은 먼저 인사하는 게 법칙이라던데.”
“언제부터?”
비상이 묻자, 강산은 ‘언젠가부터’라고 대답했다. 아마 같이 노는 사람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게 더 예의바른 거라 다들 여기는 듯했다. 비상도 여기에 불만은 없었다.
아무튼 오늘은 현이 나오는 날이니, 그 말대로라면 상대방도 이리로 올 터였다. 어쩌면 여기서 가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비상 눈에, 저 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이 오늘 현과 싸운다는 파란 밤 쪽 선수가 틀림없었다.
언뜻 보기에, 그 사람은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올 만큼 길었는데, 그걸 가지런히 하나로 묶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보이는 게 다는 아니었다. 비상은 전에 들은 ‘패널티’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아마, 나라라고 하던)은 붉은 밤 쪽에 내려앉자마자, 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이런 말과 함께, 자기 오른손을 슥 내밀었다.
“최나라라고 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그 눈빛만 봐도, 이 여성의 패기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현은 잠깐 망설이다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이렇게 물어봤다.
“그, 패널티?”
“뭐, 언젠간 들키리라 생각했지만…”
나라는 그 말과 함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걸 보면, 자기한테도 그 패널티는 꽤 무겁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렇다고 봐줄 필요 전혀 없어요. 내가 약한 것도 아니고. 그 쪽이 남자라고…”
“나도 그런데.”
현이 그렇게 말하자, 잠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라도 이런 상황이 되리라곤 전혀 짐작지 못한 모습이었다.
“원래 나이보다 더 먹었다구요?”
“그것만이 아니라…”
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꼬리를 흐리자, 나라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드디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현의 ‘패널티’를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아, 그, 그렇구나. 실례했네요. 그럼 이만 갈게요.”
나라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붉은 밤 팀원들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 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비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안 봐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저 분 화낼 테니까.”
비상의 말에,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패널티란 건 왜 이렇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지. 자기 역시 당사자이기에,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별밤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속옷만 입고 장난치는 영상 있더라. 우리나라에서도 하면 재밌지 않겠냐?”
“그거 장관인데?”
역시나라 할까, 잎새가 그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산은 그런 둘을 아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변태자식들.”
“야,강산이 너도 보고싶은 거잖아. 안 그래?”
“시, 시꺼 이별밤. 그건 그렇고, 그거 어디서 볼 수 있냐?”
“형들도 참.”
결국 관심을 가지려하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혀를 찼다. 아무튼 이 사람들은 희한한 데만 관심이 있다니까. 그런 점에서 전에 누가 말한 ‘이상한 팀’은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근데, 지금 나라면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안 해도 돼. 저런 건.”
현이 갑자기 관심을 보이자, 비상은 자기 나름대로 그걸 뜯어말렸다. 하지만 현은 둘째치더라도, 별밤과 잎새라면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것만 같았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형, 여기 계셨어요?”
갑자기 그 말과 함께, 누가 비상 쪽으로 다가왔다. 강산 및 별밤만큼 덩치가 있었지만, 둘과는 달리 살이 조금 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척 성실하게 생겼으며, 언뜻 봐도 선배, 즉 연장자를 잘 챙길 것 같은 인상이었다. 쓰고 있는 안경이, 특히 그런 인상을 강하게 만들었다.
“대한이 너 잘왔다. 이런 거 안 할래?”
“어, 별밤이 형. 그게 뭔데요?”
연장자 형들이 순진한 연소자를 안 좋은 길로 꾀고 있는 걸 보며, 비상은 거기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일이 없다 생각해서였다.
그 떄였다.
“시작!”
그 말과 함께, 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의영은 현이 걱정되는지, 현 바로 옆에 있는 난간에 기댄 채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나라가 있는 옥상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갈 때 난간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뛰어넘은 게 인상에 남았는지, 강산이 그걸 가만히 보면서 이런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솔직히 웬만한 자식들보다 현이 더 멋있지 않냐?”
“그러게.”
비상은 그 생각과 함께, 사람은 모습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이만큼 인식이 달라지는 존재구나. 란 걸 느꼈다. 물론 이건 비상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기도 엄연한 패널티 대상자니까.
멀리서 보면, 나라의 무기는 뾰족한 머리핀처럼 보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틀림없이 한무더기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나라는 그 핀 무더기를, 현이 날아오는 쪽으로 냅다 던져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절묘하게 피해낸 현은, 드디어 나라가 있는 옥상에 섰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이 경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은 곧바로 봉을 휘둘러, 큰바람을 만들어냈다. 나라는 그 바람에 잠시 뒤흔들리다, 곧바로 머리핀을 다시 현한테 던졌다. 이번에도 피한 뒤, 현은 반대쪽으로 뛰며 봉을 ‘발사’했다. 이게 갑작스러웠는지, 나라는 아슬아슬하게 그걸 피하며 분하단 듯 외쳤다.
“그런 강화를 했단 말야?!”
저 억울해하는 모습을 볼 때, 저 나라라는 사람은 정말 이기고 싶은 듯했다. 사실 전에 파란 밤 사람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이 일로 열을 단단히 받았는지, 나라는 곧바로 현을 뒤쫓으며 자기 무기인 머리핀을 있는 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팔에 핀이 맞았는지, 현은 자세를 삐끗한 채 바로 근처 건물 옥상에 쓰러지듯 내려앉았다. 그 다음으로 나라가 내려앉자, 어떤 밤이든 그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동안, 둘은 서로 말이 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현이 드디어, 나라의 빈틈을 노려 봉을 다시 크게 휘둘렀다. 여기에 넘어질 뻔한 나라였지만,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는 핀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의 바람으로 그 핀들은 다시 튕겨져, 나라가 있는 쪽으로 거세게 날아갔다. 물론 나라 역시 얼른 피했지만, 핀 중 하나가 그만 다리에 꽂힌 듯했다.
“아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라는 현 쪽을 노려보며 다시 핀을 던졌다. 이번엔 다른 데로 뛰어가려던 현의 등짝에 핀이 꽂혔다.
그걸 지켜보던 비상은, 나라가 ‘핀을 던지는’ 공격만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물론 현이 비틀대는 걸 보면 효과가 있는 건 틀림없었지만, 저거 말고 다른 강화를 하지 않았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드디어 나라의 강화가 무엇인지 드러났다, 나라는 멀리 날아가는 현 쪽으로, 핀들을 ‘한데모아’ 한꺼번에 던졌던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저게 나라가 한 강화인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걸 정통으로 맞은 현은, 그만 옥상에 내려앉기 전 바닥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으악!’이란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현은 바로 아래에 있는 나무에 간신히 내려앉았다.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아있던 현은, 이윽고 다시 나라가 있는 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나오는 가운데, 비상 바로 옆에 있던 의영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보이는 것보다 담력이 대단하다. 현이가.”
의영의 말에,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의영 자신도 비슷한 걸 했지만, 현은 자기와 여러 모로 다르단 걸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나라도 여기에 놀랐는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걸 지켜보던 비상 옆에서, 갑자기 어제 들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 언니가 지금쯤 이를 부드득 갈고 있겠죠?”
그 쪽을 보니, 역시나 은솔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상 옆에서 난간에 턱을 괸 채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런 게 신출귀몰이라는 건가. 비상은 이제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너희 팀에 가야지 왜 여깄니?”
“전 스릴을 즐기는 성격이거든요.”
니가 강산이 형이니. 라고 말하려다, 비상은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은 나라 위로 뛰어오르며, 다시 자기 봉을 ‘발사’했다. 나라는 그걸 아슬아슬하게 피한 다음, 다시 핀을 연달아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다리 및 팔에 핀을 맞은 현은, 삐끗한 채 옥상에 내려앉다 굴러넘어지고 말았다. 다들 숨을 다시 죽이는 가운데, 현이 누운 채 나라한테 봉을 다시 ‘발사’했다. 여기에 다시 다리를 다친 듯, 나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나라는 아무래도 발목을 삔 듯했다. 하지만 나라는 악착같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 아야…”
현 역시 몸을 비틀대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열심이었다. 불편해보이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라보다는 좀 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윽고 둘 다, 난간에 기대고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간은 1분도 남지 않았다. 얼른 누군가 공격하지 않으면, 전처럼 그대로 판정으로 넘어갈 상황이었다.
그 때, 현이 숨을 고르더니 자기 봉을 크게 휘둘렀다. 비록 팔에 힘이 그다지 들어가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봉을 잡을 만큼은 체력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봉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지는 걸 봐서, 현도 틀림없이 많이 지쳐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현은 물론 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그걸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 기운이 아주 떨어진 듯했다.
“그만!”
저 멀리 어딘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즉, 현이 이긴 것이다. 오늘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도 드물어서인지(얼마 하지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이제야 살았단 듯 숨소리를 내는 게 들려왔다.
다들 정신이 들자마자, 현 쪽으로 뛰어가선 ‘괜찮아?’라고 묻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둘 다 몸이 너덜너덜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은솔도 이번엔 붉은 밤이 아니라, 자기 팀인 파란 밤 쪽으로 뛰어갔다.
“언니! 괜찮아?!”
“분해. 이길 수 있었는데…”
그 말과 함께, 주저앉아있던 나라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아무래도 이번에 진 게 무척 억울했던 듯했다. 사실, 오늘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질 뻔했네.”
현은 몸을 비틀대면서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렇게 말했다. 강산은 잘했다는 듯, 연신 현의 등이며 어꺠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정말 고생했다. 너도 참.”
“우리 나라 언니는 안 고생했어요?!”
그 때, 저 쪽에서 누가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에도 ‘왜 우린 만날 지기만 해야 돼요?’라고 말하던 그 여자애였다. 언뜻 보기에, 은솔과 동갑처럼 느껴졌다.
“다 들었어요. 패널티 써서 이긴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비겁하게.”
“야, 원래 모습이면 당연히 현이가 약한 거지. 살다보면 그런 거 아니냐?”
강산이 그렇게 말하자, 여자애는 할 말을 잃었다. 대신 은솔이 여자애 옆에 서서, ‘괜찮아. 진정해’라 가만히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나라한테 캔맥주를 가지고 왔다. 아마 파란 밤 쪽 사람인 듯했다.
“힘들 텐데 이거라도 마시고 마음 바로잡아.”
“미성년자가 이런 거 마시면 법에 어긋나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라는 그 말과 함께, 그 사람한테 눈을 부라렸다. 물론 나라가 진짜로 ‘법을 어기기 싫어서’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었다. 나라는 지금, 그저 자기 처지가 괴로웠던 것이다.
“현이는 괜찮지 않나?”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가만히 있던 현의 손에 차갑게 식은 캔맥주가 들렸다. 물론 누군가 쥐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현은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누군가한테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현의 손에 들린 캔을 까더니 입으로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맥주를 입으로 집어넣은 현은, 그걸 삼키려다 말고 빨개진 얼굴로 그걸 옥상 바닥에 뱉어내기 시작했다. 켁켁대며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면, 정말로 그걸 마시는 게 힘들었던 듯했다.
“누가 현이한테 이런 짓 하랬어?!”
강산이 주위한테 화내는 동안, 비상은 가만히 현 곁으로 다가갔다. ‘힘들었니?’라 묻자, 현은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아하는 맛이야.”
비상은 지금 현의 표정이 무척 구겨져있단 걸 깨달았다. 현을 알고 지낸 다음, 처음으로 보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눈물을 글썽인 채, 현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소매로 입을 닦았다. 보통 성인남성의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현은 우스워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정을 다 아는 비상의 눈엔 전혀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암튼 현이한테 이런 짓하면 죽인다. 알았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현이 뱉은 맥주를 치우고 있었다. 이럴 땐 솔선수범하는 강산이 어쩐지 비상의 눈엔 든든하게 보였다. 만날 이러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오늘 하루 참 파란만장한데.
경기가 끝났는데도 아직 부산한 옥상을 둘러보며,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