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12. 문화교류의 중요성

그 날 저녁, 비상은 강산과 같이 수원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퇴근하던 중, ‘심심한데 서울이나 구경하러 가자’며 강산이 자기 팔을 잡아챘던 것이다. 대체 이 밤중에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상은 시키는 대로 서울까지 끌려갔다. 결국 둘이서 한강에 내려 서울 야경을 보며, ‘신발, 이거보다 더 멋진 게 있냐?’라고 강산이 자랑스레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상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옆에 강산이 같이 있지만.
벌써 시간이 여덟 시를 훌쩍 넘긴 걸 보며, 비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오늘 아무 경기도 없기에 망정이지, 뭐라도 있었으면 큰일날 뻔했단 생각에서였다. 강산은 그런 비상의 마음도 모르는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지하철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사람도 참 제멋대로라니까.
갑자기 동료가 걸어온 전화를 받으며,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강산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오! 웬일이래”라 외치며, 자기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강산은 바로 전화를 받고, 아주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현이 니가 이리로 전화걸어주는 거니? 왜, 뭐하냐고? 비상이 쟤랑 술이나 마실까 했는데? 뭐, 분식점이라도 가지. 그래, 알았어. 그럼 그 때 보자.”
그렇게 전화를 끊자마자, 강산은 지하철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둘이 막 한강을 지나려 할 무렵에.
“나도 여자한테 전화받았다! 으하하하하!!”
“이 형이 미쳤나…”
“뭐가 미쳐!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줄 알아?”
“옛날에 하던 광고도 아니고,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지금이 20세기도 아니고.”
“그런 게 있던가?”
“모르면 됐어.”
그 말과 함께, 비상은 강산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이 형은 못말린단 생각과 함께.

그렇게 수원에 다다르자, 비상은 낯익은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 모습인 현이, 항상 그렇듯 곰귀달린 후드티를 눌러쓴 채 비상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모자 눌러썼구나. 너.”
“이게 좋아서.”
강산이 킬킬대며 그렇게 놀리자, 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밤중에 자기들을 믿고 여기까지 와준 현은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원래는 아까 말한 대로 쟤랑 술이나 먹을까 했는데, 미성년자도 있으니 분식집 가지 뭘. 어때?”
“나야 뭐.”
“맛있겠다.”
강산의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비상도 찬성했다. 분식집이면 충분히 건전하고, 이 시간에 안 갈 까닭도 없으니까. 사실 비상도 배가 꽤 고팠던 것이다.
“자, 그럼 가자고!”
그렇게 강산을 따라, 비상 일행은 밤중에 분식집으로 가게 되었다. 아무튼 저 형은 쓸데없이 기운이 넘친다니까.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물론 그걸 입에 대진 않았다.

“역시 분식하면 떡볶이지. 암. 그렇고말고.”
분식집에 들어가자마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참고로 비상은 군만두, 현은 라면을 시켰다. 어차피 셋이나 있으니, 음식이 남을 리는 없었다(남는다 해도 먹어줄 사람이 바로 옆에 있고).
비상은 강산과 나란히 앉은 채, 음식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현은 건너편에 앉은 채, 신기하단 듯 가게를 가만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렇게 음식이 나오고, 셋 다 먹으려 할 때였다.
“아, 나도 먹어야지.”
갑자기 어디선가 의자가 나타나더니, 여자애 한 명이 거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꽤 활달해보이는 인상을 주는 여자애였는데, 그 인상으로 볼 때 사교성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이는 대략 현쯤 될까. 교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채,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가지런히 묶고 있었다. 앞머리는 검정 핀으로 정리한 듯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애는 누구란 말인가. 비상은 물론, 강산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은 항상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댁은 누구슈?
“파란 밤 사람인데요.”
그 말과 함께, 여자애는 아무렇지 않게 비상의 군만두를 하나 뺏어먹었다. 강산은 여기에 위기감이라도 느꼈는지, 자기 몫인 떡볶이 그릇을 한쪽으로 치웠다. 아무래도 자기 먹을 걸 사수하려는 듯했다.
“야, 이건 내 거야!”
“우아.”
현은 뭐가 그리 놀라운지, 이런 광경을 보면서 진지하게 놀라고 있었다. 사실 자기네들이 붉은 밤이란 걸 알아본 눈썰미도 대단하긴 했지만, 비상이 더 놀란 건 저 근거없는 철면피였다. 도무지 처음 보는 사람(같은 ‘놀이’를 한다 해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히 우리 팀이 좀 초식팀이긴 하죠?”
여자애는 여전히 만두를 우물거리면서, 비상 일행한테 그렇게 물었다. 가만히 보면, 이 여자애는 현과 비슷한 키인 듯했다. 일단 앉은키가 비슷했던 것이다.
“너 말 진짜 웃기게 한다.”
“그런 말 많이 듣거든요.”
여자애는 그 말과 함께 강산의 떡볶이를 먹으려다, 포크로 저지당했다. 강산은 진심으로 누가 자기 걸 뺏어먹는 게 싫은지, 자기보다 몇 살은 더 어린 여자애한테 눈을 부라렸다.
“그런다고 안 준다. 너.”
“애 상대로 뭐하는 짓이야. 형도 참.”
비상은 한숨을 쉰 뒤, 그 여자애한테 ‘그냥 내가 시켜줄까?’라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뺏어먹는 게 최고니까 괜찮아요.”
“뭐가 어쩌구저째?!”
이렇게 강산이 또 열받은 와중에도, 식사는 천천히 이뤄지고 있었다. 현도 라면을 먹고 있었고, 여자애도 비상의 군만두를 먹고 있었다. 강산은 여전히 입을 비죽 내밀고 있었지만.
“그, 그럼 금빛 밤은 육식팀이냐?”
“뭐 그렇죠. 무서운 사람 많고.”
“그럼 우리 밤은?”
비상이 묻자, 여자애는 잠깐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과 함께 군만두를 하나 더 뜯어먹기 시작했다.
“음…이상한 팀? 아야!!”
여자애는 대답하자마자, 강산한테 그냥 봐도 따끔해보이는 꿀밤을 제대로 맞고 말았다. 여자애는 그게 꽤 억울했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강산한테 서러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이렇겐 안 때려요!”
“우리 엄만 만날 이렇게 나 때렸어. 이 기집애야!”
아무리 봐도 둘 다 똑같은데.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현은 이게 그렇게나 재미있는지, 라면을 먹다 말고 그걸 빤히 보고 있었다.
어쨌든 여자애는, 비상의 군만두를 먹으며 왜 자기가 여깄는지에 관해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굳이 여기 끼어든 건, 각 밤끼리도 교류란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했다.
“솔직히 다들 노는 거 가지고 엄청 진지하잖아요.”
여자애 말에 따르면, 자기 주장인 상록 오빠는 그나마 나은데, 초식팀 주제에 강경파가 좀 있어서 다른 밤과 잘 안 어울리려 한다는 듯했다. 여자애는 그게 불만인지, 그걸 말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전 그럴 생각 없거든요. 특히 붉은 밤은 이상한 사람 많고.”
“넌 여기 싸움걸러 왔냐?”
“특히 오빠가…”
“야, 너 나랑 여기서 한 판 붙을래?!”
강산이 이 말에 열받아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비상은 어떻게든 이 형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런 일로 자기보다 몇 살은 더 어린 여자애랑 싸우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여겨서였다.
“이 형도 애한테 뭔 짓이야. 참.”
그런 세 사람을, 현은 콜라를 마시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라면은 이미 다 먹었는지, 그릇이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너도 우릴 참 잘 알아봤다.”
“제가 그런 걸 또 잘해요. 에헤헤.”
비상이 감탄하자, 여자애는 그런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댔다. 그와 함께 방금 싸움질할 뻔한 누군가를 곁눈으로 보며,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댔다.
“그래도 오빠는 말이 통할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쟤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저 형보단 낫지. 사실.”
“이거 쏘기로 한 게 누군진 알아?!”
“그럼 더치페이 가지, 뭘.”
강산이 있는 대로 화내자, 비상은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강산을 더 열받게 했는지, 갑자기 이렇게 소리치며 옆에 있던 여자애를 손가락으로 똑똑히 가리켰다.
“시꺼! 내가 다 낼 거야! 넌 내가 생명의 은인이야. 알았어?”
여자애는 그래도 좋다는 듯,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 형도 참 바보라니까. 비상은 그 생각을 다시 했다. 이런 생각이 한두 번도 아니지만.
“근데 이름이 뭐야?”
현이 그렇게 묻고 나서야, 비상은 자기네들이 이 수상한(?) 여자애 이름도 모른 채 이야기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처음 본 이한테 이름을 묻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애도 그걸 지금 깨달았는지, 킬킬 웃으면서 비상 일행을 바라봤다.
“이상한 말하다 까먹었네요.”
“자각은 있냐?”
“오빠도 이상하니까 괜찮아요.”
“뭐라고?!”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강산은 진짜 죽일듯한 눈빛으로 여자애를 노려봤다. 그게 무서웠는지, 여자애는 얼른 자기 이름을 댔다.
여자애 이름은 유은솔인데, 일단 파란 밤에선 마당발 역할을 하고 있다 했다. 보이는 대로 고등학생인데, 현과 동갑인 듯했다.
“특이한 모자 쓰고 있네. 그러고 보니까.”
이제야 현이 제대로 보였는지, 은솔은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그 곰귀달린 후드티가 신기한 듯했다.
“이게 좋아서.”
“더운데 눌러쓸 정도면 진짜 좋아하나 보다.”
은솔은 그 말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는 모습이었다.
“근데 여기 패널티 담당은 누구예요?”
“너라면 가르쳐주겠냐?”
은솔이 비상 일행을 보며 그렇게 묻자, 강산은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솔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알려준다고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먼저 말하면 되죠?”
“상록이 형한텐 허락받았니?”
“그런 것쯤 말한다고 뭐라 할 분 아니에요.”
비상의 말에 이렇게 가볍게 대답하는 은솔을 보며, 비상은 이 애도 담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자기가 알고 있는 이 나이 또래 여자애들보단 훨씬 패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솔은, 자기 말대로 여전히 가볍게 그 패널티의 주인을 털어놓았다.
“나라 언닌데요. 패널티는 생략할게요.”
“중요한 건 안 말하냐?”
“직접 보면 되잖아요.”
강산의 말이 불만이었는지, 은솔은 입을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이런 질문을 꺼내놓았다.
“이제 여기 패널티도 말하세요.”
그 당당한 말투에 현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은솔은 그게 퍽이나 의외였는지, 현을 보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뭔데?”
“너도 니 맘대로 상상해봐라. 그럼 될 거 아냐.”
“그러죠 뭐.”
강산이 또 투덜대자, 은솔 역시 맞받아치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넘어가나보다, 라 비상이 여기던 순간, 갑자기 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몸집이 점점 커지는 현을 보며, 은솔은 이제야 알았단 표정을 지었다. 비상은 현이 지금 어떻게 생각할지가 자꾸 신경쓰였다. 워낙 예민할 때니,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여겨서였다.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제대로 ‘바뀐 모습’이 되었단 걸 깨닫자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 모습을 나타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돼.”
“그래도 모자는 쓰네.”
“중요한 게 그거냐?”
은솔이 놀란 모습을 보이자, 강산이 이젠 질렸단 듯 그렇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현은 여전히 담담하게, 이런 말과 함께 검정색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뭘 쓰는 게 편해서.”
물론, 주위에서 이걸 이상하게 볼 리 없었다. 이조차 하늘의 힘인 것이다. 은솔도 신기한지, 잠깐 주위를 돌아봤다. 마치 기적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 그죠?”
“그걸 니가 말하지 마.”
은솔의 말에, 강산은 다시 투덜댔다. 하지만 은솔은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근데 이건 궁금하다.”
“야, 너 우리 현이한테 뭐하려는 거야?”
강산이 은솔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은솔은 현 쪽으로 다가간 다음, 갑자기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뭐라도 확인하고 말겠다는 모습이었다.
“뭐하는 거니?”
“냄새도 달라졌나 보려고요.”
은솔의 말에, 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을 지었다. 자기도 언젠가 비상한테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게 ‘본인’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겼던 듯했다.
“냄새가 바뀌어?”
“그거야 모습이 바뀌면 그렇지.”
현이 진지하게 그렇게 묻자, 은솔이 당연하단 듯 이렇게 대답했다. 현도 그걸 확인하려는지 자기 윗옷 냄새를 맡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아, 지금은 모르지. 원래대로 돌아간 다음에 입었던 옷을 맡아보면…”
“니들 공공장소에서 무슨 소리냐?”
이걸 더 못 들어주겠다는 듯, 강산이 열받은 목소리로 둘의 이야기를 막았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형의 말이 이번엔 맞긴 했다.
“아, 공공양속에 부적절한 얘기긴 하네요.”
은솔이 그 말과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강산은 더 열받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기가 은솔한테 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왜 쟤한테만 자꾸 말리는 거야. 진짜.”
그 뒤로도 강산은 자꾸만 은솔한테 불만이 있는지, 자기가 어떻게든 지켜낸 떡볶이만 죽어라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할 말이 떠올랐는지, 은솔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 코딱지같은 기집애 같으니라고.”
“왜 그런 말을 써요!”
“야, 그런 캐릭터가 있어. 너보다 훨씬 예쁜 애. 좀 찾아봐라.”
은솔이 열받는단 표정을 짓자, 강산이 지쳤단 듯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비상조차, 이 형이 뭘 말하는지 얼른 알 수 없었다.
“형, 방송 말하는 거 아냐?”
“있대도. 모르면 네이버에 검색이라도 하든가. 초록창 둬서 어디 쓰냐?”
“뻥같은데.”
“야, 내가 뻥치는 걸 니가 어떻게 알아?!”
은솔이 자꾸만 자기 말에 딴죽을 거는 게 열받았는지, 강산은 죽일 듯이 은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둘도 참 좋은 천적이 되겠는데.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었기에,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분식집에서 시끌벅적하게 실컷 먹은 비상 일행은, 이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이 때 은솔과도 헤어지게 됐는데, 아직도 기운이 넘치는지, 이런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저 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또 봐요!”
“시꺼!!”
강산은 그렇게 은솔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지만, 비상은 이 형이 그 애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건 잘 알 수 있었다. 그냥 너무 죽이 잘 맞아서 열받은 것 뿐이었다. 저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어쨌든 이젠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비상 일행은 어떻게 할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강산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솔직히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게 비상이 너네 집 아니냐?”
“뭐, 그렇지.”
“그럼 비상이네 집이나 한 번 가자!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 됐네.”
이렇게 해서 비상은 강산 주도로 자기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자기도 그리 싫진 않았지만, 이 형이 한 번 자기 생각을 밀려고 하면 밑도끝도 없단 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버스를 타려 기다리는데, 누군가 강산을 불렀다. 물론, 비상은 전혀 들은 바 없는 목소리였다.
“야, 너 강산이 아니냐?”
“형이 여긴 웬일이야?!”
그 말에 뒤를 돌아보던 강산은, 이 말과 함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로 볼 때, 이 사람이 바로 전에 말한 강산의 형인 듯했다.
“너야말로 웬일이냐. 친구들까지 데리고.”
그 사람은 비상한테 인사를 하더니, 자기 이름은 이강철이라고 소개했다. 올해로 서른이며, 퇴근하다 우연히 강산 일행을 보고 말을 건 듯했다. 같은 핏줄이라서인지 강산 못지않게 몸집이 있었지만, 어쩐지 강산보단 훨씬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마 성격도 저 형보단 점잖겠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강산이 형한테선 전혀 느낄 수 없는 카리스마 비슷한 게, 이 사람한테선 잘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강산은, 그딴 게 아니라 다른 게 더 신경쓰였던 듯했다.
“친구가 아니라, 얘는 나보다 한 살 어린데…”
“너보다 나이가 있어보이는데?”
강철은 그 말과 함께 킬킬대더니, 뭔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비상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기 말을 고치기라도 하려는 듯, 여전히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아, 이건 그 쪽이 나이먹었단 말이 아니라, 그, 있잖아요. 성숙함…”
“암튼 형이나 잘 돌아가. 난 오늘 얘 집서 밤샐 거다.”
이 말에 단단히 토라졌는지, 강산은 이 말과 함께 비상 일행을 억지로 끌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 태도로 볼 때, 방금 강철의 말에 기분을 단단히 잡친 듯했다. 저 형제 사이에도 여러 사정이 있겠지. 이제 비상한테 그런 사정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야. 여기가 천하의 윤비상 집이냐?”
그렇게 해서, 비상 일행은 무사히 자기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왜 하루가, 그것도 밤만 쓸데없이 길게 느껴지지. 그런 생각으로 짐을 풀던 비상이었지만, 강산은 아직도 기운이 넘쳐나는 듯했다.
“현이 넌 자주 왔다매?”
그 말에, 현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강산은 아까 그 일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지, 거실로 들어오면서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대기 시작했다.
“젠장. 기분 더럽게 좋았는데 저 형이 와서…”
“사이가 나쁜 거야?”
“나쁜 게 아니라 안 맞는 거야. 망할.”
비상의 말에, 강산은 이렇게 대답하며 자기 멋대로 물을 한 잔 마시기 시작했다. 비상도 그건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형인 강철에 관해 묻진 않았다.
“오늘 나 여기서 자고 갈 거다. 괜찮지?”
“그러든가.”
게다가 강산은, 벌써 이 집에서 눌러앉아있다가 내일 돌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런 건 참 거침없는 형이라니까. 이젠 비상도 이 형한테 적응했기 때문에, 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상이라 하들, 강산이 다음에 이렇게 말한 건 전혀 짐작치 못했다.
“이왕하는 거 셋이서 거실서 자면 어떠냐? 지금은 문제도 없고.”
“그게 말이 돼?”
비상은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현은 괜찮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 비상이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늜이었다.
“그럼 그러든가.”
그 말과 함께, 비상은 방에서 이부자리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오늘 밤 편하게 자긴 다 글렀단 생각과 함께.
“넌 자취하는 애가 왜 이렇게 깨끗하게 사냐?”
“그냥 치우고 밥만 제때 먹으면 되잖아.”
“그게 어렵다고!”
강산은 비상이 혼자 사는데도 꽤 건전하게 살고 있는 게 무척 불만인 듯했다. 아마 자기도 자취하고 있어서 괜히 질투하는 듯했다. 저 형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현이 넌 누구랑 같이…아, 부모님 있지?”
“나도 혼자 사는데.”
“…괜찮냐?”
강산이 걱정했지만, 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마 이런 질문을 들은 게 한두번이 아닌 듯했다.
“친척들이 돈 보내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비상은 자기 방에서 뭔가 꺼내왔다. 어차피 이 형은 자기 집안에 뭐 재밌는 게 없나 여기저기 뒤질 게 뻔하니, 미리 내놓는 게 낫다 여겨서였다.
“이게 뭐냐?”
비상이 집에 있던 VR기기를 내놓자, 강산이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비상은 최신기술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기에, 이것도 궁금해져서 사놓았던 것이다.
“우아. 대단하다.”
시험삼아 현한테 줘보니, 정말 놀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이런 경험이 처음인 듯했다. 어쩌면 입체영화를 본 적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뭐하냐?”
현이 VR에 푹 빠져있을즈음, 쓸데없이 비상의 부엌을 구경하고 있던 강산이 말을 걸었다. 그러자 현은 VR기기를 머리에 차고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가만히 대답했다.
“노르웨이에 있어.”
“야 신발. 이 어두운 날에 어딜 순간이동해?!”
“형은 무슨 옛날 광고 찍어?”
비상이 정말 어이없어서 이렇게 어깃장을 놓자, 강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한텐 짚이는 게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뭔 소리야 넌?”
“이게 무슨 컴퓨터 처음 보급될 때도 아니고.”
비상이 헛웃음을 짓자, 강산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현 쪽을 보며, 가만히 이렇게 물었다.
“…VR이 그런 거냐?”
“궁금하면 하든가.”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저 형도 참 단순한 데가 있다니까, 란 생각과 함께.

“가끔 이러는 것도 좋네.”
잠시 뒤, 비상을 비롯한 세 명은 거실에 이부자리를 편 채 나란히 누워있었다. 비상이 소파 쪽, 현이 가운데, 그리고 강산이 맨 바깥쪽이었다.
“비상이 넌 여기 누구 데려온 적 있냐?”
“별로 없어.”
“그럼 잘됐네. 집도 시끄러워지고.”
“그게 좋아할 일이야?”
비상이 그렇게 어이없어하자, 강산은 아주 자신만만한 말투로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은, 참으로 이 바보같은 소시민, 이강산다웠다.
“야, 사람냄새가 나는데 얼마나 좋아!”
비상이 그대로 잠들려 할 때, 현은 가운데에 누운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늘은 다른 때와 다른 상황이라서, 현도 속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너도 친구들하고 같이 잘 때는 있지?”
“가끔.”
강산의 질문에, 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혼자서 가만히 이렇게 중얼댔다.
“그런데 이렇게 자는 건 처음이야.”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현도 이성 둘, 그것도 연상에 둘러싸여 자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게다가 원래 모습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조차 없었다.
“뭐, 오늘은 편히 자라. 너도 고생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산은 몸을 반대로 틀었다. 그래도 현은 잠을 못 이루겠는지, 자꾸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비상은 가만히 말을 걸었다.
“긴장되니?”
“어쩌면.”
현은 그 말과 함께, 누운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모자는 쓰고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현은 원래 모습일 땐 잘 때도 곰귀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다.
“편히 자. 지금은 괜찮잖아.”
“응. 잘 자.”
그 말과 함께, 현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비상의 말에 어느정도 마음을 놓은 듯했다. 어쩌면 현은 양옆의 낯선 사람들 때문에 경계심을 갖고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비상이고 강산이고, 겨우 일주일쯤 알고 지낸 성인남성일 뿐이니까.
그렇게 잠이 들었던 비상은, 잠시 뒤 갑자기 눈이 뜨이는 걸 느꼈다. 옆을 보니, 현은 어느새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 푹 잠든 옆모습에서, 비상은 어쩐지 원래 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 애는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다시 잠 속으로 빠졌다. 잠결에 현이 숨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