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럼 또 벨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비상은 잠에서 깨어났다. 모처럼 쉬는 날을 또 누가 방해하는 거야, 란 생각에 액정을 보자, 거기엔 ‘강산이 형’이란 이름이 똑똑히 나와있었다.
게다가 전화를 받자마자, 강산은 비상 입장에서 무척 뜬금없는 말을 던져댔다.
“잎새 오늘 생일이란다. 준비해라.”
“누구라고?”
“너 모르냐? 연장자 중 하난데.”
“지금껏 보지도 못한 사람 생일을 왜 나까지 준비해야 하는 거야?”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강산은 전화기 너머에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비상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는 태도였다.
“이 불경한 놈. 연소자가 연장자한테 개겨?”
“알았어. 간대도.”
마지못해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 강산은 만족한 듯 전화를 끊었다. 방금 비상이 한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 잎새란 분을 비상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자기 탓이지만, 그래도 모습조차 모르는 분의 생일을 축하하는 건 솔직히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비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장자 형의 생일준비를 하게 되었다. 점심에 강산이 형 및 일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과 함께.
그렇게 약속한 곳에 나가자, 강산은 물론 파랑, 심지어 현까지 거기에 있었다. 현은 원래 모습인 채,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다. 비상의 모습을 보자마자, 강산은 곧바로 없던 불만을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현이는 전화하자마자 가겠다 하던데, 너란 놈은…”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 아닌가?”
어쨌든 강산 말에 따르면, 다른 채비는 다른 연장자 및 연소자들이 하고 있으니, 자기네들은 선물만 사면 되는 듯했다. 파랑은 벌써부터 뭘 할지 생각한 듯, 장난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씩 웃었다.
“난 애국가 불러야지.”
“왜 남의 생일에 애국가야?”
“축하할 일이잖아.”
파랑과 강산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상은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우리 팀도 참 별난 사람들이 많다니까. 물론 비상 역시, 어쩌면 그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비상을 비롯한 네 명은, 그 잎새 형이란 분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상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상은 여전히 모호한 마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상은 ‘잎새 형’이란 이름 자체를 오늘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근데 대체 어떤 사람이야? 그걸 알아야 사든말든 할 거 아냐.”
“우리 팀 알잖냐. 그럼 알지 않겠어?”
그 말을 참 자랑스럽게도 하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이 사람이 글렀단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 말은 꼭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방금 비상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던 것이다.
파랑의 말에 따르면, 그 잎새 형이란 사람은 굳은 일도 알아서 하며, 사람들하고 친해지는 것도 빨라서 얼른 말 놓아주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라 했다. 심지어 의영이 형과도 벌써 말을 놨다는 말을 들으며, 비상은 대충 그 잎새 형이란 사람의 성격을 알 것 같다 생각했다. 참고로 강산의 말에 따르면, 모르는 비상이 니가 이상한 것이며, 솔직히 간식 사는 것도 그렇고 별의별 걸 혼자 다 해서 이미 다른 밤에서도 알고 있는 존재라 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덕택에 비상은 그 잎새 형이란 사람이 또 다시 모호해지는 걸 느꼈다.
어쨌든, 네 사람은 제각기 잎새 형한테 줄 선물을 고르기 시작했다. 강산은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결국 ‘인생은 현찰이지’란 말과 함께 로또를 하기 시작했다. 비상은 정말로 기가 찼지만, 아무튼 강산이 형이 저러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은 무슨 사는 게 그래?”
“시꺼. 이게 내 진심이야.”
강산의 말을 들으면서, 비상은 자기가 하는 게 생일 준비인지 드립 준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런 팀이니까 희한하단 소리를 듣지.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비상도 그런 ‘붉은 밤’이 싫진 않았다.
“이 정도면 잎새도 내 진심을 알아줄 거야. 크하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강산은 로또를 두 장이나 뽑아오면서 자꾸만 킬킬댔다. 이 사람도 참.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생일준비를 몇 번 해왔지만, 이런 생일준비는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랑이 형은 애국가로 퉁칠 생각인 듯하니, 결국 남은 건 현과 비상 두 명이었다. 현은 ‘이런 거 많이 안 해봤는데’라 말하면서도, 근처에 있던 서양과자 코너로 곧장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걸 사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밖에 없어서.”
비상이 묻자, 현은 그런 말과 함께 과자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어린 현한테, 뭔가 고를 선물이라면 이런 게 먼저 떠오르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괜찮아. 잎새 이런 거 무지 좋아해. 쓸데없이 단 거.”
강산이 이런 말과 함께 현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이에도, 현은 진열대를 여기저기 둘러보며 여러 과자들을 꾸러미에 담기 시작했다. 그 손놀림을 볼 때, 아마 여기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도, 돈은 괜찮니?”
“친척들한테 받는 돈 있어.”
그렇게 짧게 말한 채, 현은 다시 과자를 꾸러미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해서 약 만원어치쯤 되는 외국과자 꾸러미가 만들어졌다. 대충 꾸러미를 봐도, 단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로 군침이 나올 법한 과자가 잔뜩 들어있었다.
“왜 내 로또보다 저게 더 호화스러워보이냐?”
현이 무거워보이는 꾸러미를 가만히 손에 들자, 강산은 그 말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비상한테 그건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형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지.”
“뭐라고, 이 자식아?!”
강산은 또 비상의 목을 졸라댔지만, 여전히 비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숨이 좀 막히긴 했지만, 이런 데 당황하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옆에서 파랑은 이게 그렇게 신기했는지, 이런 말과 함께 킬킬대며 웃었다.
“강산이 목조르는 걸 이만큼 참는 건 비상이가 처음인 거 같은데?”
물론 비상도 그 말대로이리라 생각했다. 자기가 아니라면, 이렇게 목을 졸리는데 안 버둥댈 리가 없으니까.
“나 참, 보지도 못한 사람 선물을 사라니…”
이제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비상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아무튼 같은 팀이고, 그런 분께 선물을 드리는 건 무척 바람직하리라 생각을 고쳐먹었다. 뭘 사야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비상은 핸드폰 케이스가 잔뜩 걸린 가게를 찾아냈다. 뭘 살까 뒤적이던 비상은, 뒤에 고추가 크게 그려진 투명한 케이스를 우연히 손에 쥐었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고추모양 캐릭터가 그려진 케이스였지만, 어쩐지 그 형한테는 이런 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 형은 핸드폰 뭐 써?”
“이거 사게?”
비상이 아무 생각없이 묻자, 강산도 그 케이스를 손에 집어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킬킬대더니, 어떤 기종용 케이스를 얼른 손에 집어들었다.
“야, 사라, 두 번 사라. 잎새 그 자식 웃겨 기절하겠다.”
강산이 형이 강력한 추천도 받았겠다, 비상은 그 케이스를 사기로 했다. 어차피 자긴 그 형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으니, 살 수 있는 것도 그런 것뿐이었다. 물론 어떤 반응일지는 자기도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비상 및 다른 이들은 모두 잎새 형한테 줄 선물(비슷한 것)을 집어들었다. 현은 아무래도 자기가 산 과자꾸러미가 좀 무거웠는지, 중심이 좀 기울어져있었다. 그러면서도 꾸러미를 꽉 쥐고있는 현이었지만, 비상은 그런 현이 자꾸 신경쓰였다.
자기가 들어주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갑자기 현의 모습이 바뀌고 있단 걸 깨달았다. 현의 몸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옷 역시 그 모습에 알맞게 바뀌고 있었다. 원래 눌러쓰던 곰귀달린 후드티는, 전에 눌러쓰던 검정색 야구모자로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바꿨다.
“아, 이런 식으로 바뀌는 거구나. 대단한데?”
강산은 이제야 그걸 깨달은 듯,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파랑도 감탄한 듯, 이런 말과 함께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주위에서 아무도 몰라보는 게 신기하네. 아무도 눈길 안 주잖아. 그지?”
“이제 편하다.”
당사자인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꾸러미를 제대로 들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걸 위해 ‘바뀐 모습’이 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들어줄 걸 그랬니?”
“그냥 내가 들고 싶어서.”
비상의 말에, 현이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비상은 전에 현이 자기 이불을 자기가 들고가던 걸 떠올렸다. 어쩌면 현은 원래 그런 성격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이왕하는 거 찜질방에서 친목이나 다질까? 이젠 별 문제도 없잖냐.”
“이 형이 더위라도 먹었나…”
강산의 농담을 받아치는 동안, 비상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인 건물에 다다라있었다. 저 위에선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옥상으로 가자, 다들 케이크를 마련하고 폭죽을 준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참고로 말을 듣자하니, 당사자인 잎새 형은 이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럼 생일은 어떻게 안 거야?”
“걔가 알아서 말하더라.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강산의 말을 들으며, 비상은 점점 더 앞일을 짐작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하면, 오늘은 의영이 형의 경기도 있는 날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파란 밤의 주장, 상록이었다.
오늘은 긴 밤이 되겠는데.
비상은 그런 생각과 함께, 난간에 손을 댄 채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런 밤에 자기가 먼저 지칠 수는 없으니까.
“야. 잎새 들어온다.”
부산한 채비가 끝나자마자, 어딘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말을 듣자마자, 다들 여기저기 흩어져서는 숨는 ‘척’을 했다. 어차피 옥상이란 특성상, 아주 몸을 숨기는 건 무척 힘든 일이라서였다. 비상도 입구인 문 바로 옆에 숨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봐도 참 희한한 데 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현은 갑자기 커진 키 때문에 숨는 게 어려웠는지, 근처에 있는 물통 뒤로 몸을 빼꼼 숨기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 현의 어꺠를 잡은 강산과 파랑이 있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잎새 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 그 잎새 형이란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사교성 좋게 생긴, 참 친해지기 쉽게 생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바뀐 옥상 모습에 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형이 혼자 ‘뭐, 뭐야?’라 당황하던 사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서라운드로 이런 목소리가 울려왔다.
“잎새야, 생일 축하해!”
이 말에 얼마나 놀란 건지, 잎새는 곧바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언뜻 봐도,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안 믿긴다는 얼빠진 표정이었다.
“가, 갑자기 웬 생일 축하?!”
“같은 팀 생일인데 당연히 축하해야지. 벌써부터 고생 많다, 잎새야.”
별밤이 이 말과 함께 잎새를 일으켜세우자,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잎새는 여기에 꽤 감동했는지, 조금 눈물이 고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야, 이렇게 빨리 해줄 줄은…”
누가 언제 마련한 건지, 벌써부터 어린이용이 틀림없는 케이크가 나타나 있었다. 주인공인 잎새가 케이크 근처로 다가가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애국가가 뒤섞이는 게 들렸지만, 그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내 생일이 조국과 이렇게 관련이 깊을 줄은 몰랐는데?”
노래가 끝나자, 잎새는 그 말과 함께 킬킬댔다. 물론 누군지는 다 알아챈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파랑이 형이 다른 사람보다 반박자 늦게 노래를 끝마쳤던 것이다. 다들 참고 있었는지, 노래가 끝나자 다들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자, 다들 케이크를 먹으며 잎새 형을 위해 마련한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일단 강산이 자랑스레 자기 선물인 로또 두 장을 내놓자, 잎새는 아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이강산 이 놈아. 내가 현찰에 넘어갈 놈처럼 보여?”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는지, 잎새는 그 선물을 소중히 지갑 속에 집어넣었다. ‘5등 안 들면 물어내라 할 거다’란 말과 함께 킬킬대면서. 이걸 보면, 이 형도 장난끼는 꽤 있는 듯했다.
비상만 빼고 이 형을 아는 사람이 꽤 되는지, 여기저기서 선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별밤이 형은 정력에 좋다며, 마가 든 에너지음료를 잎새 형 손에 쥐어줬다. ‘넌 날 뭘로 보냐?’라 불만인 잎새였지만, 그 자체는 고마웠는지 소중하게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의영이 형은 고급 양말을 선물했는데, 잎새는 그걸 보고서야 ‘이제야 제대로 된 선물이 나오는구나’라며 무척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껏 저 형이 받은 선물 대다수는 장난끼가 넘치다 못해 지나쳐서, 보통 생일선물로 떠올리는 것과는 참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잎새가 장난삼아 ‘형이라면 당연히 흰색 셔츠일 줄 알았는데’라 놀리긴 했지만, 의영은 ‘그건 나만 입으면 되지 않냐?’란 말로 답을 대신했다. 물론 오늘도, 의영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의지 누나도 선물을 마련했는지, 어떤 영화권 한 장을 내밀었다. 잎새는 그걸 보고 기쁜 표정을 짓다가, 장난끼 넘치는 표정으로 의지 누나를 쳐다봤다.
“난 영화 혼자 봐도 될 거 같은 사람처럼 보였어?”
“잎새가 전에 그랬잖아. 영화는 혼자보는 게 최고라고.”
“뭐, 그렇지. 고마워, 누나.”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선물이 잎새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현도 자기가 마련한 선물꾸러미를 잎새한테 가만히 내놓았다. 현의 과자꾸러미를 보던 잎새는, 현을 가만히 보더니 ‘실례지만 누구시더라…’라며 미안한 듯 입을 뗐다. 하지만 잠시 뒤, 드디어 누군지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딱 쳤다.
“아, 네가 그 현이구나? 센스 좋네. 내가 단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고맙다.”
“나도 좋아하거든.”
“그래그래. 같이 먹자. 무지 많은데?”
저 형은 정말 단 걸 좋아하는지, 꾸러미 한가득 있는 외국과자를 보며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현도 자기 선물을 기뻐하는 게 좋았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선물을 언제 줘야 하더라. 비상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이 구석이 워낙 편해서 저리로 갈 의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잎새는 이제 받을 건 다 받았다 여겼는지, ‘나 화장실 좀 다녀온다’란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물론 잎새는 밖으로 나가려다, 갑자기 바로 옆에서 가만히 서있는 비상을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으악, 깜짝아!”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댁은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면 안 놀래요?!”
잎새가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고, 비상도 이 사람 참 겁쟁이란 생각을 했다. 그거야 지금껏 인기척을 숨기던 자기 잘못도 있지만, 저렇게 기겁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신기하네. 비상이 쟤 아우라가 장난아닌데. 자기 맘대로 기척도 숨기고 그러는 건가?”
강산은 이게 무척 재밌었는지, 이리로 다가오면서 자꾸만 킬킬대고 있었다. 사실, 비상도 그런 말은 많이 들어온 터였다. 자기가 기척을 숨기려고 하면, 바로 옆에 있어도 잘 모르겠다는 말을 여러 사람이 말해왔던 것이다. 물론 기척을 드러내면 상황은 달라지지만.
“지금 처음 뵙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형.”
어쨌든 선물은 드려야 하므로, 비상은 그 말과 함께 케이스를 내밀었다. 잎새는 그 말조차 의외였는지, 눈이 동그래져선 이렇게 물었다.
“형? 연소자예요?”
“스물여섯입니다.”
“말도 안 돼…”
그 말과 함께 선물을 받아든 잎새는, 곧바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곤 이 말과 함께, 방금 처음 봤을 비상의 멱살을 잡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아. 나랑 장난하냐?!”
“저 쪽에 있는 모 강산이 형이 추천하기에…”
“날 뭘로 보는 거야. 이 개자식아!”
비상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잎새는 곧바로 멱살을 풀더니 저 쪽에 있는 강산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산은 그 상황 자체가 우스웠는지, 아까부터 자꾸 킬킬대고 있었다.
“매운 게 그렇게 싫냐?”
“그게 문제냐? 공공장소에서 뭐하는 짓거리야…이 자식이…쓰고 싶어지잖아…”
그 말과 함께, 잎새는 자기가 잡던 강산의 멱살을 풀었다. 이걸 보면, 저 사람도 참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비상은 생각했다. 잎새는 자기 말대로 핸드폰 케이스를 얼른 비상이 준 걸로 바꾸더니, 다시 자기한테 말을 걸었다.
“그, 존댓말 필요없으니까 그냥 말 까. 그런 거 불편하다.”
“형인데도요?”
“그럼 넌 왜 강산이한테 말 까?”
그 말에, 비상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배잎새란 사람이 반말까는 걸 좋아한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든가.”
이렇게 해서, 비상은 저 배잎새라는 연장자한테 말을 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반말을 하게 되는 건 또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수라장 속에서도, 경기 준비는 천천히 이뤄지고 있었다. 이제 볼일도 다 봤는지, 잎새는 비상을 붙잡고 자기 하고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원래 이런 성격인 듯했다.
“안 지 일주일쯤 되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축하받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냐? 난 복받은 놈이야.”
“잘 됐네요.”
“너도 참 냉정하다.”
“원래 이런 성격입니다.”
투덜대는 잎새한테 비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잎새는 갑자기 눈빛이 달라져선 다시 비상의 멱살을 잡기 시작했다. 마치 비상이 중요한 거 하나를 까먹은 듯한 태도였다.
“야 잠깐. 너 말까기로 했잖아?”
“원래 이런 성격이라고.”
“이제 됐다. 야.”
멱살을 잡던 손을 풀며, 잎새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도 참 알기 힘들다니까.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제, 정말로 모두가 기다리던 ‘그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건 제 3자인 금빛 밤에서도 흥미진진하게 여기는지, 다들 난간에 기댄 채 두 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동물원에 갇힌 느낌이라 하는 건가. 비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양쪽 선수들을 살폈다. 의영이 형은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자기 무기인 낫을 만지작대고 있었고, 그 너머에 선 상록은 여기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나오는 선수이니만큼, 뭔가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 형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냐. 솔직히 지금껏 부드러운 모습만 보여서 그렇지, 사실 한성질 할 걸.”
아직도 무기를 만지작대는 의영을 보며, 강산이 입을 떼어놓았다. 평소 패기넘치는 강산과 달리, 굉장히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알아?”
“감이 와. 성질 숨기는 거.”
저 형은 뭘 느낀 걸까.
비상은 아직, 강산이 느낀 걸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의영이 형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건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비상도 전에, 강산과 의영이 형이 싸운 걸 봤던 것이다. 그 때 맞붙었던 당사자가 하는 말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시작!”
드디어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비상은 의영이 자세를 바로잡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비상은 상록이 어떤 무기를 쓰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상록의 손엔 가느다란 꼬챙이가 들려있었다. 지금껏 저 사람이 싸우는 건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에, 비상은 저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가 신경쓰였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워낙 진지해보이는 사람이라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둘은 시작한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싸울 채비를 시작했다. 처음엔 둘 다 상대를 재고 있는지, 금방 움직이지 않고 건너편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의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 뛴 뒤, 상록이 있는 옥상에 내려앉은 것이다. 상록 역시, 자기가 든 꼬챙이를 바로 앞에 방패처럼 잡아서 혹시 모를 공격을 미리 막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또다시 상대방을 재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갔다가 멀어졌다가 하면서, 죽 상대방을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상록이 마음을 먹었는지, 꼬챙이를 손에 든 채 의영 쪽으로 돌격했다. 의영은 이걸 절묘하게 피하면서, 상록 쪽으로 낫의 칼날을 날렸다. 물론 상록도 이걸 가볍게 피한 뒤, 의영을 쫓아 뛰어갔다. 이것만으로도 저 둘이 만만치 않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다른 옥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엔 의영이 주저않고 칼날을 상록 쪽으로 날렸다. 상록 역시 이걸 피한 다음, 자기 꼬챙이를 통째로 의영한테 던졌다. 이번엔 아슬아슬하게나마, 피하려던 의영의 발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에 맞았는지 의영은 순간 다리 아래쪽을 잡았지만, 표정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리가 저리든 말든, 자긴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이걸 보면 둘 다 질긴 성격이란 건 틀림없었다.
둘은 이제, 다시 한 번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의영은 자기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는 걸 될 수 있는 대로 숨기며, 상록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 낫을 한 번 크게 휘둘러서, 상대방이 넘어질 만큼 큰 바람을 만들었다. 이 때 잠깐 방심했는지, 상록은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꼬챙이 역시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말았다.
의영은 이걸 잡고 멀찍이 뛰어간 뒤, 그 꼬챙이를 상록 쪽으로 다시 던졌다. 다행이도 상록은 이걸 피했지만, 아까 넘어지면서 어딜 다쳤는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둘 다 하나씩 약점이 생긴 셈이었다.
이 주장 대 주장이라는 드문 상황을, 각 밤에서도 손에 땀을 쥔 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밤은 물론, 다른 모든 밤들이 그랬다. 아무리 멀찍이서 벌어지는 경기라 한들, 참가자들은 신기하리만치 또렷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비상 역시, 경기 전엔 안 보이던 상록의 표정 및 자세가 지금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이거 판정으로 넘어가는 거 아냐?”
강산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지금까지 붉은 밤의 경기가 판정으로 넘어간 적이 없단 걸 떠올렸다. 비상 자신도 거기에 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경기 시간인 5분 중 절반에 가까운 3분이 지나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경기 시작한 지 5분이 되면, 경기는 강제로 끝나고 판정으로 넘어갈 터였다.
이렇게 둘 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갑자기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공중으로 뛰던 중 의영이 낫을 크게 휘두르고, 이걸 절묘하게 피한 상록이 자기 꼬챙이를 의영 쪽으로 다시 던진 것이다. 의영은 이걸 피하려다, 그만 땅바닥 쪽으로 떨어지게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으악!’이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의영은 바닥에 몸이 닿기 직전, 절묘하게 근처 가로등에 발을 걸쳐 가만히 주저앉았다. 그 뒤, 자기 아픈 다리는 모른 척 다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소름돋는다’는 소리도 멀찍이서 들려왔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였다. 비상 역시, 그 심정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둘은, 다시 옥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 다 이미 체력이 떨어질 만큼 떨어졌기에(특히 의영은 아까 간신히 가로등에 발을 걸칠 때 꽤 숨이 벅찼을 것이다), 일단 서로 간을 보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아까 크게 넘어진 상록은 물론, 의영도 오른쪽 다리를 약간씩 절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 쪽 다리가 안 좋았던 사람이 가로등에 다리를 걸치고 다시 올라오다니, 가만히 생각하면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둘 다 상황을 보고 있는 사이, 갑자기 상록이 꼬챙이의 뾰족한 데를 의영 쪽을 댄 채 달려들기 시작했다. 의영은 낫으로 막으려 했지만, 상록은 그래도 천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렇게 상록이 의영과 몇 발자국쯤 떨어진 데까지 왔을 즈음, 의영은 갑자기 상록의 다리 쪽을 낫으로 크게 벴다. 갑자기 공격을, 그것도 다리에 당해서인지 상록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때, 멀리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이건 의영이 이겼다는 말도, 상록이 이겼다는 말도 아니었다. 이미 시간은 경기가 시작된 뒤부터 딱 5분이 지난 참이었다. 즉, 5분 동안 승부가 안 났으니 판정으로 넘기겠다는 소리였다.
“거봐라. 그건 그렇고 우리 팀에서 판정은 처음이네.”
강산의 말에, 비상은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자기도 판정에 관해선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판정이 어떻게 이뤄지는 거야?”
“세 밤에서 각각 둘씩 나와 누가 더 잘 했는질 보는 거지. 적극 공격했는가, 다친 데는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효율성있게 공격했나, 뭐 이런 걸 말이야.”
참고로 세 밤에서 둘씩 나오는 건 모두 연장자라고 했다. 또한, 제 3의 밤이 참여하는 건 판정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물론 제 3의 밤이 전략상 특정 밤을 밀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잘못 판정하면 패널티가 간다’는 조항이 있는 듯했다. 물론,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제 3의 밤 주장이었다.
“그 판정 말인데, 나노로봇으로 한단다. 하늘에 조그만 드론 엄청 띄워놓고 여러 각도로 찍은 다음에 그걸 보면서 하는 거지. 오질나게 대단하지 않냐?”
그 말엔 비상도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하늘치곤 최신기술을 너무 잘 쓰고 있어서였다. 그 하늘이 어떤 기술을 지니고 있는지는 비상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둘 다 박빙이어서 그런지, 판정이 나오는 시간도 덩달아 길어지고 있었다. 붉은 밤에선 잎새 및 별밤이 심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의영이 다리를 절며 돌아오자, 다들 누구라 말할 것 없이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직 판정도 안 나왔는데, 멀찍이서 ‘오빠 멋져요!’라 외치는 목소리조차 들려왔다.
“제대로 이겼어야 했는데…미안하다.”
“그렇게 다쳤는데 그만큼 싸운 것만으로 충분히 잘했어.”
괜히 미안해하는 의영 옆에서, 의지가 그런 말과 함께 가만히 다독여주고 있었다. 승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뒤로 빠진 채, 오빠인 의영을 복잡한 눈빛으로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느 밤이 이길 것 같니?”
아직도 판정이 안 끝난 상황에서, 비상은 바로 옆에 있던 현한테 말을 걸었다. 현은 여전히 바뀐 모습 그대로였다. 현은 여전히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날마저 어두워서 표정을 알기 좀 어려웠다.
“글쎄.”
“너도 참 단호하구나.”
“다들 잘 하던데.”
그 말을 듣다가, 비상은 얼마 뒤 현도 경기에 나간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현은, 지금 그 생각에 푹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금빛 밤의 주장, 김해원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뭔가 종이가 들린 걸 보니, 이번에야말로 판정 결과가 나온 듯했다.
“결과 나왔습니다!”
이 말에 양쪽 밤은 물론, 금빛 밤조차 판정 결과를 보러 이 쪽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미 강산한테 말을 들은지라, 비상은 그런가보다란 생각과 함께 넘어갔다.
“상록이 형은 정말 적극 공격하려 했고, 자기도 넘어졌으면서 끝까지 공격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이 놀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는 정신은 각 밤에서도 높이 산 대목입니다.”
해원은 일단, 각 밤 선수들의 장점을 말하고 시작했다. 아무래도 판정을 낼 때 이렇게 하기로 되어있는 듯했다.
“물론 의영이 형도 정말 좋은 경기를 펼쳐주셨습니다. 역시 적극 공격하려 했고, 다리를 다쳤는데도 가로등에 몸을 걸친 건 정말 높게 사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판정단에서도 이걸 입에 올리는 분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저까지 해서요.”
잠시 뒤, 해원은 이렇게 말한 뒤 한숨 돌리고 있었다. 아마 이 뒤엔 틀림없이 판정 결과가 나올 터였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양쪽 밤은 물론, 이번엔 제3자인 금빛 밤에서도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다, 드디어 해원이 입을 떼어놓았다.
“사실 이번 경기는 정말 갑론을박이 많았습니다. 양쪽 밤도 그렇지만, 저희 밤에서도 이게 더 낫다, 저게 더 낫다는 식으로 말이 많았죠. 그만큼 명경기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이번에 지는 밤 팀원들은 너무 좌절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 두 분이 정말 대단한 거니까요.”
아직 결과 발표는 전혀 나오지 않았지만, 비상은 이 해원이란 친구가 말을 참 잘한다 생각했다. 스물둘이면 아직 무척 어린데, 그런데도 굉장히 조리있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저 불량 팀(에 가까운) 금빛 밤의 주장을 맡고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뜸을 들이던 해원은 드디어 결과를 입에 담았다.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영상 및 공격의 적극성 및 유효성으로 봤을 때, 붉은 밤의 김의영 형이 이기는 것이 맞다는 것으로 결론났습니다. 붉은 밤 팀, 축하드립니다!”
이 말과 함께 해원이 고개를 숙이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물론 붉은 밤 쪽은 기뻐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판정으로 의영이 이기게 된 것이다.
“형, 진짜 대단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이런 말이 터져나왔다. 잘 싸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만큼 잘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단 모습들이었다. 만약 상대가 파란 밤의 주장인 상록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의영이 이겼으리라 누구나 믿고 있었다. 그리고 비상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은 그와 함께, 의영이 형 안에 숨은 ‘충동’도 느끼고 있었다. 전에 강산이 형한테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지만, 틀림없이 저 형은 속으로 뭔가 참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첫만남 때 소리지르게 만든 원동력일지도 몰랐다.
“다들 고맙다. 정말.”
의영은 아직도 다리가 저린지, 그 말과 함께 한쪽 구석에 앉았다. 그 때, 갑자기 파란 밤 쪽에서 누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건 이번에 진 파란 밤 선수, 그리고 주장인 상록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상록은 그 말과 함께, 오른팔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려는 듯했다. 의영 역시 오른손을 꽉 잡으며,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잘 싸우시던데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저보다 의영 씨가 더 다친 거 같은데요.”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승지는 여전히 복잡해보이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강산은 그런 것도 모르는지, 붉은 밤이 판정으로 이겼단 데 아주 신이 난 듯했다.
“저 형이 있는 한 우리 밤이 무조건 이긴다. 무조건이야. 내가 보증한다. 크하하.”
한편, 이번에 판정으로 진 파란 밤 쪽은 꽤 조용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붉은 밤과 대볼때 이야기지,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아무래도 판정은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괜히 억울한 듯했다.
“우리 팀은 만날 져야만 돼요?”
저번에 돌아가다가 본 여자애가, 이런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놀이 하나에 너무 진지한 거 아닌가. 하지만 비상은, 그 마음도 어느 정도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있을 경기는 전보다 더 험난하겠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달이 뜬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 하늘은 저기서 뭘 생각하고 있을까, 란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