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비상은 잠에서 깼다. 누구인가 하고 액정을 보니, 거기엔 현이란 이름이 나와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에, 비상은 잠기운이 빠르게 달아나는 걸 느꼈다. 얼른 전화를 받자, 낮은 목소리의 남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볼 때, 현은 또 ‘다른 모습’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비상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건 전화이니,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비상은 걱정됐지만, 현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화를 받아서 잘됐단 듯,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비상한테 이런 걸 물어왔다.
“어제 길을 가다가 전립선이란 말이랑 같이 조루랑 발기부전이란 걸 봤는데, 관련이 있어?”
“응?”
비상은 순간, 몸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성인 남성(의 목소리)이 이런 걸 진지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 내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였다. 일단 지금 비상은 원래 모습이었기에,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과, 관련은 있지만 현이 너랑은 상관없어. 그러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묻고싶은 게 있어서. 그러니까 볼일을 볼 때, 거길 잡…”
“쿠, 쿨럭!”
자기도 모르게, 비상은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현이 물어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일단 현도 비상을 생각해서 말을 멈춘 듯했지만, 비상은 참 드물게도 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적나라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그래.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변기커버는 올리고. 알았지?”
비상은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게, 현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현 입장에선 당연히 궁금한 일일 터였다. 전에도 짐작했듯, 현은 ‘이성’에 관해 거의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응. 고마워.”
그 말과 함께, 현은 전화를 끊었다. 잠시 동안 비상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은 채, 이마를 손으로 짚고 있었다. 아까 그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려서였다.
하지만 잠시 뒤, 비상은 현한테 이 문제가 정말 ‘진지하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전에 봐왔던 대로. 현은 ‘이성’에 관해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비상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이성’이 된다면,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오히려 볼일이나 뭐, 그런 걸 자연스레 하리란 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자기한테 말만 안 했지, 어느 정도 당황스러울 것도 틀림없었다. 비상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인 자길 믿어주고 있구나.
그 생각에, 비상은 자길 믿고 전화해 준 현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현은 자길 믿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연구소에 안 가도 되는 날이므로, 비상은 다시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잠시동안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동안은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핑글핑글 돌 것 같았지만, 아무튼 지금은 괜찮으니 다행이라고 비상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때,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도 현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고 보니 까먹을 뻔했는데.”
“뭘?”
“볼일을 볼 땐 휴지로 닦아야 돼. 모를 거 같아서.”
“아, 그, 그렇구나.”
‘그런 모습’으로 볼일을 본 적이 극히 드물기에, 비상은 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다시 걸어준 건가. 현이 고마운 건 둘째치고, 비상은 이 문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물론 아직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날 낮, 비상은 가지고 있던 자기 무기, 물총을 가지고 베란다로 나갔다. 모처럼 쉬는 날이니, 무기를 한 번 시험하고 싶어서였다. 아직 이 무기로는 강화 한 번 시키고 시험경기 한 번 한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비상은 이 물총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시험삼아 베란다 문을 연 뒤 방아쇠를 당기자, 그렇게 한 비상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일직선으로 물줄기가 두 번 연달아 날아ㄱ더니, 바로 맞은편에 있던 맨션 벽에 부딪쳤다. 물론 뭔가 특별한 강화를 더 시킨 건 아니기에, 물줄기는 벽에 부딪치자마자 자잘하게 부서져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다행히도 아래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기에, 별 피해는 없이 지나갔다.
그걸 보던 비상은, 문득 전에 봤던 그 카탈로그를 떠올렸다. 아마 거기에, ‘벽으로 쏘면 물줄기가 반사되는’ 강화가 있었을 터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강화는 상당히 쓸만한 거였다. 나중에 혼자 가서 강화해야겠는데. 비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약 강화를 더 시킨다면 남은 강화횟수가 한 번밖에 안 남는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비상한테, 그런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비상은 정말로 순수하게, ‘무기를 만지는’ 게 재밌어진 것이다. 마치 어릴 적, 로봇 장난감을 만지던 그 느낌이었다. 요즘 놀이다운 놀이를 제대로 하지 않은 비상 입장에서, 이런 마음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긴 언제 경기하더라.
그런 생각에, 비상은 핸드폰을 꺼내 자기 일정을 확인했다. 앞으로 일주일 뒤가 자기 차례인 듯했다. 대체 누구랑 싸우는 거였지. 그 역시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자기는 금빛 밤과 붙는 것 같았다.
그 쪽 사람들 성질을 떠올리며, 비상은 자기가 할 때 아무 문제가 없길 속으로 빌었다. 그러고 보니 현은 언제 경기하는 거지. 만약 한다면 원래 모습일까, 아니면 패널티가 걸린 모습일까.
그 때,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도 현이었다. 설마 또 그런 걸 물으려는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또 뭐니?”
“그 공원에서 얘기할 게 있는데.”
목소리가 그대로인 걸 보니, 아직 현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어차피 오늘은 더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비상은 알았다고 말한 뒤 채비를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니?”
맨 처음 ‘이 모습’인 현과 인사한 공원에 다다르자, 비상은 곧장 그 벤치로 가 현한테 말을 걸었다. 현은 그 때처럼 가만히 앉은 채, 비상을 보자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자기가 앉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나마 오늘은 반팔이라 다행인데. 전에 긴팔을 입었던 걸 떠올리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천사가 또 긴팔을 줬을 것 같아 괜히 걱정했던 것이다.
현의 옆에 앉은 뒤, 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지금 둘은 전과 다른 뜻으로 동등하단 걸 깨달았다. 일단 눈길이 서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모습 하나 바뀐 걸로 이런 느낌이 들다니.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다고 비상은 생각했다.
그 때였다.
“이런 모습으로 아침에 생각을 많이 했어.”
드디어 현이 입을 떼어놓자, 비상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또 공원에서 말하기 부적절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까 현과 전화로 했던 얘길 생각해도, 앞으로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그리고, 비상의 그 생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니까, 이 모습이, 어떤 건지 모르겠어.”
현이 자기를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비상은 그 때가 왔구나, 란 생각을 했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현이 이렇게 말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성에 관해 거의 모르다시피한 현이, 이런 걸 궁금해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전립선이나 뭐, 그런 거니?”
비상이 조심스레 그리 물었지만, 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듯했다. 오늘도 검정색 야구모자를 눌러써서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오늘 현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현은 천천히 입을 떼어놓았다.
“아니, 그런 거보다 더 궁금한 게 있어. 지금 나는, 그, 내 생각이 맞다면, 아이를…”
그제서야 비상은, 왜 현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챘다. 어쩌면 전립선이란 말을 들은 순간부터, 현은 ‘그 가능성’에 관해 혼자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직 10대 후반인 여자애가 생각하기엔 조금 많이 무거운 문제를.
“그러니까, 그 모습으로 누군가한테 아이를 낳게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 말이니?”
비상이 가만히 묻자,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가만히 입을 다시 떼어놓았다.
“그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무서워져서.”
그 말을 듣고, 비상은 아침에 현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마 현이 ‘이성’에 관해 모른다고 한 건, 특히 그러한 데를 가리킨 게 아닐까, 란 생각과 함께.
“거기에 관해 전혀 모르니?”
“응.”
현의 말을 듣고, 비상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에도, 시간과 하늘만은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네가 네 친구들한테 그런 짓을 할까봐…”
다시 입을 떼던 비상은, 자기 말이 지나친 것 같아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 어린 현한테 너무 ‘과격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현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가만히 비상을 바라보며, 현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는 말이지?”
이 애한테 뭘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 걸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비상이지만, 아무튼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현한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힘들 땐 기대도 돼. 알았지?”
“그럼 어깨 좀 빌려줘.”
그거 참 빠르단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이거야말로 현답단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기가 먼저 꺼낸 말이기도 하니, 비상은 얌전히 현한테 자기 왼쪽 어깨를 빌려줬다.
그러자, 현은 기다렸다는 듯 거기에 가만히 자기 머리를 댔다. 지금은 비상과 키가 같기에 현이 몸을 좀 기울이긴 했지만, 아무튼 현은 무사히 비상의 어깨에 기댈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남자끼리 이러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비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이 공원엔 지나다니는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는지, 현은 비상의 어깨에 기대자마자 곧바로 쿨쿨 잠들어버렸다. 이걸 보면, 현은 비상을 정말로 믿고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애도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니까. 지금 현이 이런 모습이든 어쨌든, 비상은 가만히 현의 한쪽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어쩐지 원래 모습인 현의 어꺠를 감싸안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여기에 있는 동안이라도, 이 애가 푹 쉬면 좋겠는데.
지금 현의 모습 특성상 어깨가 저리는 것도 참으며, 비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뒤, 슬슬 어깨가 저려와서 현을 꺠우려던 비상은, 현이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부터 어깨가 좀 가벼워진 느낌이 있었다.
현은 여전히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쓴 채, 비상의 어깨에 기대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나이만한 남성이 여기서 기대고 있었던 걸 생각하며, 비상은 다시 한 번 천사의 힘이 놀라워졌다. 지금 자기 어꺠에 기대서 곤히 잠든 여자애는, 아무리 봐도 후드티를 눌러쓴 채 그 작은 몸집을 비상한테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현이 자기 어꺠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며, 비상은 아까와 다른 까닭으로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보다 이 애가 자길 믿어준다는 게 더 고마웠다. 가만히 어깨를 감싸안아주며 느낀 거지만, 현은 생각보다 훨씬 몸집이 작았고, 많이 가벼웠으며, 묘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질 잤다. 또 돌아갔네.”
비상이 오랜만에 가까이 만나는 이성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때, 현이 눈을 비비며 비상한테서 가만히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현은 언제 원래대로 돌아간 걸까. 어깨가 가벼워졌던 때를 생각하면 쉽겠지만, 비상은 좀처럼 그 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언제 경기에 나가니?”
“모레.”
“그렇게 빨리?”
“그렇게 됐으니까.”
바로 내일 모레 자기가 경기에 나가는데도, 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 애도 담이 참 크다니까. 그렇지 않다면, 패널티 영향으로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론 걱정 자체는 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난 무기 강화하러 갈 생각인데, 같이 어떠니?”
비상이 묻자,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으로 볼 떄, 현도 자기 무기를 강화하고 싶었던 듯했다. 이왕 가는 거 같이 하면 좋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그 예정을 핸드폰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시간이 되자, 둘은 나란히 오늘 만나기로 한 건물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탓에, 비상은 현한테 발을 맞춰주느라 퍽 고생했다. 그래도 자기가 좀 빠른지, 현은 아까보다 좀 빠른 걸음으로 비상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좀 빠르니?”
“조금.”
역시 그렇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비상은 현한테 하나 물어보기로 했다. 별 건 아니지만, 전부터 죽 신경쓰였던 거였다.
“넌 이 놀이가 재밌니?”
“응.”
현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이윽고 비상을 쳐다봤다. 갑자기 아래에서 눈빛이 맞는 바람에, 비상은 잠깐 깜짝 놀랐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재밌어?”
“난 아직 나가본 적이 없거든.”
“흐음.”
그 말에 현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비상은 오늘도, 그게 자꾸만 신경쓰였다.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데도, 비상은 여전히 이 애를 잘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현과 함께 옥상에 무사히 다다랐다. 오늘도 흰색 셔츠를 입고 있는 의영이, 이걸 보곤 마음을 놓았는지 어깨를 두드리며 비상을 격려했다.
“비상이 너도 현일 참 잘 챙겨주는구나. 마음이 놓인다.”
“천만에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비상은 의영이 형이 자기 패널티에 관해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언제까지 이걸 숨길 수 있을까. 딱히 들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비상은 다시 한 번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비상아. 연장자들이 먹을 거 좀 샀는데 먹을래?”
그 말과 함께, 바로 옆에 있던 별밤이 뭔가 내밀었다. 가만히 보니, 그건 아무리 봐도 무척 달아보이는 망고주스였다.
“왜 하고많은 것 중 그거예요?”
“내가 좋아하거든.”
그 말과 함께, 별밤은 현한테도 망고주스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저 쪽에 있는 골판지 상자에 망고주스처럼 보이는 게 잔뜩 쌓여있었다. 그렇다면 이걸 사온 연장자가 누구인지도 뻔한 일이었다.
망고주스는 둘째치더라도, 저 형도 참 특이한 사람이라니까.
망고주스 자체에 별 감정이 없는 비상이지만, 여기까지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또 금빛 밤이라구요?”
현이 별밤한테 받은 망고주스를 가만히 마실 때, 비상은 의영한테 그런 말을 전해들었다. 전에도 한 번 있었지만, 이번에도 붉은 밤이 금빛 밤과 맞붙는 듯했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죠?”
“아, 그, 고등학생처럼 생긴…”
의영이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고, 비상은 전에 자기 팀 남자를 혼쭐내던 그 사람이란 걸 금방 알아챘다. 그 사람이면 만만치 않겠는데. 그럼 우리 쪽에선 누가 나오는 거지?
그런 생각에 비상이 고개를 돌리자, 전에 의영의 여동생이라 하던 여자애가 채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미술용 큰 붓이 들려있었다. 문득 비상은, 그걸 보는 의영의 표정이 잠깐 굳는 걸 봤다. 저 둘이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의 짐작대로 그리 다정한 사이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애가 의영이 형 동생이라매?”
의영이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번엔 강산이 비상 쪽으로 다가왔다. 말은 가벼웠지만, 강산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이걸 보면, 강산은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의영이 형한테 물어본 바, 둘은 부모가 다른 남매라 했다. 그리고 이 역시 의영이 형한테 들었지만, 둘은 사이가 그리 안 좋다고 했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사이가 나쁘다기보단 데면데면한 사이라 했다. 저 정도 나이차에 부모까지 다르다면, 그렇게 안 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같은 집서 살긴 하는데, 말을 별로 안 한대. 그래도 의영이 형은 동생한테 잘해주고 싶어하는 거 같더라.”
“형 말이 반은 맞았네.”
자기 생각에 맞았단 생각과 함께, 비상은 그렇게 대답했다. 방금 강산한테 들은 말은, 자기가 짐작했더 것과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내가 뭐라 했냐?”
“아무튼 형도 바보라니까.”
“야, 윤비상 이 자식. 나한테 오늘 한 번 죽어볼래?!”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리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정말 이 형은 단순한 사람이란 생각을 다시금 했다. 참고로 금방 화를 가라앉힌 강산 말에 따르면, 여자애 이름은 한승지라 하는 듯했다. 오빠인 김의영과 성이 다르단 것만으로도, 저 둘이 여러 사정을 가졌단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
이 말에, 비상은 경기가 시작됐단 걸 꺠달았다. 가만히 보면 저 고등학생 쪽이 체격이나 뭘로 봐도 더 강해보여서인지, 비상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는 의영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어져있는 걸 느꼈다. 의영이 형은 저 남자의 패널티를 알고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말할까 했지만, 그런다고 형이 걱정을 거둘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 지금보다 더 심하게 걱정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금빛 밤 쪽 선수 무기는 페트병처럼 생긴 물통인 것 같았다.물론 보통 페트병은 아니고, 1.5리터는 충분히 되어보이는 크기였다.
남자가 물통을 승지 쪽으로 돌리자,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어미어미한 물이 그 쪽으로 뿜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지는 가볍게 피한 다음, 자기가 가진 붓을 써서 그 물줄기를 크게 갈라냈다. 남자가 열받았는지 물통을 여기저기 돌려대기 시작했지만, 승지는 신기하리만치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그걸 다 피해갔다. 겨우 고등학생밖에 안 된 여자애가 그 거센 물줄기를 잘도 피하는 데에, 금빛 밤에서조차 박수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특히 주장인 해원은, 아주 대놓고 자기 팀 선수가 아닌 승지한테 ‘잘한다!’라며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저 팀도 참 희한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비상이었지만, 물론 붉은 밤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다들 목청이 터져라 여기저기서 ‘승지 잘한다!’는 식으로 환호성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박수세례 속에서, 비상은 의영이 아주 가만히 묵직한 박수를 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뚫어져라 승지를 보는 그 눈빛을 보며, 비상은 저 형이 정말로 저 ‘여동생’을 걱정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승지가 지닌 붓은 그 길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 있어서(이건 강산한테 들은 말이지만), 붓이 죽 늘어난 다음 끝에 달린 호가 튀어나가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승지가 상대방 쪽으로 호를 날리자, 물통만 신경쓰던 남자는 총알처럼 날아온 호를 제대로 맞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이 때 물통을 바닥에 쏟은 탓에 물에 미끄러졌다는 거였다. 이것 때문에 다리라도 저려온 것인지, 남자는 금방 일어나지도 못한 채 ‘젠장, 젠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만!”
그걸 듣고서야, 비상은 자기네 팀, 붉은 밤이 ‘또’ 이겼단 걸 깨달았다.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붉은 밤은 지금껏 있었던 경기를 세 번 내리 이긴 것이다. 물론 금빛 밤도 파란 밤한테 꽤 이겼으므로, 마냥 마음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승지가 돌아오자, 다들 두말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의지 누나는 바로 옆에 선 채, 꼭 껴안아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강산도 그런 승지가 자랑스러운지, 자기가 이긴 듯한 자세로 이렇게 칭찬했다.
“과연 의영이 형 동생이다. 엄청 잘 하는데?”
“난 아직 하지도 않았잖아. 너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영이 형도 칭찬이 싫진 않은 듯했다. 참고로 의영은 내일 파란 밤의 주장, 상록과 싸우는 걸로 되어있었다. 어쩌면 동생의 경기를 보면서, 형은 자기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승지도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뒤 의영을 흘끗 보고는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의영과 아주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저 둘한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문득 금빛 밤 쪽을 가만히 쳐다봤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금빛 밤은, 자기들끼리 ‘왜 자꾸 쟤들한테만 지냐’라 투덜대고 있었다. 붉은 밤(의 승지)이 잘 싸운 건 인정하겠지만, 아무튼 자기네가 진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따라서 열받은 듯했다.
“이런 젠장. 무슨 운이 이렇게 없냐?”
특히 방금 진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은, 이런 말과 함께 발로 바닥을 한 번 세게 찼다. 아무래도 아까 진 게 꽤 열받았던 듯했다. 마치 그걸 노리기라도 한 듯이, 전에 졌던 바로 그 남자가 그 남자한테 시비거는 듯이 이런 말을 던졌다.
“거봐요. 형도 못하잖아요.”
“뭐라고, 이 개자식아?!”
그게 방아쇠가 되었는지, 방금 승지한테 진 남자는 이 말과 함께 그 남자한테 달려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주먹질 때문에, 순식간에 금빛 밤 쪽은 아수라장으로 바꾸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방금 진 남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에 진 남자가 체격이 더 좋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방금 진 남자가 자꾸만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도 이게 억울했는지 어떻게든 목을 조이려 난리였지만, 키 차이조차 조금씩 나는 바람에 그것조차 쉽지 않은 듯했다.
“이, 이 자식이 나한테 반항하려 들어?”
그렇게 발악도 해봤지만, 결국 남자는 오히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릴 터인 연소자한테 목을 조이고 말았다. 남자는 그게 어지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이를 부드득 갈고는 죽일 듯이 전에 졌던 그 남자를 노려봤다.
“너, 원래대로 돌아가면 두고 보자. 이 자식을 그냥 확…”
아무리 봐도 좋은 분위기가 아닌 이 상황에, 금빛 밤 주장인 해원이 나타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기 시작했다. 해원은 저 둘을 말리진 않았는데, 아마 둘 다 한 성질한다는 걸 잘 알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사이좋게 지내자구요. 다음에 이기면 되잖아. 그죠?”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비상 쪽으로, 갑자기 누가 다가왔다. 오늘 저 금빛 밤한테 이긴 승지였다. 왜 자기한테 오는 거지? 처음엔 잠깐 그런 생각을 한 비상이었지만, 이윽고 자기 옆엔 아까부터 현이 죽 있었단 걸 떠올렸다.
“나랑 동갑인데 인사도 못했다. 그지?”
승지는 그 말과 함께, 현한테 손을 내밀었다. 이걸 보면, 평소엔 꽤 사근사근한 성격인 듯했다. 의영을 대할 때와 달리, 표정에도 약간 웃음기가 있었다.
“안녕.”
현도 그 말과 함께, 승지가 내민 손을 가만히 잡았다. 이걸 볼 때, 현도 승지가 싫지 않은 듯했다. 잠깐 손을 흔들다가, 갑자기 승지는 뭔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패널티가 그…힘들겠다.”
“이 사람 있어줘서 괜찮아.”
승지가 말끝을 흐리자, 현은 갑자기 비상의 손을 세게 잡았다. 갑자기 손이 잡힌 바람에 비상도 순간 놀랐지만, 아무튼 이 아이가 자길 믿는다는 마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승지도 비상을 흘끗 보고는,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자기 이름을 잘 모르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이…”
“윤비상이라 하는데, 인사하는 건 처음이지?”
“아, 네. 연장자시죠?”
승지의 말에, 비상은 또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너도 그러니. 대체 자기가 어떻게 보이기에 다들 하나같이 착각하고 마는 것일까.
“아니, 스물여섯이니까 연소자가 맞겠지.”
“진짜요?”
승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며,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도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의영이 형 얘길 꺼내지 않기로 했다.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뒤, 비상은 강산 및 현과 같이 건물을 나왔다. 오늘은 파랑도 함께였다. ‘강산이랑 한 번 같이 돌아가야지’란 말과 함께 강산과 비상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현이는 패널티가 있던가?”
언뜻 생각하면 묻기 어려운 이야기인데도, 파랑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현한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말투에서 현을 깔아내리는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현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랑은 그 모습을 잘 못 봤는지, ‘어떤 모습인지는 나도 모르지만’이라며 다시 킬킬댔다. 그리고 강산 쪽을 보며, 뭔가 뜻이 있는 듯이 씩 웃었다.
“난 기억이 없어서 말이지. 물론 강산이가 잘 챙겨주겠지?”
“내가 아니라 비상이가 챙겨준다, 비상이가.”
“비상이도 참 착한 애구나.”
비상은 이 때 사실대로 말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결국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말하는 것도 묘한 느낌이라서였다. 언젠간 아마 밝혀지겠지만, 그 때까진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때, 저 쪽 어둑한 데서 누가 말하는 게 들렸다.
“그치만 우리 밤만 자꾸 지잖아요.”
“그래. 하지만 다들 점차 잘 해가고 있잖아.”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가로등 불빛으로 볼 때 아까 그 여자애는 고등학생쯤 되어보였고, 다른 남성은 파란 밤의 주장, 상록이었다. 그렇게 둘이서 얘기를 나누던 여자애는, 갑자기 비상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한숨을 한 번 크게 쉬곤, 마치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댔다.
“붉은 밤이네. 저 팀하고 얼마나 졌더라…”
자기네들이 붉은 밤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치고, 비상은 저 여자애의 승부욕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팀이든 승부욕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큰일인데. 어쩌면 자기가 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비상은 자기도 이 놀이를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 속으로 여겼다. 물론 지금까지도 진지하게 여겼지만, 저 승부욕 넘치는 모습을 보면 자긴 아무리 생각해도 대충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왜 별 것도 아닌 ‘우스운’ 놀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려는 걸까.
자기도 그 우스운 놀이를 하고 있으면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