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잠에서 깬 비상은, 또 모습이 바뀌어있단 걸 깨달았다. 이제 놀라운 마음은 좀 잦아들었지만, 연구소에 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비상을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제 유급휴가를 낸 참인데, 오늘 또 내는 것도 그렇겠지.
잠시 이마를 짚던 비상은, 이내 어제 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자기가 ‘이’ 목소리로 연구소에 연락했는데도, 담당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휴가를 받아준 것이다. 즉, 자기가 이 모습 그대로 가도 다들 자기를 원래대로 받아줄 가능성은 많이 높았다. 비록 이 모습으로 서류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는 비상이 좀 민망하긴 할지라도.
그 때, 누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침에 누구지? 이상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인터폰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비상은, 거기 비친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 있던 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현이었던 것이다. 그거야 비상의 집에 몇 번이고 오긴 했지만, 자기 발로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용케도 여기까지 오는 길을 외웠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들어와’란 말을 하며 문을 열어줬다. 이렇게 빨리 이 집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는 생각에 조금 민망해하며.
“너도 참 기억력이 좋구나. 우리집을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별 거 아닌데 뭘.”
현은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뭔가 갖고온 짐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상이 흘끗 보니, 그건 아무리 봐도 옷가지인 것 같았다. 게다가 비상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거기엔 속옷도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현이 여기에서 하려던 건, 아마도.
“화장실 써도 돼?”
마치 물 좀 마시자는 듯, 현은 가벼운 말투로 비상한테 그리 물었다. 가만히 보면, 현은 오늘처럼 더워지기 시작할 때쯤에도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다. 아무리 반바지를 입고있다 한들, 지금 저런 옷차림이라면 틀림없이 더울 터였다.
“샤워할 생각이니?”
비상이 이렇게 묻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런 모습인 비상이 그 말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현이 화장실을 쓰는 동안, 비상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서 될 수 있는 대로 저 쪽에 신경을 안 쓰려 애썼다. 만약 지금 원래 모습이라면 어땠을까, 란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뒤, 현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비상 역시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비상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윗도리는 제대로 입었지만, 현은 아랫도리가 속옷차림인 채 밖으로 나오더니, 밖에 나와서 비로소 반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혀, 현아. 옷이…”
“지금은 괜찮을 것 같아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보며, 비상은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자기라면 안전하다 생각해서 이렇게 갈아입은 걸까? 자기를 믿고있단 뜻이라면 고마웠지만, 비상은 이 아이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잠시 뒤, 둘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스크램블 에그였다. 눈길이 서로 같아져서인지, 비상은 이 아이와 또 다른 데서 동등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자기 키와 현의 키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습으로 회사가는 거야?”
그게 그렇게 궁금했는지, 현은 드물게도 밥을 먹다 말고 비상한테 그리 물었다. 비상도 이미 답을 냈기 때문에, 담담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응. 아마 가다가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아.”
“나도 그럴 거 같아.”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은 다시 비상이 만든 스크램블 에그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 애랑 있으면 참 편하다니까. 뭘 먹으면서 얘기하는 게 익숙치 않은 비상은, 이 잔잔한 순간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애도 날 나름대로 걱정해주고 있구나.
현한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었기에, 비상은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현이 간 뒤, 비상은 큰맘먹고 연구소에 갈 채비를 했다. 주위에서 보면 우스워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제 자기가 생각했던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가던 길인데도, 이런 모습으로 서류가방까지 들고 걷고 있으면 정말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자기 생각이 맞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비상은 현이 했던 말, 그리고 자기 판단을 믿기로 했다.
주위에서 가끔 자길 돌아보는 눈길을 받으며 걷던 중, 비상은 갑자기 세상이 한층 작아진 걸 느꼈다. 물론 정말로 세상이 줄어들었을 리 없었다. 그건 즉, 비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단 걸 뜻했다.
정말 자기 생각이 맞았구나.
그걸 깨닫자, 비상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아무리 천사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 한들, 이 정도 배려는 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저녁이 되자, 비상은 일을 끝낸 뒤 퇴근했다. 퇴근한 게 하루이틀도 아니지만, 특히 오늘은 비상이 ‘평소와 다른 일’을 해서인지 주위에서 보는 눈길이 참으로 묘했다.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어요?
자기가 유급휴가를 쓴 게 그렇게 특이한 일인지, 비상은 이것과 비슷한 질문을 열 번은 넘게 받았다. 대체 연구소에서 자기 이미지는 어떻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 경기를 볼 건물로 걸어가다, 비상은 문득 누가 경기를 하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단 걸 떠올렸다.
가만보자. 아마 붉은 밤 대 파란 밤이었던가?
거기까진 떠올랐지만, 자기 팀인 붉은 밤에서 누가 나가는지까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그런 생각으로, 비상은 옥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인사 못했네. 윤비상 씨 맞죠?”
비상이 옥상에 발을 내딛자마자, 어떤 여성이 자기한테 말을 걸었다. 언뜻 보기엔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길게 기른 다정해보이는 여성이었다.
어쨌든 이런 분과 같은 팀이었단 걸 몰랐단 게 미안해져서, 비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네, 같은 팀인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하게 만들다니…”
“전 배의지라고 해요. 올해로 서른하나…”
“서른이 넘으셨다구요?”
배의지라 자기를 말한 여성이 말꼬리를 흐리자, 비상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봐도 이 여성이 그 의영이 형보다 연상인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였다. 세상엔 동안인 사람이 여럿 있지만, 이렇게 믿기 어려운 상황은 비상도 처음이었다.
“그런 말 많이 듣는데…에헤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 말과 함께, 의지 ‘누나’는 다시 한 번 비상한테 고개를 숙였다. 우리 팀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의영이 형이 의지를 ‘누나’라 부르는 걸 속으로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른쪽 건물을 보자, 오늘도 금빛 밤 쪽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금빛 밤 대 파란 밤이 경기하는 듯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비상은, 뭔가 이상한 걸 알아챘다. 어제도 본 고등학생쯤 된 성질 더러워보이는 남자가, 역시 어제 진 그 남자(붉은 밤한테 시비를 건 바 있는)한테 이런 말과 함께 짜증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해 봐. 죽인다. 알았냐?”
“알았다고요. 형도 그만 좀 해요. 참.”
‘고등학생’의 말에 형이란 말과 함께 따르는 어제 그 남자를 보며, 비상은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 지금 같은 팀원을 협박하는 저 남자는, 틀림없이 현처럼 ‘보이는’ 패널티를 받고있는 것이다. 아마 원래 모습은 결코 저렇지 않으리라 비상은 생각했다. 현의 모습과 ‘패널티’를 받은 모습이 크게 다른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시작!’이란 소리가 들려 비상은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써 붉은 밤의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을 다른 데 너무 팔고 있었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옥상 난간에 팔을 괴고는 이 놀이가 어떻게 될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비상은, 곧바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붉은 밤에서 나오는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의지 누나였던 것이다. 상대방은 의지 누나보다 몸집이 조금 더 큰,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비상이 놀란 건, 의지 누나가 아주 적극적으로 상대방 남성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성이라고 약하게 싸우란 법은 전혀 없지만, 저렇게 동안인 데다가 마음도 고와보이는 누나가 이만큼 상대방을 밀어붙이리라곤 비상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의지 누나가 가진 무기는 고작 머리를 빗을 때 쓰는 빗(중에서 꽤 큰 것)이었는데, 빗에 붙은 이 하나하나가 상대방한테 무지막지하게 빨리 튀어나가더니, 상대방을 찌르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공격만으로도 대단한데, 심지어 저 빗은 그 자체가 무기가 될 만큼 커질 수조차 있었다. 의지 누나는 그 빗을 칼처럼 크게 휘둘러 칼바람을 만든 뒤, 냄비 뚜껑으로 막고 있던 남자를 저만치 쓰러뜨렸다.
물론 냄비뚜껑은 ‘막는’ 데 편한 무기였지만, 그래도 저 냄비뚜껑은 결코 약해보이지 않았다. 무척 든든해보이는 방패라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해서 웬만한 공격은 모두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일 만큼 컸다. 하지만 의지 누나의 힘엔 저 방패조차 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 큰 뚜껑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라면, 의지 누나의 전투력이 얼마나 센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결국 파란 밤 쪽 선수가 바람에 넘어진 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자, 저 멀리서 ‘그만!’이란 말이 나왔다. 이번에도 붉은 밤이 이기게 된 것이다. 의지 누나가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붉은 밤에 돌아오자, 다들 껴안고 달려들고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 오늘도 흰 옷을 입은 의영은, 누구보다 박수를 크게 치며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누난 정말 대단하다. 내가 존경할 수밖에 없어.”
“에이. 왜 그래. 이런 건 진심으로 해야지. 그지?”
의영을 보며 다정하게 웃어보이는 의지를 보며, 비상은 이 사람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같은 팀이라서 천만다행인데. 의지 누나는 결코 겉만 보고 판단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 뒤에서 듬직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비상은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누구인지 안 봐도 알 수 있어서였다.
“우리 팀은 참 별난 사람들이 많다니까. 암튼.”
“특히 형이 그렇지.”
이 말을 듣자, 바로 뒤에 있던 사람, 즉 강산은 비상의 목을 그 두꺼운 팔로 마구 조이기 시작했다. 아마 그 말이 꽤 찔린 듯했다.
“이 자식이 뭐라고?!”
“맞는 말을 해도 화낸다니까. 이 사람은.”
그렇게 목이 조였는데도 조금 컥컥댈 뿐 할 말을 다 하는 비상이 재미없었는지, 강산은 곧바로 팔을 풀었다. 비상이 숨을 가다듬는 사이,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투덜대며 고개를 돌렸다.
“넌 목조르는 재미도 없어. 이 망할 아우라 자식.”
“그런 재미를 느껴서 어디다 쓰게?”
“시꺼, 내 맘이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화내는 강산을 보며, 비상은 이 사람도 붉은 밤에 있는 ‘특이한’ 사람이란 생각을 다시금 했다. 물론 좀 희한한 사람일 뿐,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비상의 눈엔, 여러 모로 믿을만한 소시민으로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비상은 아까 생각하던 그 패널티를 다시 떠올렸다. 아마 모르는 이가 많겠지만, 붉은 밤에선 자기와 현, 둘이 패널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 밤에서 보이는 패널티를 받는 남자는, 틀림없이 어제 진 선수를 혼내던 그 고등학생(겉모습은)일 터였다. 그렇다면 파란 밤에서 패널티를 받은 이 두 명은 누구일까. 사실 몰라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그 처지인 비상은 자꾸만 그걸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에 빠진 채, 비상이 옥상을 빙 돌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의영이가 오빠라고?”
모두 신나서 남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어보일 때, 의지 누나가 저번에 본 그 고등학생쯤 되는 여자애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나치면서 들은 말이지만, 그걸 들었단 건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잠깐 지나쳤을 뿐이지만, 비상은 그걸 다 볼 수 있었다.
역시 이 여자앤 의영이 형과 상관이 있는 애구나.
비상은 이제야 상황을 좀 알겠단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둘은 가족(과 가까운 사이)이며, 저번에 둘만 있을 때를 생각하면 아마 사이는 조금 서먹할 것 같았다. 만약 좋다면,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리 없었다. 물론 이 일은 의영이 형과 저 아이의 문제이니, 비상은 더 이상 깊게 파헤칠 생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팀에도 형제가 있지 않을까.
전에 강산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비상은 역시 자기 생각이 맞았단 걸 깨달았다. 붉은 밤에 어떤 방식으로든 형제자매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팀에 형제자매가 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상은, 이젠 원래 모습을 하고 있는 현과 마주쳤다. 여전히 현은 남의 놀이에 관심이 많은지, 난간 너머 금빛 밤 대 파란 밤의 놀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잘 있었니?”
“응.”
현은 그 말과 함께, 다시 난간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곰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쓴 채였다. 앞으로 점점 더워질 텐데, 이 애도 사서 고생하는구나.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깜박할 뻔했다.”
그 때, 갑자기 현이 이런 말과 함께 자기 가방에서 뭔가 꺼내기 시작했다. 대체 뭘 주려는 거지? 비상이 그렇게 생각할 때, 현은 바로 그것을 당당하게, 다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붉은 밤 팀의 아지트인 옥상에서 꺼내들었다.
“…이게 뭐니?”
비상은 맨 처음, 정말로 몸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그건 비상의 25년 남짓한 삶에서, 절대로 인연이 없을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런 자리에서 꺼내드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거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상은 오히려 현이 여기서 전립선 얘기라도 다시 꺼내주는 게 더 속이 편할 거 같았다.
그 물건은, 파란 포장지에 쌓인 생리대 20개들이 세트였던 것이다. 비상은 생리대에 관해 전혀 모르지만, 포장지엔 ‘중형’이라고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워낙 유명한 상표였기에, 아무리 생리대를 모르는 비상이라 한들 저 물건이 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니?”
대충 저 물건이 뭔지 깨닫자, 비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생리대를 손에 든 현한테 물어봤다. 사실 조금 짐작가는 데는 있었지만, 그걸로만 판단하기엔 상황이 너무나 이상했다.
“언젠가 필요할 거 같아서.”
현은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이런 말과 함께 비상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눈빛을 보면, 현이 자길 생각해서 이걸 갖고왔단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자길 놀릴 리 없었던 것이다.
“혹시 네가 쓰던 거니?”
그 말에, 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데까지 자길 생각해줬단 말인가. 이걸 쓸 일이 있을지 어떨지는 둘째치더라도, 비상은 현의 마음씀씀이에 다시금 놀랐다.
어쨌든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비상은 얼른 생리대를 자기 가방에 넣었다. 이런 걸 들키면 ‘안 들키는 패널티’를 받고있는 자기 입장에서 꽤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은 가만히 있지 않고, 비상이 생리대를 숨기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던졌다.
“어떻게 차는지 모르겠음 말해.”
“그, 그래. 하지만 그러고 보면 난 네 전화번호도 모르는 거 같은데…”
비상이 이렇게 대답하자, 현은 아무렇지 않게 비상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리고 담담히 액정을 누르며, 자기 번호를 비상의 핸드폰에 입력했다.
“자, 그럼 입력해줄게.”
“고맙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가면 갈수록 이 여자애가 알 수 없어지는 비상이었지만, 그래도 현은 결코 싫지 않았다. 자기를 챙겨주려 한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물론 속내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조차 생각지 못한 데를 챙겨주는 건 진심으로 고마웠다. 물론 잠시 뒤, 비상도 현의 핸드폰에 자기 연락처를 입력시켰다.
그건 그렇고, 혹시 오늘도 전립선을 묻는 건 아니겠지.
사실 비상이 가장 걱정하던 건 그거였지만, 현은 이상하리만치 그걸 묻지 않았다. 오히려 비상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젯밤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놓았다.
“어제 만난 내 친구 말인데.”
“그래. 그 친구가 어떠니?”
현의 말에 따르면, 자기한텐 친구가 그다지 없다고 했다. 비상도 그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여자애, 세영은 드물게도 자기랑 감성이 비슷한 친구라 했다. 어쨌든 현한테 비슷한 환경에 놓인 친구가 있다는 건, 비상한테도 충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애가 날 오해하는 건 아니니?”
“내가 말했어. 같이 놀이하는 친구라고.”
나는 이 아이의 친구로 보이는 건가.
쓴웃음을 지으며, 비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비상은, 이현이란 아이의 눈에 자기는 어떻게 비치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정말 그 말대로 친구라 생각하는 걸까. 물론 자기를 친구로 보는 것 자체는 전혀 상관없었지만(비상은 나이에 별 고집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상은 묘하게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가방을 든 채, 이제 경기가 끝난 옥상을 나서려 할 때였다.
“연장자 형이시죠?”
누가 자기 어꺠를 두드리는 느낌에, 비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성실하게 생긴 남자가 서있었다. 언뜻 봐도 무척 진지한 느낌이었는데, 그나마 융통성은 있는 비상과 달리 융통성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자기 뜻을 얼굴에 안 드러내는 성격인지, 참으로 묘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연소자인데.”
“저, 나이가?”
“스물여섯.”
이 말에, 남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치 큰 오해라도 한 듯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워낙 카리스마라 해야 하나, 기운이 있어서 연장자인 줄…죄송합니다. 형님.”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또 이런 답인가, 란 생각에 비상은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자기가 그렇게 연장자처럼 보인단 말인가. 실제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연소자일 뿐인데.
“아깐 죄송했습니다. 올해로 스물다섯인 이군청이라 합니다.”
그 군청이란 남자는 이 말과 함께 다시 고개를 숙였다. 군청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연장자 형들한테는 일일이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 찾아뵙고 있었다 했다. 혹시나 해서 강산의 이름을 대니, ‘뭐 이런 진지한 놈이 있어’라며 머리를 험하게 쓰다듬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튼 그 형도 참. 비상은 결국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너도 고생한다. 나도 다 모르는데.”
“저는 전부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여기까지 말을 듣자, 비상은 이 군청이란 친구가 자기보다 몇 배는 더 고지식하단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성실하단 말을 밥먹듯 듣는 자기조차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이 친구는 왜 이렇게 진지하단 말인가.
“이런 놀이가 있단 게 참 신기하죠?”
군청은 그 말과 함께, 아직도 놀이가 벌어지는 옥상 너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보통 이들의 그것과 다르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저, 운동부였는데 다리를 좀 다쳐서 그 길로 못 가게 됐어요.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이런 기회가 와서…”
거기까지 듣고서야, 비상은 군청한테 이 ‘놀이’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자기한테는 그저 ‘신기한’ 놀이일 뿐이었지만, 군청에게는 다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아직 대학생이니?”
그 말에, 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모로 생각이 넘쳐흐르는 걸 느끼며, 비상은 군청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잘 해보자.”
“반드시 붉은 밤이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군청은 그 손을 세게 잡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 눈빛만 봐도, 군청이 강한 의지로 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별 거 아닌, 그저 ‘놀이’일 뿐인데도.
이렇게 승부욕 넘치는 이가 붉은 밤에 있었던가. 굳이 말하자면 의지 누나가 그렇긴 하겠지만.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사람에겐 여러가지 사정이 있단 걸 다시금 떠올렸다. 자기가 그런 것처럼, 현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의영이 형이 그런 것처럼. 군청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닌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비상은 군청한테 말을 걸었다.
“나도 연소자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않겠니? 너보다 고작 한 살 더 많을 뿐인데.”
“형님은 연장자라 아는 애들이 더 많을 걸요.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비상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일이 지적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번거로우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이 아우라인지 뭔지는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그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자기도 ‘패널티’를 받고있단 걸 떠올렸다. 그 모습으로는 아우라도 뭣도 없었단 것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