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08. 전립선과 갑상선, 그리고 본격적인 ‘놀이’의 시작

드디어 오늘부터 경기가 시작되는구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상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비상은 대진표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자기가 처음 싸우는 날은 아직 좀 남아있었기에, 미처 기억할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다, 비상은 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너무 가벼웠던 것이다. 게다가 가슴팍이 무거운 거나, 어깨에 뭔가 닿는 느낌이 비상한테 ‘그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또 바뀌었나…”
여전히 이런 느낌이 익숙치 않기에, 비상은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럴 때면 목소리도 평소보다 높아지는 것 역시, 아직 전혀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튼 이 천사란 사람은 무슨 꿍꿍이속이지. 한숨을 쉬며, 비상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씻다 보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눈을 감은 채 씻었지만, 이번엔 그래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느낌이 없었다. 이 천사도 참. 결국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눈을 감은 채 씻고 나서 옷도 갈아입었다. 물론 천사가 미리 마련한 그 옷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속옷은 이렇게 입는 게 맞는 건가.
모호한 느낌을 떨치며, 비상은 일단 강산한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전화를 받은 강산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고 넌 또 그 모습이냐?”
“왜 자기가 화를 내고 난리야.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말했을 뿐인데.”
“그걸 모른다고. 너, 그러고 보니 연구소는 어쩔 거냐?”
강산의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평일이니 연구소로 나가야 하는데, 이런 모습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천사의 힘을 볼 때 그냥 가도 될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비상 자신이 꺼려졌다.
결국, 비상은 큰 결심을 했다.
지금껏 제대로 쓰지 않았던 유급휴가를, 오늘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네. 고맙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은 뒤, 비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유급휴가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일에 이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늘의 도움인지 어떤지 잘 처리되었다.
이런 일로 유급휴가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 눈 딱감고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비상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기도 참 성실하게 살아온 것이다. 다른 팀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휴가를 쓰는데, 비상만 성실하게 매번 연구소에 나가곤 했다.
그건 그렇고, 하늘의 힘이란 게 참 대단한데.
비상은 처음 연구소로 전화를 걸 때, 자기가 ‘누구세요?’란 말을 들을 걸 각오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기는 원래 윤비상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힘은 진짜였다. 원래 윤비상과 목소리가 이렇게 다른데도, 상대방은 제대로 ‘자기’라 알아준 것이다. 어쩌면 이대로 가도 다들 알아보지 않을까, 란 생각을 잠시 했지만, 비상은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그게 되든 안 되든, 자기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좀 쉴까.
자기와 가장 안 어울리는 생각을 하며, 비상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대로 있다간 자기 몸에 또 신경을 쓸 것 같아, 얼른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려 애쓰면서.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안경이 없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며, 비상은 평소보다 더 더벅머리가 된 듯한 자기 머리를 정돈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다지 쉬지 않는 성격이라서인지, 비상은 집에 있는 게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큰길이라도 나갈까.
이런 모습이긴 하지만, 큰길로 나가면 그래도 뭔가 재밌는 건 볼 수 있을 터였다. 어쨌든 집보단 낫겠단 생각을 하며, 비상은 밖에 나가기 위한 채비를 서둘렀다.

그런 생각으로 버스에 탄 채 큰길로 나온 비상은,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다가 아주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이였다.
근처 종합병원 근처로, 모습이 바뀐 현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이런 큰길에서 마주칠 줄 몰랐기에, 비상은 얼른 그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둘의 처지는 정반대란 게, 비상의 마음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언뜻 봐도 피곤해보이는 모습으로, 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비상이 봐도 오늘 현은 평소보다 더 지쳐보였다. 이런 모습일 때도 이렇다면, 원래는 얼마나 피곤했단 말인가. 까닭은 모르겠지만, 자기도 같이 병원에 가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같이 가도 되겠니?”
어차피 누군가한테 들킬 일도 없으니 비상이 그리 물으면,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현은 종합병원 안쪽으로 들어갔고, 비상은 그 넓은 로비에서 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모른단 생각에 강산을 전화를 불렀더니, 당장 가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현이 로비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신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그게 신경쓰여서, 비상은 얼른 현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신분확인은 어떻게 됐니?”
현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라며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그걸 본 비상은 잠시동안 할말을 잃었다. 틀림없이 ‘지금’ 현의 모습으로 사진이 찍혀있는 건 물론, 주민번호 뒷자리도 1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하늘이란 존재는 대체 뭐지?
자기도 한 번 겪었으면서, 비상은 이 이상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하늘은 어떻게 이런 걸 가볍게 해내는 걸까. 현실적 사고가 특기인 비상 입장에선 그야말로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가 아팠던 거니?”
“아, 전립선에 문제가 있대.”
뒷머리를 긁적이며, 현이 담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걸 들은 비상은 곧장 눈이 동그래졌다. 전립선이라니, 자기가 잘못 들었단 말인가.
“…혹시 그거, 갑상선 아니니?”
“아, 맞다. 갑상선.”
현은 그제야 깨달았단 듯, 말을 바로잡았다. 그걸 듣고서야 비상은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자기가 잘못 들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아마 현은 이 둘을 헷갈렸던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전립선이 어디더라…”
그 말과 함께, 현은 자기 아래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비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로비엔 사람이 한둘 있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처지가 바뀌어서 이런 이야깃거리 자체가 민망한데, 사람이 여럿 오가는 병원 로비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아, 아마 현이 너랑은 상관없을 거야. 정말로.”
비상은 이 말과 함께, 현한테서 눈길을 돌렸다. 원래 비상은 이렇게 ‘민망한’ 이야기를 꺼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남중에 남고를 나왔으니, 오히려 면역이 되었다 하는 것이 더 맞았다. 물론 자주 입에 담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남이 한 농담에 대충 맞장구쳐주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비록 처지가 바뀌어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해도, 현 앞에서 비상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상의 마음도 모르는지, 현은 바로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상을 바라봤다.
“전립선이 여기 아냐?”
“아니, 그러니까…”
“야, 니들 여깄었냐?”
이렇게 혼자 당황하던 비상한테,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다. 비록 그 구세주가 가장 못 믿을 사람인 강산이긴 했지만, 지금 비상한텐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고마운 존재였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이 이상한 분위기를 금방 알아채고, 강산은 다짜고짜 비상한테 이걸 캐묻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은 조금 목소리를 죽인 채,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현이가 갑상선하고 전립선을 헷갈려해서…”
“뭐, 뭐랑 뭘 헷갈렸다고?!”
비상이 결국 말꼬리를 흐리자, 강산은 금세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하지만 현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자기 입장에선 정말로 ‘순수한’ 궁금증이라서 그런 듯했다.
“그치만 지금 나라면 전립선이 있을 거 같은데.”
이 말에, 비상과 강산은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병원 로비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고많은 상황 중 왜 처지가 바뀐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우습다 못해 민망해서, 비상은 차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이게 자기답지 않단 걸 잘 알면서도.
“전립선이든 갑상선이든 뭐 어때. 약은 받아왔냐?”
“응.”
결국 강산이 얼른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리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는지, 강산은 이런 말과 같이 돌아섰다.
“그럼 얌전히 그거 먹어. 그럼 나아. 자, 나가자.”
“그러니까 전립선이 지금 나로 치면…”
현은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밖으로 나가면서도 비상한테 이런 말을 걸었다. 비상도 여기서 대답할 수 없었기에, 그저 고개만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둘의 처지는 완전히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나가자.”
그렇게 답을 피하며, 비상은 병원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 눈에 자기들은 엉뚱한 걸 묻는 20대 남성 및 그걸 들으며 민망해하는 고등학생쯤 되는 여자애로 비칠 터였다. 상황이 바뀌니 별 게 다 우습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오랜만에 자기가 무척 당황하고 있단 걸 느꼈다.
“그럼 전립선은 어디있는 거야?”
하지만 현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버스에 타는 순간에도 비상한테 진지한 표정으로 그걸 묻고 있었다. 물론, 버스에 사람이 여럿 있단 걸 아는 비상 입장에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그건 나중에…”
“나는 이런 모습에 관해 잘 모르니까, 지금 알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말과 함께, 현은 자리에 앉은 채 밖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제야 비상은 왜 현이 자꾸 자기한테 그렇게 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현은 정말로, 이성에 관한 지식이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과정에서 배운 게 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일 것만 같았다.
즉, 현은 진심으로 ‘지금 이 자기’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비상이나 강산을 괴롭히려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나중에, 천천히 알려줄게. 알았지?”
그런 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게 미안해서, 비상은 가만히 그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둘은 2인용 자리에 앉아있었기에, 바로 옆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창가에 앉아있는 건 현이었다.
사실, 비상은 그다지 남녀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물론 누군가를 사귄 적은 있지만, 오래간 적도 없었고, 그리 많이 만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비상은 지금 무척 복잡한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남녀관계를 의식하리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살다보면 참 별의별 일이 다 있다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오늘’ 있을 첫 경기로 생각을 돌렸다. 드디어 세 밤이 제대로 맞붙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앞으로 뭐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가 뭘 짐작치 못할 때가 있긴 했던가.
비상한테 있어서, 오늘 저녁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블랙박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뒤, 저녁이 되자 비상은 다시 집을 나섰다. 여전히 모습은 그 때 그대로였다. 비상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하늘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건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비상은 눈앞에 듬직한 남성이 있단 걸 깨달았다. 일단 비상은 지금껏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비상이 궁금했던 건, 저 남자가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놀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남자도 비슷한 생각인지, 뒤에서 따라가는 비상을 흘낏 쳐다보곤 다시 자기 길을 갔다.
저 사람은 뭘 생각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는 저만치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비상 역시 원래대로 돌아가있었다. 언제 겪어도 이건 놀라웠지만, 특히 옷이 알아서 ‘항상 입던’ 자기 사복으로 바뀌어있단 게 비상 입장에선 더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튼 목적지인 옥상에 다다라보니, 현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현은 아직 ‘바뀐’ 모습 그대로였는데, 아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현이 검정색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보지 못한 거였다. 그걸 보자, 비상은 현이 원래 곰 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 모자는 뭐니?”
“뭘 안 눌러쓰면 허전해서.”
그 말과 함께, 현은 눈부신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 질문이 민망했던 듯했다. 비상도 더 이상 안 묻고, 오늘 대진표를 떠올렸다. 자기 생각이 맞다면, 오늘은 붉은 밤 대 금빛 밤, 그리고 금빛 밤 대 파란 밤이 싸울 터였다. 누가 싸우는지는 자기도 잘 모르지만.
“오늘 누가 나오는 거죠?”
비상이 묻자, 근처에 있던 연소자가 대답해주었다. 오늘 붉은 밤에선 전에 싸우다 의영이 형한테 혼난 연소자 중 한 명, 그리고 금빛 밤에선 전에 붉은 밤에 시비를 걸던 그 남자가 나오는 듯했다. 그거 참 대단한 싸움이 되겠구만. 뭐가 일어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비상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그 때, 강산이 옥상에 다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댁은 누구세요?”
비상을 알아채고 이리로 다가오던 강산은, 현을 알아보지 못한 채 대뜸 그렇게 물었다. 현은 왜 자길 못 알아보는지 깨달았다는 듯, 쓰고 있던 모자를 잠깐 벗어 얼굴을 제대로 보여줬다.
“으이구. 넌 모자가 그렇게 좋냐?”
“난 이게 편해.”
그 말과 함께, 현은 앞으로 ‘놀이터’가 될 눈부신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7층짜리 옥상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아득히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앞으로 자기네들이 할 그 ‘놀이’처럼.
오늘은 자기 차례도 아니었기 때문에, 비상은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놀이’가 준비되는 걸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5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붉은 밤이, 그리고 저 쪽에 있는 5층짜리 학교 옥상에서 금빛 밤이 채비하고 있는 게 비상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이게 보이는 건, 옥상 주위에 밝은 불빛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을 위해, 놀이가 이뤄지는 옥상엔 이런 걸 해두게 됐다고 옆에 있던 강산이 목에 힘을 주며 설명했다.
언뜻 보기에, 상대방의 무기는 호스처럼 느껴졌다. 물론 진짜 호스라면 갖고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겠지만, ‘무기’로 강화된 호스는 길이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데다가, 언뜻 보기에도 가벼워보였다. 저거라면 전혀 안 힘들겠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자기 팀이 가진 무기로 눈길을 돌렸다.
자기 팀원은 손에 과일깎는 칼을 든 채, 저 너머에 있는 ‘상대방’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건 붉은 밤만이 아니었다. 금빛 밤의 그 남자 역시, 자기네 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그저 ‘놀이’일 뿐인데.
설마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비상이 이마를 짚고 싶어질 때, 갑자기 ‘시작!’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해왔던 ‘연습’과 차원이 다른, 진짜 ‘실전’인 놀이가.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짐작했을 대로 경기는 무척 살벌하게 이뤄졌다. 경기 전 채비하던 때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금빛 밤 쪽 선수는 아주 사람을 아작낼 듯이 호스를 뿌려대고 있었고(저걸로 죽진 않겠지만), 자기 팀 쪽 연소자는 그 물줄기를 과일용 칼로 전부 갈라가며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선 채 호스를 마구 휘두르고, 다른 한 명은 그걸 절묘하게 피하며 물줄기를 갈라낸다. 신기하다면 신기하고, 우습다면 참 우습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저 둘 사이에 뭐 있었어?”
하도 살벌한 광경에 비상이 그리 묻자, 강산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러고 보니 그런 말 들었던가’란 말투로 경기를 본 채 대답했다.
“일단 저 사람은 전에 붉은 밤 자체에 시비걸었고…쟨 모르겠다. 진짜 뭐 있나?”
아무튼 둘 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딱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디까지나 멀찍이서 보고 있는 사람 입장이지만, 붉은 밤 쪽 연소자가 더 잘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아무렇게나 호스를 휘두르는 금빛 밤 쪽 문제아보단, 그걸 잘도 피해가며 물살을 갈라 피해를 막고, 여기에 공중을 칼로 베어 칼바람을 만든 뒤 그걸 상대한테 내던지는 붉은 밤 쪽 연소자가 훨씬 잘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강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표정에 무척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이 형이라면, 자기 팀이 질 땐 백 퍼센트 표정이 일그러질 것 같았다).
“뭐야, 잘 하는데?”
금빛 밤 쪽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바로 근처 건물에서 그런 말이 여럿 나왔다. 금빛 밤도 물론 가까운 건물 옥상에서 경기를 보고 있기에, 이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승부라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비상은 생각했다. 어차피 두 팀 다 건물 단위로 떨어져 있으니, 억지로 건너오지 않는 이상 시비붙을 일도 없었다. 저 쪽도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고.
“혹시 형제끼리 다른 팀에 배치된 사람도 있나? 그럼 진짜 웃기겠다.”
경기를 보던 강산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저 살벌한 경기를 보니 그럴 가능성이 있겠다 여긴 듯했다.
“형은?”
“우리 형은 이런 유치한 거 안 하는 사람이야.”
“자기가 하면서 유치하단 말이 잘도 나오네. 형도 참.”
“시꺼. 내가 유치한데 니가 보태준 거 있냐? 넌 어떤데?!”
“난 외동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형이나 신경써.”
그렇게 받아치며, 비상은 이 형도 참 고지식하다 생각했다. 이런 게 뭐라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하지만 강산의 말은 틀림없이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다른 팀’은커녕, ‘같은 팀’에 형제자매가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설마 의영이 형도 그런 건가.
비상이 그런 생각과 함께, 전에 봤던 그 여자애를 다시 떠올릴 때였다.
“맥주 한 잔 안 할래요?”
그 말과 함께, 언뜻 봐도 시원해보이는 맥주 두 캔을 들고 별밤이 나타났다. 여전히 몸집은 강산만큼 듬직했지만, 아무리 봐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론 강산이 나쁜 인상이란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별밤보다 무섭게 보이는 건 틀림없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맥주야. 이 자식은.”
“솔직히 형은 좀 끌리지 않아요? 술 좋아한다면서요.”
“시꺼!”
어이없어하는 강산의 표정을 보며 별밤이 씩 웃으며 그렇게 되받아치자, 강산은 얼른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걸 보던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서로 동갑 아니에요?”
“저 사람이 생일이 좀 빨라서. 이러면 좋아할 거 같지 않아?”
그 말과 함께 별밤이 킬킬대자, 강산은 ‘지랄을 한다’란 말과 함께 더더욱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대도 별밤이 건네준 맥주는 잘 받아마시는 걸 보면, 둘은 썩 사이가 좋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생리 어쩌구는 어떻게 해서 나온 말이에요?”
“아, 맞다. 그거 걸작이지?”
갑자기 전 일이 떠올라 비상이 물어보자, 별밤은 지금이라도 그 때 일이 떠오른다는 듯 킬킬댔다. 강산도 그게 다시 떠올랐는지, 별밤을 돌아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죽인다 너. 진짜로.”
“그냥 아는 게임에서 비슷한 말이 나왔는데, 강산이 보니까 떠올라서. 남자끼리니까 괜찮잖아?”
강산이 이렇게 빡쳐있는 상황에서도, 별밤은 그런 말과 함께 더더욱 킬킬댈 뿐이었다. 이걸 보면 이 별밤이란 사람도 배포가 대단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막 써먹냐?!”
“인생은 응용이잖아. 강산아. 아니, 실전인가?”
“그걸 나한테 써먹지 말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자기가 아무리 화내도 오히려 딴청을 부리는 별밤의 등을, 강산은 아주 세게 때렸다. 하지만 별밤도 맷집이 있어서인지, 맞거나 말거나 여전히 난간에 쓰러진 채 낄낄대고 있었다. 저 정도 덩치들이면 저렇게 싸워도 되는구나. 비상은 속으로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근데, 그 망할 게임은 뭐야?!”
별밤을 때리고도 분이 안 삭히는지, 강산이 씩씩대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별밤은 아직도 여유가 있는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킬킬대며 그 말에 대답했다.
“그냥 사람들하고 교류하는 건전한 게임이야. 위험한 거 아니고.”
“그런 걸 왜 해?!”
“상상이든 현실이든 누구랑 마음을 나누는 게 얼마나 건전한 일이냐. 사람은 사람 없이 못 산다. 안 그러냐?”
이 말에, 강산과 비상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저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서였다. 아무튼 이 사람은 특이하다 여기면 되는 건가.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좋은 사람이란 건 잘 알겠지만.
셋이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당연히 경기는 이뤄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자세히 보니, 금빛 밤 쪽이 아주 밀린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붉은 밤 쪽에서 날린 칼날에 호스 끝이 잘린 듯했다. 물론 ‘강화’된 무기이니 이걸로 망가지진 않았지만, 대신 금빛 밤 쪽이 물을 왕창 뒤집어쓰곤 어이없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전의 강산처럼 크게 다친 건 아니지만, 이쯤되면 승패는 안 봐도 뻔했다.
“그만!”
결국 이 소리가 나오자, 금빛 밤 선수 쪽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6월이라 한들, 이런 밤중에 찬물을 뒤집어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젠장!”
진 당사자는 물론, 바로 옆에 있는 금빛 밤 쪽에서도 이런 욕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이건 그냥 져서가 아니라, 이번에 나온 선수가 경기를 못해서에 더 가까워보였다. 실제로 비상의 눈에 보인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성질 더러워보이는 남자는, 이런 말과 함께 이번에 진 선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씨. 저 새끼를 그냥 확…”
“야, 쟤 고딩 아니냐? 자기보다 나이많은 사람한테 막 욕해도 돼?”
강산이 놀란 채 비상한테 되물었지만, 사실 비상한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다. 지금 비상의 눈에 보이는 건, 저 금빛 밤이란 팀이 살벌하기 짝이 없단 거였다. 어제 말을 건 여자가 그렇게 망설인 데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붉은 밤은 남의 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까닭은 물론 뻔했다. 아무튼 자기 팀이 이겼기 때문이었다.
“잘했어. 만세!”
경기가 끝나고 연소자가 돌아오자, 다들 등을 두드려주며 무척 기뻐했다. 그 중엔 ‘이겼다!’라며 하늘로 주먹을 휘두르는 시원한 사람도 있었다. 주위에 먹을 게 그다지 없어서인지, ‘이럴 땐 한잔해야 되는데’라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 ‘앞으로 연장자 애들이 뭐 좀 사오는 게 어때?’란 말이 들리자, 다들 찬성한다며 박수를 쳤다. 물론 비상 역시 박수를 쳤다. 지금은 그저 기뻐하면 되는 일이니까.
“이러다가 한 팀이 너무 우세면 어떡해?”
갑자기 어디선가 이런 질문이 나오자, 연소자를 격려하던 의영은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 경기가 그걸 뒤집을 만큼 강한 거래. 하지만 마음놓지 말자. 알았지?”
다들 이제야 ‘놀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챈 듯,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기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었다. 만약이란 상황을 만들어놓는 것보단 그게 더 안전하니까.
그 때, 이런 즐거운 상황에서 여전히 경기장을 보고 있던(금빛 밤과 파란 밤의 경기였다) 현이, 갑자기 비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비상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왜, 왜 그러니?”
“그, 나한테 이성이 뭔지 좀 알려줬으면 해서.”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지한 표정으로, 현은 나지막이 그런 말을 꺼냈다. 이 말에, 비상은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언뜻 들으면 어이없는 건 물론 문제가 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지금 현한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알고 싶니?”
비상은 가만히 현한테 다시 물어봤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둘은 ‘모습’만 따지면 동등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비상은 예전보다 현의 말을 더 진지하게 듣고 있는 자기를 알아챘다. 존재 자체는 항상 그렇듯 이현일 뿐인데도.
“나는 남자에 관해 잘 모르고, 알 기회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아서. 가르쳐줄 사람도 딱히 없고.”
현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물론, 비상은 현의 진심을 믿었다. 자기도 익숙하지 않는 모습으로 지내는 데 여러모로 고생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현한테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앞으로 천천히 알려줄게. 너무 걱정 마.”
비상의 말에 마음이 놓였는지, 현은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비상은 지금껏 느끼지 못했지만, 아까부터 지금까지 죽 그걸 걱정한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현이 이제 떠올렸단 듯 다짜고짜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럼 전립선도 알려주는 거야?”
“어? 그건…”
그거야 지금은 비상한테도 전립선이 있지만, 이런 데서 알려줄 만큼 민망하지 않은 이야깃거리도 아니었다. 이런 질문이 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비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어쨌든 비상은 대답해야 했다.
“그, 그건 나중에…”
“다른 사람들 때문에?”
현이 그 말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기와 눈길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현을 보며, 비상은 앞날이 험하겠단 생각을 다시금 했다. 이 아이의 ‘이성’에 관한 호기심을 풀어주려면, 자기가 꽤나 고생하겠구나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을 모르는 현한테, 지금처럼 ‘이성’을 짊어지게 하는 것도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일단 여기에 관해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야지.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건물을 나왔다. 다들 이겨서 그런지, 상당히 흥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하나둘씩 제갈길을 가는 가운데, 비상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재촉하던 순간.
“어. 누나?”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은, 비상과 대략 비슷한 나잇대로 보이는 성인 남성이었다.
맨 처음 비상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 또래인 남성이, 그것도 지금 현을 보고 ‘누나’라는 말을 쓸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현은 물론이고 비상 자신도 ‘다른 모습’이 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아, 안, 안녕하세요.”
상대방은 엉거주춤 비상 쪽으로 다가오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마 아까 자기가 뱉은 말 때문에, 비상이 자기를 수상쩍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죄송해요. 옆에 모르는 분이 있을 줄 몰라서…”
“아니, 괜찮아요. 혹시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