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잠에서 깬 비상은 자기 모습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평소보다 작아진 몸집에 여전히 위화감을 가진 채, 비상은 머리를 짚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으로 방을 나오자, 현이 이불 위에 주저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마 비상보다 먼저 일어나있었던 듯했다. 비상이 아직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현 역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비상은, 현이 앉아있는 걸 보고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현은 이불 위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무슨 까닭이라도 있나?란 생각에, 비상은 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현은 비상이 다가오는 걸 깨닫자, 재빨리 이불을 무릎에 덮었다. 그리곤 비상과 눈을 안 마주치려는 생각인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던 비상이지만, 잠시 뒤 모든 걸 깨달았다. 지금 현이 원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 건강한 성인남성으로서 20년 넘게 살아온 비상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괜찮니?”
조심스레 묻자, 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상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현의 모습으로 볼 때, 이 아이가 이성, 즉 남성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리라고 보긴 어려웠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속으론 꽤 당황하고 있을 터였다.
“난 방에 들어가있을 테니까, 먼저 씻겠니?”
이 말에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은 그대로 자기 방에 돌아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한참동안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잠시 뒤 밖으로 나오자, 현은 이미 이불을 개둔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까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여전히 비상한테서 눈길을 돌린 채였다. 그것만으로도 비상은, 현이 그 때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괜찮아. 당황했지?”
비상이 나지막하게 묻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건 잘 몰라서.”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비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달걀프라이를 할 생각이었다.
“오늘 연습엔 나올 거니?”
오늘도 식탁에서 얼굴을 맞대며, 비상은 조심스레 물어봤다. 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란 한쪽을 크게 찢고는 입에 집어넣었다.
“내일부터 시작한다면서.”
“그런 모습으로 불편한 점은 없니?”
“뭘 불편하다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잠시 생각하다, 현은 그런 말을 꺼냈다. 아마 이성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자체가 없기에,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비슷한 처지니까, 힘들면 뭐든지 말해도 돼.”
“괜찮아?”
“당연하지.”
비상의 그 말에, 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비상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 말고.”
그제야 비상은, 현이 ‘괜찮아?’라고 물은 게 자기 얘기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지금 현은, ‘비상한테’ 자기는 괜찮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난 괜찮아. 괜히 안 걱정해줘도 돼.”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비상은 마음 한켠이 자꾸 걸리는 걸 깨달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기조차 ‘이렇게 된’ 자기를 똑바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비상은 이런 모습일 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기가 현한테, ‘힘들면 뭐든 말해도 돼’라고 당당히 말할 자격이 있을까.
현이 집으로 돌아간 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껏 자기가 스스로 금기시하던 걸, 이제야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에 들어선 뒤, 비상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옷을 모두 벗고, 천천히 자기 몸에 손을 댔다. 지금껏 비상이 이 ‘바뀐 모습’에 관해 갖고있던 생각은, 그저 평소보다 몸집이 좀 줄어들고, 살결이 좀 더 밝아졌단 것뿐이었다. 물론 팔다리가 가늘어졌단 느낌도 있었지만, 아무튼 별 생각이 없었던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손을 대니, 비상은 자기가 지금까지와 다른 ‘이질’적 존재가 됐단 걸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이 얼마나 또렷하던지, 비상은 자기 손가락이 떨리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각이나, 아래쪽에서 바로 느껴지는 ‘뭔가 부족한’ 느낌은, 비상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만약 현도 자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면, 비상은 너무나 가볍게 현을 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눈을 감은 채 샤워를 하던 비상은, 갑자기 자기 모습이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틀림없이 자기 몸집이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의 그 허한 느낌도, 이젠 아주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26년 가깝게 항상 봐오던 자기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 얼마 안 되는 사이에, 비상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던 것이다. 이걸 보면, 언제 모습이 바뀔지는 정말 천사 마음대로인 것 같았다. 마음의 채비조차 되지 않은 채, 이런 상황이 죽 되풀이되리란 것이다.
아무튼 천사란 사람도 사람 괴롭히는 데 소질이 있다니까.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비상은 샤워를 마저 마쳤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저녁이 되어, 비상은 일을 마치고 곧장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그랬듯, 오늘도 옥상은 사람들로 바글대고 있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놀이가 시작되는 바로 전날이라서, 다들 자기 무기를 같은 팀한테 실전처럼 시험하기로 한 날이었다. 다른 팀도 이건 마찬가지이기에, 저 너머로 보이는 다른 옥상엔 붉은 밤이 아닌 다른 밤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오늘은 멀찍이서 다른 팀들도 연습하니까, 괜히 부딪치거나 그러지 말자. 알았지?”
흰색 셔츠를 입은 의영이 팀원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별 거 아닌 추레한 회사원인데, 이렇게 팀원들을 이끌 수 있단 것이 비상은 놀랍게 느껴졌다.
이렇게 연습이 시작되자, 다들 자기 무기를 꺼내든 채 짝을 지어 옥상 밖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순서가 있었기에, 비상도 가만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비상의 차례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물총을 꺼내들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아.”
비상은 그제야, 자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전혀 짐작 밖의 존재였지만, 거기엔 현이 있었던 것이다. 현도 비상처럼 원래대로 돌아가있었지만, 오히려 비상은 그것 때문에 망설여졌다. 자기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아무리 크게 안 다친다 한들 막 다뤄도 되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 비상이 여기서 보기로는 그다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실제 경기에서도 이런 대진표가 충분히 나올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현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걸 보고, 비상은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괜히 봐주는 건 현한테 정말 해선 안 될 짓이라 여긴 것이다. 어차피 크게 안 다친다면, 현도 자기가 온힘을 다해 맞서는 걸 더 보고 싶어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시작!”
이런 소리가 들리자마자, 비상은 현이 이 쪽으로 뛰어오는 걸 봤다. 물론 그대로 당할 생각은 없었기에, 비상은 현이 날아오는 쪽으로 총을 한 발 쐈다. 순식간에 두 발이나 되는 물줄기가 곧장 현 쪽으로 날아갔지만, 현은 날아오면서도 이걸 절묘하게 피했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비상이 있는 건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물론 비상도 현 쪽으로 계속 방아쇠를 당겼지만, 현은 믿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그걸 잘 피해나갔다. 그 때 가게 구석에 가만히 있던 아이가 이렇게 순발력이 좋을 줄 몰랐기에, 비상은 속으로 놀랐다.
그 때, 현이 들고 있던 봉을 휘둘러 꽤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만들어냈다. 회오리바람은 힘이 꽤 되는지, 가만히 서있던 비상이 몸을 비틀댈 만큼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거리는 점차 좁아져, 이미 현은 비상의 몇발짝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비상도 물론 피하고 싶었지만, 자기 몸을 세게 누를 만큼 회오리바람이 강해서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말려들 수 없단 생각에, 비상은 바로 뒤에 있는 난간을 붙잡았다. 그대로 건물 밖을 벗어난 뒤,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
“뭐지?”
현이 갖고 있던 봉이 갑자기 죽 늘어나더니, 비상의 옷에 걸쳐졌다. 고작 봉이 옷에 걸린 것 뿐인데, 어쨰서인지 비상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갖고 있는 총으로 현을 쏘려고도 했지만, 팔이 그 쪽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공격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무기를 쓸 수도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든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비상의 팔은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회오리바람은 아직도 그대로인지, 앞에서 누르는 느낌이 너무 강해 몸 자체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은 여전히 비상의 옷자락을 자기 막대기에 걸친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굉장히 희한한 상황이었지만, 비상 입장에선 움직일 수 없다는 답답함이 더 컸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려나 싶을 때.
“그만!”
의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비상은 모든 게 끝났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기가 현한테 졌단 것도 깨달았다. 물론 정식 경기가 아니라 그저 연습일 뿐이지만, 비상은 방금 현한테 깨끗하게 지고 만 것이다.
“현이 무지 대단하네. 자기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오빠한테 이기고.”
다들 이 경기가 그렇게 감명깊었는지, 끝나자마자 현한테 달려들어서는 마구 칭찬하기 시작했다. 아마 다들 현이 자기보다 몸집이 더 있는 비상한테 과감히 공격한 게 무척 인상깊었던 듯했다. 특히 강산은 현이 무척 자랑스러운 듯, 대놓고 비상을 가리키며 이렇게 엉뚱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천하의 윤비상을 저렇게 만들다니, 너 앞으로 크게 되겠다. 진짜.”
“누가 천하의 윤비상이야?”
“너 정도면 상관없잖냐. 아직도 너보고 등 못 펴는 애들 의외로 있다. 연소자들 중에.”
강산이 그런 말과 함께 킬킬대는 걸 보고, 비상은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대체 어떤 연소자가 자길 보고 등을 못 편단 말인가. 여기서도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미 강산이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든 가짜든, 저 형이 며칠동안 이걸로 자길 놀려댈 게 비상은 더 골치아팠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산은 이런 걸로 사람 놀리는 걸 가장 좋아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게 엄청 질기리란 것도 비상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경기가 끝났으니 자기도 현한테 인사를 해야 했다.
“잘 해줘서 고마워. 현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자기 상대로 잘 싸워준 게 고마워서 비상은 현한테 손을 내밀었다. 현도 손을 내밀어, 비상의 손을 꽉 잡고 가만히 흔들었다.
“그냥 나도 좋아서 한 건데 뭘.”
“그래. 그게 고마워.”
항상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현이, 비상은 어쩐지 재밌게 느껴졌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은 전부터 이 놀이, 아니 이 ‘상황’에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상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일단 현이 먼저 말할 때까지 그걸 묻진 않을 작정이었다.
그 때, 갑자기 반대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유. 거긴 연습 잘 돼요? 아주 여유가 넘치시네?”
갑작스럽게 시비를 거는 목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언뜻 봐도 좀 놀것처럼 생긴, 껄렁껄렁한 남자가 서있었다. 다른 팀이란 건 틀림없고, 짐작하건대 금빛 밤 쪽 사람인 것 같았다. 비상이 본 금빛 밤 쪽 사람들이 특히 저런 느낌이라서 그렇게 짐작한 것이긴 하지만.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우리한테 질 거 같아서 겁나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남자의 말에 다들 어쩔지 몰라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딱히 누가 나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마 너무 상대가 강하게 치고나와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비상도 잠시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비상은, 생각 끝에 자기라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붉은 밤 팀끼리 연습하고 있는데, 다른 밤에서 막 와도 되는 건가요? 나중에 시간을 따로 만들면 될 텐데.”
“댁이 여기 주장이야? 무슨 말을 막 해?”
“주장이 아니면 이런 말할 자격도 없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론인데?”
남자가 짜증난다는 말투로 반박하자, 비상은 항상 그랬듯 차갑게 그 말을 받아쳤다. 이런 말싸움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남의 말싸움에서 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때, 상황을 알아챈 의영이 두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팀원한테 뭐하는 겁니까? 그것도 남이 연습할 때에.”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의영이 끼어들자, 남자는 비상을 한 번 노려보곤 자기네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이제야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어디 듣보잡이 헛소리야’란 식으로 서로 그 남자를 까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비상을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비상 입장에선 쓸데없는 걱정이긴 했지만.
“저런 사람한테 질 만큼 허투루 안 살았으니 쓸데없는 걱정 좀 마세요. 다들.”
사실, 비상은 저런 사람한테 자기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여기고 있었다. 저런 사람한테 자기 시간을 허투루 쓰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비상은 괜히 걱정해주는 이들한테 고개를 저으며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솔직이 이런 일을 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습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려 건물을 나설 때였다. 갑자기 처음 보는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비상을 보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저희 팀 사람이 이상한 말한 거 같아서…”
언뜻 보기에, 아마 자기와 나잇대가 비슷한 직장인인 듯한 여성이었다. 굳이 인상을 말하자면 소시민이었는데, 꽤 잔정이 많을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밤 아홉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제대로 인상을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금빛 밤 쪽 분이세요?
그 말에, 여성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저희 팀이 다들 기가 세서, 먼저 기선제압같은 걸 해야한다 난리예요. 전 그런 생각과 반대인데 막 말할 수도 없고…죄송해요.”
“그쪽이 사과할 건 없잖아요. 괜찮아요.”
“그래도 제 팀하고 관련이 있고, 저도 뵌 적이 있어서…”
“…절 봤다고요?”
여성이 말꼬리를 흐리자, 비상은 깜짝 놀라 그렇게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상은 이 여성을 정말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길 알아보다니,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근처에서 일하거든요. 출퇴근할 떄 잠깐 얼굴 본 정돈데…별 건 아니죠?”
여성은 그 말과 함께, 수줍었는지 바록 고개를 떨궜다. 그제야 비상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연구소 근처에도 여러 회사가 있으니, 출퇴근길이 같다면 우연히 지나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닐 터였다.
“아니에요. 그럼 알 수도 있죠 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여성을 그렇게 안심시키고 나서, 비상은 다시 돌아섰다. 자기 생각보다 상황이 더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이미 여러 일을 겪어온 비상 입장에선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내일부터 시작되는 진짜 ‘놀이’는 이것보다 더 큰 파란이 일겠지.
자기가 고른 일이니 후회할 일도 없지만, 그것만은 자꾸만 비상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비상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천사조차 짐작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때가 되어 생각해도 늦지 않는 것이다. 그게 비상이 살면서 안 가장 큰 진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