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날, 비상은 또다시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천사가 말한 대로, 그 ‘무기’를 강화할 수 있는 가게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젠 남의 회사에 막 들어가서 회사원들 사이에 부대껴 엘레베이터를 타는 데도 위화감이 없었다. 이런 게 익숙해질 줄은 비상도 미처 몰랐지만, 천사와 만난 뒤부터 앞일을 함부로 짐작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서인지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옥상에 다다르자, 바로 앞에서 강산이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을 보니, 틀림없이 어제 잠은 다 잔 느낌이었다.
“야, 비상아. 넌 어제 잘 잤냐?”
“그거야 무지 잘 잤지. 형은 설마 밤샌 거야?”
“당연하지. 이런 데 가슴이 팔팔 안 끓으면 그게 남자냐?”
그 말을 듣자, 비상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튼 이 형도 참 희한한 데가 있다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돌아서려는 순간.
“야, 너 방금 속으로 나 욕한 거 아니냐?!”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왜 갑자기 사람 목을 조이고 그래. 사람 목을.”
갑자기 강산이 그 억센 팔로 자기 목을 조르려 들기에, 비상은 켁켁대면서 간신히 그 팔을 빠져나왔다. 아무튼 이 형도 참 성격이 불같다니까. 말 하나 잘못했다간 패대기라도 쳐댈 기세였다.
그러던 참에, 드디어 천사가 나타났다. 항상 그렇듯 정신을 차리면 거기에 있던 천사는, 아무렇지 않게 ‘그럼, 지금부터 가게로 안내할게요’란 말과 함께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이제 이런 천사한테도 적응한 비상 및 다른 이들은, 얌전히 천사를 따라 건물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길을 천사가 걷고 있는데 아무도 몰라볼 수 있나.
여전히 눈부신 빛을 내며 바로 앞에서 걷는 천사를 보며 비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지금 비상이 더 신경쓰고있는 건 천사가 아니었다. 전에 천사가 말한 ‘안 보이는 패널티’가 훨씬 더 신경쓰였던 것이다. 자기가 ‘안 보이는 패널티’를 입고 있단 걸 깨달은 날 뒤로, 비상은 다시 그 모습이 된 적이 없었다. 물론 패널티의 특성상 이렇게 같은 팀원들끼리 모여있으면 아무 문제도 안 되겠지만, 언제 자기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비상을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물론 비상은 자기자신을 안심시키는 것도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걷다보니, 갑자기 천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벌써 큰길은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다. 그리 골목길도 아니었지만, 가끔 일이 있을 때 스쳐지나가고 말 것 같은 곳인 건 틀림없었다.
그래서 멈춘 곳을 보니.
“…병원?”
천사가 멈춘 건, 보라색으로 칠해진 겉이 기억에 남는 평범한 한의원이었다. 대충 보니 2층쯤 될까. 그리 큰 병원도 아닌 걸 봐선, 다닐 사람만 다니는 곳일 것 같았다. 게다가 입구를 자세히 보니, ‘오늘은 쉽니다’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대체 천사는 자기네를 여기로 데려와서 뭘 어쩔 작정일까?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천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천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바로 여기에 계단이 있죠? 이제 올라갈게요.”
만약 비상이 여길 지나칠 일이 있었다면, 이 병원 옆에 이렇게 ‘작은’ 계단이 있단 건 전혀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얼마나 볼품없는 계단이던지, 비상은 이 계단이 가정집에 있는 걸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천사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비상 일행이 안 올라갈 수는 없었다. 결국 붉은 밤 팀원들은 일자로 줄을 서서 천사를 따라 그 허름한 계단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올라가보니, 비상의 상상과 좀 다른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마치 지금 막 지어서 임대를 앞두고 있는 건물이라도 되는 듯, 2층은 그야말로 텅 비어있었다. 정말 여기가 병원 맞나?라 생각할 즈음, 비상은 저쪽 구석에 뭔가 가게 비슷한 게 있단 걸 깨달았다.
저기가 그 가게인가.
어차피 들어갈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 비상과 붉은 밤 팀원들은 천사를 따라 그 곳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나지막한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가게에 들어선 비상한테 맨 처음 보인 건, 천장까지 다다를 듯한 수많은 선반들과, 거기에 한가득 늘어져있는 ‘잡동사니’들이었다. 그 잡동사니를 어디서 본 것 같아 자세히 쳐다보니, 어제쯤 천사가 들고 온 상자에 한가득 있던 바로 그 잡동사니들이었다. 그제야 비상은, 천사가 그것들을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어유. 손님들 아니세요?”
안쪽에 있는 계산대에서, 갑자기 여고생쯤으로 여겨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목소리대로 고등학생쯤 된 듯한 말총머리 여자애가 싱긋 웃으며 자기네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예상밖의 인물이 계산대에 있는 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여자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무기 강화하러 오신 거죠? 이리 오세요. 카탈로그 보여드릴 테니까요.”
“아, 예…”
비상도 여기에 오기 전까지, 이런 데서 무기를 다루는 가게라면 나이 지긋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라 생각했던 터였다. 아마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하나같이 뭐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뭘 파악할 수가 없다니까. 한숨을 쉬면서도, 비상은 계산대에 놓인 카탈로그를 손에 들어 펼쳐보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강화하려면 여기에 있는 카탈로그를 보시면 돼요. 강화마다 돈이 들긴 하지만, 그렇게 비싼 값은 아닐 겁니다. 만약 청소년처럼 부담이 되는 입장이라면 깎아주는 제도도 있어요. 물론 강화에 따라 드는 돈은 다릅니다. 한 무기마다 강화는 세 번까지만 시킬 수 있으니 고를 떄 참고하세요.”
천사의 말을 들으며, 비상은 자기가 가진 무기, 즉 물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대체 뭐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실제로 본 ‘강화’ 목록은 비상의 상상하던 것보다 더 희한한 편이었다. 연속으로 물줄기를 내뿜는 강화는 둘째치더라도, 물이 형광빛으로 빛나는 강화나, 총알 모양으로 발사되는 강화, 전자파(물론 죽진 않는 듯했다)를 섞어서 물을 내뿜는 강화까지, 잘도 이런 걸 떠올렸다 싶은 강화가 여러가지 실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비상이 머리를 움켜쥐고 싶었던 건, 암모니아를 내뿜는 강화였다. 대체 누가 이런 정신나간 걸 생각했단 말인가. 만약 하늘이 이런 걸 생각했다면, 비상은 지금껏 하느님한테 지니고 있던 모든 이미지가 부서질 자신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비상은, 갑자기 어떤 대목에서 카탈로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어쩐지 모르게,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물을 총알처럼 만들어 쏘는 강화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우스운 일이었다. 아무리 자기 무기가 총(처럼 생긴 장난감)이라 해도 망정이지, 이런 건 너무 ‘막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치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비상답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이 놀이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비상은 그, 암모니아만큼 어이가 없는 강화에 마음이 이끌리는 걸 느꼈다. 마치 직감이라도 되는 듯, 이걸 해야겠다, 란 생각이 비상을 사로잡고 있었다. 지금껏 비상은 그런 직감이 든다면 대개 망설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런 놀이를 자기가 하게 된 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 비상은 그 강화, 즉 총알을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직감에 따라서. 물론 남한테 이걸 왜 골랐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비상은 그저 이 놀이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처럼, ‘무언가에 이끌려’ 이 강화를 골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기 생각을 정했으면, 다른 이들이 뭘 했는지도 한 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법이었다. 마침 바로 옆에 강산이 있었기에, 비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하하하하. 이 정신나간 놈들…”
“뭘 봤는데 그래?”
뒤에서 살펴보니, 강산은 “뭐 이런 미친 강화가 다 있어’라며 카탈로그를 본 채 낄낄대고 있었다. 비상이 뒤에서 살짝 보니, 강산이 말한 대로 참 가관이었다. 쌍절곤 미사일은 그런가보다 치더라도, 대체 퓨전은 뭐고 쌍절곤 소용돌이는 뭐란 말인가. 심지어 쌍절곤 포박처럼 뭘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까지 있었다.
“이런 건 술먹어도 못한다. 못 해. 아이고 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산은 진지하게 카탈로그를 훑고 있었다. 아무리 웃기다 한들, 강산도 진지하게 자기 무기를 강화할 생각인 것이다.
그 때, 바로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산아, 이거 하자. 이거!”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흥분한 것 같은 파랑은, 손가락으로 카탈로그 한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상이 잠깐 보니, 거기엔 ‘암모니아를 뽁뽁이 안에 집어넣는’ 강화가 나와있었다. 파랑이 형의 무기는 뽁뽁이로 된 방망이 비슷한 것이므로, 거기에 암모니아를 넣은 뒤 세게 쥐면 상대방한테 암모니아가 발사되는 구조인 듯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그런 생각에, 비상은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렇게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카탈로그를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순간이동. 칼바람 일으키기. 여기에 칼로 간지럽히기…”
가만히 보니, 그 남자는 한쪽 손에 칼날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꽉 잡아도 별일이 없는 걸 보니, 바로 저게 저 남자의 무기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 몸집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비상의 생각이 맞다면, 첫날 강산한테 ‘생리하세요?’라 말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다시 봐도 몸집은 강산이 형과 비슷했지만, 형과 달리 이 사람은 인상이 선해보였다.
어쨌든, 자기가 말을 건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터였다.
“뭘로 강화할 생각인데요?”
“어유 깜짝아. 그렇게 궁금하셨어요?”
갑자기 비상이 옆에서 말을 걸어서인지, 남자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 남자의 이름은 이별밤이라 하는 듯했다. 나이는 강산이 형과 같으니, 이 사람, 별밤도 연장자라 할 수 있었다. 비상 입장에선 형이라 부르는 게 맞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쨌든 별밤은 킬킬대며, 자기가 보고 있는 카탈로그에 관한 자랑을 비상한테 해대기 시작했다.
“근데 이런 거 보면 막 두근대지 않아요? 솔직히 내 취향은 간지럽히긴데.”
“효과도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런 건.”
“그게 재밌잖아요. 전 세상에서 쓸데없는 일하는 게 가장 좋아요. 이런 게 얼마나 좋은데.”
이 말을 듣고, 비상은 이 사람도 만만치 않단 걸 깨달았다. 이 팀엔 유난히 기인들이 많은 거 같다니까. 어쩌면 자기도 그럴지 모르고.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쪽으로 눈길을 줬을 때.
“…”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남자가, 카탈로그에서 눈을 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섣불리 말을 안 걸려 하는 걸 볼 때, 저 남자는 현이 틀림없었다.
“뭘로 강화할지 정했니?”
비상이 뒤에서 묻자, 현은 고개를 저으며 “돈 없는데”라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현도 아직 미성년자가 아닌가. 이런 모습으론 아무도 안 믿겠지만.
“그래도 뭔가 하고싶은 건 있지 않니?”
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비상한테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중 구석에 있던 어떤 항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걸 하고 싶은 듯했다.
“어디 보자. 봉을 휘둘러서 강한 바람을 내뿜게 하는 강화?”
비상이 말하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암모니아 어쩌구 하는 것과 대보면 참으로 무난하면서 좋은 강화란 생각에, 비상은 ‘이게 좋겠다’란 눈빛으로 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현은 이걸 할 만한 돈이 없으니, 청소년 강화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청소년 강화는 조금이나마 깎아주는 듯하니, 이거면 현도 강화를 시킬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계산대로 가다, 비상은 자기가 하나 잊어버리고 있던 게 있단 사실을 꺠달았다. 지금 현은 청소년이라 하기에 좀 많이 컸던 것이다. 물론 패널티 탓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걸 계산대에 있는 여자애한테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비상은 알 수 없었다.
이 탓에 비상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현이 비상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비상은 깜짝 놀랐지만, 현은 아무 상관없단 태도로 계산대에 섰다. 여자애는 어떤 상황인지 빨리 알아챈 듯, 싱긋 웃으며 미리 준비한 듯한 답을 내놓았다.
“굳이 패널티를 말씀하지 않아도 깎아드릴 수 있어요. 전 다 알 수 있으니까요.”
“다행이다. 그렇지?”
현이 고개를 끄덕인 걸 끝으로, 드디어 다른 이들의 강화가 모두 끝났다. 천사 말에 따르면, 또 강화하고 싶을 떈 언제든 다시 오면 된다고 했다. 단, 자기가 한 강화에 따라 더 할 수 있는 강화와 더 할 수 없는 강화가 있다고 했지만, 그건 그 때 가서 다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자, 이제 무기를 한 번 시험해볼까요?”
그 말에 따라, 비상 일행은 천사를 뒤쫓아 근처에 있는 높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항상 그렇지만, 틀림없이 잠겨있는 옥상이 천사가 손을 대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열리는 건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천사는 이게 뭐가 신기하겠느냐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옥상에 오자, 다들 천사가 말하는 대로 자기가 지닌 ‘무기’를 마음껏 시험하기 시작했다. 원래 모이던 회사 건물보다 좀 낮아서 바로 아래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보통 이들’한테는 무기의 효과가 전혀 없으니 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 다들 자기 멋대로 뛰어다니며 무기를 마구 쓰는 와중, 비상도 총을 텅 빈 데로 쏘아보았다. 자기가 강화한 대로, 물줄기가 동그란 총알로 바뀌어 저 앞으로 곧장 날아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비상의 무기 강화는 성공한 것이다.
강산은 무기를 강화하면서, 부메랑이 방향을 바꿀 때 휘어지면서 더 빨라지도록 한 탓인지, 주위에서 부메랑이 날아오기만 해도 냅다 피하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다. 그 광경이 우스워서 무심코 웃음을 머금은 비상이었지만, 어쨌든 이 정도라면 실전에서도 문제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암모니아를 넣어서 강화한 파랑이 형은 좀 걱정됐지만, 어차피 자기 팀이 당할 것도 아니니 비상한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다들 무기 시험도 어느 정도 끝나고, 첫경기를 대비해 내일 다시 한 번 모여 연습 한 번 하자는 식으로 오늘 모임이 모두 끝났다. 물론 비상도 이제 무기 시험이 다 끝났으니,집에 가려 계단 쪽으로 걸어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저 쪽 구석에서 눈에 익은 모습이 둘이나 보였다.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의영이었다. 그건 비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여자애는 비상의 생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전에 의영이 앞으로 나설 때, 혼자 박수를 안 치고 멀뚱하니 보던 그 여자애였던 것이다.
대체 둘은 무슨 사이지?
둘의 사이가 너무나 어색해보여서, 비상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이건 자기와 상관없는 이야기란 생각에 곧장 등을 돌렸다. 저 둘한테 어떤 사정이 있든, 그건 자기가 짐작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건물 밖을 나오는데,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그건 주위가 이상한 것도, 분위기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이상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비상, 바로 자신이었다.
혹시나 해서 자길 자세히 보니, 입고 있는 옷 자체가 딴판이었다. 분명 여기 올 땐 양복용 셔츠와 바지를 입었을 텐데, 지금 입은 건 ‘그 날’ 천사가 놓고 간 여성용 옷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풍경도 평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자기가 지금 ‘패널티를 입은’ 상태란 걸 뜻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비상이 반쯤 어쩔 줄 몰라할 때, 갑자기 누가 뒤에서 어깨를 치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야? 란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아, 맞다.”
거기에 있던 건 현이었다. 아마 뒷모습으로 자기란 걸 알아본 듯했다. 또 처지가 정반대인 상황에서 만나다니. 비상은 참으로 묘하단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현이 자길 알아봐준 게 고맙게 느껴졌다.
“밥해줄 수 있어?”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현이 하는 말도, 참으로 ‘현다운’ 말이었다. 다짜고짜 던져진 말이었지만, 물론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가자.”
사실 현이 비상을 대하는 방식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비상은 이 아이가 자기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준다는 게 그저 고마웠다. 이 아이가 자길 믿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던 것이다.
아마 이것도 이 아이 나름의 의사소통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현과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현과 같이 집에 돌아온 뒤, 비상은 둘이서 같이 먹을 저녁을 만들었다. 오늘은 스크램블 에그를 할 생각이었다. 현은 이것도 무척 맛있게 먹었는데,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한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그렇게 배고팠니?”
“그냥 이런 모습이 되면 배고파.”
그 말을 듣고, 비상은 현이 왜 이렇게 배고파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습이 갑자기 이렇게 바뀌었으니, 필요한 열량도 틀림없이 다를 터였다. 비상은 이렇게 된 뒤에도 먹는 양이 거의 그대로였지만, 현은 비상과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편하다.”
여전히 밥을 먹으면서, 현이 지나가는 듯 그런 말을 꺼냈다. 어쩌면 그건, 지금 식탁에서 마주보고 있는 둘이 같은 처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 다행이다.”
“물총이 무기야?”
“그렇지.”
“신기하다.”
“의외가 아니라?”
생각 밖에 답이 돌아온 탓에, 비상은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물어봤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자기가 물총이라니, 어떻게 보면 우스울 법도 했다.
“재밌잖아.”
하지만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대답했다. 이 애도 참 재밌는 데가 있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현의 대답이 어쩐지 고마웠다.
“오늘도 거실에서 잘래?”
현이 식사를 마치자, 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물었다.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방에서 이부자리를 갖고오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떄였다.
“그건 내가 할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현이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런 반응 자체를 전혀 짐작치 못했기에, 순간 비상은 발걸음을 딱 멈췄다.
“괜찮대도. 이건 내가…”
“지금은 내가 해도 아무 상관없잖아.”
게다가 현은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사실, 비상은 이렇게 의지가 굳은 현의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저 강한 눈빛이나 말투만 봐도, 이번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단 뜻이 또렷했다.
“날 어떤 식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건 나 혼자해도 돼. 내가 할래.”
그런 말을 하며, 현은 비상을 똑바로 쳐다봤다.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지금 현은 비상도 뭐라 함부로 하지 못할 기운이 있었다. 고작 모습 하나 바뀐 것뿐인데, 눈빛이나 태도, 기세, 모든 것이 무척 무게가 실려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모습이 바뀐 것만으로도 이렇게 인상이 크게 바뀐단 말인가. 어쩌면 자기도 현의 어려보이는 모습 때문에 이 아이를 가볍게 봤을지 모르겠다 생각하니, 비상은 자기의 좁은 생각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결국 그렇게 해서, 이불은 현이 나르게 되었다. 꽤 묵직한 이불을 아무렇지 않게 거실까지 옮기는 현을 보며, 비상은 지금 둘의 처지가 바뀌었단 걸 다시금 느꼈다. 자기가 그 때 이불을 옮길 땐, 티는 안 냈지만 평소보다 좀 더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방에 있다 잠시 뒤 거실로 나가보니, 현은 그 때처럼 아주 곤히 잠들어있었다. 언제 봐도 남의 집에서 자고있단 게 믿기 어려울 만큼 깊이 잠든 모습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아주 마음이 풀렸는지, 코조차 크게 골고 있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피곤에 절은 성인 남성의 코고는 소리였지만, 물론 실제로는 다를 터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구나.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지만, 비상은 오늘 다시 한 번 그걸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런 배짱이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지낼 수 있는 현이 비상은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긴 결국 우등생 체질이라서, 이런 식으로 멋대로 산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야 하고싶은 대로 하지만, 결국 다른 이들을 의식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어쨌든 비상도 피곤했기에, 자기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보니, 지금까진 애써 피하려 했던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런 모습일 땐 한 번도 씻은 뒤 침대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물론 왜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천사가 준 옷으로 갈아입을 때도 비상은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뭐, 지금 이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런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잠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내일이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있길 속으로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