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에 아주 들어선 다음 날, 비상은 항상 그렇듯 연구소에서 일하다, 메시지가 와있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 내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제 그 옥상으로 올 것’이었다.
오늘은 뭘 한다고 했더라.
그런 생각에 옥상으로 가자, 가장 반갑게 맞아준 건 강산이었다. 이 사람은 비상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걸까. 겨우 며칠 만난 것뿐인데, 비상은 그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일 끝나고 바로 왔냐?”
“그럼 어떻게 오란 거야?”
“그냥 물어봤다. 이 놈은 뭘 입어도 쓸데없이 아우라가 있어. 연구원이라면서.”
“내가 연구원인 게 그렇게 불만이야?”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도 모든 팀원들이 옥상에 북적대고 있는 게 곧장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천사는 언제 오는 거지? 란 생각을 할 때쯤.
“여러분. 안녕하세요?”
생각하기가 무섭게, 드디어 천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데에 놀라거나 말거나, 천사는 여전히 자기가 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시작했다.
“오늘은 무기도 다들 고르셨겠다, 직접 ‘싸우는’ 걸 겪어보게 하려 합니다. 이게 끝나면 다른 밤 분들을 한데모아 대진표를 짤 거예요. 질문 있으신가요?”
천사가 하는 말은 항상 너무 새롭게 들려서, 뭘 궁금해야할지조차 얼른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아무도 뭔가 물으려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아, 이 친구가 비상이야?”
거기 있던 건 강산과 비슷한 나잇대로 보이는, 해맑아보이는 인상을 지닌 남성이었다. 아무리 봐도 강산과 친구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한 인상이었는데(강산이 나쁜 인상이란 말은 아니지만), 보통 남성만큼은 있는 몸집만으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순수한 느낌이었다. 정말 이 사람이 형과 아는 사이인가? 라고 비상이 생각할 때.
“나랑 성격 무지 다르지 않냐? 아, 비상아. 얜 김파랑이란 앤데 전에 죽이 맞아서 연락하는 사이다. 인사해라.”
“윤비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비상이 악수를 청하자, 그 남자, 파랑도 손을 내밀어 굳세게 악수했다. 선한 인상과 달리 악수를 받는 팔은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어서, 비상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랄 뻔했다.
“이 친구도 무지 예의바르게 보이네. 강산이 너랑 진짜 다르다. 그지?”
“시꺼. 갑자기 이상한 소리하긴.”
둘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비상은 이 형의 사람보는 눈에 관해 다시금 생각헀다. 자기 때도 그렇고 저 분 때도 그렇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참 특이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비상은 찾아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단 걸 깨달았다.
“어젠 잘 들어갔니?”
오늘은 원래 모습인 현한테, 비상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현은, 맨 처음 비상이 봤던 그 옷차림 그대로였다. 곰돌이 귀가 달린 후드티를 푹 눌러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때문인지 현한테 말을 걸려는 이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또래라면 쉽게 안 입을’ 옷이, 현을 다른 이들과 다른 느낌으로 보이게 하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그 때, 천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 다들 채비도 되셨겠다, 한 번 해볼까요? 일단 두 분을 앞으로 모셔볼게요. 먼저…”
그 말과 함께, 천사는 곧장 자기들 쪽으로 오더니, 또 강산의 팔을 잡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당사자는 어이가 없어서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자, 잠깐만요. 왜 이래요. 댁은 나한테 뭔 억하심정이라도 있어요?!”
하지만 천사는 그 말을 들은척만척한 채, 자기보다 팔굵기가 두 배는 차이나는 강산을 아무렇지 않게 앞에 끌어다놓았다. 강산도 이젠 지쳤는지, 얌전히 천사가 가는 대로 따라가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분은…”
강산을 끌어다놓은 뒤 천사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윽고 한쪽 구석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누군가를 찾아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의영이었다. 의영은 오늘도 흰 옷에 청바지를 입은 채, 천사가 자길 쳐다보는 걸 보고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저, 저요?”
그러거나 말거나, 천사는 강산한테 했던 것처럼 의영의 팔을 잡고는 앞으로 끌고갔다. 의영은 이미 자기 처지를 이해한 듯, 무념무상에 가까운 표정으로 천사한테 이끌려 강산 옆에 섰다.
“그럼, 지금부터 이 두 분을 맞붙게 할게요. 여러분들도 보면서 참고하시면 돼요. 어떠세요?”
이제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까운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딱 봐도 몸집이 큰 강산과 보통보다 약간 마른 것처럼 보이는 의영의 체격차 때문이었다. 과연 누가 이기는 걸까. 비상조차도, 저 둘이 맞붙으면 어떻게 될지 얼른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럼 강산 님, 저 쪽 건물로 먼저 가 주시겠어요?”
이 말에 따라 강산은 저 너머에 있는 건물로 뛰어갔고, 의영만이 여기 남게 되었다. 이렇게 둘 다 채비가 끝나자, 천사는 먼저 이 둘의 무기를 설명했다.
“강산 님의 무기는 쌍절곤형 부메랑. 의영 님의 무기는 밭을 갈 때 쓰는 그 낫이죠. 지금부터 이 두 분을 맞붙게 할 생각이랍니다. 참고로 제 말은 강산 님한테도 잘 들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멀리까지 천사의 목소리가 닿는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비상이 지금 가장 신경쓰이는 건 대체 저 둘이 저 ‘무기’로 어떻게 맞붙을까하는 거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비상은 저 둘을 ‘쓰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마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지녔을 터였다. 사실 이 ‘놀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건, 다들 지금이 처음일 테니까.
“그럼 준비하시고-시작!”
천사가 놀이의 ‘시작’을 알리자, 잠시 동안 둘은 어쩔 줄 모르고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저 둘은, 얼마 전까지 듣지도 못한 ‘놀이’를 누구보다 먼저 해야하는 처지였으니까.
그 때, 일단 강산이 의영이 있는 쪽으로 자기 부메랑을 날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거워보이는 부메랑이 자기 쪽으로 날아오자, 의영은 얼른 날아올라 피하면서 자기 낫을 강산 쪽으로 던졌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하자 낫의 칼날이 마치 부메랑처럼 강산 쪽으로 휙 날아갔다. 여기서 강산이 칼날을 피하자, 날아갔던 칼날은 아무렇지 않게 의영이 잡고 있던 낫자루로 다시 되돌아갔다. 물론 이건 강산의 부메랑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의영은, ‘어떻게 하는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건 강산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곧이어 둘의 공격이 이어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눈길도 여기저기 바쁘게 휘둘렸다. 강산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메랑을 의영 쪽으로 연신 던져댔고, 의영도 그걸 절묘하게 피하면서 낫의 칼날을 휘둘러댔다. 얼마나 움직임이 빠르던지, 다들 눈으로 저걸 좇느라 지친 기색조차 보일 지경이었다. 저만치에서 들리는 쉭쉭 소리에, 몇몇은 환호나 감탄,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격이 이어지다가, 드디어 의영이 강산 쪽으로 날을 제대로 꽂아넣었다. 갑작스레 빈틈을 찔린 강산은, 그대로 낫을 다리에 맞은 채 넘어지고 말았다. 물론 강산은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낫한테 찔린 다리가 저려서인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 채 끙끙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1초, 2초, 3초, 그리고…
“그만!”
천사의 그 외침을 듣고서야, 다들 어떤 식으로 경기가 이뤄지는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둘 다 잘 싸웠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끝난단 걸 지금 깨달은 것이다.
“자, 여러분들도 두 분께 박수 부탁드릴게요.”
의영 및 (다리를 저는)강산이 다시 이리로 오자, 다들 손바닥에 불이 날 만큼 큰 박수를 둘한테 보냈다. 일단 이긴 의영은 둘째치고, 강산은 그렇게 진 게 불만인 듯 영 시원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수가 좀 잦아든 다음 강산은 천사한테 곧장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근데 이 무기, 이런 식으로밖에 못 써요? 다른 방법도 있을 거 같은데.”
“물론 그렇지 않죠. 이건 내일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천사의 말에 따르면, 내일은 그 무기를 ‘강화’할 수 있는 가게에 자기들을 데리고가려는 듯했다. 여기에 관해선 내일 다시 말하겠지만, 물론 자기 발상력에 따라 무기를 다루는 방법은 수많으리란 말도 덧붙였다.
“자, 이제 어떤 식으로 놀이가 이뤄지는지도 알았으니, 다른 밤 분들을 모실까요?”
이 말에 따라, 붉은 밤 팀원들은 모두 천사를 따라 어떤 건물로 한꺼번에 뛰어갔다. 이 경험도 이제 처음은 아니지만, 이십 명은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심 공중을 뛰어 다른 건물로 날아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한테는 이런 모습조차 안 보이는 모양이었지만, 이 무리에 섞여서 저만치에 있는 건물로 뛰어가는 비상 입장에선 묘한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다 모이셨죠?”
그렇게 다다라보니, 옥상은 맨 첫날처럼 50명은 훌쩍 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앞으로 이 사람들끼리 ‘놀이’를 한단 말인가. 어쩐지 비상은, 자기가 무척 규모가 큰 사건에 끼어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 대진표를 정하기 전 각 밤의 주장분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려 해요. 정정당당히 놀자는 의미도 있구요. 자, 각 밤의 주장분들, 나와주시겠어요?”
이 말에 따라, 붉은 밤의 주장인 의영을 비롯해 다른 팀에서도 각각 한 명씩 주장을 맡은 이들이 앞으로 나왔다. 다들 앞에 나와서 자기를 소개한 다음, 서로 악수하는 시간을 가질 모양이었다.
“저는 붉은 밤 팀의 주장 김의영이라 합니다. 올해 서른이니 괜히 나이만 든 셈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의영이 이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자, 다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다음으로 파란 밤 주장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과묵해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올해로 스물아홉인 전상록이라 합니다.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상은 그 상록이란 남자의 말을 들으며, 묘하게 자기와 닮은 데가 많은 남자란 생각을 했다. 그다지 자기 생각을 밖으로 안 내려고 하는 것과, 성실해보이는 모습이 그랬다. 물론 비상은 하고싶은 말은 제떄 하는 편이었지만, 사실 상록같은 이와 같이 있는 게 자기도 여러모로 편했다.
그 다음은 금빛 밤의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김해원이라 합니다! 아직 스물둘밖에 안 된 새파랗게 어린 놈이지만 꼭 이기겠습니다. 정정당당하게 합시다!”
어린 나이치곤 무척 패기넘치는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일었다. 특히 금빛 밤은 척 봐도 기가 센 이들이 많아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박수나 성원이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패기넘치는 모습으로, 해원은 다른 주장들한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의영이 악수를 받아주자, 해원은 그 손을 세게 쥐고는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들!”
어린 나이인데도 저렇게 굳세게 악수할 수 있단 건, 자기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단 말이었다. 저 놈은 여간내기가 아니겠는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상록과 악수하는 해원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렇게 세 밤이 인사하자, 본격적으로 대진표 결정이 시작되었다. 대진표가 무작위란 건 다들 짐작하고 있었지만, 대체 천사가 ‘어떻게’ 대진표를 정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다들 갸우뚱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가 노트북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엑셀에 가까운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곤, 이미 입력되어 있는 참가자들의 이름을 무작위로 집어넣는 매크로를 실행시켰다. 너무나 천사답지 않은 이 행동에,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뗴지 못했다.
“천사가 노트북이라니, 말세네 말세야…”
농담에 가까운 말투로 강산이 중얼대는 사이, 어느새 대진표는 참 빠르게 정해져 있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대로라면 정말 다음 주에 ‘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직 다들 마음의 채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데도.
“그럼, 내일은 제가 말했던 그 가게에 한 번 가보도록 할게요. 여러분들도 무기를 ‘강화’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그럼 이만.”
이 말과 함께,천사는 또다시 사라져버렸다. 이젠 천사가 이렇게 사라지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해탈한 눈치였다. 심지어 비상조차, 이젠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렇게 천사가 가자, 누군가가 비상 및 강산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니나다를까, 그 사람은 방금 강산과 어쩔 수 없이 싸웠던 주장, 김의영이었다.
“고생했다. 강산이 너도.”
“뭘 이런 걸 갖고. 형이야말로 수고했어.”
둘은 그런 말과 함께, 짧게 악수를 나눴다. 그 팔에 들어간 힘만 봐도, 둘이 서로를 믿고 있단 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너, 잘하더라. 깜짝 놀랐다.”
“‘뭐, 처음 하는데 잘하고 뭐고도 없지. 그냥 멋대로 했는데 너무 비행기 띄우신다. 형도 참.”
“그게 비행기처럼 들리든? 난 진심이었는데.”
의영은 그 말과 함께, 강산한테 다시 팔을 내밀없다. 한번 더 악수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뭐, 나야말로 잘 부탁해. 형. 어쩐지 형 진짜 좋은 사람인 거 같다. 근거는 없지만.”
“넌 근거도 없는데 사람을 막 말하는구나. 참.”
“그게 난데 뭘. 자, 잠깐만. 왜 또 박수를 치고 그래요?!”
둘이 그저 악수 한 번 했을 뿐인데, 갑자기 주위에서 다시 한 번 박수가 끓어올랐다. 강산은 이게 진짜 민망했는지, ‘야, 이게 뭘 박수칠 일이라고!’라 외치면서 괜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물론, 비상은 박수를 치면서 강산을 격려했다.
“그냥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형이 이럴 일 어딨어.”
“야, 너 이러기냐?!”
“원래 형은 이런 일이 드무니까, 받을 거면 지금 많이 받는 게…”
“시꺼 인마!”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옆에 있는 현도 멀뚱한 표정으로 박수를 천천히 쳐주고 있었다. 파랑 역시 신나게 박수를 치며, ‘강산이도 이럴 땐 빼려 한다니까. 부끄러워서 그런가 봐’라며 무척 즐거워했다. 물론 강산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지만.
“저, 그럼 모처럼 같은 팀인데 좀 더 물어봐도 되겠죠?”
이 흐름을 놓치지 않겠단 듯, 의영이 조심스레 나와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물론 한 팀의 주장이 이렇게까지 해준다는 건 비상도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나이가 몇이지? 사람이 하도 많아서 전체 인원 파악이…”
이 말에, 다들 일제히 손을 들어 자기 나이를 나타냈다. 대충 정리하고 보니, 대략 26세 미만과 27세 이상으로 나뉘는 듯했다. 생각보다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의영의 말에 따르면)이 참 깔끔하게 갈린 바람에, 의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보자. 그럼 연장자와 연소자로 나뉘는 거네? 다들 이의 있나?”
이에 따라, 붉은 밤 팀원을 가르는 말은 연장자 및 연소자가 되었다. 다들 그 개념이 웃겨서인지, 킬킬대며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되는 건 비상이었다. 비상은 지금껏 연장자들과 주로 어울렸지만, 스물여섯이니 당연히 연소자 쪽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한 건 사실이지만.
“어유. 그럼 난 연소잔가?”
“그렇게 되겠지. 니를 연소자라 믿는 놈 자체가 없겠지만.”
“나도 연소잔데.”
강산이 놀리는 와중, 현은 재밌단 눈빛으로 비상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도 되는구나. 비상은 어쩐지, 현이 자기 말에 대답해주는 게 고맙게 느껴졌다.
“그럼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거 같네,. 다들 수고했다. 그럼 이제…”
“잠깐, 형.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의영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할 때, 갑자기 강산이 끼어들어왔다. 의영이 놀라할 때, 강산은 아주 의심스럽단 눈빛으로 입을 떼어놓았다.
“근데 형, 만날 흰색 옷만 입는 까닭이 있어? 첫날은 양복 셔츠라 치자. 어제랑 오늘은 뭐야?”
“그런 걸 궁금해하냐? 만날 입는 건 맞지만…”
이 말에, 다들 ‘그러고 보니’란 표정으로 의영을 쳐다봤다. 만난 지 사흘밖에 안 됐지만, 입는 옷이 만날 비슷하단 건 흥미진진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의영 자신은 괜히 멋쩍어하는 눈치였지만, 먹을거리를 찾아낸 하이에나들에게 이보다 더 재밌는 건 없었다.
“나는 그냥 이것만 입는 거래도. 너희들도 참…”
“뭐. 암튼 맞잖아. ‘흰 옷’하면 의영이 형이다, 하면 되겠네. 다들 동의하죠?”
“네!”
이 말에 비상은 물론, 다른 이들도 한바탕 웃었다. 의영도 처음엔 당황해하다가, 이내 자기 처지를 깨달았는지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라며 킬킬댔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웃는데,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저쪽 구석에 있는 다른 여자애는, 이걸 보고 전혀 웃고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앤 의영이 형이 앞으로 나설 때도 그저그런 반응이었던 거 같은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일단 비상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자기 생각이 맞다면, 언젠가 알아서 깨닫게 될 터였다. 지금 의심해봤자 도움이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한바탕 웃은 뒤, 다시 의영이 말을 꺼냈다.
“대진표도 짜였으니, 한 번 연습이라도 할까? 어차피 내일도 모여야 하니까. 다들 시간이 된다면 좋겠는데.”
이 말에 다들 동의해서, 의영이 말한 대로 가게에 간 뒤 바로 연습하러 모이기로 했다. 다들 앞서 의영과 강산이 벌인 시험경기를 봐서인지, 자기도 해보고 싶단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사실, 비상도 어느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내일은 가게도 간다는데, 뭐가 있을까?’라며 앞일로 이야기꽃을 잔뜩 피우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어떻게든 이겨야지. 그냥 확!”
물론, 개중엔 강산처럼 전의를 불태우는 이도 있었다. 이 형도 참 지기 싫어한다니까. 비상은 우스워하다, 옆에 있던 현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애는 여러모로 챙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너도 만날 그 옷을 입는구나. 그 옷이 그렇게 좋니?”
“이게 좋아서.”
현은 다른 이와 말할 때, 눈을 잘 마주치려 하는 것같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도 현이 살아온 삶의 영향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엔 다니니?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아니, 안 다녀.”
그 말에, 비상은 자기 짐작이 어느 정도 맞단 걸 깨달았다. 이 아이한텐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다. 비상은 물론 그 사정을 모르며, 앞으로도 알 일이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비상이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나중에 심심하면 다시 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알았지?”
“응.”
현이 보통 떄와 달리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 보니, 이 아이는 적어도 먹는 건 전혀 꺼리지 않는 듯했다. 이런 아이도 먹보기질이 있구나. 그 조그만 걸 안 것만으로도, 비상은 어쩐지 무척 기뻐졌다.
내일, 비상 일행은 ‘진짜’ 놀이를 할 채비를 마치는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기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란 건 틀림없었다. 바로 오늘, 자기 상상을 뛰어넘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