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04. 첫 공중비행, 그리고 첫 무기

다음 날, 눈을 뜬 비상은 자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있단 걸 깨달았다. 마치 어젯밤 일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모습은 26년 살아온 윤비상 그 자체였다.
…그게 정말이었단 말인가.
자기가 겪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어제 일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걸 느끼며, 비상은 안경을 다시 썼다. 혹시나 해서 거실로 나가보니, 거기엔 자기 옷을 입고 잠든 현이 있었다.
물론, 현 역시 비상이 처음 봤던 원래 모습이었다.
“아직도 자는구나.”
여전히 곤한 잠에 빠진 현을 보며 쭈그려앉은 채, 비상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제만 해도 여기 있던 건 지금 자기만큼 몸집이 있는 남성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새근새근 잠든 건, 비상이 그 때 봤던 그 묘한 느낌의 여자애였다. 비상의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자고 있어서인지, 마치 친척 오빠 옷을 입은 채 잠든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닮은 데도 꽤 있는데, 이렇게 느낌이 다른 건 왜일까.
어제 그 남자와 대보면, 틀림없이 인상이 닮아있었다. 만약 둘을 다른 이한테 보여준다면, 다들 동일인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친척, 혹은 남매라 여길 터였다. 특히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무표정은 판박이였다. 굳이 말하자면, 어제 현은 아무래도 모습이 바뀌어서인지 인상이 좀 더 강하고 굵어졌단 것뿐이었다. 몸집같은 건 크게 차이가 났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응…”
비상이 자길 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하니 비상을 보는 걸 보니, 현도 방금 비상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안녕.”
“잘 잤니?”
어쨌든 현이 겨우 인사를 하자, 비상도 그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려다, 엉거주춤 다시 주저앉았다. 아마 자기한테 옷이 커졌단 걸 깨달은 듯했다.
“아. 옷 갈아입을래?”
마침 어제 입던 옷이(신기하게도) 침대 옆에 고이 개어져있기에, 비상은 그걸 가지고 왔다. 가만히 생각하면, 잠에서 깨고 보니 자기가 항상 입던 옷을 입고 있단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이 천사란 존재는 대체 뭘까. 비상은 머리가 아파왔지만, 일단 그건 지금 생각지 않기로 했다.
“어제하고 냄새가 다른데.”
옷을 갈아입고 나서, 현은 자기가 입은 셔츠의 냄새를 맡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그게 민망해져서, 비상은 얼른 다른 데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침 먹을래? 토스트에 달걀프라이 어떠니?”
“응.”
그렇게 둘은 어제처럼, 아무 말없이 아침을 먹었다. 그저 그릇소리만 나고 있는데도,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서 마음이 저절로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적어도 비상은 그렇게 느꼈고, 현도 그렇게 느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참 앳된 애구나.
전엔 곰돌이 귀가 달린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어서 몰랐지만, 오늘 본 현은 어깨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에, 표정을 알기 어렵긴 하지만 고등학생으로 볼 때 굉장히 어려보이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몸집도 비상의 짐작대로 그리 크진 않았다.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내가 묘하게 드러나보이는 게 비상 입장에선 꽤 재밌었다.
이런 아이가 어제처럼 자기랑 동년배처럼 보이는 사내로도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자기도 그렇게 되었으면서, 비상은 새삼스레 그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젠 괜찮았니?”
비상이 조심스레 묻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면 모를까, 이 정도 나잇대 아이가 갑자기 모습이 바뀐 데 당황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듯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렴. 나도 같은 처지니까.”
이 말에도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은 여전히 이 현이란 아이가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 말을 믿어주는 건 고마웠다. 조금이나마 믿음을 가지게 해줬단 게 기뻤던 것이다.
그 때였다.
“응?”
주머니에서 진동이 오는 바람에, 비상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엔 이런 말이 떠있었다.
-붉은 밤 팀은 오늘 저녁 그 옥상으로 올 것.
드디어 그 날이 왔구나.
현 역시 뭔가 받았는지, 비상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체 앞으로 뭐가 일어날까. 비상은 속으로 채비를 하며, 남은 식사를 모두 끝마쳤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나서.
아침을 먹고 나서 현을 보낸 뒤,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비상은 드디어 건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건물에 다다라 옥상으로 가보니, 이미 거의 모든 팀원들이 옥상에 가득 모여있었다.
드디어 뭔가 시작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비상은 가슴이 이상하게 들뜨는 걸 느꼈다. 원래 이런 걸 꿈꿔왔던 것도 아닌데, 지금 자기 마음은 묘하게 설렜던 것이다. 물론 비상도 그 까닭을 알 순 없었지만.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는데, 비상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현이니?”
정말 천사 말대로, 현은 어제처럼 자기 또래의 남성이 된 채 구석에서 다른 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은 아직 이걸 모르는 듯했다. 아직 다들 얼굴도 익히지 못했으니까.
“아깐 잘 갔니?”
비상이 말을 걸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자기 정체를 털어놓지 못한 건 틀림없어보였다. 이 아이는 이렇게 보이는 패널티를 받고 있구나. 안 보이는 패널티를 지닌 이상, 비상은 현한테 묘하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다들 잘 계셨죠?”
항상 그랬듯, 갑자기 옥상에 천사가 나타났다. 물론 천사가 나타나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천사는 생긋 웃어보이곤,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먼저 붉은 밤 팀의 주장을 고르려 하는데, 다들 어떤 생각이신가요?”
이 말에, 이번엔 다들 약속한 듯 어떤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이런 반응이 의외였는지, ‘저요?’란 눈빛으로 다른 이들을 둘러봤다. 정말 갑작스럽단 표정이었다.
그 남자는 비상도 첫날 본, ‘그만해, 이 자식들아!’라 외쳤던 사람이었다. 흰색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남자는 멀뚱하니 선 채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비상은 그 뒤로 강산과 이야기한 뒤 밖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뭔가 까닭이라도 있나?라 생각했을 때.
“저 사람이 뭘 했냐면 말이야.”
바로 옆에 있던 강산이 비상한테 사정을 설명했다.
강산의 말에 따르면, 저 남자, 김의영은 그 일 뒤로 다른 테이블을 돌면서 한명한명한테 일일이 인사했다고 했다. 강산한테도 인사했는데, 올해로 30이 된 회사원이라 자기를 소개한 듯했다.
“일일이?”
“그래. 그 땐 나도 깜짝 놀랐는데, 오히려 엄청 얌전한 분이더라.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고.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냄새 빼곤 취했단 느낌도 안 났어.”
“그건 대단한데.”
“말도 조리있게 잘 하던데. 대학생들한텐 공부 잘 되냐고 물어봐도 주고. 그 떄 혼자 술먹던 사람이란 게 좀 못 믿길 정도긴 했어.”
그 때, 주위에서 박수가 이는 게 느껴졌다. 결국 저 남자, 김의영이 붉은 밤의 주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의영은 잠시 생각하다 앞으로 나온 뒤, ‘뭘 보고 주장으로 골라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번에도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럼, 지금부터 이 놀이에 관해 말씀드릴게요.”
주장이 정해져서인지, 천사는 다시 이야기를 놀이로 돌려놓았다.
“이 놀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하는 거예요. 도시의 공기를 가르며 논다고 해도 맞겠네요. 어쩌면 하늘을 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지도 몰라요.”
“떨어지지 않아요?”
“아니에요. 아마 한 번 뛰어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 거예요.”
천사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둘러보면 아무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천사는 그조차 짐작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물론 건물만 넘나들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바라신다면 가로등에도 내려앉을 수 있어요. 한 번 해 보면, 이게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아리라 생각해요.”
“죄송한데, 저 고소공포증이 있는데요.”
“괜찮아요. 이 놀이에서는. 말 그대로 공중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답니다. 해보시겠어요?”
이 역시 당연하지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다지 겁이 없는 비상이긴 하지만, 지금은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천사의 말은 상식을 벗어나있었던 것이다.
“그럼, 예시를 보여드릴까요?”
“자, 잠깐만! 왜 나예요?!”
천사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자기 팔을 끌자, 당연히 강산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하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천사는 강산을 건물 난간으로 질질 끌고갈 뿐이었다. 저 덩치를 어떻게 하면 천사 정도의 몸집으로 끌고 갈 수 있는지도 수수께끼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천사는 난간으로 강산을 끌고 간 뒤, 그대로 밀처버렸던 것이다.
“우아아아악!!”
사방에서 외마디비명이 나오는 가운데, 비상도 눈앞이 깜깜해질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자기가 뭔가에 속고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와 함께,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생각도 같이 했다. 조심스레 눈을 뜨고 앞을 보니, 자기 생각과 반대인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아래로 떨어졌을 터인 강산이, 떨어지긴커녕 위로 공중돌기를 한 번 하고 나서 저 너머에 있는 다른 회사 옥상에 내려앉은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천사는 그럴 줄 알았단 듯, 항상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다른 이들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 건물이 얼마나 멀리 있든, 이렇게 쉽게 뛸 수 있어요. 그럼 해볼까요?”
그렇게 옥상에 있던 이들은, 천사한테 이끌려 하나하나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비상도 어느새 팔이 잡힌 채, 천사한테 등이 떠밀려 아래로 떨어졌다.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되지 않아서인지,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불빛들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떨어진다, 란 생각에 겁이 나려던 순간, 비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비상은 스스로 공중돌기를 한 뒤 강산이 내려앉았던 그 건물 옥상에 내려앉아있었다. 자기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직접 겪었으니 더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이건 꿈일까? 그렇다기엔 발에 남은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하늘을 가르는 듯한 그 느낌.
“진짜 신기하지 않냐?”
어느새 자기한테 다가온 강산이, 이런 말을 하며 어깨를 툭툭 치고 있었다. 옥상에 이제 막 내려앉은 다른 이 역시, 신기해서 못견디겠단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있는 게 보였다.
“그거야 뭐…”
현이 내려앉는 걸 보며, 비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현은 내려앉을 때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전에도 해본 것처럼.
“자, 이제 다들 실감나시죠?”
모든 이들이 내려앉자, 천사는 다시 나타나 커다란 상자를 자기 앞에 내려놓았다. 멀리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언뜻 봐도 상자 안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있는 게 여러분들이 쓸 무기랍니다. 아무거나 하나씩 골라보세요. 여기 없더라도 주위에 흔히 있는 거라면 뭐든 무기가 될 수 있답니다.”
“이걸로 어떻게요?”
“여깄는 물건을 ‘강화’해서 무기로 만드는 거예요.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이걸로 공격받는다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랍니다. 좀 아프긴 하겠지만요.”
비상과 다른 팀원들은, 상자로 다가가 그 ‘무기’란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있는 건 생각대로 온갖 잡동사니였는데, 축구공부터 야구방망이까지, 어떻게 무기로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있었다. 하지만 다들 재밌어보이는 건 있었는지, 삼삼오오 모여서는 ‘이건 어떨까?’나 ‘뭘로 할까’같은 말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비상도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어쩐지 가슴이 들뜨는 걸 느꼈다. 비녀에 부메랑에 플라스틱 병에, 희한한 것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재미있었다. 다만 강산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는지, 이것저것 뒤지던 비상 옆에서 이런 식으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이 놈은 이런 걸 봐도 표정이 그대로구만. 아무튼.”
“알아서 생각하든가.”
“그래놓고서 속으로 두근대고 그러냐?”
강산이 자꾸 놀려대긴 했지만, 그 말이 맞기에 비상은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상자 안을 죽 뒤지던 비상한테, 갑자기 뭔가 ‘희한한’ 게 손에 잡혔다.
그건 별 것도 아닌, 그냥 장난감 물총이었다. 장난감이라곤 하지만 의외로 진짜 총처럼 잘 만들어져있어서, 오히려 이게 물총이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론 온통 파란색이란 게 그냥 총이 아니란 증거이긴 했지만.
시험삼아 방아쇠를 당겨보니, 안에 물이 들어있어서인지 생각보다 괜찮은 물줄기가 나왔다. 강산도 쌍절곤처럼 생긴 부메랑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아마 그걸 고를 듯했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자기 마음에 드는 무기를 쥐어나갔다.
그러던 와중, 비상의 눈에 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현은 아직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었지만, 손엔 마술용 봉이 잡혀있었다. 그걸 보면, 현도 마음을 어느 정도 잡은 듯했다.
드디어 다들 무기를 고르자, 천사는 한 명씩 그 무기를 받아들고는 손에 꼭 쥐어 ‘강화’하기 시작했다. 비상의 무기 역시, 천사가 쥐자마자 뭔가 희한한 빛을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천사한테 건네받고 보니, 이상하게도 아까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상태에서 비상은 아무 생각없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이야. 니 총도 참 대단한데?”
아까만 해도 그저 평범하게 물이 나오던 물총이, 마치 레이저빔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장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놀라우리만치 ‘무기’처럼 바뀌어있던 것이다.
“자, 그럼 무기에 관해 말씀드릴게요.”
천사의 말에 따르면, 지금 강화한 무기는 어디까지나 ‘초기상태’라고 했다. 만약 모자란 데가 있다면, 자기가 말해주는 가게에서 ‘강화’를 시키면 된다고도 했다. 물론 비용은 들지만, 일정 횟수까지는 마음대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게 천사의 설명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다들 공중을 ‘뛰면서’ 무기를 시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산은 비상 바로 전에 무기를 시험했는데, 부메랑을 연달아 던진 뒤, 다른 건물로 뛰어내려오면서 그 부메랑을 어떻게든 받아냈다. 이건 강산은 물론, 지켜보던 비상도 놀란 대목이었다.
그리고, 비상의 차례가 돌아왔다.
비상 역시 다른 건물로 뛰어가면서, 방아쇠를 당겨 무기를 시험했다. 이미 한 번 뛰어서인지,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공중을 ‘나는’ 데 위화감이 없었다. 마치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물 사이를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험하니, 신기하게도 물줄기는 비상이 바라는 곳으로 힘있게 죽 뻗어나갔다. 지금은 조금 곡선에 가깝게 보였지만, 아마 방아쇠를 당긴 정도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듯했다. 그냥 물총으로 이런 게 된단 말인가. 이미 공중을 뛰어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비상은 여전히 자기 눈이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더 신기한 건, 이 무기가 마치 오래 전부터 써온 것처럼 비상의 손에 딱 맞는다는 점이었다. 총을 쏠 때 느낌도, 잡을 때 느낌도, 그 어느 것도 전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손에 쥔 건 오늘이 처음인데도 그랬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기가 지닌 무기가 안 맞는다고 뭐라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자기 무기가 마음에 쏙 들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이제 연습도 끝났으니,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직접 실력을 늘려보셨으면 좋겠어요. 내일은 각 팀 대진표 추첨에 들어갑니다.”
다른 이들이 무기 시험을 모두 끝내자, 천사는 이런 말 뒤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번이 두번째인데도, 다들 꿈이라도 꾼 것처럼 천사가 간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도 그 생각에 방아쇠를 다시 당겼지만, 물총은 틀림없이 아까처럼 고른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럼 다시 통성명이나 할까요?”
이제 천사도 갔기 때문인지, 아까 주장으로 뽑힌 김의영이란 사람이 분위기를 이끄기 시작했다. 언뜻 봐도, 말투를 봐도 리더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상황을 이끄려는 의지는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비상은 저 사람이 술을 먹다 소리친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얌전하게, 그리고 보통 회사원에 가깝게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비상도 자기를 소개했고, 이윽고 현의 차례가 되었다.
“…”
“…”
아무 말도 안 하는 현을 보고, 다들 갸우뚱하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현은 음식점 안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현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지금 이 상황도 알아챌 터였다.
당분간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비상도 뭐라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영은 뭔가 결심한 듯, 천천히 현한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리며 이런 말을 건넸다.
“괜찮아. 혹시 힘든 일 있으면 우리한테 말해도 돼. 알았지?”
이 말에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야 다들 천천히 현 근처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깨나 등을 두드려주며 ‘거 참 희한한 패널티도 다 있네’나 ‘괜찮아. 도와줄게’라며 현을 격려해줬다. 이전부터 현을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비상은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그렇게 모임이 끝난 뒤, 비상은 강산과 같이 건물을 나섰다. 건물을 나서니, 혼자 걸어가고 있던 현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처럼 눈에 띄기도 해서, 비상은 조심스레 현을 불렀다. 현도 잠시 강산 및 비상을 보고는, 이내 천천히 옆으로 다가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자기네들은 그냥 평범한 성인남성 3인조로 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비상은 현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가 자꾸 신경쓰였다.
“아까 그 때 기분 째지지 않았냐? 어유. 지금 생각해도…”
“뭐, 신기하긴 하더라.”
“뭐야, 별로 안 놀랐단 툰데? 난 최고였다. 살다보니 별의별 경험을 다 하게 된다니까.”
“앞으로 더 기겁할지도 모르는데 벌써 놀라서 쓰겠어? 형도 참.”
강산과 비상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현은 신기하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대뜸 강산이 현한테 말을 걸었다.
“비상이한테 얘긴 들었다. 너도 참 고생이 많구나. 참.”
“괜찮은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현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강산은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현의 어꺠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 그럼 됐다. 무슨 일 있음 오빠들한테 상담하고. 알았지?”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은 자기도 뭔가 말을 걸어야겠다 생각했다. 아까부터 걸린 게 있어서였다.
“뛰어내릴 때 무섭지 않았니?”
“아니.”
“너도 참 대단하구나. 나랑 형은 솔직하게 말해서 당황했거든.”
“야. 왜 날 끼우냐? 거야 그 말이 맞지만…”
“처음한 것도 아닌데 뭘.”
“…응?”
“나 먼저 갈게.”
비상과 강산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 현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현이 간 쪽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 애한텐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비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한동안 그런 생각을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