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언리미티드 03. ‘핸디캡’의 존재

첫만남을 가진 다음 날, 비상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어?”
비상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자기 몸을 둘러싼 감각이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바뀌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기 방이 평소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여기까지라면 또 알겠는데, 더 큰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자기 전에 입었던 옷이, 지금 자기한테 헐렁하리만치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보면, 문제는 그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 몸이 전보다 훨씬 줄어든 것도 그렇지만, 살결도 전보다 좀 더 밝아져있었다. 몸집 이전에, 뭔가 더 중요한 게 바뀌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머리카락이…”
어쩐지 어깨가 간지럽다 싶어 손으로 만지니, 틀림없이 머리카락이 전보다 더 길어져 있었다. 물론 어깨에 간당간당하게 올 정도이긴 했지만, 적어도 머리숱이 갑자기 늘어난 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전혀 짐작치 못한 데에서도 뭔가 느낌이 있었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거울을 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비상은 조심스레 일어나, 방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이게 뭐지?”
거기에 비쳐져있던 건, 비상이 전혀 짐작치 못한 것이었다.
지금 비상이 비친 거울 너머에 있는 건, 묘하게 앳된 느낌이 있는,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여자애였던 것이다. 그 인상은 묘하게 원래 비상과 달랐지만, 거울 너머에 있는 게 자기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기가 이렇게 보일 수도 있단 말인가.
안경 하나 없이도 앞이 잘 보이는 것에 위화감을 가지며, 비상은 거울 속 자기를 가만히 쳐다봤다. 원래 170대 후반이던 키가, 적어도 150대 중반으로는 줄어든 듯한 느낌이었다. 원래 모습이라면 당연히 딱 맞았을 티셔츠나 바지조차, 지금 이런 상황에선 그저 몸에 안 맞는 큰 옷일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깔끔하게 깎으므로 어깨까지 올 일이 없는 머리카락이, 지금은 목에 닿을 만큼 길어져있었다. 여자애들이 하고 다니는 깔끔한 커트와는 달리, 뒷부분 가운데만 묘하게 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숱도 늘어나 보였는데, 그 탓인지 원래라면 더 깔끔하게 보여야 할 머리모양이 더벅머리, 아니 사자머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부터 묘하게 흰빛과 파란빛이 뒤섞인 것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이, 지금은 특히 더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우라니 등을 못 편다느니란 말까지 들을 정도로는 인상이 또렷한 비상이었지만, 거울 너머에 있는 자기한테선 그다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친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특유의 인상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신기하리만치 그 아우라인가 뭔가하는 건 많이 줄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비상의 눈으로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데도 ‘같은 사람이 바뀐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단 게 더 신기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당사자인 비상은 바로 자기자신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다른 모습’은 틀림없이 비상이었다.
그래서,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비상의 머릿속을 바로 스치고 지나간 건, 어제 천사가 말했던 ‘패널티’였다. 그 땐 비상도 모르는 것 투성이였기에, 패널티란 말쯤은 그냥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천사가 한 짓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비상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자,가지런히 접힌 옷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와 셔츠를 손에 들어보니, 지금 모습이라면 딱 맞을 법한 옷들이었다.
이걸 입으라는 건가.
이걸로 확신할 수 있게 된 비상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뒤 버스를 타러 밖으로 나갔다. 남고를 나와 여자경험이 많지 않은 비상인지라 지금 이 모습에 위화감이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천사는 정말 거기에 있는 걸까.
버스를 타고 천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도, 비상은 속으로 망설였다. 대체 왜 이런 패널티를 주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천사가 하는 일이라면 뭔가 까닭이 있을 건 틀림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다니는 것도 묘하게 민망한데.
그다지 이런 감정을 안 갖는 비상이었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놓여서인지 주위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이니 누군가 자길 알아보지도 않을 텐데(비록 아는 사람이 본다면 자기와 무척 인상이 똑같다 여기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사리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크게 느껴지는 세상 역시, 비상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불안해지는 건, 비상한테 있어 드문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천사가 있던 옥상에 다시 오니.
“오실 줄 알았어요. 깜짝 놀라셨죠?”
천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지금은 해가 높이 뜬 낮인데도, 천사는 여전히 묘한 현실감을 갖고 있었고, 눈부신 것도 그대로였다.
“지금 이 상황이 패널티인가요?”
천사한테 말을 걸며, 비상은 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낮은 목소리가 나오는데, 지금 목소리는 자기가 감당하기엔 너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그런 위화감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네. 붉은 밤 팀에 주어진 ‘숨겨진 패널티’랍니다.”
“…숨겨진?”
“네. 패널티는 각 팀마다 두 명한테 주어지거든요.”
지금 처음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상하게도 비상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이렇게 대범한 천사라면, 그런 제안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보면 속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패널티를 미리 말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말은 즉, 다른 한 명은…”
“네. 보이는 패널티를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패널티는 크게 주목받지 않는 거랍니다. 아마 보시면 알겠지만…”
“그거야 그렇겠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비상이 당연하단 듯 말하자, 천사는 ‘맞아요’라 웃어보였다.
“주어지는 패널티는 각 밤마다 달라요. 모두 같다면 짐작하기 쉬울 테니까요. 이러한 패널티는, 여러분들이 놀이에 ‘진지하게’ 임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분께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한 팀에 두 명만 패널티를 받아도 진지해지는 게 다르거든요.”
“그래요?”
“네. 그러니 부디 받아들여주세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따라 무작위로 골랐을 뿐이니까요.”
정말 이런 걸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제 생각에 따라’ 무작위로 골랐다는 대목까지 해서 걸리는 게 이것저것 있었지만, 비상은 일단 이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에 패널티란 말을 듣고도 이걸 하겠따 한 건 비상 자신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정도는 받아들여도 좋을지 몰랐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죠?”
“아. 밖에서는 가끔 그런 모습이 되실 거예요. 놀이를 할 때는 원래대로 돌려드릴 생각이지만요. 물론 겉모습이나 다른 이들의 지각은 제가 도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팀원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건가요?”
“같은 팀원들 중 몇 분께는 그 모습을 풀어드릴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천천히 들키시게 될 거예요. 숨겨진 패널티이니만큼, 이 점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보이는 패널티는?”
“물론 모든 이들이 알게 되는 거랍니다. 여기에 관해선 그 때 가서 아시게 될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복잡해진 비상이었지만, 일단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연구소에 가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모습이 가끔 바뀐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역시 나중에 알게 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사한테 인사한 뒤 문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어?”
그저 문을 열고 나가려 했을 뿐인데, 비상은 바로 앞에서 웬 남자가 자기 옆을 스쳐 옥상 문을 여는 걸 느꼈다. 지금 자기 모습으로는 꽤 덩치가 있어보였지만, 아마 보통 남성의 체격일 터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틀림없이 이 남자를 보는 건 처음인데, 어쩐지 그리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비상은 잠시 뒤를 돌아보며, 닫힌 문과 그 너머에 있을 것을 가만히 상상했다. 천사가 아까 말한, ‘드러나는 패널티’를 다시 떠올리며.

그렇게 집에 돌아가려던 비상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누구야?”
핸드폰을 보고 나서야, 비상은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어제 만난 그 단순한 남자 이강산이었던 것이다. 전화 자체는 받아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이런 모습인 상황에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버려뒀더니, 이번엔 메시지가 왔다.
-왜 연락을 안 받아? 지금 만날 수 있냐?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결국 마음을 잡았다. 어차피 천사가 했던 말도 있고, 이번에 한 번 확인해보는 게 낫겠다 여겨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부딪히는 게 훨씬 나았다.
-여기 그 회사 근천데, 올 수 있어?

“어, 뭐야?”
비상이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자, 잠시 뒤 저 너머에서 강산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비상이 손을 들어 여깄단 걸 보여주자, 강산은 맨 처음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자, 잠깐만. 너, 혹시?!”
“그 혹시가 정말인데, 뭐가 어떄서?”
“크, 크, 크하하하하!!”
비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산은 배가 아파라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앞에 앉아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래, 그 패널티가 그런 거였단 말이지? 거 참, 희한한 패널티도 있구만.”
“뭘 이런 걸 갖고 그래. 난 괜찮은데.”
“그거야 괜찮겠지. 니가 이런 걸로 놀랄 놈이었겠냐? 그건 나도 안다.”
겨우 이틀 본 사람의 뭘 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상은 그 말을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강산은 아직 안 질렸는지, 자꾸만 비상한테 말을 걸려 했다.
“이야. 그 아우라는 어디 갔냐? 도망이라도 갔나보지?”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된 거지 뭘 그래. 거 참.”
“아무튼 마음이 편하네. 이제야 등 좀 펼 수 있겠는데?”
“내가 그렇게 등펴기 어려운 인간이야?”
“그런 모습인데 잘도 당당하다. 너도 참.”
이런 상황에서 칭찬받는 게 묘한 느낌이었던 비상이었지만, 어쨌든 강산이 자기를 이렇게 대해주는 건 무척 고마웠다. 비상 자신도 여기까지 오는 데엔 결단이 필요했기 떄문이었다.
“보이는 패널티? 그런 것도 있다고?”
“그렇지. 그건 누구나 알 수 있다던데.”
“별 게 다 있구만. 진짜.”
강산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윽고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햄버거 한 쪽을 베어물었다. 그리곤 비상을 쳐다보며, 별 것도 아니란 듯 이렇게 말했다.
“뭐, 잘 대해주면 되지. 니 일은 비밀로 하고.”
“누가 될지도 모르는데?”
“누가 되든 상관없잖아. 너도 잘 대해줄 거고. 안 그러냐?”
그 말을 듣자, 비상은 이제 자기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꽤 괜찮은 남자였단 걸 알아서였다. 아까 그 남자가 자기가 생각하는 그라 한들, 비상은 어떻게든 되리란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고마워. 내 말 들어줘서.”
“뭘. 너도 참 큰일겪는다. 나도 뭐 마찬가지지만. 무슨 일 있음 말해라.”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비상은 패스트푸드점을 나왔다. 강산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려 걸어가던 비상은, 문득 눈앞에 공원이 있단 걸 꺠달았다. 아직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 근처에 꽤 큰 공원이 있었던 듯했다.
잠깐 다녀올까.
그런 생각에 공원에 들어선 비상은, 저쪽에 있는 벤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있단 걸 깨달았다. 혹시나해서 다가가본 뒤, 비상은 자기 생각이 맞단 걸 알게 되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던 건, 틀림없이 아까 옥상에서 스쳐지나갔던 그 남자였기 떄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겠나.
비상은 조심스레 그리로 다가가, 다시 한 번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남자는 벤치에 앉은 채 가만히 앞을 보고 있었는데, 키나 몸집만 보면 원래 모습이었을 때의 자기와 거의 마찬가지였다. 좀 더벅머리처럼 보이는 게 흠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근 곧장 알 수 있는 인상이었다. 그 묘한 무표정과, 얼굴생김새와 조금 안 맞는 앳된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특유의 분위기가, 비상한테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비상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붉은 밤하고 관련있어요?”
“…누구세요?”
그 낮으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방금 몸을 움찔한 걸로 볼 때, 아무래도 비상의 생각이 맞는 듯했다. 비록 모습은 바뀌었지만, 이 사람은 어제 봤던 그 여자애가 틀림없었다. 만약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비상은 가만히 남자 옆에 앉은 뒤, 잠시동안 어떻게 할까를 생각했다. 남자도 비상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죽 흘러가다, 드디어 마음을 다 정리한 비상이 다시 입을 뗐다.
“우리, 어제 봤지?”
“…”
남자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비상의 눈을 가만히 쳐다본 다음,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로 자기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된 듯했다.
“네 그 모습도 패널티구나, 그렇지?”
그 말에도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상의 생각대로였던 것이다. 잠시 동안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궁금한 건 다 물었으니,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너도 고생이구나.”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비상은 남자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런 말을 건넸다. 물론 이런 말이 아무 소용없단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뭐라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때였다.
“안경은?”
“…안경?”
그 말을 듣고서야, 비상은 지금껏 자기가 안경 없이 다녔단 걸 깨달았다. 아침에도 한 번 놀랐지만, 그 뒤론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잘 보이거든. 그래서 케이스에 넣어놨어. 궁금했니?”
“우와.”
고작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남자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비상을 쳐다봤다. 이게 그렇게 희한한 일인가. 어제만 해도 별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런 모습을 본 게 비상 입장에선 신기한 일이었다. 이 모습으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좀 얼빠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네 이름은 뭐니? 난 윤비상이라고 하는데. 올해로 스물여섯이고.”
“이현. 열여덟 살.”
“너도 어리구나. 생각대로이긴 한데.”
고등학생이 아니라 나이를 대는 게 좀 신기하긴 했지만, 비상은 이 아이의 이름을 알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비록 이런 모습으로 진짜 나이를 대는 게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상은 이 아이, 현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낮에 일어나서인지, 벌써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있었다. 이제 자기도 돌아가야겠단 생각과 함께, 비상은 자기 연락처를 현의 핸드폰에 넣어줬다.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 너무 부담갖지 말고.”
비상 입장에선 이 애를 내버려두는 게 마음에 걸려서,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전해준 연락처였다. 그런데 현은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뭔가 떠올랐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저녁밥.”
“…응?”
이렇게 빨리 답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비상은 깜짝 놀랐다. 지금 집에 가서 밥을 해달란 말인가? 그렇게까지 배가 고팠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자기도 이 아이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럼 따라와. 우리 집으로 가자.”
현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기가 우리 집이야.”
잠시 뒤, 비상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로 보이는), 현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섰다. 지금껏 자기 집에 이성을 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일로 들일 거란 생각은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일이니, 집도 제대로 치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래 집을 꺠끗이 치우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상은 그 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남의 집(어쩌면 ‘이성의 집’일지도 모르지만)에 온 게 처음인지, 현은 신기하단 듯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봤다. 그게 묘하게 신기해서,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외간 남자 집은 처음이니?”
그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도 있나, 란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소파에 현을 앉게 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외간 남자가 자기 집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일단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상은 저녁을 만들러 부엌으로 들어간 뒤, 뭘 만들지 생각했다.
여자애한테 뭘 대접하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을 텐데.
묘한 긴장을 느끼며, 비상은 달걀을 깨뜨려넣었다. 항상 하는 과정인데도, 뒤에 누가 있단 걸 느끼면 자꾸만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오믈렛이 만들어지자, 비상은 현을 불렀다. 같이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우와.”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온 현은, 오믈렛이 그렇게 신기했는지 얼마 동안 가만히 선 채 그릇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리에 앉고, 이내 한 입 들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만큼 느릿느릿하긴 했지만, 한입한입 자기 나름대로 맛보고 있단 건 비상도 잘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었다. 그릇소리나 음식을 씹는 소리만이 부엌에 가득했다. 비상도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건네는 성격은 아니기에, 지금 이 분위기가 오히려 편했다.
“맛있니?”
자기 식사를 끝맺고 나서, 비상은 현한테 물어봤다. 현은 느릿느릿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보니, 그릇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자기 음식을 누군가, 특히 여성이 먹어줄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비상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러던 와중, 현은 배도 부르고 피곤했는데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다 큰 남자가 자기 눈앞에서 고개를 꾸벅대는 게 묘하게 희한하단 생각을 하면서, 비상은 조심스레 물었다.
“피곤한가 보구나. 그러고 보니 집은 어디니?”
“여기서 좀 먼 데.”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현이 대답하자, 비상은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저녁 여덟 시를 넘긴 걸 보니, 혼자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 집에서 재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 둘의 처지는 정반대이니, 현이 여기서 자고 가도 문제는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혹시 부모님이 허락하신다면 여기서 자도 되는데, 어떠니?”
“부모님 안 계신데.”
이 말에 비상은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 대답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자고 가렴. 이런 상황이면 괜찮지 않겠니?”
잠시 망설이던 현은, 이윽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고있던 옷(아마 자기처럼 천사가 놓고 갔으리라 짐작되는)이 6월 첫날인 오늘 보면 답답해보여서, 비상은 자기 옷장에 있던 것들을 내줬다. 이제 여름인데 긴바지에 긴팔이라니, 자기한테도 그랬지만 천사는 사람 놀리는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아직 옷이 익숙하지 않단 표정으로 거실로 온 뒤 비상이 깔아준 이불 위에 누웠다. 자기 옷을 남이 입는 일은 드물었기에, 현이 입은 옷이 딱맞는 걸 보고 비상도 놀랍단 생각을 했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중, 현은 남의 집인데도 곧장 푹 잠이 들어버렸다.
얘도 참 대단하구나.
코고는 소리 하나 없이 푹 잠든 현을 보며,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띄우고 말았다. 이렇게 자는 표정을 보면, 자기가 어제 본 그 여자애란 걸 특히 잘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모습이 바뀌는 가운데 인상도 조금 바뀌었지만, 그래도 그 특유의 앳된 느낌은 묘하게 남아있었다. 지금 모습은 고등학생이라기보다 자기랑 동갑에 가까운 어른이지만.

현이 잠든 걸 보고 나서, 비상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처음 이성과 같은 곳에서 잔다는 생각과 함께, 입장이 바뀐 지금은 그것조차 우습다는 생각이 비상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애가 푹 잠든 건 정말 다행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해 생각하며, 비상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렇게 짐작하기 어려운 앞날은 비상 역시 처음이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어떻게든 될 터였다. 지금까지도 죽 그랬으니까.
더 복잡한 생각하기도 싫어서, 비상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드물게도 씻지도 않은 채, 이렇게 빠른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