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갑작스러운 첫만남이 끝나고 나서.
“…”
비상은 ‘붉은 밤’이란 팀이 된 이들과 함께, 그 회사 근처 고깃집에 앉아있었다. 여기가 가장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들 눈에 먼저 들어온 데로 가는 데 전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라, 아무튼 어디든 좋으니 일단 들어가자, 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비상 역시, 속으로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면, 앉아있는 이들 대다수는 20대쯤 되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개중 고등학생뻘로 보이는 아이 몇 명이 섞여있었지만, 대다수가 성인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비상 자신도 연구소 일로 팀원들과 술자리를 갖는 일은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술자리는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얘길 주고받으란 말이지?
일단 주위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비상은 물을 마셔 마음을 달랬다. 일단 밤이긴 하지만, 미성년자도 같이 있는 곳에서 함부로 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관계맺기 자체를 어려워하는 성격은 아닌 비상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동안 다들 눈치만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문한 소고기가 도착함에 따라 한 명씩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날씨나 하는 일, 사는 곳을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대화가 늘어나고 있단 게 눈에 보이게 될 만큼 나아가는 걸 비상은 잘 알 수 있었다. 몇몇은 죽이 잘 맞았는지,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도 활발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하고싶은 말만 하고, 남의 말을 듣는 게 더 성에 맞는 비상 입장에선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때였다.
“어우. 이런 젠장!”
갑자기 대각선 너머 테이블에서 큰소리가 나는 바람에, 비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한 성질할 법한 덩치큰 남자가, 열받는단 표정으로 자기 가랑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누가 그 쪽으로 뭘 쏟은 모양이었다. 역시 덩치는 크지만 인상이 좋아보이는 남자가 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게 들렸다.
“어, 형. 혹시 생리하세요?”
“야, 이 신발 개자식아!”
이 말을 듣자마자 성질이 있어보이는 남자는 이를 부드득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가랑이에 빨간 물이 든 걸로 볼 때, 가랑이에 쏟은 건 김치였던 듯했다. 그 성질있는 남자가 인상 좋아보이는 남자 멱살을 잡는 걸 보며, 비상은 자기가 희한한 이들과 한 팀이 되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넌 생리를 갖고 농담으로 써먹냐! 생리가 장난이야, 엉?!”
“형은 남자시잖아요. 저도 여자분들께 그런 농담을 할 생각은 전혀…”
“그게 문제냐?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이 자식을 그냥 확…”
여전히 끝나지 않는 고함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다른 한쪽에서 또다른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방금 전 두 남자처럼 농담조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화난 말투였다. 술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위험하단 걸 잘 알고 있기에, 비상은 곧바로 고개를 그리로 돌렸다.
그러자, 생각하던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거 참…”
대체 술을 마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남자 두 명이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고 있었다. 여기선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둘 다 진짜로 화가 난 건 틀림없었다. 술자리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처음 만난 이들과의 모임에선 그다지 보고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뜯어말리려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자기라도 나가야 하나.
비상은 누굴 말리는 게 특기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약한 몸도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제몫은 할 수 있었다. 정 아무도 안 나간다면 자기라도 나가는 게 좋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만해, 이 자식들아!”
갑자기 구석에서 이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싸우던 이들은 물론, 눈치만 보던 이들도 곧장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상도 깜짝 놀라, 그 쪽을 가만히 쳐다봤다. 거기에 있던 건 목소리와 달리, 무척 의외인 인물이었다.
거기에 있던 건 몸집이 큰 것도 아니고 배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그저 추레한 회사원이었다. 다른 이보다 눈에 띄는 약간의 더벅머리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몸집도 그저 그렇고, 기가 센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검은색 서류가방이, 이 남자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까 소리지른 건 틀림없이 이 남자였다.
비상도 여기로 들어오면서 여러 사람을 봤지만, 이 남자는 죽 저기서 혼자 가만히 술만 마셨을 터였다. 언뜻 보기에 크게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취해서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결코 작은 체구는 아니지만(가만히 보면, 오히려 30대에 가까운 겉모습과 달리 어느 정도 듬직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저렇게 화가 끓어오를 거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 취했다면 아무리 우렁차게 외친다 한들 어느 정도 우스울 텐데, 방금 그 외침이 허세가 아니란 건 비상도 알 수 있었다. 겉모습으론 믿기 어려울 만큼, 충분히 박력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대체 저 남자는 뭐하는 사람이지?
싸우다 이 외침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던 남자들은, 이걸 보고 서로 멀뚱하니 있더니, 아주 어색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떴다. 이와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도, 어색하게나마 아까 그 분위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소리를 친 남자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혼자 얌전히 소주를 마실 뿐이었다. 다들 그 남자가 자꾸 신경쓰였던 건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곁눈으로 남자를 쳐다보곤 했다.
정말 방금 그건 뭘까.
만약 술에 취해 그런 거라면, 비상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저 남자가 취하지 않았단 건 비상도 잘 알고 있었다. 목소리도 전혀 취한 느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혼자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시는 지금조차 동작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저 남자는 술에 세든가, 취한 걸 안 드러내든가, 둘 중 하나이리라 비상은 생각했다.
아마 이 팀 주장은 저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비상은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좀 추레한 회사원일 뿐이었다. 더 어울리는 이를 찾으라면, 저 남자가 아니더라도 맞아떨어져보이는 사람이 더 있을 터였다.
하지만, 비상은 저 남자한테서 묘한 카리스마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게 흔히 다른 이들이 말하는 카리스마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오히려 특이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라면, 이렇게 다루기 힘든 팀이라 한들 어떻게든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비상의 직감일 따름이었지만, 그 직감은 평소보다 더 강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이 뭔가 마시려 컵을 쥐었을 때였다.
“근데 댁은 몇 살이신가?”
아까 가랑이에 김치를 쏟고 날뛰던 남자가, 어느새 비상 앞에 와서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자, 남자는 아까보다 더 덩치가 크게 보였다. 살이 찐 건 아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몸집 때문에라도 피할 법한 느낌이었다. 인상 역시 굳이 말하자면 성질이 있어보이는 느낌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나쁜 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비상 눈에, 이 남자는 어디서나 볼 법한 소시민이었다.
“스물여섯인데요.”
“진짜? 이렇게 아우라가 장난 아닌데?”
대체 뭐가 아우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입을 벌린 채 놀라워했다. 아마 겉으로 보기에, 비상은 이 남자와 동갑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럼 인사나 하죠. 내 이름은 이강산이라고 하는데, 댁은?”
“윤비상입니다.”
“어유. 이름도 특이하네. 악수 한 번 안 할래요?”
이렇게 해서, 비상은 이강산이란 사람과 얼렁뚱땅 악수를 하게 되었다. 처음 말을 걸 때도 그렇고 대범하다 못해 실례가 될 법한 태도였지만, 비상은 이 사람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자기한테 없는 그런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상이 자주 어울리는 인물 중,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대학생은 아닌 거 같은데, 어디서 일하나?”
“이 근처 연구소에서 일합니다.”
“어유. 스물여섯치고 말도 잘 하네. 망설이는 게 없어.”
“이런 데 망설여서 어디에 쓰겠어요?”
“이야. 이렇게 받아치네? 나보다 한 살 어린데 꽤 괜찮은 놈이구만. 반말까도 되나?”
“원래 반말하고 있던 거 아닌가?”
이 말을 듣자, 강산은 갑자기 무척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마치 엄청 재밌는 놈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자식 크게 되겠는데? 맘에 든다. 한 잔 받아!”
“뭐야. 이 단순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비상은 강산이 따라주는 술을 가만히 받았다. 자기가 뭘 말했다고 저렇게 흥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댁은 몇 살인데?”
“스물일곱이다. 자꾸 나이나이 말하니까 짜증났냐?”
“아니, 아까부터 죽 말한 게 신경쓰여서.”
“그런 건 대충 넘어가도 돼. 나도 괜히 편견갖고 그랬던 거 같고. 너 인마. 무지 맘에 든다. 내가 아는 모든 범생이 계열 중 니가 최고야. 어쩐지 그래.”
이 사람은 정말 바보인가.
그 단순하기 이를데없는 사고가 이젠 우스워졌지만, 그조차 비상은 싫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소시민을 떠나서, 몸집만 큰 바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비상의 눈엔 그게 재밌게 보였다. 이 데면데면하기 이를 데 없는 팀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자기가 알게 된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술을 한 잔 나눈 뒤, 둘은 담배라도 피울 겸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미 담배를 예전에 끊은 비상은 물론 피우지 않았지만, 강산은 곧바로 담배갑을 꺼내고는 연신 킬킬대고 있었다.
“넌 진짜 크게 될 놈이야. 진짜로. 이 이강산이 이름 걸고 보증한다. 크하하하.”
강산이 신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며, 비상은 다시 한 번 이 사람이 단순하단 걸 확인했다. 대체 이 남자는 처음 본 사람의 뭘 보고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칭찬을 받고 기분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기에, 비상은 강산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무엇보다, 비상은 이강산이란 사람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건 무척 단순한 성격이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사람이 자기한테 없는 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사귀어본 사람과 여러 모로 다르지만, 오히려 지금 비상한텐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갖고 있던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둘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물론, 강산은 ‘이런 거 잘 안 알려준다니까’라며 무척 생색냈다), 얼떨결에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아까 짜증낼 때만 해도 강산은 상당히 거친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보면 그냥 성격 시원시원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아까 그 남자도 그렇고,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고 비상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강산에 뒤이어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응?”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며, 비상은 방금 느낀 인기척을 가만히 쳐다봤다. 음식점 문 바로 옆 외진 곳에, 여자애 한 명이 서있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가만히 보면 맨 처음 둘러볼 때에도 눈에 띄었던 것 같았다. 여자애는 고등학생치고 좀 작은 키긴 했지만, 중학생이라 하기엔 어느 정도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특이한 건 그 여자애의 옷차림이었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데도, 곰 귀가 달린 조끼형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던 것이다. 점퍼가 채워지지 않은 조끼 너머로는 흰색 티셔츠가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아래는 회색 반바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상의 눈길을 끌기엔 충분했다. 비상이 알고 있는 대로라면, 고등학생이 이렇게 한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만큼 긴 것 같았는데, 그것 때문인지 모자 안에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들어가있었다. 묶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렇게 깨끗하게 머리카락이 정돈된 것도 신기했지만, 이 여자애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만큼 여자애가 지닌 ‘느낌’은 다른 이와 달랐던 것이다.
여자애는 비상이 자길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벽에 기댄 채 큰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늘진 탓도 있었지만,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여기서 알 수 없었다.
저 나이 또래치곤 무표정인데.
비상 자신도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자기가 볼 땐 이 여자애가 훨씬 더 그런 경향이 센 것 같았다. 묘하게 현실과 빗나간 느낌이라 할까. 자기도 아우라 운운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도, 비상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거기서 더 말을 걸진 못한 채, 비상은 다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란 생각이 잠시 비상을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