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하지 않겠나요?
그 날 밤, 윤비상은 꿈에서 그런 말을 하는 천사를 만났다. 빛으로 가득 둘러싼 채, 자기를 보며 웃고 있는 천사와.
“무슨 놀이 말씀이시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비상은 침착하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이걸 전할 수 있는 게 무척 큰 행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 밤으로 나뉘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즐거운’ 놀이 말이에요.”
물론, 비상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건, 비상이 천사의 말에 따라 어떤 건물 옥상에 다다랐을 때였다.
때는 5월 마지막 날. 주어진 시간은 이로부터 세 달.
아무도 하지 않는, 기상천외한 ‘놀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상한테 있어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들도.
윤비상이라는 남자는, 자기가 생각해도 특이한 점이 여럿 있는 사람이었다.
올해로 스물여섯. 대학을 조기졸업한 뒤 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여자친구는 딱히 없었다. 안경을 쓴 깔끔한 인상(주위의 말에 따르면 아직 젊은데도 묘한 압박감이 있는)을 지녔으며, 적당히 튼튼한 몸도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었고, 입는 옷 역시 ‘자기다운’ 군더더기없는 것들이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어쩐지 흰색이 섞인 파란색에 가까운 사람이라 하던데, 정작 당사자인 비상은 그걸 잘 알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우등생 루트를 밟아왔으며, 물론 지금도 그건 그대로였다. 융통성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비상 역시 자기 성격이 논리정연하단 건 알고 있었다. 할 말은 다 하고사는 성격이지만, 자기가 하고싶은 말이 아니면 입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란 것도 잘 알았다. 이걸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연구소에서도 평판이 좋고, 일 잘 해내기로 이름났단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이 정말 알 수 없는 건, 자기를 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었다.
비상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너한테는 아우라가 있어’같은 소리를 흔히 들어오곤 했다. 물론 비상한텐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깔끔한 것에 신경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한테 그렇게 큰 아우라가 있다 여긴 적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목소리만 들어도 등뼈가 꼿꼿해진다 말하는 선배조차 있었다.
물론 비상은 지금껏 이런 말이 있거나 말거나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25년 넘게 지내온 자기 삶에서, 각기 다른 이들한테 몇 번이고 이런 말을 듣고 있자면, 아무리 남의 눈길에 신경 안 쓰는 비상이라 한들 이러한 걸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다른 이들이 등도 못 펼 만큼 대단한 존재인가?
딱히 자길 깔아내릴 생각은 없었지만, 가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면 비상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자기를 높게 사는 게 싫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여럿 있었던 탓이었다. 누군가는 비상을 두고 ‘등을 못 펼 만큼 뭔가가 있다’고 했지만, 비상 입장에선 여전히 물음표였다.
어쩌면 그건 비상이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을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만 아우라가 있다 일컬어지는 건 묘한 일이었다. 물론 비상이 다른 이들보다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일지도 모르나, 거꾸로 자기만큼 능력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나라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터였다.
사실, 비상은 어릴 적부터 지극히 모범생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비상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 역시 그걸 바랐고, 비상도 엘리트 코스를 밟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비상은 이 길에도 물음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한테 달라붙은 그 우등생 이미지가, 자기 발목을 잡는단 걸 느낀 것이다.
딱히 다른 이들이 자기에 관해 뭐라 말하든 신경쓰지 않는 비상이었지만,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학생 시절부터 죽 가지고 있던 ‘어떠한 느낌’이 자꾸만 되살아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연구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항상 그렇듯 수많은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제 초여름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5월 말. 며칠 뒤면 말 그대로 여름이 되는 이 시기라서인지, 버스 안에선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냉방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바깥을 보며, 비상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사실 아우라고 뭐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비상한테는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 까닭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그건 다른 사람의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마음 한구석에 ‘숙제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만은 비상도 잘 알 수 없었다.
그건 흔히 말하는 강박관념도 아니었고, 물론 트라우마와 같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은,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죽, 자기가 못본 척하고 있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다른 이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신경쓸 것도 없다’란 답이 돌아올 터였다. 비상은 지금 살면서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이들한테는 유능하다는 칭찬을 받고, 뭔가 아우라가 있다며 높이 살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비상은 슬슬, 자기가 그 ‘숙제’와 마주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한테 뭔가 부족한 것이나 고쳐야 할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지만, 만약 자기가 못본 척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비상은 그것과 마주보고 싶었다.
문제는, 그 마주보고 싶은 무언가가 무엇인지, 비상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보며, 비상은 잠시동안 그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생각만으로 시간이 죽 흘러가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과 함께, 오늘도 비상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비상은 집을 나와 연구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지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신차리고 보면 비상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만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일에 관해 생각할 시간이 훨씬 많았기에 그다지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자기답지 않게 회의감이 머릿속을 맴도는 걸 느끼며, 비상은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잠시, 비상은 자기가 천천히 잠 속으로 빠져드는 걸 느꼈다. 워낙 일에 빠져있다 보니, 자리에 눕자마자 금세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대로 비상은 꿈 속에 아주 빠져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 채.
여전히 자기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그리고, 비상은 꿈 속에서 갑작스레 천사를 만났다.
“무슨 놀이라구요?”
자기도 모르게 비상은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아까 그 말이 도무지 안 믿겨서였다. 아무리 꿈이라 한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천사라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단 것조차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이미 말씀드렸지 않나요. 세 밤으로 나뉘어,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잠깐, 싸운다고요?”
여전히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는 비상이었지만, 하나 이해한 건 있었다. 이 천사가 말하는 ‘놀이’란, 즉 싸움이라는 것이었다. 그 싸움이 스포츠인지 결투인지 비상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일단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디까지나 놀이이니 스포츠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각 밤이 승리를 가져가야 하는 놀이이니만큼, 저 역시 진심으로 놀아주셨으면하고 바란답니다.”
“…진심으로?”
“네. 그러기 위해서 무기가 있으니까요. 정말로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그 무기란 건 대체…”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니에요. 혹시 집에 야구방망이나 대걸레같은 게 있으신가요? 그런 걸 ‘개조’해서 무기로 써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비상은 어쩐지 그 말에 끌리려 하는 자기를 알아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다가, 지금 이 순간은 틀림없이 꿈이었다. 하지만, 비상은 드물게도 자기가 논리가 아닌 ‘직감’에 끌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말인데, 피가 천천히 끓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죠?”
비상의 말에,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살짝 웃어보일 뿐이었다. 조급함이라곤 전혀 없는 그 표정에서, 비상은 ‘당신이 알아서 생각해달라’는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꿈이라 한들, 눈앞에 있는 이 천사가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 이런 걸 하는 까닭이 있나요?”
“그건 꽤 재밌는 질문이네요. 제가 여러 분들의 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런 질문은 그다지 없었던 거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천사는 잠시 비상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곤 마치 커다란 꿈을 말하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뗐다.
“만약 여기서 이기는 팀이 나온다면, 그 분들은 정말 큰 선물을 받을 거예요.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리고 자기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선물입니다.”
“그게 뭐죠?”
“물론 비밀이에요. 그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이 말까지 듣자, 비상은 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꿈에 천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런 엉뚱한 놀이까지 제안해온 탓이었다. 사실 비상은, 여전히 이 놀이가 대체 뭔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하나 깨달은 건, 이 천사가 뭔가 큰 판을 마련해놨으며, 거기서 놀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 번 놀아보시겠나요?”
그 말에,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꿈이라 한들, 이 말에 함부로 대답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천사가 하는 말이 재미있는 건 사실이지만, 수상쩍은 것도 역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힘을 벗어난 일이 일어난다면, 비상으로서도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만약 제가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저 이 꿈을 꿨단 기억이 지워지는 거죠. 그것뿐이랍니다. 물론 같이 놀아주신다면 모든 기억은 그대로 있을 거구요.”
“즉, 지금 한 말은 모두 참말이란 말이죠?”
“물론이죠. 꿈이란 방법으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이 모든 건 정말이랍니다.”
그 말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망설이게 되었다. 이 말은 틀림없이 재미있었다. 어쩌면 한 번 해봐도 후회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상은 자꾸만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천사가 이 이상한 ‘놀이’를 하려고 하는 목적이었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이런 놀이를 왜 하는 거죠? 뭔가 꿍꿍이속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아뇨, 그런 건 없어요. 이건 그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그것 때문에 나쁜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예요.”
천사가 너무나 깔끔하게 잘라말하는 바람에, 비상은 오히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말을 돌리지 않을까, 란 생각을 무의식 속에서 했기 때문이다.
“아마 직접 해 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제가 왜 이걸 하려고 하는지를요. 하지만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어요.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셨으면 해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가자, 비상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수수께끼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그냥 넘어갈 것인가?
“만약 제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증거를 보여드릴게요.”
천사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상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그리곤 비상이 잘 알고 있는, 이 도시에 자리잡은 유명 회사건물 사진을 꺼내보였다.
“내일 저녁 일곱 시까지, 여기 옥상으로 와 주세요. 아마 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증거를 보여드리죠.”
“…남의 회사 옥상을요?”
“오실 수 있을 거예요. 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정신이 확 꺠어나는 걸 느꼈다. 눈을 깜박여보니, 자긴 틀림없이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까 그 일은 틀림없이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그저 꿈일 뿐인가?
잠시 생각하던 비상은, 결국 천사의 말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게 정말 꿈인지 어떤지를 알기 위해, 그 건물 옥상에 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물론 그건, 이렇게 어중간한 채로 그냥 흘려보내는 게 꺼림칙해서라는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비상한테는 좀 더 다른 까닭 역시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한테 지금, 남겨진 숙제가 대체 무엇인지를.
“나 참…”
그 말과 함께, 비상은 천사가 보여준 바로 그 회사 옥상으로 가기 위해 엘레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혀 믿지 않았지만, 천사의 말은 진짜였다. 회사원도 뭣도 아닌 자기가 남의 회사 옥상에 아무렇지 않게 가도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긴장한 비상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 천사의 말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낯설기 이를 데 없는 남의 회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비상은 생각에 잠겼다. 벌써 해는 서쪽으로 저물고 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보는 이 도시의 야경도 천천히 빛나고 있었다. 과연 자기가 가는 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야경이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비상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걸 느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맨 윗층에 다다랐다.
“그래서, 여기가 옥상인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옥상으로 가는 문 앞에 다다른 뒤, 비상은 천천히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잠시 동안, 비상은 이 상태에서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문 너머 세상을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
“뭐지?”
비상은 맨 처음, 자기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 너머엔 보통 회사건물 옥상에 있으리라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복장도 제각기였고, 훑어본 것만으로 보면 영락없는 대학생도 눈에 띄었다. 사실 대학생은커녕, 누가 봐도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이 공통점이라곤 단 하나도 없을 법한 이들이, 어떤 회사 옥상이라는 ‘대개 사람이 없는 곳’에 여기저기 모여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있는 이들은, 아마 이 회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제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단 한 가지 같은 까닭으로 이런 엉뚱한 곳에 모여있는 상황.
자기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란 걸 알면서도, 비상은 그 묘한 느낌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오셨군요?”
자기를 가만히 보고 있는, 옥상 깊은 곳에 서있는 천사였다. 이제 꿈도 희미해진 걸 느끼는 비상이었지만, 저 천사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주위를 맴도는 눈부신 빛이나 부드러운 인상, 어딜 보나 자기 꿈에 나온 바로 그 천사가 틀림없었다. 저 나직하면서 듣기 편한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그럼, 여기에 있는 다른 이들도 자기와 같은 꿈을 꿨단 말인가?
줄잡아 50명은 넘어보이는 사람들 무리로 발걸음을 옮기며, 비상은 그 많은 이들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천사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같이 놀자 다가간 걸까. 저들도 여기에 있단 건, 자기처럼 ‘확인’을 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정말인지를 알아보려고.
그리고,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그 말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다 모였네요.”
잠시 뒤 몇몇 사람들이 다다르자, 천사는 이 말과 함께 자리를 대각선 쪽으로 바꿨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쪽으로 모든 눈길을 모았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전 여러분들을 놀이에 끌어들이고 싶답니다. 이제 제 말을 믿을 수 있으리라 보니, 만약 생각이 바뀌었다면 지금 떠나주세요. 물론 그 시점부터 기억은 바뀔 것입니다.”
“그럼, 남아 있으면요?”
“어머, 좋은 질문이시네요.”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천사는 그 사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누군가 이걸 물어줬으면 했다는 말투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억은 그대로일 겁니다. 오늘은 여기 계신 분들을 세 팀으로 나누려 해요. 일단 자세한 설명은 뒤에 하고, 오늘은 여러분들끼리 모여 친해지셨으면 합니다. 이왕하는 거 각 팀 주장을 뽑을 수 있으면 더더욱 좋구요.”
“이걸 해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각 팀마다 한 명씩 핸디캡을 매기려 하고 있어요.”
“예?”
천사의 말에, 모인 사람들 대다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저 천사라는 작자가 제정신이 아니라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천사는 놀라울 만큼, 이러한 반응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핸디캡은 누구나 극복할 수 있는 쉬운 것들입니다. 목숨엔 전혀 지장이 없어요. 오히려 즐거우실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정말이에요. 이 놀이는 여러분들이 참가할 가치가 있어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비상은 묘한 느낌이었다. 천사의 말이 정말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긴 정말 이 놀이를 하고싶은 걸까? 이대로 서있어도 좋을까?
그 떄였다.
“그딴 게 뭐야!”
갑자기 저편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비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자기 나이뻘쯤 되는 어떤 남자가 천사를 보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말을 믿으라고? 설명도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누굴 설득하려는 거야?!”
그렇게 외치는 남자를, 천사는 무표정에 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런 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겠단 모습이었다. 지금껏 보인 다정한 모습과 틀림없이 차이가 있는, 조금 많이 색다른 천사가 비상의 눈앞에 있었다.
“그게 제 놀이니 어쩔 수 없죠. 전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생각합니다. 만약 이 놀이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나가주세요. 이 정도 시련으로 포기할 만큼 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게 낫지 않나요?”
“저, 저게 진짜…”
“이 놀이는 하고싶은 사람만 하면 됩니다. 하기싫은 분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만약 기억이 지워져도 이걸 하고싶지 않다면, 가셔도 좋습니다.”
“…”
천사의 말이 끝나자, 당분간 옥상엔 정적이 일었다. 비상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사의 말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직접 놀이를 하자 말했다곤 믿기 어려울 만큼 시원하기 이를데없는 반응이었다.
이 천사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구나. 비상은 속으로, 천사에 관한 자기 인상을 고쳐먹었다. 갑자기 꿈에서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그다지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비상이 생각하던 것보다 이 천사는 훨씬 더 줏대있는 존재인 듯했다.
그래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천사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비상은 오기가 드는 걸 느꼈다.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도발감을 느낀 탓이었다. 아무리 이 놀이가 수상쩍다 여기는 비상이라 할지라도, 저런 말까지 들으면 차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놀이를 해보자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번 일로, 전부터 지니고 있던 숙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비상은 이 수상쩍은 놀이에 한 번 도전할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그럼, 이대로 괜찮은 거죠?”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 천사에게 고함을 지른 남자도, ‘더러워서 참가한다’라며 불만을 드러낼지언정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그대로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자, 그럼…”
천사는 다시 웃음을 띄우곤, 무작위로 각 팀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뽑기용 상자를 가져온 뒤, 천사가 손을 넣어 거기서 뽑은 이름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참으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다시 말하자면 아무도 불만을 안 드러내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비상 역시 자기 이름이 천사한테 뽑인 뒤, ‘붉은 밤’이라 배정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그렇게 해서.
“자, 이제 세 밤이 나뉘어졌죠?”
천사는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입을 떼어놓았다. 각 팀이란 천사가 정한 세 팀, 즉 붉은 밤과 금빛 밤, 파란 밤을 뜻했다. 이 세 팀이 앞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는 듯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할게요. 여러분들은 이제 따로 모여서, 앞으로 누가 주장을 맡을지를 정해주세요. 다음 일정은 주장 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뵐게요.”
그 말과 함께, 천사는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들 여기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라진 천사를 찾고 있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했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비상 역시, 이 상황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비상뿐만이 아닌, 여기 모인 50명 남짓한 이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